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31화 (31/225)
  • < 31. 될까, 안 될까? >

    “마, 말도 안 돼!”

    방금까지 가능할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패스가 실제로 벌어지려 하고 있던 것이다.

    수비수 두 명을 걸치고 있는 루트라는 말은 조금만 어긋난다면 둘 중 한 명의 발에 공이 걸려 패스가 무산될 수 있었다는 소리였거늘.

    재혁의 패스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이정도 패스는 무난히 성공시킬 수 있다는 듯, 재혁이 찬 공은 거침없이 잔디를 훑으며 공간을 향해 굴러갔고, 계속해서 라인을 따라 달리며 오프사이드를 깨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던 안토루의 발에 무사히 안착했다. 모두가 바보 같다고, 절대 패스가 올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공간에 말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달리 처음부터 재혁이 자신에게 패스를 줄 것이라는 믿음에 흔들림이 없었던 안토루는 예상대로 굴러온 공을 받기 무섭게 재빨리 행동에 나섰다.

    등 뒤로 쳐져 쫓아오는 수비수들과 거리를 벌리기 위해 한 번 공을 길게 차면서 박스를 향해 달려갔고, 동시에 상대 골키퍼의 위치를 파악했다.

    수비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골키퍼도 설마 저기서 저런 패스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넋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허둥지둥 비어있는 골대를 지키기 위해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모습이 안토루의 눈에 들어왔고···.

    투웅!

    안토루는 빠르게 상황파악을 끝낸 뒤 공을 길게 찼다.

    원만한 포물선을 그리면서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가 천천히 떨어지는 공은 황망히 발을 놀리고 있던 골키퍼의 머리 위를 지나 그대로 바닥에 한 차례 튕긴 뒤, 지금까지 미동도 없었던

    마침내 동점 골.

    시드니 FC의 벤치에서 환호성이 터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나이스!”

    “정말 좋았다! 역시 A리그의 선수야!”

    “저기서 어떻게 바로 슈팅할 생각을 했대? 안토루 녀석, 오늘 컨디션이 좋아 보이더니 결국 한 건 터트리는구나!”

    재빠른 드리블 이후 빠른 상황 판단.

    그 부드러운 득점 과정을 보면서 다들 기뻐했던 것이다.

    특히 코헨 감독을 포함한 코치들은 이제 더 이상 뒤를 쫓는 게 아닌, 앞서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왔다며 필드 위의 선수들을 독려하며 역전 골까지 노리자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관중석에 지켜보고 있던 콕 코치는···.

    ‘방금 저 패스는 뭐였지?’

    자신이 방금 본 장면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뜬 눈을 기계적으로 껌뻑이며 침을 삼켰다.

    안토루의 마무리가 분명 좋긴 했지만, 슈팅을 시도하기 전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좋은 마무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완벽하게 열린 공간으로 침투하는 패스는 물론이거니와 수비수와 골키퍼, 둘 사이에 만들어진 공간을 정확히 노리고 찌른 공은 잡는 그 순간부터 이미 공격수에게 무한한 자유를 부여하고 있었으니.

    그런 찬스를 얻었는데 득점을 성공시키지 못했다면 콕 코치는 오히려 안토루에게 실망했을 것이리라.

    그 말인즉.

    “저 8번···, 대체 누구지?”

    콕 코치의 관심이 재혁에게 서서히 쏠리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

    동료들이 축하를 담아 등과 어깨를 두드린 것에 고맙다고 대답하던 안토루가 진영으로 돌아가고 있는 재혁을 발견하고 얼른 그의 뒤를 쫓아간 뒤 말했다.

    “꼬마! 역시 네가 있어야 한다니까. 꿀 패스 고맙다.”

    친근하게 어깨를 두르면서 옆으로 다가온 안토루를 향해 재혁도 생긋 웃으면서 답했다.

    “제가 더 고맙죠. 아무리 좋은 상황이 만들어져도 결국 골로 연결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잖아요? 안토루 선수가 득점을 넣어준 덕에 저도 어시스트를 기록하게 됐으니, 상부상조한 거죠.”

    “무슨 소리야? 그만한 기회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중요한 거라고.”

    재혁의 말에 안토루가 짐짓 큰 목소리를 내더니 진중한 얼굴로 재혁에게 재차 말했다.

