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44화 (44/225)
  • < 44. 3개월 >

    뮌헨에서 감독직을 수행할 때, 다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유소년 영입에 솔선수범해 나서주던 친구의 든든함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곳에서 같은 목표를 바라보던 입장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고, 지금은 각자 속한 구단의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경쟁자였으니···.

    잠시간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있던 과르디올라 감독이 슬쩍 고개를 들어 달력을 확인하고 길로스에게 말했다.

    [가능하다면 어떻게든 빨리 해결하고 싶은 선수인데 말이죠.]

    “그 말씀은···.”

    [필요하다면 제가 직접 움직이는 게 가장 확실하겠죠. 실제로 어떤 선수인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기도 하고요.]

    “!”

    자신이 직접 재혁을 만날 의향이 있음을 내비친 과르디올라의 한 마디에 길로스가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고 과르디올라가 그런 것처럼 탁상 달력을 찾아 요일을 확인하면서 전화 통화를 계속 했다.

    “맨체스터 시티의 현재 리그와 컵 대회 일정을 고려하면 아무리 빨라봐야 내년 3월에 있을 A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렇겠죠.]

    “···예?”

    [아마 지금 감독들이 재혁에 대해 알게 된다면 정확히 길로스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겁니다. 겨울 이적 시장이 닫히고, 여름이 오기 전,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비단 재혁만이 아닌, 선수 영입을 위해 움직이는 가장 상식적이면서 이상적인 루트를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야기하자 길로스는 자연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길로스를 향해 과르디올라 감독이 작게 미소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주 짧지만, 단 하루. 그 전에 움직일 수 있는 하루가 있습니다.]

    “하루라 하시면···.”

    [박싱데이 이후 리그 후반기 첫 경기가 끝났을 때. 그 뒤로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22시간이 주어지죠.]

    “!”

    [마침 겨울엔 추운 곳을 피해 따뜻한 곳에서 하루 정도 보내고 싶었는데, 시드니가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은 곳이 될 것 같군요.]

    과르디올라 감독이 고개를 주억이며 흥이 깃든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길로스가 침을 삼켰고, 과르디올라는 손에 쥐고 있던 펜을 쭉 뻗어 달력 위에 표시를 한 뒤 웃었다.

    [앞으로 3개월. 그 사이에 과연 어떤 선수가 되어 있을지, 정말 궁금하군요.]

    ***

    두 번째 친선 경기를 끝으로 U-20팀의 소집도 끝이 났다.

    독일과 치렀던 경기와 달리, 국내 구단에 속한 다른 유소년 팀과 친선 경기를 치렀기에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에서 소집은 해제되었고, 선수들은 각자 다음에 보자며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

    다만 당일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선수들은 하루 더 기숙사에 남게 되었고, 호주로 돌아가야 할 재혁과 개인 사정으로 집으로 바로 갈 수 없어 기숙사에 남게 된 최준이 발을 맞춰 걸으면서 방으로 향했다.

    최준은 평소와 달리 재혁과 단 둘이 남게 되자 연신 열을 올리며 재혁에게 그동안 묻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대체 넌 어떻게 그렇게 공간을 잘보냐? 그렇게 뛰고, 또 패스를 주고받으면서도 공간을 확인할 짬이 나?”

    초등학생 때 상대팀으로 만났을 땐 그저 운이 좋은 녀석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같은 팀으로 뛰어보니 재혁의 능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던 최준은 진심이 우러나오는 질문을 던지고 재혁의 얼굴을 살폈는데, 재혁은 그런 최준을 빤히 마주보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간단히 답했다.

    “볼 수 있으니까.”

    “···네가 재능충인지, 뭔지 하는 그거냐? 하, 진짜 힘 빠지는 답이네.”

    “재능은 아니지. 나도 죽어라 노력을 한 거니까.”

    “너도 노력을 했다고?”

    장난스러웠던 답에 비해 이어지는 대화의 내용이 진지해지자 최준이 고개를 기울이며 재혁에게 물었고, 재혁은 그런 최준을 앞에 두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 젓가락으로 반찬 집으려고 할 때, 젓가락을 어떻게 쥐었는지 따로 확인하면서 반찬을 집어?”

