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32화 (32/225)

< 32. 선발 명단의 이름들 >

“최재혁 덕분에 안토루의 기량도 회복을 넘어 잔뜩 물이 올랐고, 감각도 날카로워졌으니까요.”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안토루만 콜업할 게 아니라 최재혁, 그 선수도 같이 불러야 한다, 이 말인가?”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쉬운 문제가 하나 있죠.”

콕 코치가 슬그머니 손에 쥐고 있던 수첩을 다시 품에 넣은 뒤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 8번은 저희 팀 소속이 아닙니다. 아카데미에서 차출한 선수에요.”

“아카데미에서?”

“게다가 국적도 호주가 아니라 대한민국이죠.”

“···.”

콕 코치의 짧은 몇 마디에 상황을 바로 파악한 루아드 감독이 이마를 긁적였다.

아무리 같은 대륙의 연맹 소속이라고 할지라도 해외 선수를 영입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상대는 이제 겨우 16살.

샐러리 캡 제한을 풀어 영입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그 말인즉···.

“정규 리그에서는 못 쓰겠군.”

“뭐, 그렇죠.”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정규 리그에서 재혁을 차출해 사용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말이었다.

루아드 감독이 눈썹을 찌푸리며 콕 코치를 향해 물었다.

“지금까지 장황했던 설명은 뭔가? 어차피 뽑지도 못 할 선순데.”

“정규 리그에서는 비록 쓸 수 없겠지만, 유소년 규정을 이용하면 컵 대회에서는 충분히 출전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

콕 코치의 말에 루아드 감독의 두 눈이 흥미로 반짝였고, 콕 코치가 말을 계속 했다.

“정규 리그와 달리, 소속과 상관없이 참여가 가능한 만큼, 컵 대회에서는 확실히 쓸 수 있는 카드가 될 겁니다.”

“그렇다면···, 안토루와 함께 재혁이라는 그 친구를 콜업 할 수 있는 경기는···.”

루아드 감독이 시선을 옮겨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을 찾았고, 붉은 마크로 표시된 날짜를 확인하면서 씨익 웃었다.

“다음 주, 시드니 유나이티드전이 되겠군.”

***

어느 리그에서도 있는 라이벌 구단 간의 더비전이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같은 도시에 포함되어 있는 두 구단이라면 당연하게도 팬들 사이에서 은근한 경쟁 심리가 발동한다.

[시드니 FC는 올해에도 광탈각이죠? 이럴 거면 왜 출전하나요? ㅋㅋㅋ.]

[시드니 유나이티드가 할 말은 아니죠. ㅋㅋㅋ. 아직 우승 커리어도 없는 곳에서 어딜 보고 광탈이라고 말하나요? 완전 역겹죠?]

시드니 FC와 시드니 유나이티드.

시드니라는 도시에 소속된 두 팀이 만나게 된 경기 덕에 양 팀 팬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 두 팀이 만난 무대는 FFA 컵이라 불리는 호주 협회 주관으로 열리는 가장 큰 컵대회였으니, 조용히 지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팬들은 지난 시즌 자신들에게 패배해 탈락을 경험한 시드니 FC의 팬들을 놀렸고, 시드니

그런 분위기는 단순히 온라인에만 머물던 게 아니었다.

“이번엔 분명 시드니 FC가 이긴다.”

“놀고 있네. 당장 오늘 내일하고 있는 노땅 공격수가 제대로 골을 넣을 수 있을 거 같냐? 꿈깨라, 꿈깨.”

“그런 노땅 선수보다 시드니 유나이티드의 커리어가 내쉬 선수보다 떨어지는 거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님? 우승 커리어 열등감 오지죠? 우승컵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을 해라. 큭큭.”

시드니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점심시간이 되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떠들었다.

당연하게도 주제는 오늘 오후에 있을 더비전에 대한 것이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은 만큼, 남녀를 불문하고 화제성이 높은 경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학생들이 많았던 것이다.

아무리 같은 도시에서 나고 자랐어도 응원하는 팀이 각기 달랐으니, 서로 친구이면서 경쟁 팀의 서포터인 학생들은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어느덧 소규모로 파벌까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에 섞이지 않고 있는 학생들은 축구에 관심이 없거나, 재혁처럼 혼자 자리에 앉아서 도시락을 해치우고 있는 학생들뿐이었고, 조용히 치킨 샐러드를 입에 넣고 있는 재혁을 건너편에 앉아서 빤히 바라보고 있던 케이트가 재혁에게 물었다.

