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38화 (38/225)

< 38. 배경 >

“!”

짧지만 또렷한 재혁의 한 마디에 종철은 순간 침묵했고, 그런 종철을 향해 고개를 슥 들어 올렸던 재혁이 작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정말 입소에 늦었다가 감독님께 무슨 소리를 들을 줄 알고요? 차라리 일찍 오는 게 낫죠.”

“자식이···.”

은근한 장난기에 종철이 재혁의 머리칼을 헝클다가 사못 진지한 얼굴로 다시 한 번 그에게 말했다.

“아무튼, 돌아온 걸 환영한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부탁은 무슨. 내가 보는 건 선수들의 실력, 그것뿐이야.”

종철이 뻗은 손을 단단히 움켜쥔 재혁은 그 뒤로 종철의 안내를 받아 배정받은 방으로 향했다.

***

파주 축구 국가대표 훈련장의 아침은 일찍부터 시작된다.

정상적인 오전 훈련은 9시부터 시작되지만, 그 전에 가벼운 조깅을 끝내고 아침을 먹으려는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자율적인 부분이었지만, 국가대표라는 명목 아래에 모인 선수들인 만큼, 다들 가능한 자기 관리에 최선의 노력을 쏟고 있었는데, 오늘 개별 조깅을 뛰던 선수들은 단순히 다리만 움직이던 게 아니었다.

“어제 호주에서 온 걔 왔다면서?”

“최재혁인가, 뭔가?”

“감독님은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은 따로 뽑지 않겠다면서 걔만 소집한 이유가 뭘까?”

삼삼오오 모여서 운동장을 달리고 있던 선수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최재혁.

어릴 때 호주로 떠났다가 이번에 갑자기 테스트라는 이유로 소집된 선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국에선 겨우 반 년 정도 반짝 했기에 재혁에 대해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운동장에선 계속해서 각자 귀동냥으로 들었던 이야기들을 꺼내놓았고, 그렇게 선수들의 머릿속에서 재혁에 관한 정보가 하나둘 정립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해외로 유학을 갈 수 있을 정도의 부자이면서, 인맥과 뒷배경까지 좋은, 실력보다는 배경이 더 뛰어난 선수로 말이다.

게다가 이번 소집에서 해외 선수는 따로 차출하지 않겠다고 했던 감독의 말을 떠올리면서 선수들은 확신을 굳혔다.

현재 영국이나 스페인, 독일로 유학을 간 선수들과 함께 뛴다면 재혁의 밑천이 훤히 드러날 것이니, 감독이 일부러 그들을 소집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침 조깅을 끝내고 식당으로 향한 선수들은 곧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아가 앉았고, 낯선 얼굴이 식당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하고 모두 시선을 집중했다.

“쟤가 최재혁이야?”

“생긴 건 평범한데?”

“완전 곱상하게 생겨가지고···, 저래서 공은 제대로 차겠어?”

“너 ‘그 이야기’ 몰라? 그러니까 호주로 도망갔던 거겠지.”

“그 소문이 그럼 진짜였어?”

다들 아직까지 동료라기보다 경쟁자라는 의미로 재혁을 바라보며 그를 품평하고 있었고, 하나같이 좋은 말보단 불편한 단어들로 재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멍하니 식당을 둘러보고 있는 재혁을 향해 한 사람이 다가가 말을 붙였다.

뾰족한 머리칼이 특이한 친구는 검지로 이곳, 저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서 식권을 뽑아 기계에 넣으면 준비된 음식을 이쪽 카운터에서 아주머니들이 식판에 담아 주실거야.”

“어, 그래? 고마워. 그런데···,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 목소리가 낯익은데.”

“나 따위는 그냥 잊고 살았다, 이거냐? 나는 너네 학교한테 진 게 분해서 어릴 때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재혁의 말에 상대가 뾰족하게 세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고, 그런 상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재혁이 뒤늦게 상대를 알아보고 손을 마주쳤다.

“너, 영동초에서 공격수로 뛰던 걔구나?”

재혁의 반응에 뾰족 머리, 최준이 미간을 찌푸리곤 퉁명스레 답했다.

“너, 걔, 이런 대명사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 최준이다. 호준이랑은 제대로 통성명한 거 같더니, 역시 호준이 외에는 딱히 기억하고 있던 사람이 없었나 보군.”

“아. 맞아. 호준이도 있었지. 걔는 지금 어디 있어?”

