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29화 (29/225)
  • < 29. 마지막 조각 >

    “그래야 할 거야. 안 그러면 이번 시즌이 끝났을 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진 나도 잘 모르겠거든.”

    “···.”

    꽤나 살벌한 의미가 담긴 한 마디에 콕이 침을 꿀꺽 삼키고 구단주와 몇 차례 더 대화를 주고받다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알리앙의 사무실 문을 닫기 무섭게 콕은 콧김을 씩씩 거리면서 코헨 감독이 있는 집무실 문을 거칠게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코헨! 대체 이게 뭐야? 6경기를 치르고 6번을 다 져? 무승부도 없어? 팀을 관리할 생각은 있는 거야?”

    “응? 콕이군. 수탉처럼 아침부터 정말 우렁차구만.”

    “말장난 하지 말고! 이 결과부터 좀 설명해 봐! 지금 스킨헤드한테 가열차게 까이고 오는 길이니까!”

    “그 말을 알리앙이 들으면 까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네 목이 날아가.”

    “아무튼, 내 말에 얼른 대답부터 하라고!”

    코헨이 계속해서 말장난만 늘어놓자 콕이 손에 쥐고 있던 결과표를 그의 앞에 내려놓으면서 재차 소리쳤다.

    “어떻게 된 게 팀 성적이 프리 시즌이 이어질수록 나빠지는 거냐고? 대체 뭔 짓을 하면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이···.”

    “프리 시즌은 결국 훈련과 연습을 실험하는 기간이라고. 난 그 의미에 충실했을 뿐이야.”

    “그랬으면 결과가 더 나빠지는 게 이상하잖아?”

    “그렇다고 좋아질 순 없잖아. 핵심 선수가 빠져있었는데.”

    “···뭐라고?”

    코헨이 한 말을 바로 이해할 수가 없어 콕이 미간을 찌푸리자, 코헨이 책상을 내려 보고 있던 시선을 슬그머니 들어 콕과 눈을 마주친 다음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어디까지나 나는 프리 시즌 기간 동안 ‘완성된 팀’을 위한 전술을 실험했을 뿐이야. 퍼즐 조각이 하나 빠져있으니, 당장 보기에 불완전해 보이는 게 당연하잖아?”

    “마지막 퍼즐 조각이라.”

    집으로 돌아온 콕이 코헨 감독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코헨이 따로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는 듯 했으니, 본 시즌이 시작된다면 그때엔 무언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달력과 함께 일정표를 꺼내든 콕이 하루사이에 자란 수염을 벅벅 긁었다.

    “U-21팀의 첫 경기는 내일 APIA FC랑 있군.”

    호주로 이민을 온 이탈리아 계 사람들을 중심으로 뭉쳐 있는 팀인 APIA는 비록 퍼스트 팀도 A

    지난 시즌 APIA FC와의 전적을 떠올리면서 콕이 저녁으로 준비한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작년에는 1무 1패를 기록했던 팀을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알리앙 구단주에게도 할 말은 있어. 그래. 일단은 첫 경기까지 관전하고 구단주와 이야기를 나누자.”

    포크를 이용해 발사믹으로 간단하게 시즈닝을 한 샐러드를 깨끗하게 비워낸 콕은 설거지와 샤워를 끝내고 곤히 잠에 들었고, 다음 날 해가 뜨기 무섭게 구단으로 향했다.

    퍼스트 팀의 공식 일정이 시작되려면 아직 한 주가 더 남았으니, U-21의 첫 경기를 마음 놓고 관람할 수 있는 상황.

    콕은 퍼스트 팀의 오전 훈련 세션을 도운 뒤 U-21의 첫 경기가 진행될 램버트 파크를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비록 소속은 퍼스트 팀의 코치였지만 U-21에서 뛰는 선수들의 컨디션과 기량을 체크하고 퍼스트 팀의 감독에게 전달하는 것도 그의 업무 중 하나였으니, 오후 훈련 세션을 빠지고 자리를 벗어나는 그에게 무어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떠나는 콕에게 퍼스트 팀의 감독은 안토루의 상태가 어떤지를 체크하고 오라는 개별적인 업무까지 하달했다.

