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35화 (35/225)
  • < 35. 이해가 빠른 아이 >

    드르르륵.

    라커 안에서 놓여 있던 휴대폰이 진동으로 몸을 떨었으나, 재혁은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고, 그런 재혁의 옆에 다가온 안토루가 그의 어깨를 찌르면서 말을 붙였다.

    “괜찮아? 지쳤어?”

    “설마요. 이제 겨우 전반전이 끝났는걸요.”

    “그렇지? 벌써 지치면 곤란해. 아직 후반전이 남았다고.”

    재혁의 대답에 안토루가 경기장에서와는 달리 긴장이 풀린 얼굴로 살며시 웃었고, 재혁도 그를 따라 살며시 미소를 보인 뒤 다시 눈을 감았다.

    안토루의 말이 맞았다.

    이제 겨우 45분이 지난 것이다.

    앞으로 45분, 그리고 계속 있을 경기들을 떠올리면 셀 수 없는 시간들이 남아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만큼···.

    탕탕!

    “모두 주목!”

    생각에 잠겨있던 선수들, 그리고 재혁이 루아드 감독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선수들을 한 차례 훑어본 감독이 잠시 끊었던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모두 잘해주고 있다. 3점차 리드라니. 근래 보기 힘들었던 선전이야.”

    “그러면 이제부터 지키는 겁니까?”

    선수들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고 물었고, 해당 선수를 향해 고개를 슬쩍 돌렸던 루아드 감독이 짧게 웃더니 그를 향해 물었다.

    “지금 이 점수 차이를 경기가 끝날 때까지 지킬 수 있다면 좋겠지.”

    “그럼···.”

    “하지만 나는 지키는 것보다 여기서 더 벌릴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말야.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

    감독의 말에 모두가 일순 눈동자를 빛내더니 옅게 미소를 보였고, 그것은 재혁도 마찬가지였다.

    후반전도 전반전과 같은 45분이 주어지는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지키기만 한단 말인가?

    감독은 선수들이 모두 공통된 생각을 떠올리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들을 따라 웃었고, 이내 전술 보드를 가지고 이어질 전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매우 기본적이면서 뿌리가 되는 3백은 지키되, 전반전과는 조금 달라진 진영을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전술의 핵인 한 선수를 루아드 감독이 지목하면서 말했다.

    “후반전에선 재혁, 네 위치가 바뀐다. 후안의 자리와 바꿀 거야. 하지만 역할은 그대로, 보란치다.”

    “네? 그게 무슨 소리이십니까? 위치는 바뀌지만 역할은 그대로라니···.”

    지금까지 공격형 미드필더로 재혁과 위치가 바뀌게 된 후안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고, 루아드 감독은 후안과 재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말 그대로야. 둘의 위치는 바뀌지만 역할은 그대로 고수하라고. 이게 무슨 말인지, 너는 이해하고 있겠지?”

    루아드 감독의 말을 들은 후안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재혁은 그와 달리 루아드 감독을 똑바로 마주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선을 새로 짜라는 소리시군요.”

    “역시 고등학생이라 이해가 빠르군.”

    “고등학생인 게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요? 저희들한테도 제대로 설명 해주셔야죠, 감독님.”

    루아드 감독과 재혁이 두 사람만 이해할 대화를 주고 받는 것에 내쉬가 뿔을 보이자, 루아드 감독은 곧장 그들을 향해 선을 새로 짠다는 의미를 설명했고, 감독의 설명을 들은 선수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재혁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정말 그걸 이 친구가 할 수 있단 겁니까?”

    “단순히 미드필더 한 명의 역할이 아닌데요?”

    “후반전도 전반전과 같은 전술을 유지하는게 안정적이지 않습니까?”

    “중요한 건 자네들의 생각이 아니야. 재혁, 할 수 있겠지? 못하면 바로 교체야.”

