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34화 (34/225)
  • < 34. 패스, 패스, 패스 >

    그의 눈에 들어오는 동료 선수들은 넷. 상대편은 다섯.

    플레이에 관여할 수 있는 선수들의 숫자를 파악하기 무섭게 재혁의 앞으로 상대 선수 한 명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재혁이 자유롭게 센터 서클을 벗어나게 두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상대의 움직임을 미연에 파악하고 있었던 재혁은 그와 함께 선을 맞추고 있던 선수에게 공을 넘겨주면서 일단 일차적인 압박에서 벗어난 뒤 비어있는 공간을 찾아 움직였고, 동시에 월패스로 돌아오는 공을 다시 소유하면서 가뿐하게 상대 진영을 향해 몸을 틀었다.

    다만 기본적인 패스 앤 무브였던 만큼, 상대도 이미 재혁의 이어질 행동을 예측하고 그의 뒤를 쫓고 있던 상태.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미드필더가 재혁의 앞을 재차 막아서면서 호흡을 골랐다.

    ‘이제 뭘 할 거냐? 또 짧은 패스? 아니면 드리블?’

    어떤 선택지를 취하던, 반드시 막아내겠다.

    애초에 이렇게 골대과 먼 곳에선 적극적인 압박을 통해 상대를 막아낼 수 있었으니, 수비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선택을 취하던 부담이 덜했던 탓에 가능한 재혁에게 바짝 다가가 마크를 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의 눈에 서서히 돌아오는 공에 발을 대고 있는 재혁의 축구화가 보였다···, 가 이내 사라졌다.

    헛숨을 삼킨 미드필더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사라진 공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뭐?!”

    논스톱 다이렉트 패스.

    굴러오는 공을 멈춰 세우지 않고 그대로 중거리 패스로 깊숙하게 찔러 넣은 것이다.

    설마하니 저 상태에서 공을 세우지 않고 그대로 패스를 찔러 넣을 줄이야.

    낮고 빠르게 공이 날아가는 방향과 위치를 확인한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선수는 이내 천천히 재혁을 따라가던 발을 멈췄다.

    ‘저런 곳으로 공을 보냈으면 이 녀석의 플레이는 여기서 끝이 났겠군.’

    최전방 바로 밑에서 날아오는 공을 기다리고 있는 안토루를 향하는 패스였으니, 재혁의 역할은 이번 패스를 마지막으로 끝이 날 것이리라.

    당장 안토루의 뒤로 내쉬가 라인 브레이킹을 시도하는 것을 보니 저 패스는 이후 계속 박스 안을 향해 움직일 것만 같았으니까.

    그렇다면 재정비를 위해 슬슬 수비 진영을 향해 적당한 걸음걸이로 복귀하면 되겠다···, 라고 생각을 하면서 발을 옮기고 있었는데···.

    재혁의 행동은 달랐다.

    꽤 먼 거리로 패스를 보내놓고도 전력을 다해 안토루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가며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왜? 라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던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미드필더는 안토루가 공을 가슴으로 트래핑을 함과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뒤쪽으로 내주는 위치를 확인하고 왜 재혁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저, 저기서 8번한테 리턴을 준다고?! 아니, 그보다 이미 8번은 저 패스가 돌아올지를 알고 있었던 건가?’

    8번, 최재혁.

    비록 안토루의 후방으로 내주는 패스가 부정확했지만, 전력으로 공을 쫓아 달리던 인물이 그밖에 없었던 탓에 재혁은 재차 자유롭게 공을 소유하면서 플레이를 이어갈 수 있었고, 이어지는 상황에서 재혁은 침착하게 전방을 끝까지 살펴보면서 지금 그의 플레이에 관여할 수 있는 선수들의 숫자를 셌다.

    그를 막아서는 상대 팀의 수비자들은 여전히 변함없이 다섯이었지만···.

    ‘우리 쪽의 사람은 한 명이 늘었다.’

    공이 위치한 장소가 바뀐 만큼, 자연히 플레이에 관여할 수 있는 선수들도 변했고,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재혁은 이번에 새로이 플레이에 관여할 수 있는 선수를 확인하기 무섭게 인프론트로 감아서 패스를 깊숙하게 찔러 넣었다.

    경기장 왼쪽 구석, 왼쪽 풀백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한 패스였다.

    크게 반 시계 방향으로 회전을 하면서 왼쪽 구석을 향해 날아가는 공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핀포인트처럼 왼쪽 측면을 따라 달리고 있던 시드니

    ‘정말 무서운 놈이다.’

