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재회 >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내용을 품고 있는 듯한 글의 제목을 확인한 사람들은 서둘러 커서를 이동시켜 글을 눌렀고, 이어지는 내용을 쭉 눈으로 훑었다.
글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지만 한 줄, 한 줄이 알찬, 재혁의 호주 리그에서의 기록을 설명하고 있는 글이었던 것이다.
제목에서 그랬던 것처럼 본문에도 적지 않은 느낌표를 사용한 작성자의 글을 사람들은 쭉 읽어 내려갔다.
[이제 보니 중앙초는 전국 대회를 진행하던 중 협회와 마찰이 있었더군요. 그 탓에 전국 대회에서 몰수 패를 당했던 거고, 그 이후 바로 호주로 유학을 떠났던 거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이 선수, 이제 겨우 17살이면서 벌써 프로 리그에서 뛰고 있었어요! 호주의 2부 리그에선 고정적으로 출전하고 있고, 퍼스트 팀에는 컵 대회가 있을 때
마다 콜업되서 뛰는 듯 해요. 혹시나 싶어서 영어로 이름을 검색해봤던 건데···. 역시 구글이 검색 엔진 중 최고네요.]
[헐. 미쳤다. 저 나이에 벌써 프로 리그에서 뛴다고요?]
[그래봐야 호주 리그잖아요. 유망주들 키우는 의미로 올려서 쓰는 수준이겠죠. 원래 호주 2부 리그는 벨기에처럼 유망주들의 리그로 유명해요.]
[노노. 그건 절대 아님.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이미 이 친구는 핵심 선수 급으로 활약하고 있음요. 스텟부터가 남다르다니까요. 제가 당장 링크 띄워드릴게요.]
그 뒤로 시드니 FC의 웹사이트와 연결 되어 있는 로스터로 이어지는 링크를 가지고 온 작성자는 댓글로 그 부분을 따로 올렸고, 실제로 재혁의 스텟을 확인한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한 가지.
지금 눈에 보이는 이 기록들이 전부 진짜라면···.
[최재혁이라는 이 선수, 기대해볼만 하겠는데요?]
이번 소집은 꽤나 흥미로운 소집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렇게 재혁이 괜찮은 선수라는 것에 다들 동의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궁금증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과연 이번 팀은 어떻게 재혁이라는 존재를 발견하고 소집했던 걸까?
곧 3년을 넘어 4년에 가까운 세월을 해외에서 보낸 탓에 국내에선 존재를 아는 사람이 거의 희박한 선수였는데 말이다.
그런 사람들의 의문은 발표 바로 다음 날 있었던 기자 회견장에서 밝혀졌다.
파주에 위치한 국가 대표 훈련장에서 U-18 청소년 대표팀의 감독이 간소하게 기자들을 모아놓고 이번 대회에 대해 질답을 주고받던 중, ‘최재혁이라는 선수는 어떻게 뽑게 되었냐?’ 라는 질문을 받게 된 것이다.
감독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다음 질문을 던진 기자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최재혁 선수는 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선수니까요.”
3년 전엔 중앙 초등학교의 감독이었고, 지금은 U-18 청소년 대표팀의 감독을 맡게 된 임종철이 차분한 어조로 말을 끝낸 후 기자들에게 옅은 미소를 보였다.
***
“오빠!”
“깜짝이야. 얼굴을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소리부터 지르냐?”
집에 돌아온 안토루가 트레이닝 백을 바닥에 내려놓기 무섭게 동생 케이트가 달려들어 소리를 내지른 것에 눈썹을 모았다.
어째선지 케이트는 커갈수록 여동생보다 남동생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안토루가 그나마 사근사근했던 케이트의 중학생 시절을 그리워하며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런 안토루를 향해 케이트는 바짝 다가가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재혁이 진짜 국가대표로 소집된 거야?”
“아, 그거.”
시드니 FC를 응원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관심있어하는 사항에 대해 동생이 물은 것에 안토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아마 다녀온다는 거 같던데? 아마 내일 오전 비행기라고 했던가···.”
“얼마나 다녀오는데?”
“일정상 두 경기를 뛰고 와야 하는 걸로 보이니까, 훈련기간을 포함하면 한 일주일에서 9일정도 다녀오지 않으려나?”
