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33화 (33/225)
  • < 33. 균열 >

    루아드 감독의 말에 내쉬가 싱긋 웃으며 장난이 아니라 긴장을 풀어주던 것이라 했고, 내쉬의 말을 들은 루아드 감독이 재혁에게 다가가 물었다.

    “긴장하고 있었나?”

    “아뇨. 전혀.”

    “하긴. 네가 긴장을 하고 있을 리가 없지.”

    재혁의 짧은 대답을 들으면서 루아드 감독은 재혁이 처음 퍼스트 팀 훈련에 합류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안토루와 함께 훈련장 피치에 올라오던 모습과 나이가 두 배는 많을 법한 내쉬를 상대로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플레이를 보여주던 재혁의 모습을 말이다.

    그런 재혁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현실을 초월한 느낌이 들었는데. 아무리 데뷔전이라고 해도 긴장을 하고 있을 리 없으리라.

    ‘이런.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담.’

    가볍게 고개를 털어낸 루아드 감독이 다시 한 번 팀을 향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컵 대회다. 한 번 지면 바로 탈락이야. 리그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번 시즌 우리 목표가 뭔지는 다시 안 말해도 다들 알고 있겠지?”

    “트레블이죠!”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정규 리그, 그리고 컵 대회.

    메이저 세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을 다들 제대로 인지하고 있음을 루아드 감독이 흐뭇하게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유럽의 트레블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영광이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이길 수 있는 모든 경기에서 이기고 가능한 최고의 자리에 오르리라. 그리고 오늘 경기는 그 시작이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떠올린 루아드 감독은 먼저 앞으로 나가 통로 밖에서 경기장으로 빠져나가는 선수들 한 명, 한 명과 손을 마주치며 기운을 북돋았다.

    “그러면 나가서 이기고 와! 기운 빠진 플레이를 보여주는 놈들은 먼저 교체해버릴테니까, 끝까지 뛰고 싶으면 경기 종료 휘슬까지 죽어라 뛰어!”

    ***

    “쟤들 왜 저렇게 요란해?”

    “원래 겁 많은 강아지들이 시끄럽게 짖더라.”

    “하긴 우리 집 말티즈도 대형견만 보면 짖더라고. 정작 앞에 서면 조용해질 거면서 말야.”

    시드니 FC가 상대하게 될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선수들이 시드니 FC와 발을 맞춰가면서 경기장에 올라갔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 짧은 포토타임, 그리고 선수들간의 페어플레이를 다짐하는 악수를 거치면서 상대팀과 한 차례 손을 섞었던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선수들은 진영으로 이동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방금 봤어? 무슨 고등학생이 한 명 껴있더라?”

    “시드니 FC가 정신을 아직 못 차렸네. 지난번에 탈락 했던 걸론 경험이 부족했나?”

    “아니면 얕보인 거야? 고등학생 정도를 섞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건가?”

    아무리 많이 쳐줘봐야 1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선수를 발견하고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지난 시즌에 그렇게 얻어맞고 탈락했으면서 대체 올해에는 무슨 자신감으로 고등학생 유소년 선수를 스쿼드에 섞었다는 말인가?

    쯧쯧,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혀를 차던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선수들이 심판의 휘슬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도 건너편에서 신발 끈을 동여매고 있는 8번, 재혁을 살펴보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내 조카가 이제 고등학생인데···. 적당히 상대해줄까?”

    “웃기고 있네. 적당히는 무슨, 감독한테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적당이라는 말을 쓰냐?”

    “조카 생각하다가 네 미래가 먼저 날아간다.”

    “하긴, 내가 지금 누굴 걱정 하냐.”

    국내 프로 리그인 A리그의 소속되어 있지만 보다 높은 곳을 목표로 하는 이들인 만큼, 경기를 설렁설렁 치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될 소리이리라.