    그렇게 1군 경기가 진행되는 경기장인 시드니 알리안츠 아레나에 비하면 인파가 나름 한적한 램버트 파크의 경기장에 도착한 콕이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터벅터벅 관중석을 향해 걸어갔다.

    팀을 관리하는 입장이 아닌 단순히 관전을 위해 온 만큼, 벤치가 아닌 경기를 전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높은 자리를 찾아 이동한 콕이 의자에 앉았고, 곧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펜을 손에 쥐었다.

    ‘다들 컨디션이 나빠 보이진 않군. 안토루도 몸을 풀고 있는 걸 보니 재활을 열심히 한 보람이 있는 거 같고. 정말 본 경기에선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려나?’

    선발로 출전하는 선수들과 벤치에 앉게 된 선수들의 이름이 적힌 진영표를 보면서 고개를 주억이던 콕은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될 즈음 무언가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벤치에 왜 한 자리가 비어 있지? 누가 아직 안 왔나?’

    대기 선수들로 7명이 앉아 있어야 할 벤치에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혹시 누군가 잠시 자리를 떠나있던 것인가 싶어 계속 살펴보고 있었는데, 주장들이 주심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순간까지도 그 자리는 계속 비워져 있던 것이다.

    혹시 자신이 숫자를 잘못 센 것인 줄 알고 다시금 명단을 살폈는데, 분명 교체 선수에는 변함없이 7명이 적혀 있었다.

    펜대로 이마를 긁적이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눈썹을 꼬고 있던 중, 콕의 귓가로 주심이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 소리가 들렸고, 일단 잡념은 접어두고 경기에 집중할 요량으로 콕이 신중한 얼굴로 경기장을 내려 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대략 30분 정도 흘렀을 때···.

    철썩!

    골대 안에 축구공이 박히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콕이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로 중얼거렸다.

    “이, 이게 대체 뭐야? 말도 안 되게 밀리고 있잖아?”

    전반전 내내 제대로 된 공격은커녕 공을 제대로 소유한 적도 없었던 시드니 FC는 수비에만 급급하다가 결국 코너킥 상황에서 실점을 하고 만 것이다.

    마치 모래알이 부서지듯, 와르르 무너지는 팀을 지켜보면서 콕이 어이가 없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프리 시즌에선 연습을 목적으로 팀을 운영했다는 변명이라도 가능하지만, 이건 본 무대라고! 대체 코헨 감독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오늘 한 경기는 단순한 한 경기가 아니다.

    어쩌면 앞으로 있을 시즌을 미리보는 경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인데. 게다가 프리 시즌 결과까지 좋지 않아 알리앙 구단주까지 신경이 날카로운 상황인데.

    그런데 지금 경기력까지 최악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니.

    ‘코헨 이 자식, 정말 제대로 할 생각이 있긴 한거야?’

    콕이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거칠게 긁적이며 고민에 빠졌다.

    당장 벤치에 다가가 코헨 감독에게 정신 차리라고 무어라 소리라도 질러주고 싶었지만, 한창 시합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팀을 관리하는 감독에게 그런 행동을 보인다면 오히려 팀 전체적으로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

    결국 이도 저도 못하고 자리를 서성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였다.

    “···응?”

    그의 눈에 시드니 FC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선수가 터치라인을 타고 이동해 벤치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다만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인 것에 콕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는데, 코헨 감독은 마치 오랜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기뻐하더니 막 도착한 선수에게 이것저것들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선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코헨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공을 가지고 필드 밖으로 나가 몸을 풀기 시작했고, 선수가 한창 공을 가지고 리프팅과 드리블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콕이 기억을 더듬기 위해 눈썹을 모았다.

    ‘누구지? 꽤 어려 보이는데···. 우리 팀 유소년들 중 한 명인가?’

    호기심이 어린 눈빛으로 한창 몸을 풀고 있는 등번호 8번을 빤히 바라보던 콕이 슬그머니 시선을 내려 선수들의 이름이 적힌 선발 명단과 대기 선수 명단을 찾았고, 8번과 함께 적혀 있는 이름을 작게 읊조리면서 재차 미간을 찌푸렸다.