    “겸손도 좋지만, 가끔은 자기가 한 행동에 자부심도 가질 수 있어야 해. 자고로 선수라면 자기 실력에 대한 자신이 있어야 앞으로의 실력도 늘 수 있는 거지.”

    “겸손이요? 전 겸손을 떤 적이 없는 걸요.”

    안토루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인 재혁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저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할 뿐이에요. 자부심도 좋지만, 중심을 잃을 순 없는 거니까요.”

    “호오, 그래?”

    “그리고 아직 경기 안 끝났어요. 후반전이 앞으로 30분 정도 남았으니, 끝나기 전까지 3골은 더 넣어야죠.”

    “···정말로 겸손을 떨던 게 아니었구나.”

    30분 간 3골. 10분마다 적어도 한 골씩을 넣겠다고 장담하고 있는 재혁을 보면서 안토루가 식은땀을 흘리더니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이 녀석은 장난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닐 테니까 말이다. 그건 함께 훈련을 했던 안토루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진짜로 이 녀석이라면 가능할지도.’

    다시 진영으로 돌아온 안토루가 전방에서 상대팀이 경기를 재개할 준비를 하는 것을 잠깐 살피다가 슬쩍 뒤를 돌아 재혁을 눈에 담았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

    하지만 장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축구를 하면서 만났던 선수들 중, 재능으로 따진다면 이 녀석이 아마 가장 대단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앞으로 3골이라.’

    재혁이 말했던 오늘 경기의 목표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안토루가 주심의 휘슬 소리를 듣기 무섭게 다리에 힘을 주고 재빨리 앞으로 쏘아지듯 내달렸다.

    겸손을 모르는 것은 재혁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럼 난 4골까지 만들어 본다!’

    안토루가 의욕이 가득한 눈빛으로 축구공을 쫓으면서 목표를 정정했다.

    그렇게 다시 재개된 후반전의 남은 시간이 모두 지났을 때, 안토루는 전광판에 기록된 최종 스코어를 확인하면서 아쉬움이 진하게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진짜 3골로 끝났네.”

    4대1.

    시드니 FC의 U-21팀은 시즌 첫 경기를 역전승으로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

    패자들은 아쉬워하고 승자들은 기뻐하는 순간.

    필드에서 마지막까지 뛰었던 선수들이 서로 손을 교환하고, 감독들이 수고했다며 작별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관중석에서 빤히 지켜보고 있던 콕 코치는 부들부들 떨리는 눈동자를 천천히 내려 경기 내용을 기록하고 있던 메모지를 작은 목소리로 소리 내 읽었다.

    “8번 최재혁, 혼자서 4도움···.”

    기록상으로도 혼자서 모든 골을 만들어냈지만, 실제로도 경기 자체를 자기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던 재혁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 했다.

    첫 번째 골을 만들어낼 때의 패스도 기가 막혔지만, 그 다음 역전 골을 만들어낼 때의 기민했던 움직임을 떠올리면서 콕 코치가 입술을 끌었다.

    ‘중앙에서 2대1 패스를 주고받고, 최전방에 위치해 있던 안토루와도 한 번 패스를 교환한 다음 돌아오는 공을 논스톱으로 침투 패스를 찔러 넣었어.’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동시에 주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다는 소리.

    기술적인 스킬들을 많이 보여주진 않았지만, 전술적인 운영이 무엇인지, 미드필더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준 어린 선수가 서서히 필드를 벗어나는 것을 콕 코치가 마지막까지 살피다가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어 번 울린 후 낯익은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고, 상대는 발신자가 콕 코치인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바로 용건을 물었다.

    [경기는 어땠어? 안토루 녀석 컨디션은 괜찮아 보여?]

    “경기는 U-21팀이 4대1로 이겼습니다. 안토루의 컨디션도 나쁜 것 같지는 않아 보이더군요. 다만 경기력 회복을 위해서 몇 경기 정도는 더 뛰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그보다 4대1이라니. 역시 프리 시즌의 결과는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다니까.]

    시드니 FC의 퍼스트 팀 감독이 기분 좋은 소식에 빙그레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럼 내일 훈련장에서 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를 끝내려 했다.

    그런 감독의 말꼬리를 콕 코치가 간신히 부여잡은 뒤 말했다.

    “감독님, 그보다 찾은 것 같습니다. 물론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찾은 것 같다고? 뭐를?]