    그렇게 해이해질 수 있었던 정신력을 다잡은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선수들이 경기 시작을 알릴 주심의 휘슬을 기다렸고, 시드니

    공격수인 내쉬와 안토루를 거쳐 가볍게 굴러간 공은 시드니 FC의 중원에 머물렀고, 공이 8번의 발밑에서 맴돌고 있는 것을 확인한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미드필더가 눈을 빛내며 재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직 어린 선수인 것 같다만, 네 사정을 봐줄 만큼 이쪽도 여유가 있는 게 아니라서 말이다.’

    기술적으로 얼마나 뛰어날지, 어느 정도의 선수일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압박을 넣어 본다면 대략적인 감이 올 테고, 그 틈을 노려 공을 빼앗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갔던 미드필더는 재혁이 자신이 달려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도 가만히 자리에 서있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얼어버렸다고 생각을 했고, 얼른 공을 뺏어 역습을 이어갈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렇게 이제 발을 뻗어 공을 건드리려고 했는데···.

    투욱, 툭!

    “?!”

    가벼운 터치 두 번으로 깔끔하게 미드필더의 압박에서 벗어난 재혁은 상대가 달려드는 운동력을 역이용해 그를 손쉽게 제쳐버린 것이다.

    달려들었던 미드필더는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재혁의 모습을 찾을 수 없어 당황했으나, 재혁은 여전히 누구보다 침착한 눈동자로 전방을 노려보다가···.

    투웅!

    가뿐한 발놀림으로 그의 경기 첫 번째 패스를 시도했다.

    낮고 빠르게 날아간 패스는 최전방에서 패스를 기다리고 있던 내쉬에게 정확히 닿았고, 계속해서 시드니

    그렇게 계속 경기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선수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재혁에게 완벽하게 당했던 미드필더는 등 뒤로 넘어간 재혁을 향해 고개를 살며시 돌리더니 침을 삼켰다.

    방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던가? 적당히 상대해준다고?

    ‘···이거 그냥 고등학생이 아닌데?’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미드필더는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인지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

    최전방에 서있던 내쉬를 향했던 재혁의 첫 번째 패스 이후의 경기는 무난한 양상으로 흘러나갔다.

    다만 그 무난한 양상이라는 것은 시드니 FC의 진형인 3-5-2와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4-4-2가 중앙에서 충돌하면서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는 힘 싸움을 쉼 없이 겨루고 있다는 소리였다.

    투톱인 내쉬와 안토루를 필두로 공미가 한 명, 그 밑을 재혁을 포함한 두 명의 미드필더가 받쳐주고 시드니

    두 팀 다 상대가 약한 부분을 노리는 게 아닌,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공격 방식을 고수하며 길을 열어보려 했던 탓에 자연스레 경기는 힘 싸움이 되었고, 거기에 더비라는 이름 아래 거친 파울들이 간간이 튀어나오며 선수들의 신경을 자극했다.

    바로 지금 안토루를 향한 태클처럼 말이다.

    콰득!

    삐익!

    잔디가 패일 정도로 깊었던 태클 이후 심판이 황급히 호각을 불었고, 동시에 안토루가 바닥을 뒹굴면서 정강이를 부여잡았다.

    그 장면을 정면에서 목격했던 내쉬가 심판을 한 차례 부른 뒤 태클을 했던 선수에게 달려들면서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 자식아! 부상에서 막 복귀한 친구를 다시 병원으로 보낼 셈이냐? 미쳤어?”

    “보호대 끼고 있잖아. 저거 맞고 뼈 부러지면 축구 선수 생활을 앞으로 어떻게 하겠어?”

    “이 미친놈이, 그럼 방금 그 태클은 일부러 한 거였다고?”

    “둘 다 진정해!”

    결국 심판이 나서 두 선수를 제지하는 것으로 간신히 상황이 정리되었다.