    연습 때도 그랬지만, 정말 뇌 속에 경기장 전역을 살피고 있는 CCTV라도 연결된 게 아닐까 의심이 되는 시야였다.

    패스가 안토루를 향할 때부터 측면을 따라 달리고 있었는데, 리턴 패스를 받기 무섭게 다이렉트로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공을 찔러 넣어주다니.

    ‘적이었다면 정말 상대하기 싫은 종류의 선수지만···, 지금은 같은 팀이니까!’

    투웅, 투웅!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재혁의 패스 이후 샨은 곧장 왼쪽 측면 박스 안쪽을 노리고 드리블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균형을 이루고 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완벽하게 공간을 뚫고 들어가는 드리블이었고, 적당히 박스를 몇 발자국 앞에 두고서 차츰 속도를 줄였던 샨은 그대로 박스 안쪽을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완벽하게 열린 공간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간 크로스는 안토루를 향했던 패스 때부터 전방의 빈 공간을 찾아 움직이던 내쉬의 이마에 닿았고, 뒤로 따라오는 수비수도 없었던 상황에서 시도한 헤딩은 그대로 골키퍼가 손도 쓰지 못할 빈구석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토옹, 토옹.

    골망에 걸렸다가 바닥에 떨어진 공이 힘없이 바닥을 굴렀고, 헤딩 이후 바닥에 착지하기 무섭게 내쉬가 주먹을 움켜쥐고 시드니

    “아자아!”

    “이야, 아저씨 마무리 좋았는데요? 다 늙었어도 잘 넘겨준 건 무난히 받아먹을 줄 아시네요?”

    “웃기고 있네! 개떡같이 넘어온 크로스를 내가 찰떡같이 넣은 거지!”

    내쉬를 중심으로 여러 선수들이 달려 들어 득점을 축하해주고, 그런 선수들을 향해 목청이 터져라 뜨거운 환호성을 보내주는 서포터들.

    그 틈에 섞여서 내쉬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던 안토루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한 선수를 찾았다.

    이번 득점의 시발점이 되는 결정적인 패스를 뿌렸던 미드필더, 재혁을 말이다.

    재혁은 다른 선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쉬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짧게 남기고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 이동하고 있었고, 그런 재혁을 눈에 담으면서 안토루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역시 저 녀식은 보통이 아니야.’

    ***

    전반전을 벤치에 앉아 쭉 지켜보던 루아드 감독이 옆에 앉아 있던 콕 코치에 짧게 한 마디를 건넸다.

    “미쳤군.”

    “그러게요. 설마하니···.”

    자리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은 슬쩍 고개를 들어 전자판에 기록되어 있는 스코어를 확인하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3대0.

    전반전이 겨우 지난 마당에 벌써 3점씩이나 차이를 벌린 것이다.

    첫 번째 실점을 당했을 땐 그래도 여전히 의욕이 넘치던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선수들은 3점까지 차이가 벌어지자 눈에 띄게 의욕을 상실한 모습을 보였고, 몇몇은 서로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며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듯 했다.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이 되었다고 판단이 드는 선수를 향해 루아드 감독과 콕 코치가 고개를 돌리더니 진지한 얼굴로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공간을 열어주는 패스. 기회를 만드는 패스···. 이 모든 것들을 자기 입맛에 맞게 써먹을 수 있는 선수라니. 이건 기대 이상이군.”

    “단순히 그 뿐만이 아니라, 공격 포인트를 제외한 모든 기록이 다른 선수들보다 월등해요. 게다가 이 패스 성공률은···.”

    “패스 성공률? 패스 성공률이 어떤데?”

    루아드 감독의 호기심이 깃든 질문에 콕 코치가 기록지를 그의 눈앞에 펼쳐 보이면서 답했다.

    “전반전 내내 실패한 패스가 없어요.”

    “···.”

    “쉬운 패스도, 어려운 패스도···. 일단 어떻게든 선수들의 발에 공을 붙여주고 있다는 소리죠.”

    콕 코치의 말을 들은 루아드 감독이 일순 할 말을 잃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주억였다.

    이미 재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그가 이정도로 충격을 받았는데···.

    “오늘 저 친구를 처음 봤을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군.”

    과연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을지.

    루아드 감독은 짧게 웃어 보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선수들이 돌아올 라커룸으로 향했다.

