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괴물 >
분명 대여섯 발자국은 뒤쳐져 있었으면서 그만한 거리를 어느 틈에 좁혔고, 또 슬라이딩으로 패스를 끊어낸 것인지, 상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플레이가 계속해서 돌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공을 쫓아 몸을 움직이다가 1팀에서 떨어지는 공을 소유한 것을 확인하고 황급히 수비를 준비했다.
다행히 공을 소유하고 있는 1팀 선수의 앞을 누군가 일차적으로 막아내면서 역습으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유의해야 할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고, 공이 1팀 선수들 발 사이를 한 바퀴 돌더니 중앙에서 홀로 자리를 잡고 있던 재혁의 발 앞에 멈춰 섰다.
태클로 공을 끊었던 것을 제외하면 이번 미니 게임에서 처음으로 공을 터치하게 된 재혁은 차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본 다음 부드러운 동작으로 패스를 시도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동작으로 뿌린 패스는 허공에 한 차례 둥실 떠오르더니 서서히 낙하하게 시작했고···.
“···어?!”
“자, 잠깐!”
공이 떨어지는 위치를 파악하고 2팀의 수비수와 골키퍼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정확하게 수비수의 뒤쪽 공간과 골키퍼가 쉽사리 달려들어 손댈 수 없는 장소를 노리고 떨어진 탓이다.
둘 다 자신이 처리해야 할 공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동하던 탓에 서로의 위치를 뒤늦게 발견하면서 스텝이 엉켰고, 누가 공을 처리할 지에 대해 눈빛을 교환하던 중, 그 둘보다 먼저 머리를 내밀어 공을 건드린 선수가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2팀의 입장에서 꼬여버리고 만 것이다.
1팀의 공격수, 최준.
정확하게 이마로 공을 건드려 그의 발 앞에 떨어지는 공을 끝까지 노려보다가 가볍게 오른발을 휘두른 최준은 곧 발등에 걸렸다가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공의 꼬리를 쫓아 고개를 들었고, 골대 윗부분을 때리고 골망 안으로 들어간 공이 그물을 출렁이는 것을 확인하고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등을 돌려 자신에게 패스를 찔러주었던 재혁을 바라보면서 쓰게 웃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역시 저 놈은 괴물이야.’
동료지만 소름이 돋는 재혁의 실력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던 최준은 등골이 오싹한 기분을 느끼면서 재혁에게 다가가 손을 쭉 뻗으면서 말했다.
“나이스 패스.”
짧은 한 마디와 함께 손을 건넨 최준의 손을 재혁은 피하진 않았지만,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 플레이에서 패스는 평범했는데, 마무리가 좋았던 거지.”
“뭐?”
“아마 수비수랑 골키퍼가 호흡만 제대로 맞췄다면 네가 공을 건드리기 전에 누군가 먼저 클리어 했을 거야.”
자신이 성공시킨 어시스트에 대해 냉소적으로 평가한 재혁의 말을 들으며 최준이 멀뚱히 뜬 두 눈을 껌뻑였고, 그런 최준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다음엔 제대로 된 패스를 보내줄게’라고 말한 뒤 재혁이 자리에서 멀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니 오히려 같은 팀인 최준이 더 당황스러웠다.
방금 득점 상황을 만들어낸 패스보다 제대로 된 패스를 보내주겠다니.
재혁의 말을 바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자리로 돌아온 최준은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로 경기를 뛰었으나, 곧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2팀의 패스 미스로 1팀에게 역습 찬스가 찾아온 상황.
최준은 역습의 묘를 살리기 위해 망설임 없이 상대 3백 수비수들 사이를 노리고 뛰었으나, 그의 얼굴에는 확신이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만들어진 공간은 분명 뚫어낼 자신이 있었으나, 수비수들의 위치가 생각보다 촘촘했기에 자신에게 향할 동료의 패스가 쉽사리 그 틈을 뚫고 공간으로 향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달려 나갈 공간이 눈에 보인 이상, 최준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발을 움직였고···.
“!”