    “아니. 그냥 반찬만 보면서 집는데.”

    “그게 왜 그럴 거 같아?”

    굉장히 뜬금없는 재혁의 질문에 최준은 잠시간 할 말을 잃었으나, 입술을 끌어 모은 후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가 깨어나며 재혁의 물음에 답했다.

    “그야 젓가락을 굳이 살필 필요가 없으니까. 어차피 어떻게 쥐고 있는지 다 알고 있고···, 그냥 반찬만 제대로 집으면 되는 거니까 그러지.”

    “내가 공간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야.”

    “···?”

    “공이 어떻게 올지, 빤히 아니까. 그리고 어떻게 트래핑을 해야 할지 이미 몸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나는 내가 원하는 공간을 찾는데 온전히 신경을 쏟을 수 있는 거지.”

    “!”

    “이만하면 답이 됐어?”

    결국 중요한 것은 기본기.

    재혁이 전해준 답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파악할 수 있었던 최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럼 수고해라’라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재혁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그의 발길을 붙잡으며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그럼 넌···, 그만한 실력을 쌓으려고 얼마나 훈련 했어?”

    “흐음. 글쎄. 너는 밥 먹을 때마다 젓가락질을 한 횟수를 기억하면서 밥을 먹었냐?”

    “···.”

    “뭐. 굳이 떠올려보자면, 정말 죽고 싶고, 토하고 싶고, 당장 쓰러지고 싶을 때에도 꼭 한 번만 더···, 라는 생각으로 해왔지. 물론 ‘한 번만 더’라는 생각을 또 하고, 또 하고···. 대충 그랬어. 자랑이 아니라, 정말 기억이 안 나거든.”

    거짓이 없는 얼굴로 답을 한 재혁의 얼굴을 보면서 최준은 지금 자신이 재혁에 비해 얼마나 부족한지를 실감하고 침을 삼켰고, 또 다른 궁금한 점을 묻기 위해 재혁에게 질문을 던지려다가 재혁이 손을 뻗어 그를 제지한 탓에 입을 그대로 다물 수밖에 없었다.

    최준이 뾰루퉁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이며 어차피 둘뿐인데 심심하니까 이야기나 더 나누자고 하는 것에 재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후 방문 손잡이에 손을 걸고 말했다.

    “나도 바쁘다고.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어.”

    “어차피 오늘은 훈련도 쉴 거라며?”

    “당연히 쉬어야지. 해야 할 일의 순서까지 잊어가면서 훈련하는 멍청이는 아니거든.”

    “그럼 뭐 때문에 그러는데?”

    도저히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듯, 최준이 재차 묻는 것에 재혁은 짧은 한 마디로 답해준 뒤 방문을 닫았다.

    “고등학교 졸업은 제 때 해야 하지 않겠냐? 유급은 피해야지. 3개월 뒤 울면서 추가 시험 보는 건 싫다고.”

    ***

    한국에서 짧았던 U-20팀의 일정을 끝내고 호주로 돌아온 재혁은 또 다시 바쁜 하루들을 보내야 했다.

    일단 걱정했던 대로 그동안 수북이 쌓인 과제들이 그를 반겼고, 학교를 떠나 있던 동안 미뤄졌던 시험들을 연일 치르면서 그 어느 때보다 바쁜 학교생활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같이 수업을 듣는 일이 많았던 케이트가 재혁을 위해 따로 준비한 노트를 빌려줘서 어느 정도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재혁이 한국에 가서도 조별 과제를 늦지 않게 끝낼 수 있게 협조한 상이라고 하며 빌려준 케이트의 노트가 없었다면 아마 단순히 고생하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았으리라.

    기회가 된다면 꼭 케이트에게 고맙다는 말을 개인적으로 전해주고 싶었던 재혁이었지만, 학교 일정을 제외하고도 눈코 뜰 새 없는 일정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시드니 FC에 소속되어 뛰게 되는 경기들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정규 리그를 못 뛰는 재혁에게 있어서 가장 큰 대회인 FFA컵 대회, 그 64강전.

    상대 팀과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는 가운데, 중원에서 패스를 기다리고 있던 재혁이 공을 받기 무섭게 재빠른 턴, 그리고 전방에서 공간을 찾아 달리고 있는 안토루의 위치를 바로 파악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정확한 패스를 시도해 공을 그의 발밑으로 이어주었고···.