“일주일에서 9일?!”
또 한 번 동생의 말끝이 높게 올라가는 것에 안토루는 두눈을 질끈 감고 양손으로 얼얼한 고막을 감쌌고, 당황하고 있는 동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재혁이가 시합을 뛰러 다녀오는 거랑 너랑 무슨 상관인데 그렇게 놀라?”
“당연히 상관있지! 나랑 합동 과제 중이었단 말야!”
“합동 과제?”
동생의 절망에 찬 비명을 들은 안토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고, 케이트는 울상이 된 얼굴로 계속 말했다.
“걘 진학반이라서 나랑 같은 수업을 듣고 있는데, 2주 뒤까지 제출해야 할 과제가 있다고! 아, 그러면 아무리 빨리 다녀와도···.”
동생이 양손의 손가락을 하나둘 접어가면서 계산을 해보다가 아무리 고민을 해보아도 제때 모든 게 끝날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 비명과 함께 머리칼을 움켜쥐었고, 그런 동생을 곁에서 바라보던 안토루는 씻으러 가야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결국 혼자 남게 된 케이트는 혼자 고민하는 것으론 해결이 날 것 같지 않아, 책상에 내려놓았던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재혁에게 문자를 찍어 보냈지만···.
[과제가 있는 건 알고는 있지만 다녀와서 고민 해보겠음.]
“···.”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재혁의 답장에 참고 있던 울분을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에 담아 침대 위를 향해 던져버렸다.
***
“···흐암.”
보조석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는 재혁을 옆에서 힐끗 훔쳐본 로니가 쯧쯧 혀를 찼다.
“제대로 자두라니까.”
“자긴 잤어요. 미리 해둬야 할 게 좀 있어서 그것 좀 처리하느라 그랬던 거죠.”
“미리 해둬야 할 거?”
로니가 이해가 힘들다는 듯, 운전대를 따라 고개를 슬쩍 갸웃거렸고, 그런 로니를 향해 재혁은 고개를 가뿐하게 끄덕인 뒤 떠오르는 해를 뒤편에 두고 있는 공항을 바라보며 말했다.
“학생이라면 해야 할 거요. 아무튼, 컨디션에는 문제없습니다.”
“문제없어야지. 이런 기회는 흔한 기회가 아니니까.”
빨간 불에 걸렸던 차의 엑셀을 다시 서서히 밟으면서 공항 터미널을 향해 이동한 차 안에서 로니가 작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각국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모이는 대회가 될거다. 분명 대회를 지켜보는 눈들이 적지 않을 테니, 이런 기회를 그냥 놓쳐선 안 될 일이지.”
로니의 말에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재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하지만 오늘 바로 대회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대회를 하는 건 아니지만, 선수들을 테스트하는 소집일이지. 애초에 테스트를 받는 자리에서 좋은 모습을 못 보여주면 실전도 없는 거야.”
“그렇긴 하죠.”
“딱히 네가 걱정이 되는 건 아니다만···.”
재혁의 실력을 현재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로니가 말끝을 흐리며 재혁을 한 차례 살핀 후 차를 공항 출국 게이트가 위치한 장소에 세우면서 말을 끝맺었다.
“그래도 조급해하거나 실수했다고 실망하지 마라. 아직 네 커리어가 제대로 시작되려면 멀었으니까.”
나름 재혁을 걱정하는 로니의 말이었으나, 재혁은 그런 로니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자신감이 깃든 목소리로 그에게 답했다.
“멀었으니 더 제대로 해야겠죠. 그래야 아직 멀기만 한 커리어의 시작을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을 테니 말예요.”
그 말을 끝으로 트렁크에서 조그마한 케리어와 스포츠 백을 어깨에 두른 재혁이 짐을 끌고 공항을 향해 걸어가면서 로니를 향해 작별 인사와 함께 미소를 남기고 사라졌고, 혼자 남게 된 로니는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주억였다.
누구보다 재혁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재혁의 호전적인 성격에 대해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차에 탑승한 로니는 재혁이 사라진 방향을 한 차례 눈에 담았다가 다시 핸들에 손을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멀다고 무조건 바라보기만 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렇게 멈췄던 차에 다시 타고 엑셀을 밟아 공항을 빠져나온 로니는 아카데미로 돌아갔고,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끝마친 재혁은 게이트 앞에 위치한 의자에 앉아 호흡을 골랐다.