마치 자로 잰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발 앞으로 패스가 굴러들어오는 것을 확인하면서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대체 누가, 어떻게 이리 어려운 패스를 깔끔하게 성공시켰단 말인가?
신기함에 떠올랐던 고민은 잠시간 최준의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일단 해결해야 할 과제가 눈앞에 있었으니.
최준은 그의 뒤를 쫓아오는 수비수를 따돌리기 위해 발 앞에 놓여 있던 공을 한 차례 길게 친 후, 슈팅 각도를 좁히기 위해 달려드는 골키퍼의 빈틈을 노리는 정확한 슈팅으로 추가점을 성공시킨 다음에야 패스를 보내준 동료 선수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눈에 들어오는 선수를 발견하고 침을 삼켰다.
마치 이번에도 별 일 아니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며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 하고 있는 재혁이 그의 떨리는 동공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다만 그런 재혁을 눈에 담으며 눈동자를 떨고 있는 것은 최준만이 아니었다.
재혁과 함께 뛰고 있는 1팀, 그를 상대하고 있는 2팀 선수들을 포함해 경기장 밖에서 재혁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던 3팀 선수들과 코치 그리고 감독까지.
모두 자신들이 지금 제대로 본 게 맞는지, 의심 섞인 눈빛으로 재혁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의심을 한다 한들, 변하지 않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종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걸로 2대0이군. 3팀, 곧 뛸 준비해라!”
공지했던 25분이 모두 지났을 때, 경기에서 패배한 2팀이 필드에서 빠져나오고 그 자리에 3팀이 들어갔으나, 3팀 또한 재혁을 필두로 한 1팀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참패하면서 미니 게임 훈련은 1팀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그 뒤로 몇 번의 사이클이 더 돌았지만, 결과적으로 1팀의 완승으로 끝이 난 훈련에 모두들 충격을 받은 얼굴로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헐떡였는데, 그 사이에서 홀로 멀쩡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재혁이 땀이 흐르는 이마를 몇 차례 긁적이다가 임종철 감독에게 다가갔다.
“오늘 훈련은 이걸로 끝인가요?”
“근육을 풀어주는 스트레칭 세션까지 모두 끝이 나야 끝나는 거지.”
“그러면 저는 따로 개인 훈련을 할 생각이니까, 스트레칭은 나중에 따로 하겠습니다.”
“안 힘들어?”
“평소 훈련 량에 비하면 특별히 많지도 않았으니까요.”
재혁의 말에 종철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알겠다고 답한 뒤 남은 선수들을 이끌고 스트레칭을 시작했으나, 운동장 바닥에 쓰러져 간신히 뭉친 근육을 풀고 있는 선수들은 멀어진 자리에서 공을 차고 있는 재혁을 보면서 질린 얼굴이 되어 입술을 깨물었다.
괴물 같은 놈, 혹은 미친놈이라고 재혁을 보며 떠오르는 단어들을 되뇌던 선수들은 적어도 오늘 훈련을 통해 한 가지 사실 만큼은 바로 고칠 수 있었다.
들리는 소문처럼 재혁이 배경으로 대표팀에 뽑힌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뒤로 이틀간 이어지던 훈련이 끝이 났을 때, 대표팀에 속한 모든 선수들은 재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찾아온 평가전을 준비하기 위해 경기장으로 향했다.
U-18팀의 첫 번째 평가전 상대는 유럽에서 건너온 독일.
컨티넨탈 컵에는 출전하지 않지만, 내년에 열릴 U-20 월드컵을 목표로 소집된 연령대 선수들이 모인 강팀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지금 선수단이 완성에 가장 가까운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경기에 나서기 전에 갖게 된 기자 회견장에서 독일 U-18팀을 감독하고 있는 귀도 감독이 자신감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와 단어들이 지니고 있는 표현력들이 절대로 허풍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기자들이 하나둘 손을 들면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말씀은 더 이상 새로운 선수들이 추가될 일은 없을 것이란 말씀인가요?”