    “···!”

    재혁의 패스를 받는 순간 안토루가 눈썹을 한 차례 떨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가 사라진 탓이었다.

    대체 그게 무엇인지 안토루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재빨랐다.

    안토루는 왼발등으로 받은 공을 가지고 머릿속의 ‘이미지’가 그려주었던 대로 반시계 방향으로 빠르게 돌았고, 안토루의 갑작스런 턴을 예상하지 못했던 수비수는 바로 다리를 멈추지 못하고 몇 발자국 안토루의 곁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안토루와 수비수 사이에 아주 미세한 틈이 벌어졌고, 그만한 틈이라면 충분히 뚫고 들어가 슈팅을 때릴 능력이 있었던 안토루는 지체 없이 공을 가지고 박스 안으로 침투한 뒤···.

    뻐엉!

    기습 슈팅을 시도했다.

    간결한 슈팅 동작의 끝에서 안토루의 오른 발을 떠난 공은 허공을 가르면서 골키퍼의 장갑을 피해 골대 구석에 박혔고,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선취점이 되어 관객과 선수들을 흥분시켰다.

    다만 그 장면을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웃고 있던 재혁은 안토루와 가볍게 손바닥만 마주치는 것으로 세레머니에 호응한 뒤 자리를 찾아 움직였는데, 그런 안토루의 득점 장면을 예상했던 것은 경기장 내에 재혁만 있던 게 아니었다.

    콧잔등 위에 얹혀 있는 선글라스를 고쳐 쓰면서 중년 남성, 과르디올라 감독이 씨익 웃었다.

    “역시 직접 찾아와 보길 잘했어. 이런 ‘그림’은 경기장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거지.”

    ***

    삑, 삑, 삐이익!

    후반전이 끝남을 알리는 휘슬을 주심이 불었고, 동시에 선수들의 발이 하나둘 멈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시드니 FC의 선수들은 경기 종료에 맞춰 동시에 안토루를 향해 달려들어 그를 덮쳤다.

    “이야, 안토루! 이런 경기에서 해트트릭이라니. 굉장한 걸?”

    “어제 뭐 먹고 잤어? 무슨 좋은 음식을 먹었길래 이렇게 잘 뛰어?”

    “너 머리카락 한 올만 뽑아서 나주라. 해트트릭한 선수의 머리카락을 베개에 넣고 자면 다음 경기에서 나도 해트트릭을 할 수 있다더라. 얼른 한 올만 뽑아줘!”

    “그, 그만해···.”

    동료부터 선배, 그리고 코치까지.

    팀 멤버 전원이 자신에게 달려들어 얼싸안고, 짓누르길 반복하던 탓에 안토루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구르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내 소리쳤다.

    “재혁이가 준 패스들이 없었으면 해트트릭도 없었다고요. 저를 괴롭히지 말고, 재혁이한테 가요, 재혁이한테!”

    “아, 그러고 보니 이번 경기에서 나온 득점들 어시스트를 전부 저놈이 했었지?”

    “재혁! 다음 경기에선 나한테도 패스 좀 줘!”

    “그러면 안토루 말고 재혁이 머리카락으로···.”

    “···.”

    선수들이 짜기라도 한 듯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면서 재혁은 그대로 몸을 내뺐고, 재혁이 순식간에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다들 아쉬운 얼굴로 입맛만 다셨다.

    참 이상하게도 재혁의 달리기 속도가 빠른 것은 아니었는데, 경기장에서 만큼은 재혁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재혁을 쫓느니 차라리 캥거루를 쫓겠다는 말이 선수들 사이에서 괜히 돌던 것이 아니었으니까.

    선수들이 그렇게 작은 소란을 일으키고 있는 동안 양팀 감독들은 악수와 함께 수고했다는 말을 교환한 뒤 라커룸으로 향했고, 선수들도 곧 주변을 정리하고 감독을 쫓아 라커룸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러다보니 재혁과 같이 발을 맞춰 걷게 된 안토루는 재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오늘 경기 중 이상한 일이 있었단 말이지.”

    < 44. 3개월 > 끝

    ⓒ 권주호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