간만에 듣게 된 반가운 이름에 재혁이 들뜬 목소리로 물었고, 최준은 재혁의 질문에 여전히 퉁명스럽지만 충실하게 답해주었다.

“네가 호주로 간 것처럼, 호준이도 초등학교 졸업 이후 바로 해외로 갔지. 지금 독일에서 유소년으로 뛰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

“독일로 갔군. 확실히 공은 잘 찼으니까.”

“그러는 너는 호주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응? 뭐?”

재혁이 고개를 주억이며 되물은 것에 최준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재혁에게 연신 물었고···.

“너도 충분히 유럽으로 갈만한 실력이 있었잖아? 왜 하필 호주로 간 거야? 거기서 무슨 성장을 할 수 있다고? 혹시 너···.”

잠시간 말꼬리를 늘리며 미간을 구기던 최준이 머릿속으로 재혁에 관한 루머들 중 한 가지를 떠올리고 그에게 물었다.

“진짜로 유럽이 무서워서 쫄았던 거냐?”

“내가 겁이 나서 쫄았다고?”

“네가 호주로 가고 나서 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 지금이야 모두 잊혀졌지만, 아는 사람들이 하던 말로는···.”

“재밌네.”

최준이 어설프게 말을 이어가던 것을 중간에 툭 자른 재혁은 최준을 향해 생긋 웃어보였다.

“말은 아껴둬라. 나도 어차피 여기에 떠들러 온 게 아니니까. 나중에 훈련장에서 보자. 아참, 식권 쓰는 법 알려준 건 고맙다.”

그렇게 휘휘 최준을 향해 손을 내젓고 아침을 받기 위해 재혁은 자리를 떠났고, 멀어진 재혁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최준은 깨끗하게 비워진 자신의 식판을 도로 내려놓은 뒤 식당을 떠났다.

그 뒤로 최준이 다시 재혁을 만난 것은 훈련장 위였다.

종철은 24명의 선수들을 세 팀으로 나눠 연습 경기를 진행하기 위해 모았고, 그 사이에서 자신과 같은 팀인 재혁을 발견한 최준은 재혁과 같은 색 조끼를 입고 그의 곁에 다가갔다.

최준이 옆에 다가온 것을 발견한 재혁은 최준에게 대뜸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호주로 간 게 못 미더운 사람들이 많다, 이거지?”

“모르는 사람들은 몰라도, 아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알고 있을 걸.”

“그래?”

최준의 대답에 재혁이 잠시간 팔짱을 끼고 상대 팀에서 몸을 풀고 있는 8명을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그러면 저기 있는 8명들 중에도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있어?”

“쟤들 중에?”

재혁을 따라 상대편을 가만히 지켜보던 최준은 재혁의 질문에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명이 아니라 쟤들 전부가 그렇게 알고 있을 걸.”

***

한 때 국가대표팀 내에서 파벌 싸움이 일었다.

국내 협회를 필두로 뭉친 협회파와 해외에서 주로 활동을 한 선수들과 관계자들이 뭉친 해외파가 두 부류였다.

이유는 사소했고, 갈등보단 오해가 더 컸던 파벌 싸움이었지만, 그동안 곯았던 문제들이 연쇄 작용으로 터져나가니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만한 수준을 넘어버린 것이다.

언론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추측성 기사들을 뿌렸고, 협회에서 내놓은 공식 성명에 대해선 의문 부호를 달면서 사건을 필요 이상으로 부풀렸다.

결국 대대적인 개편이라는 이름의 태풍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고 나서야 조용해질 수 있었는데, 그런 과정 속에서 등장한 뜻밖의 수혜자가 바로 임종철 감독이었다.

다가올 U-20 월드컵의 개최지가 한국인만큼, 사전 대회인 컨티넨탈 컵을 준비하기 위한 감독 선임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는데, 협회에도 속하지 않고 해외 인물들에도 속하지 않았던 인물이 바로 임종철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종철은 감독에 부임하면서 다른 복잡한 것보다 일단 성적을 내기 위해 대회를 준비하겠다는 짧은 말로 취임사를 대신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독의 생각이었고···.

“결국 쟤도 해외라서 특혜를 받은 거지?”

“짜증나네. 배경 빨로 뽑힌 놈이라 다음 경기 선발도 확정이겠지?”

“애초에 감독님이 이번 소집에 해외 선수는 없을 거라고 했던 말을 번복한 거잖아? 벌써 냄새가 나지 않냐?”