    밑도 끝도 없는 콕 코치의 말에 감독이 되물었고, 콕 코치는 벤치에서 유니폼을 갈아입고 있는 재혁을 지긋이 바라보며 답했다.

    “우승이라는 퍼즐을 완성시킬 마지막 조각을요.”

    ***

    시드니 FC U-21팀은 프리 시즌 때와는 전혀 달라진 팀이 되어 이어지는 경기들을 전부 이겼다.

    아니, 단순히 이겼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첫 경기가 4대1. 다음 경기를 3대0, 5대1, 그리고 바로 어제 경기에서 또 한 번 4대1.

    그야말로 대승.

    프리 시즌 때의 참패를 만회하려는 듯, 만나는 팀들마다 전부 3점차 이상의 대승으로 꺾어버린 것이다.

    처음 한 경기 정도는 운이 따랐다고 할 수 있었겠으나, 이어지는 3경기들을 모두 그렇게 이겼으니. 더 이상 단순히 운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런 팀의 변화를

    “최재혁?”

    당장 퍼스트 팀을 맡고 있는 루아드 감독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눈앞에 놓여 있는 기록표를 확인하면서 입술을 매만졌다.

    이미 콕 코치에게 한 차례 언질을 받은 기억을 떠올리면서 루아드 감독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4경기에서 올린 도움이 벌써 두 자리 수라니. 아무리 2부 리그에서 뛰고 있다지만 이건 좀 충격적인데···.”

    현재 부상에서 복귀 이후 컨디션 회복을 위해 U-21팀에서 뛰고 있는 안토루가 비슷한 의미로 4경기에서 7골을 터트린 것도 믿기 힘들었지만, 이 친구의 기록도 쉽사리 믿기 힘든 종류였던 것이다.

    비록 NPL이 A리그의 하부 리그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그 말뜻을 조금만 다르게 풀면 1부 리그에서 데뷔하기를 기다리는 선수들이 잔뜩 모여 있는 리그라는 소리였는데, 그런 곳에서 이렇게 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니.

    흐음.

    짧게 콧바람을 토해낸 루아드 감독이 누군가를 호출했고, 머지않아 사무실 문을 열고 콕 코치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부르셨습니까?”

    “안토루를 언제 콜업하면 좋을 지에 대한 콕 코치의 생각을 한 번 듣고 싶어서 말이야.”

    지금까지 U-21팀의 경기들을 모두 현장에서 지켜본 콕 코치였으니, 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게 옳으리라.

    루아드 감독의 물음에 콕 코치가 개인 수첩을 꺼내더니 기록한 경기 내용을 눈으로 한 차례 쭉 훑은 뒤 말문을 열었다.

    “작년까진 로테이션 멤버였지만, 가능성을 보자면 올해부턴 주전 멤버로도 충분히 뛸 자질이 있는 친구죠. 현재 톱을 맡고 있는 내쉬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했으니, 적절한 교체가 이루어질 것 같네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조심스러운 게 아니겠나? 그만한 부상을 당했던 만큼, 복귀 시점을 신중하게 고르고 싶을 뿐이야.”

    현재 팀에서 간판 공격수로 활약하고 있는 내쉬의 나이가 벌써 35살.

    비록 해외 리그에서 크게 활약한 적은 없어도 국내 리그에서 만큼은 클래스를 증명하고 있는 선수가 떠날 자리를 안토루가 채워주길 기대하고 있는 루아드 감독이 얼른 의견을 말해보라는 눈빛으로 콕 코치를 바라보았고, 콕 코치는 다시 한 번 진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기록상으로는 이미 기량을 모두 회복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그 이상이죠. 아무리 2부 리그라고 해도 4경기에서 7골을 복귀하자마자 넣을 수 있는 선수는 많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당장 내일부터 콜업해도 괜찮겠다는 소린가?”

    “하지만 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 확실히 인지하고 계셔야 합니다.”

    루아드 감독의 질문에 콕 코치가 또렷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지금 U-21팀에는 핵이 되는 선수가 따로 있어요. 본 리그에서 그 친구가 합류하기 무섭게 성적을 내기 시작한 것이니, 안토루의 스텟에도 분명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거겠죠.”

    “8번, 최재혁. 그 선수를 말하는 거겠지?”

    루아드 감독이 물었고, 콕 코치가 한 차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인 뒤 답했다.

    < 31. 될까, 안 될까?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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