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43화 (43/225)
  • < 43. 눈에 들다 >

    삑, 삑, 삐익!

    주심이 휘슬을 부는 순간 운동장 위에 서있던 22명의 희비가 엇갈렸다.

    한국 선수들은 기쁨의 함성을, 독일 선수들은 허탈한 얼굴로 지금 자신들이 경험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떨리는 동공으로 바닥을 구르는 축구공을 좇았다.

    그 중에서도 독일의 10번, 위즈헤이머는 충격이 컸는지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간신히 낱숨을 뱉어내다가 중얼거렸다.

    “우리가···, 졌다고?”

    그것도 그냥 진 게 아니었다.

    4대1.

    역전 골을 허용하기 무섭게 쐐기 골, 그리고 한 골을 더 실점하면서 완벽하게 꺾인 것이다.

    바로 지금 눈앞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한국의 8번, 최재혁에게 말이다.

    전광판에서 경기 시간을 알려주던 전자시계가 이미 움직이길 멈췄지만, 위즈헤이머는 아직까지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 했는지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건 귀도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예···.”

    임종철 감독이 다가와 손을 건네며 영어로 수고했다고 말하는 것에 뒤늦게 반응하기 전까지도 그는 자신이 꿈을 꾸는 줄만 알았지만, 종철의 손이 전해주는 온기가 지금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동시에 귀도 감독이 입술을 깨물더니 혼잣말을 읊조렸다.

    “완벽하게···, 깨져버렸다.”

    변명할 여지가 없는 완패.

    한국 정도는 무리 없이, 아니. 승리를 확신하고 경기에 나섰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결과에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그의 눈에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멀어지는 8번이 들어왔다.

    ‘최재혁이라고 했던가···.’

    단 한 명 있었던 한국 U-20팀의 프로 소속 선수.

    입술을 꾹 깨물던 귀도 감독은 이내 무겁게 고개를 주억이며 자신을 다독였다.

    지금이라도 녀석의 존재를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속삭이면서 말이다.

    그리고···.

    ‘팀이 완벽하다는 것은 헛소리였으니,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어···.’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음을 깨닫고 오늘 실점 장면들을 기록한 메모장을 들고 라커룸으로 향했다.

    ***

    손에 카메라를 하나씩 쥐고서 경기장 밖으로 향하는 통로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들었다.

    경기가 끝이 난지 벌써 30분은 족히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독일을 4대1로 이기다니. 이런 결과를 누가 예상했겠어요?”

    “아무도 예상 못했지. 그것도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을 전부 제외하고 이길 줄은···.”

    “정확히 이야기하면 ‘전부’는 아니죠. 한 명이 있었으니까요.”

    국내가 아닌 호주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 최재혁.

    그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바로 알아들었고, 곧 라커룸 문이 열리고 밖으로 빠져나오는 선수들 사이에서 기자들은 모두 재혁을 찾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최재혁 선수, 가능하다면 짧게 인터뷰를 나누고 싶은데요!”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된 느낌이 어떤가요?”

    “선제골과 추가골을 넣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계속해서 셔터를 누르고, 마이크가 달린 녹음기를 들이밀며 재혁의 모습과 목소리를 담으려고 노력하는 기자들이 힘겨운 몸싸움을 이어가며 재혁의 대답을 기대했지만, 재혁은 그런 기자들을 향해 난감하다는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딱 한 마디만 남기고 자리를 재빨리 떠나버렸다.

    “죄송합니다!”

    “어어, 최재혁 선수! 한 마디만 해줘요!”

    “하다못해 사진이라도 한 장···!”

    “그쯤하고 보내줍시다. 오늘만 날이 아니잖습니까?”

    아무런 대답도 없이 멀어지는 재혁을 대신해 기자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임종철 감독이었다.

    종철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기자들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축구장에선 선수였지만, 필드 밖에선 선수보다 오빠라는 역할에 충실해지는 녀석이거든요. 그동안 할 수 없었던 역할이니, 오늘 만큼은 그 역할에 소홀하지 않도록 도와줍시다.”