    선수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움켜쥔 주먹을 들어올리는 것을 제지한 루아드 감독은 재혁에게 고개를 돌리며 얕은 장난기가 묻은 목소리로 물었고, 재혁은 퍼스트 팀 전원이 바라보는 시선을 빤히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오늘 풀타임 뛸 겁니다. 저랑 교체할 선수를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

    후반전이 시작되기 전, 다시 필드 위로 올라온 선수들은 각자의 자리에 서서 심판의 휘슬을 기다렸고, 그건 재혁도 마찬가지였다.

    전반전과는 다른 위치였지만, 익숙한 듯 고개를 좌우로 살피면서 상대 진영을 노려보았고,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선수들이 포진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4백을 유지하고 있지만 공격수를 한 명 내려서 중원에 힘을 쏟을 생각이군. 저거라면···.’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던 재혁의 머릿속으로 루아드 감독이 변경한 전술의 내용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미소가 그려졌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후반전의 시작을 알리는 주심의 휘슬과 함께 상대팀의 한 명이 자신의 뒤를 쫓아 움직이는 것을 보면 루아드 감독의 전술 변화가 효과적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

    더블 보란치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재혁이 갑자기 전방으로 향하자, 재혁을 마킹하고 있던 선수가 당황했고, 그런 상대 선수를 여전히 뒤에 달고서 전방으로 쭉쭉 올라가던 재혁은 동료 선수가 자신에게 내준 패스를 가뿐하게 소유해내면서 전방을 노려보며 루아드 감독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곤 짧은 패스를 동료에게 보냈다.

    ‘왼쪽을 뚫기 위해 오른쪽으로 패스를 주라던 것은···, 이런 의미였겠지.’

    지금까지 비어있는 선수들을 귀신같이 찾아가던 것과 달리, 재혁의 이번 패스는 선수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을 향하고 있었다.

    “갑자기 저런 패스를 해? 왜 저러는 거야?”

    “크게 이기고 있다고 너무 자만하고 있는 거 아냐?”

    단순히 한 명이 아닌, 등을 지고 있는 수비수가 하나, 그 옆으로 따로 마킹이 붙어 있는 수비수들의 숫자들도 적지 않아 절대로 쉽사리 뚫어낼 수 없을 것 같은 장소를 향해 재혁이 패스를 계속해서 시도하자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흘렸다.

    몇몇 관중들은 지켜보고 힘들었는지 양손으로 뺨을 감싸고 불안한 얼굴로 재혁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어지는 상황을 보면 시드니

    만약 저러다가 실수로 공이라도 뺏긴다면 어떤 식으로든 역습을 당하게 될 게 뻔했으니까 말이다.

    경기장을 넓게, 공간과 시간을 여유있게 써도 모자랄 판에 팀을 고립시키는 패스들을 계속해서 시도하다니.

    재혁의 발에 돌아온 패스가 다시 한 번 우측면 바깥에 서있던 윙에게 향하자 관중들이 손을 모아 소리를 질렀다.

    “밀집되어 있는 곳에 공 좀 그만 보내!”

    “뒤에 후안이 받쳐주고 있잖아! 경기장을 넓게 쓰라고!”

    “역시 너무 어려. 뒤늦게 긴장해서 한쪽 밖에 안 보이는 것 좀 봐. 경기 망치기 전에 당장 교체해라!”

    지금 이 순간은 리드하고 있지만, 언제 실점을 하고 분위기가 넘어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팬들의 조급함이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으나, 벤치도, 필드에서 경기를 뛰고 있는 재혁도 그런 관중들의 외침에 묵묵부답으로 대응하며 그저 시합에 집중했다.

    그렇게 또 한 번 패스를 주고받으면서 시드니 FC의 중심이 완전히 오른쪽으로 치우쳤을 때,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선수들이 재혁이 공을 받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눈에 불을 켜고 재혁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지금이 기회다!’

    ‘이번에 압박을 줘서 확실히 공을 빼낸다면···!’

    지금 이 순간에 저 공만 뺏을 수 있다면 그대로 상대 골대까지 고속도로를 뚫을 수 있을 것이리라.

    상대가 경기장의 반절이 사라진 것처럼 진행 해준 덕에 포메이션도 상당 부분 어긋난 상황.