    ***

    “키야! 오늘 경기 볼 맛 나네!”

    “워, 워, 워! 우리가 누구라고? 우리가 바로 시드니의 주인! 워, 워!”

    하프 타임이 찾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은 각자 화장실을 가거나, 음식을 사러 움직이거나, 혹은 자리를 지키면서 팀의 응원곡을 부르면서 분위기에 취했다.

    이제 겨우 전반전이 끝난 상황이었으니 이런 팬들의 행동을 보며 시기상조라며 걱정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오늘 경기가 있기 전까지 매번 1골차 진땀 승, 혹은 득점력 결여로 패배한 경기들이 수두룩했던 탓에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3골을 리드하고 있는 팀의 득점력에 기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역시 내쉬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는 건 너무 아쉬워. 벌써 2골째라구. 다음 시즌까지도 충분히 뛸 수 있지 않을까?”

    “안토루는 어떻고? 복귀전에서 복귀 신고 골이라니.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는 선수라니까!”

    “하지만 역시 그 둘보다 오늘 경기에서 눈에 띄는 선수는 따로 있잖아?”

    자리에 남아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떠들고 있던 서포터들은 전반전 동안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면서 웃었다.

    내쉬가 벌써 두 골, 그리고 안토루가 한 골을 넣었지만, 그들보다 지금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힌 선수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8번, 최재혁.

    오늘 처음 필드에 등장했던 고등학생.

    아직까지도 재혁이 보여준 퍼포먼스를 믿을 수 없었는지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깔끔하게 축구를 할 수 있는 거지? 적재적소에 넣어주는 패스들이 정말 예술이지 않아?”

    “심플하지만 그 심플한 패스들을 성공시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가장 첫 번째 골을 넣기 전, 샨한테 향했던 패스 기억해? 난 그거 보고 소름이 돋았잖아.”

    “크으. 맞아, 맞아. 거기서 어떻게 샨이 달리는 걸 확인하고 바로 찔러줄 수 있었던 거지?”

    “쟤 나이 속인 거 아냐? 어떻게 저런 친구가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야?”

    “나이 많다고 축구 잘하고, 나이 적다고 축구 못하냐? 고등학생인 걸 신기해 할 게 아니라, 미래가 밝다는 점에서 기뻐해야지!”

    아무래도 이대로 둔다면 후반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떠들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의 대화를 곁에 앉아서 가만히 듣고 있던 케이트는 그들과 달리 복잡한 얼굴이었다.

    ‘···세상에.’

    처음엔 오빠의 복귀전을 보러 왔던 건데.

    재혁의 이름을 선발 명단에서 발견하고, 실제로 재혁이 필드 위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나니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 같이 학교에 있었던 친구가 프로 선수들이 뛰는 무대에서 경기를 치르고 있다니.

    ‘이게 진짜 꿈이 아니라고?’

    “케이트. 괜찮니?”

    “응? 으응, 괜찮아.”

    “엄마는 마실 것 좀 사러 다녀올 건데, 필요한 거 없어?”

    “물이면 될 거 같아요.”

    멍하니 경기장을 내려 보고 있던 케이트는 갑자기 타오르는 갈증에 엄마에게 물을 부탁했고, 엄마는 알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이제 자리에 혼자 남게 된 케이트.

    모든 선수들이 라커룸으로 사라져버려 관리 요원들 밖에 남아있지 않는 필드를 빤히 내려 보다가 휴대폰이 사정없이 몸을 떠는 것을 느끼고 케이트가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케잇! 지금 경기장이야?]

    [지금 시드니 FC에서 뛰는 8번, 걔 맞지? 벙어리?]

    [오빠가 아무 말도 안했어? 저거 진짜 벙어리 맞아?]

    케이트처럼 친구들도 경기를 지켜보다가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시드니 FC에서 그녀의 오빠, 안토루가 뛰고 있다는 것은 친구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확인을 해보기 위해 친구들이 모두 케이트에게 연락을 한 것이리라.

    하지만 누구에게도 확신에 찬 대답을 해줄 수 없었던 케이트는 친구들에게 답장해주기에 앞서, 답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에게 문자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꾹, 꾹. 스크린 위의 전자 버튼들을 누르면서 문자를 작성한 케이트가 전송 버튼을 누른 뒤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 속에 넣고 답장을 기다렸다.

    [지금 운동장에서 뛰는 거 진짜 최재혁 너야?]

    < 34. 패스, 패스, 패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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