    ***

    “오빠, 왜 이리 오래 걸렸어!”

    “씻고 옷만 갈아입고 바로 나온 건데?”

    경기장 밖에 위치한 벤치에 엉덩이를 걸터앉고 다리를 휘휘 앞뒤로 휘두르던 재희가 재혁이 나온 것을 발견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고, 그런 동생을 향해 재혁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면서 머리칼을 긁적였다.

    이제는 중학생이라고 제법 숙녀 티가 나는 동생의 모습을 다시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어 재혁은 그저 웃음만 흘리고 있었는데, 재희는 재혁과 달리, 그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뺨을 잔뜩 부풀리고 팔짱을 단단히 낀 채로 재혁에게 재차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아니잖아!”

    “응? 그러면 뭔데?”

    “100밤 자면 돌아온다며!”

    “···!”

    “그리고 공부도 1등하면 돌아온다며!”

    동생의 이어지는 말에 재혁은 순간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당황하고 있는 재혁을 향해 재희가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흥. 내가 언제까지 바보 동생일줄 알았어? 정말 나빴어.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를 놀리고 훌쩍 떠나버리니까 좋았냐?”

    “하하하···.”

    “그냥 웃고 있으면 내가 봐줄 거 같아?! 어림없어!”

    어색하게 미소를 흘리고 있는 재혁에게 다가간 재희는 있는 힘껏 재혁의 어깨를 향해 연신 주먹을 날렸고, 동생이 던지는 주먹을 그저 맞아주면서 재혁은 웃고만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재혁을 때렸을까.

    재희가 힘이 빠진 손으로 재혁을 마지막으로 툭 치더니 입술을 비죽 내밀고 글썽이는 얼굴로 그를 향해 말했다.

    “오빤 정말 바보야. 할머니가 오빠를 얼마나 걱정했는데. 얼마나 찾았는데. 정말 자기 밖에 모르는 바보야.”

    “···미안해.”

    “흥. 됐어. 그 말은 할머니한테 해. 오늘 지기라도 했으면 더 때려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이겼으니까 이만하는 거야.”

    “흐흐, 고맙다.”

    “됐거든! 징그러! 그만 다가와! 신고할 거야!”

    “어릴 땐 나보고 항상 업어달라고 했으면서.”

    “그건 어릴 때고! 이젠 다 컸거든!”

    간만에 만난 남매는 웃고, 떠들기를 반복하면서 버스 정류장을 찾아 움직였고, 곧 정류장에 멈춰선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향했다.

    목적지는 옛날에 둘이서 학교가 끝나면 함께 몇 번이고 갔었던 그곳, 할머니가 있는 중앙 시장이었다.

    눈에 익은 시장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간 남매는 머지않아 할머니가 계신 분식가게를 찾을 수 있었고, 동시에 할머니를 부르면서 뛰기 시작했다.

    해가 갈수록 눈이 침침해지고 귀가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손자, 손녀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던 할머니는 반쯤 감겨있던 눈을 크게 뜨더니 가게 밖으로 뛰어나가 달려오는 손자와 손녀를 안았다.

    “히히, 할머니! 다녀왔어요!”

    “아이구, 내 강아지들. 재희는 다 컸으면서 뺨에 요런 검정을 묻히고 다닌다냐?”

    “에헤헤, 그거 할머니가 묻힌 거거든요!”

    “끌끌, 그른가?”

    재희에 이어 재혁의 얼굴도 발견한 할머니는 괜히 또 눈가가 시렸는지 손등으로 눈 주변을 훔치면서 재혁을 끌어안고 그의 등을 토닥였고, 재혁은 그런 할머니의 품에 안겨 웃으면서 할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그런 세 가족의 상봉을 뒤늦게 발견한 중앙 시장 상인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으잉? 이거 재희랑 재혁이 아녀?”

    “뭐? 재혁이가 왔어? 아까까지 티비에 나오던디?”

    “티비에? 티비에는 왜?”

    “아니, 축구하는 걸로 나온 게 당연하잖어! 그리고 재혁이 때문에 경기도 이겼다니까!”