오늘로 3년···, 아니. 곧 4년에 가까운 세월을 호주에서 보내고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옅은 긴장감과 흥분을 품고 있던 재혁은 길게 호흡을 내뱉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훈련도, 시합도, 그리고 대회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떠올리면서 끌어 모은 양손에 아주 조그맣게 말이다.
“일단 한국에 간다면···, 꼭···.”
그 후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 안내 방송에 따라 비행기에 탑승했던 재혁은 인천 공항에 도착하기 무섭게 택시를 타고 익숙한 곳으로 향했다.
비록 몇 년간 방문하지 않았지만, 허름한 간판과 함께 북적이는 시장의 모습은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재혁의 눈동자에 아로이 새겨졌는데, 그 사이에서 지금까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던 그리운 인물을 발견하고 재혁이 큰 목소리로 그를 부르면서 달려갔다.
“할머니!”
“으응?”
떡볶이 국물을 국자로 휘적이고 있던 할머니는 몇 년간 제대로 듣지 못했던 손자의 목소리를 바로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었고, 그 사이 훌쩍 성장한 재혁을 발견하고 아이고야, 라는 비명과 함께 재혁을 향해 달려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동시에 재혁의 콧가로 잊고 있었던 할머니의 냄새가 서서히 전해져왔다.
매일같이 흘리던 할머니의 땀과 분식집에서 하루 온종일 보내시면서 배였던 튀김 냄새들이 복잡하게 꼬여서 말이다. 하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은, 항상 그리웠던 냄새였다.
그 뒤로 한동안 할머니를 끌어안고 있던 재혁은 환히 웃는 얼굴로 할머니에게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
파주 NFC의 입구에서 등을 걸치고 담배를 태우고 있던 종철이 손목시계를 확인한 다음 혀를 차면서 툴툴거렸다.
시간이 됐음에도 아직까지 기숙사에 도착하지 않은 선수들이 여럿 있었던 것이다.
“입소는 해지기 전까지 하라니까. 이 자식들이 진짜···.”
후우.
그 뒤로 길게 한숨이 뒤섞인 담배 연기를 내뿜은 종철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승용차 한 대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담뱃불을 껐다.
택시는 트레이닝 센터 정문 앞에 멈춰 섰고, 뒷좌석에서 누군가 내리는 것을 발견한 임종철 감독이 대뜸 소리를 질렀다.
“인마, 지금이 몇 시야? 입소는 분명 8시 전까지 하라고 알려줬잖아?”
종철이 쌍심지를 켜고 소리를 내지른 것에 상대방, 재혁은 잠시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되물었다.
“저 하루 일찍 도착했는데요?”
“응?”
“호주에서 비행기타고 오는 시간을 생각해서 24일까지 오라면서요? 그래서 그냥 일부러 오늘 도착한건데, 이것도 늦은 건가요?”
24일? 그러면 내일이 아닌가?
또박또박, 똑부러지는 어조로 말대꾸를 하는 어린 선수의 얼굴을 빤히 살펴보며 생각을 이어가던 종철은 뒤늦게 상대가 재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곧 환하게 웃으면서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이야, 재혁이 너였구나!”
“오랜만에 뵙네요, 감독님.”
“자식아. 사람을 보면 이름부터 말하면서 인사를 했어야 내가 착각을 안 하지. 어두워서 얼굴을 못 봤잖아.”
“그런 것 치고는 특별히 확인하려고 하신 것 같지도 않던데···.”
재혁이 트렁크에서 꺼낸 케리어를 끌면서 이동하자 종철은 재차 큰소리를 내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설마. 그래도 늦지 않게 와서 다행이군. 음? 그런데 이렇게 일찍 도착한거면 가족은 보고 온거냐?”
재혁이 할머니와 동생과 오랜 기간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감독의 질문에 재혁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머니랑 동생하고 같이 저녁까지 먹고 온겁니다.”
“그럼 그냥 거기서 하룻밤 묵지 그랬어? 간만에 본 가족이라 반가웠을 텐데.”
“그랬다간 내일까지 기숙사에 못 올 거 같아서요.”
< 37. 재회 > 끝
ⓒ 권주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