    물론 극도로 높아진 텐션을 가라앉히기 위해 각자 경고 한 장씩을 가져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심판이 멀어진 후에도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콧김을 씩씩 내뿜던 내쉬가 안토루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상태를 물었고, 안토루는 팀 닥터가 튀어나오려던 것을 손을 흔들며 제지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뻐근한데, 이 정도 버텨야죠.”

    “샤놀 저 미친 자식. 나이 먹고 아직도 저 버릇을 못 고쳤네. 코뼈가 또 한 번 내려 앉아 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랬다간 출장 정지에요. 은퇴 하실 시즌 중 반 이상을 관중석에서 보내고 싶으세요?”

    안토루의 말에 끄응, 콧등을 찡그리던 내쉬가 알겠다며 안토루의 등을 토닥이고 자리를 떠났고, 안토루도 툭툭 잔디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의 옆에 서있던 재혁을 발견하고 씨익 웃었다.

    “고딩. 잘 버티고 있냐?”

    “전 멀쩡한데, 안토루가 더 문제 아니에요?”

    “이 정돈 가뿐하지.”

    애써 괜찮다며 제자리에서 몇 차례 뜀을 뛰던 안토루가 다시 자기 위치로 돌아가려다가 재혁을 향해 슬쩍 등을 돌리며 물었다.

    “네가 보기에 어떻냐? 공이 생각처럼 잘 안 움직이는 것 같던데···.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아주 약간의 걱정이 묻어나오는 안토루의 물음.

    그런 안토루의 얼굴을 슬쩍 훑은 재혁이 콧등을 긁적였다.

    지금 이 경기가 재혁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데뷔전이었지만, 안토루에게도 부상 이후 처음 치르는 복귀전이었던 것이다.

    아주 옅게 손을 떨고 있는 것은 단순히 안토루가 숨을 몰아쉬기 때문이 아닌, 은근히 차오르는 긴장감 때문일 것이리라.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안토루가 귀엽게 느껴졌던 재혁이 피식 실웃음을 흘렸다.

    ‘역시 그래봐야 아직 어린 친구구만.’

    “어쭈, 웃어? 너무 긴장이 돼서 정신이 나가버린 거야?”

    재혁의 미소를 다른 의미로 이해한 안토루가 검지로 귀 주변을 빙빙 돌렸고, 그런 안토루를 마주보면서 재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아뇨. 뭐, 무대가 어디로 바뀌던, 우리가 하는 게 축구인 건 변함이 없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별로 긴장이 되지 않더라고요.”

    “···긴장이 안 된다고? 신기한 놈이네.”

    어찌됐든 그러면 다행이군, 이라고 작게 혼잣말을 뇌까렸던 안토루가 자리에서 슬슬 벗어났고, 그렇게 멀어지려던 안토루를 향해 재혁이 한 마디를 건넸다.

    “안토루. 제가 패스를 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기억하고 있죠? 긴장했다고 잊고 있으면 곤란해요.”

    “패스를 주면···?”

    짧게 되뇌던 안토루가 탄성을 흘렸고, 곧 기억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잊고 있을 리가 없었다. U-21팀에 함께 속해 있을 때부터 발을 맞추던 기억이 지금도 온전히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다시 등을 돌리고 원래 위치인 내쉬의 옆으로 이동했고, 그 모습을 모두 확인한 재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거면 됐다.

    그거만 잊고 있지 않았다면···.

    ‘충분히 뚫을 만 해.’

    투웅!

    생각을 끝냄과 동시에 짧은 패스로 멈추고 있던 공을 움직인 재혁은 곧장 공을 따라 움직였고, 재혁의 패스를 받았던 동료 선수는 그런 재혁을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공을 다시 재혁에게 돌려주었다.

    단어로 형용할 수 없는 자신감.

    그 아우라에 이끌려 공을 돌려준 것이다.

    그렇게 공을 돌려받은 재혁은 곧장 전방을 살피면서 넓게 퍼져 있는 양측의 진형을 살폈고, 천천히 공을 몰고 전방으로 움직였다.

    < 33. 균열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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