    “아이고, 우리 재혁이! 나도 한 번 안아보자!”

    “하하, 다들 잘 지내셨어요?”

    과거에도 재혁, 재희 남매를 특별히 아꼈던 정육점 주인이 튀어나오자, 야채 가게 주인이 뒤를 따라 나왔고, 이따금 반찬을 챙겨주던 반찬 가게 아줌마도 재혁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였다.

    그런 시장 상인들의 환대를 받으면서 재혁은 밝게 웃었다.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신을 기억해주고, 사랑해주는 이들이 이렇게 많이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면서 말이다.

    그 틈에서 다른 누구보다 더욱 밝게 웃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을 살피면서 재혁이 환한 미소를 보이며 또 한 번 다짐했다.

    절대로 다른 선수들에게 뒤쳐지지 않겠다고.

    기필코 세계적인 선수가 되어 성공하겠다고 말이다.

    ***

    독일과의 경기는 겨우 한 경기였지만, 그 한 경기는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다.

    임종철 감독이 인정받게 된 것이 그 첫 째였다.

    언뜻 무모하다고, 혹은 건방지다고 생각했던 도전적인 선수 선발을 감행했음에도 독일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으니.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 시킨 재혁이라는 존재였다.

    당시 경기에서 어떤 선수보다 밝게 빛나던 재혁의 존재는 평범한 어린 선수 그 이상의 존재감을 시청자들의 마음속에 진하게 남겼는데···.

    [한국의 8번. 저 선수의 이름이 뭐라고요?]

    “최재혁이라고 합니다.”

    [최재혁···.]

    스카우터가 보내준 경기 영상을 빤히 지켜보던 중년 남성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습관처럼 턱을 괴고 입술을 매만지면서 잠시간 생각에 잠기더니 마음을 정한 얼굴로 고개를 다시 한 번 끄덕이며 길로스에게 물었다.

    [흥미로운 선수군요. 혹시 다른 경기 영상들은 없습니까?]

    전등에 매끈한 머리와 함께 눈동자를 반짝인 중년 남성, 과르디올라 감독은 기대에 찬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과르디올라 감독의 물음에 길로스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과르디올라 감독에게 흥미가 생겼다는 의미는 결코 가벼운 의미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축구와 관련된 모든 것에 ‘중독’되어 있다고 알려진 그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것은 그와 비슷한 종류의 ‘감각’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차 들었기 때문에, 길로스는 과르디올라의 짧은 한 마디에서 많은 것들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길로스는 일단 감정을 추스린 후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에게 답했다.

    “아쉽게도 추가적인 영상은 아직 구할 수 없었습니다. 저도 해당 경기에서 처음 발견한 선수여서 말이죠.”

    [흠. 다른 경기에서 뛰는 영상들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안타까움에 과르디올라 감독이 목소리 끝을 끄는 소리를 재빨리 끊어낸 길로스는 단어에 힘을 실어서 말을 이었다.

    “바로 내일 비행기를 타고 호주로 가볼 생각입니다. 그곳에서 재혁의 소속 구단과 이야기를 한 번 나누어 보면 무언가 더 나오겠죠.”

    [좋군요. 긍정적인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협조하지요.]

    과르디올라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에 고맙다는 말로 답하며 반드시 좋은 소식을 들려주겠다고 답하던 길로스가 무언가를 떠올리곤 혀를 차면서 턱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약간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걱정이요?]

    “한국과 독일이 치른 경기에 재거도 찾아왔었습니다.”

    [!]

    길로스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낯익은 이름에 과르디올라 감독의 눈이 한 차례 커졌고, 그런 과르디올라에게 길로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원래 목적은 위즈헤이머의 체크였겠지만···.”

    [그 친구가 냄새를 맡았다면 일처리에 망설임이 있으면 안 되겠군요.]

    “뮌헨에 계실 때 경험해보셨겠으니, 감독님께서 저보다 재거에 대해 잘 아시겠지요.”

    길로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한 과르디올라 감독이 자못 진지한 얼굴로 과거를 기억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 43. 눈에 들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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