“너는 축구 별로 안 좋아해?”

갑작스레 말을 걸어온 케이트의 목소리를 들은 재혁은 딱히 대꾸하지 않고 슬쩍 고개만 들어올려 케이트와 시선을 맞췄고, 재혁과 눈을 마주친 케이트가 재차 물었다.

“너 맨날 운동복 입고 학교 오잖아. 가끔 축구 팀 유니폼도 있던데. 축구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좋아하는데.”

“그래? 그런데 왜 그렇게 조용해?”

케이트의 이어지는 질문에 재혁은 입에 물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빈 도시락 통을 다시 조립하면서 흘러가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내 이야기를 남한테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그런 것 치고는 항상 조용하던데.”

“···.”

“우리 중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였던 거 너도 알고 있지? 그땐 영어를 못 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이젠 아니잖아?”

꽤나 날카롭게 파고드는 케이트의 말에 재혁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수가 없었다.

짝이었으니까.

다만···, 재혁이 보기에 지금 같이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이 또래로 보이기보다는 그저 어린 아이들로 밖에 보이지가 않았으니 특별히 친구를 사귀지도, 또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던 것이다.

외형은 10대였지만 그 껍데기 안의 영혼은 이제 40이 훌쩍 넘었으니 말이다.

그런 재혁의 고민을 알 리 없었던 케이트는 계속해서 재혁에게 질문을 던졌고, 재혁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케이트에게 한 마디 말을 남기고 그녀의 시선에서 사라져버렸다.

“내가 뛰는 이상, 절대 질 생각은 없어.”

“뛰는 이상 질 생각이 없다? 저게 무슨 소리야?”

“쟤 뭐니? 저러고 그냥 가버린 거야? 그보다 쟤 벙어리 아니었어? 말을 하긴 하네···.”

재혁이 사라지자 케이트의 옆에 앉아 있던 그녀의 친구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평소에도 혼자 앉아 있고, 그룹으로 짜주는 활동에서도 자기 할 일만 하고 싹하고 사라지던 재혁이었으니, 다들 재혁에 대한 이미지로 ‘이상한 남자애’ 혹은 ‘벙어리’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케이트는 그런 친구들이 무어라 하든, 멍하니 재혁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재혁이가 허튼 소리를 하는 애는 아니던데···.”

“이미 가버린 애 생각을 왜 자꾸 해?”

“맞아. 신경 쓰지 마. 맨날 혼자 있는 애한테 말 걸어봐야 너만 손해야.”

친구들이 아직까지도 재혁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케이트에게 몇 마디를 했으나, 케이트는 붉은 입술을 앙증맞게 오므리더니 친구들을 향해 말했다.

“쟤 축구 되게 잘한단 말야. 난 중학교에서 봤어. 체육 시간에 혼자서 이것저것 하더니 골을 막 넣던데···.”

“그게 뭐?”

“아니, 그렇게 축구를 잘하는 애가 조용하니까 그렇지. 흐음. 시드니에 있는 축구팀들은 별로 안 좋아하나?”

아주 약간 물기가 어린 슬픈 목소리.

그런 케이트를 향해 친구들은 다시 한 번 신경 쓰지 말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고, 케이트는 입술을 비죽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학교가 모두 끝이 나고 하교 시간.

케이트는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에 탑승하고 곧장 어딘가로 향했다.

시드니 무어 파크에 위치한 타원형으로 천장이 열려 있는 시드니 풋볼 스타디움이 바로 그곳이었다.

케이트는 운전석에 앉아서 차를 몰고 있는 엄마에게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오늘 오빠 나와?”

“글쎄. 지난주부터 퍼스트 팀에서 훈련을 했다니까, 출전하지 않을까?”

“다행이다. 다리를 다쳤을 땐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살짝 흐려진 말끝으로 지난 1년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던 케이트가 조그마한 입술을 오물거렸다.

경기 중 부상을 당해 지독한 재활 훈련을 거치고, 2군에서 컨디션을 조절하다가 마침내 다시 1군에 복귀를 한 오빠에 대한 걱정과 우려, 그리고 기대가 섞인 얼굴이었다.

항상 긍정적으로 습관처럼 괜찮다고 말을 하던 오빠였지만, 다른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힘들었을 것을 가족이기에 잘 알고 있었던 케이트는 꼭 오늘 경기에서 오빠가 나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차에서 내린 뒤 지정된 관중석을 향해 이동했다.