    어떻게든 공만 뺏어오면 만회골을 성공시키고 흐름을 바꾸는 게 가능할 것이라 믿으면서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선수들이 재혁의 발밑에 놓여 있는 공을 노리고 달려들었고, 그런 상대 선수들이 다가오는 것을 빤히 바라보던 재혁은 가볍게 공을 한 차례 앞으로 굴리더니···.

    투웅!

    발등에 공을 가뿐하게 얹어 보기에도 가벼운 롱패스를 시도했다.

    부드럽게, 그리고 확신을 담아서 말이다.

    다만 재혁의 패스가 지금까지와 달리, 필드의 정반대편으로 향하고 있는 것에 모두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특히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선수들은 재혁이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일단 공을 걷어내기 위해 길게 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공이 떨어지는 위치에 지금까지 눈에 보이지 않았던 시드니 FC의 선수, 안토루가 등장한 것에 모두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언제부터 안토루가 저곳에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 그 전에 저 패스가 동료의 위치를 파악하고 노린 패스였다고?

    도저히 한 번에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모두가 당황하고 있을 때, 객석에 양손을 꼭 부여잡고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케이트가 작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저건, 오빠가 매일 복기하던 약속된 플레이···?”

    이따금 집 뒷마당에서 혼자서 트레이닝을 하고 있을 때면 전술을 위해 숙지해야 한다며 손에 플레이북을 쥐고 리프팅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그때 안토루가 했던 말을 기억하면서 케이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엔 연습을 해도 쓸 일이 없겠지만.

    “그 녀석이라면 분명 실수없이 패스를 줄거라고 했었는데, 그러면 그 녀석이···?”

    케이트의 혼잣말을 오래지 않아 끊어졌다.

    재혁의 패스를 받은 안토루가 떨어지는 공의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수비수 한 명을 제치고 그대로 패널티 박스 안으로 침투한 탓이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뒤늦게 슈팅 각을 좁히기 위해 튀어나오는 골키퍼를 앞에 두고서 안토루는 침착하게 공을 밀어차 골키퍼의 키만 살짝 넘기는 로빙 슛을 시도했고, 슬라이딩 하는 골키퍼의 장갑을 피한 공은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가 그대로 골망 안으로 들어가면서 시드니

    여태까지 불안한 목소리로 입을 모으던 관중들이 환호성을 내지른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

    시드니 유나이티드 전이 끝났을 때, 인터넷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단순히 경기 결과를 놓고 사람들이 떠들던 게 아니었다.

    [시드니 FC의 8번, 미쳤네요.]

    [저게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라고요? 게다가 이번이 데뷔전?]

    [2부에서 데뷔한 적은 있는 거 같던데, 1부에선 처음이긴 하죠.]

    이제 겨우 고등학생에 불과한 재혁의 충격적인 데뷔와 그 실력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축구는 팀이 하나가 되어 뛰는 스포츠였지만, 팀의 전부였던 것처럼 활약을 펼쳐 보인 선수가 있다면 당연히 그를 향해 시선이 쏠리기 마련이었고, 그 화제성에 경기를 보지 못 한 사람들까지도 흥미를 가지고 대화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그 고등학생이 그렇게 잘했어요?]

    [그냥 잘한 게 아니었는데요. 시드니 FC의 모든 플레이가 그 8번 때문에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 경기를 중계해주지 않은 스포츠 채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죠?]

    [컵 대회는 32강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원래 중계해주지 않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나름 시드니 더비였는데 말예요. 아, 궁금하다···. 일 때문에 직관을 못 가서···.]

    경기장을 직접 찾은 팬이 아니라면 경기를 볼 수 없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있을 때, 평소 개인 소장용 영상 클립을 제작해 커뮤니티에 올리던 사람이 슬쩍 등장해 글을 남겼다.

    [원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풀경기는 무리겠지만 제가 토막낸 영상 클립들 정도는 공유할 수 있는데요.]

    < 35. 이해가 빠른 아이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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