“엄마가 나보고 줄 잘 타라고 하던데···.”

어린 만큼 보고, 듣는 것을 통해 배우는 습득력이 빠른 어린 선수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뚱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다가 건너편 필드에서 몸을 풀고 있는 재혁을 눈에 담았다.

어린 선수들은 이미 재혁을 해외파들 중 한 명으로 인지하고 상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보니 선수들은 재혁을 선의의 경쟁자가 아닌, 특혜를 받아 현재 자리에 올라온 선수로 치부하고 불쾌한 경쟁심을 속에서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서로 짧은 몇 마디를 나누던 선수들은 모두 한 가지 사항에 대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훈련에서 철저하게 놈을 짓밟아 주리라.

실력을 낱낱이 까발려 더 이상 캠프에 머무르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 다짐을 속에 품으면서 선수들은 이어질 훈련을 기다렸고, 곧 종철의 지도하에 세 팀들 중 두 팀이 필드에 올라갔다.

종철은 준비를 끝낸 16명의 선수들을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미니 게임이니까 서로 다치지 않는 걸 주 목적으로 삼아라. 괜히 부상 때문에 정작 평가전에서 못 뛰면 누가 손해인지는 확실히 알고 있지?”

“예!”

“그렇다고 또 대충하라는 말은 아니니까.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뛰어. 그럼 먼저 1팀이랑 2팀. 플레이 타임은 25분이다. 이긴 팀이 남고 진 팀이 3팀과 교대하는 거야. 그럼 휘슬에 맞춰서···, 시작!”

종철이 휘슬을 불자 2팀의 선축으로 미니 게임이 시작됐다.

8대8.

필드에 7명이 뛰지만 미니 게임의 특성상 골키퍼도 어느 정도 공간을 차지하며 8명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미니 게임의 초반에는 2팀의 기세가 제법 매서웠다.

2팀은 대략 3분 정도 되는 시간동안 공을 한 차례도 빼앗기지 않고 재혁이 속한 1팀의 빈틈을 노리고 있던 것이다.

1팀에서 압박으로 패스를 강요하면서 뒤를 쫓아오면 바로 공을 한 차례 뒤로 뺏다가 반대편으로 공을 넘겨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할 틈을 노리는 2팀의 안전한 플레이 방식은 지켜보고 있는 다른 선수들과 감독, 코치들의 눈동자에 이채를 띄게 만들었는데···.

“···.”

오직 한 선수, 정작 2팀을 상대하고 있는 재혁은 별다른 감흥이 없는 얼굴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2팀이 공을 돌리고 있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간 더 2팀의 패스 워크를 지켜보았을까.

중앙에 위치해 있던 재혁이 살며시 측면으로 빠진 것을 확인한 2팀의 선수들이 동시에 눈을 빛냈다.

‘중앙이 흔들렸다.’

양옆 측면을 쉼 없이 두드리다 보니, 재혁이 지켜야 할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공이 위치한 측면 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말의 의미는 1팀의 중앙에 파고들 틈이 생겼다는 소리였고, 2팀 선수들은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재빨리 열린 틈을 노리기 위해 팀을 재정비한 다음 공격 전개를 서둘렀다.

중앙에 위치해 있던 3명의 선수들 중 한 명이 재혁이 방금까지 위치해 있던 장소로 이동했고, 곧 그를 향해 패스를 찔러 넣으면서 전방으로 공격을 전개할 준비를 끝마쳤다.

재혁이 뒤늦게 공을 받은 선수를 압박하기 위해 달려오는 것을 보면서 2팀의 미드필더가 비릿하게 웃었다.

‘이미 늦었어.’

지금에서야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커버하기 위해 뛰어봤자, 놈이 지근거리에 왔을 때 공은 자신의 발을 떠나 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최전방에서 공간을 찾아 뛰고 있는 아군 공격수를 발견한 2팀의 미드필더가 여유 있게 패스를 뿌렸고···.

투웅!

“?!”

바닥을 훑으며 나아가던 패스가 누군가의 발끝에 걸리면서 크게 휘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완벽하게 열린 찬스라고 생각하고 여유 있게 패스를 뿌렸던 것인데, 누가 이걸 막았단 말인가?

공이 위쪽으로 튀기는 방향을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려 태클로 패스를 끊어낸 상대가 누군지 확인한 2팀의 미드필더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최재혁···? 대체 어느 틈에?’

< 38. 배경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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