“네. 지금의 스쿼드로 내년에 있을 대회까지 준비할 계획입니다. 앞으로는 다른 것보다 조직력을 최대한 끌어 올리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확실히 말씀하셨던 것처럼, 시험적이었던 경기를 제외하면 최근 5번의 친선 전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셨죠?”
“바로 그 점이 지금의 선수단이 완성에 가까운 단계라는 말을 반증해주는 증거가 되어주는 것이죠.”
기자의 말에 씨익 웃어 보인 귀도 감독이 고개를 주억이면서 오늘 한국과 경기하기 전까지 있었던 경기들에 대해 짧게 설명하며 말을 이었다.
“최종 전술의 구상을 위해 준비했던 평가전인 이스라엘과의 경기에서 비록 2대3으로 아쉽게 패배했었지만, 바로 지난 경기에서 완성된 전술을 통해 바로 4대0으로 설욕했으니. 지금부터는 새로운 것보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보완하는 과정을 거쳐야겠지요.”
“문제점들을 보완하는 과정이라···.”
귀도 감독이 하는 말을 메모장에 꼬박꼬박 적고 있는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몇 가지 기본적인 질답을 더 주고받았다.
적당히 기사에 쓰기 좋은 기사들이 주된 질문들이었다. 그렇게 슬슬 시계를 확인하면서 귀도 감독이 마지막 질문만 받겠다고 했을 때, 여러 기자들이 일제히 손을 들었고, 그 중 한 명을 지목한 귀도 감독이 턱을 쓸면서 지목받은 기자의 질문을 기다렸다.
귀도 감독이 지목한 기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감독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이미 팀의 문제라고 판단되는 부분들 중, 보완 중이신 부분이 있나요?”
“흐음, 이미 파악된 문제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죠. 다만 그것들을 마이크에 대고 이야기를 하기엔 조금 망설여지는 군요.”
“그러면 최대한 팀에 피해가 되지 않는 선에 이야기 해줄 수 있는 부분은 없나요?”
“팀에 피해가 안 가는 부분이라···.”
마지막이라고 말을 했기에, 무엇이라도 괜찮다며 대답을 바라는 기자의 말에 귀도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주전으로 뛸 수 있는 선수들의 재능이 나이에 비해 너무 뛰어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재능이 뛰어난 게···, 문제라고요?”
“이미 프로 팀에 속한 선수들도 있다 보니, 소집이 쉬운 게 아니거든요.”
“아.”
그제야 귀도 감독이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던 기자들이 탄성을 흘렸다.
A매치에 속하지 않는 U-18의 경기 소집에 대해 프로 구단에선 선수의 차출을 거부할 수 있었으니까.
혹여 소집일 중 프로 리그 일정이라도 끼어있는 날이 있다면 U-18의 소집에 프로 구단들이 응해줄리 없었으니 말이다.
그 점이 곤욕스럽다는 말인 것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던 기자들이 모두 귀도 감독의 말을 글자로 받아 적었는데, 귀도 감독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눈앞에 있는 기자들을 향해 웃으면서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회견장을 떠났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오늘 평가전에는 모든 선수들이 참여해주었다는 점일까요? 한국과는 좋은 경기를 치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경기장 관중석은 꽤나 한적했다.
아무리 서울에 소재해 있는 경기장에서 열리는 친선 전이었지만, 시합이 열리는 날이 평일 오후 4시였고, 성인 대표팀이 아닌 청소년 대표팀들끼리 맞붙는 경기인지라 일반인들의 호응이 성인 대표팀을 향한 것처럼 뜨겁긴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중계를 위해 방송국도 와있었고, 스폰서까지 따로 붙어 있었으니.
나름의 국가전이라는 구색은 맞춰져 있었는데···.
“호오, 재거. 자네도 여기 와있었나?”
“내가 못 올 곳을 왔나?”
“그런 건 아닌데, 어차피 계속 퇴짜만 맞고 있잖아? 이쯤 되면 내 쪽에서 봐주기 애처롭다고.”
“흥. 난 신경 끄고, 네 걱정이나 하시지.”
재거와 길로스.
독일 출신의 스카우터로 일하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발견하고 쓰게 웃었다.
< 39. 괴물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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