그렇게 엄마와 함께 자리에 앉고, 선발로 뛰게 될 선수들의 명단이 적힌 네이밍 시트를 진행 요원에게 받게 된 케이트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달래고 명단을 쭉 읽어 내려가다가 옆에 앉은 엄마의 어깨를 방정맞게 때리면서 웃었다.

“엄마, 엄마! 오빠 이름이 명단에 있어! 오늘 뛰려나봐!”

“어머, 잘 됐네.”

“그치? 그치? 헤헤, 오늘 꼭 골 넣었으면 좋겠다!”

팀의 최전방을 맡아 뛰게 될 오빠의 이름, 안토루를 발견한 케이트가 엄마와 함께 환히 웃더니 다시 네이밍 시트를 훑었다.

과연 오빠와 함께 뛰게 될 선수들이 누가 있는지 궁금해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다시 골키퍼부터 천천히 선수들의 이름을 읽어보던 케이트의 눈동자가···.

“···어?”

최재혁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크게 떨렸다.

***

와아아···, 와아아아···!

경기장으로 향하는 통로에 선 선수들의 귓가로 관중들의 함성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메아리처럼 퍼지고, 끝에 가서는 흐려지는 함성 소리가 비록 정확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입을 모아 내지르고 있는 소리라는 것을 어느 누구라도 알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런 소리를 처음 듣게 된다면···.

“어이, 고딩. 쫄았어?”

재혁의 앞에 서있던 중년 남성이 고개를 슬쩍 돌면서 물었고, 그런 남성의 목소리에 대꾸한 것은 재혁이 아닌 재혁의 뒤에 서있던 안토루였다.

“내쉬 아저씨. 장난치지 마요. 한창 집중하고 있는 것 같던데.”

“나도 데뷔 전을 17살 때 치렀다고. 아마 지금 이 자리에서 저 고딩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게 아마 나일 걸? 그리고 나라면 누가 농담이라도 걸어주길 간절히 빌었을 거다. 나 땐 그런 사람이 없었거든.”

“그거야 모르는 거죠.”

내쉬의 악의 없는 장난기에 안토루가 툴툴거렸으나, 이내 내쉬와 비슷한 얼굴이 되어 히죽 웃더니 재혁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오히려 아저씨 때문에 쫄아서 도망가면 어떡해요? 경기 시작부터 10명이서 뛰고 싶어요?”

“큭큭. 선축을 하기도 전에 선수 교체부터 하는 거 본 적 있냐? 이거 진귀한 장면이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안 쫄았습니다.”

가만히 들어주고 있다간 내쉬와 안토루가 앞뒤에서 쉬지 않고 떠들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재혁이 살며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고, 그런 재혁의 목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또 한 번 호들갑을 떨었다.

“오오, 우리 고딩 장하다! 그래, 바로 그 혈기야. 그게 바로 필요한 거라고.”

“재혁. 혹시 화장실 가고 싶으면 지금 가는 게 좋을 걸? 터널 통과하고 나면 이제 못 돌아간다고.”

“아니, 저는 괜찮···.”

“둘 다 그쯤 합시다. 다들 자기 데뷔전 생각 못하고 너무 장난만 치는 거 아닙니까?”

재혁을 대신해 주장이자 골키퍼인 아이슨이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를 꺼내놓자, 일순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으나···.

“그런데 필드에서 오줌을 지리면 곤란하긴 하니까. 화장실 정도는 미리 가는게 좋을 거 같다.”

“···.”

“크, 크크큭···.”

“주장. 주장이 제일 나쁜 놈인 거 아세요?”

“주장한테 놈이 뭐냐? 말 좀 곱게 쓰자. 그래도 주장인데.”

이어지는 아이슨의 말에 재혁이 깊게 한숨을 내뱉곤 이마를 감싸 쥐었다.

훈련 때부터 이런 식이었다.

어리다는 이유로 장난을 걸고, 농담을 따먹고.

따지고 보면 나보다 다 어린놈들이···.

그런 속마음을 떠올렸으나, 그저 속으로 참아내면서 참을 인자만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중, 재혁의 귓가로 루아드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난 좀 그만쳐. 경기가 30분도 안 남았는데. 다들 집중 하자, 집중.”

< 32. 선발 명단의 이름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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