    “최재혁? 처음 보는 이름인 건 알겠는데···, 이제 16살이라고?”

    등번호와 이름, 그리고 나이가 적혀 있는 간략한 프로필을 보면서 콕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인상을 잔뜩 구겼다.

    아무래도 이 팀에선 그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꽤 많이 벌어지고 있는 듯 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렀고, 45분이 모두 지났을 때 주심이 호각을 불어 전반전의 끝을 알렸다.

    ***

    벤치로 돌아온 선수들에게 마실 것들을 건네 준 뒤 코헨 감독이 재혁을 찾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분명 경기 시작이 3시 반이라고 알려줬던 것 같은데?”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묻는 코헨 감독을 앞에 두고 재혁은 태평한 어조로 답했다.

    “저도 일찍 오고 싶었는데요. 선생님이 안 보내주시는 걸 어떡해요. 늦게라도 교감 선생님이 도와주셔서 지금에라도 도착한 거예요.”

    “선생님이 안 보내주셨다고? 협조 공문은 분명 학교에 보냈었는데?”

    “교육 실습생이라고 하더라고요. 협조 공문이나 그런 거에 대해 잘 모르시던데요?”

    “···후우.”

    재혁의 답을 들은 코헨 감독이 길게 한숨을 뱉은 뒤 골치가 아팠는지 이마를 부여잡았다.

    다행히 전반전이 끝나기 전엔 도착했지만, 잘못 했다간 아예 경기장에 오지 못 할 뻔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오늘 경기가 끝나면 협회 측의 공문을 받아 좀 더 확실히 학교 쪽에 서류들을 보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재혁이 도착한 것에 코헨 감독은 다시 한 번 안도하면서 자리에 있는 선수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면 후반전이 시작됨과 동시에 진영을 바꾼다. 훈련 때 연습했던 거 다들 기억하고 있지?”

    “네.”

    “그럼 조한이 빠지고 그 자리에 재혁이 들어가면서 수비를 3백으로 바꾸고···.”

    후반전이 시작됨과 동시에 변경될 전술적인 부분들에 대해 선수들에게 설명을 하던 코헨 감독이 마지막으로 선수들을 독려했다.

    이제 겨우 1대0.

    앞으로 남은 시간이 45분이 있으니 절대로 기죽지 말고 준비한 것들을 보여주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그렇게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필드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던 코헨 감독이 슬그머니 재혁에게 다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준비 됐지?”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증명이 된 친구다.

    하지만 역시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한 선수였기에 코헨 감독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걱정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왔던 것이다.

    바닥에 앉아 축구화 끈을 묶고 있던 재혁이 슬쩍 고개를 들어 코헨 감독에게 되물었다.

    “안 됐다고 하면 안 내보내실 건가요?”

    “아니,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농담이었어요. 잠도 8시간 잤고, 몸도 확실히 풀렸으니 준비는 다 됐죠.”

    “···.”

    나비매듭을 매고 그 위에 한 번 더 매듭을 지어 신발 끈이 풀리지 않게 단단히 고정을 한 재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나이답지 않게 침착한 고등학생 선수를 앞에 둔 코헨 감독이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재혁을 바라보다가 재차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코헨 감독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재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재차 물었다.

    “왜 그러세요? 고민 있어요?”

    “고민이라면 고민이지. 요즘 내 목이 위험하거든.”

    “지면 잘려요?”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묻는 것에 코헨 감독이 다듬어지지 않은 수염을 벅벅 긁으면서 답했다.

    “그건 아직 안 져봐서 모르겠는데, 진다면 아마 99%정도의 확률로 잘리지 않을까?”

    “그래요?”

    대수롭지 않게 코헨 감독의 말을 받으면서 툭툭 양말에 묻은 풀들을 털어내던 재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확률이 정말 99%인지는 오늘 확인할 길이 없겠네요. 데뷔전부터 지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도 다치지 마라. 다치면 네가 가장 손해야.”

    자신을 걱정해주는 코헨 감독을 뒤로 하고 마침내 필드 위에 올라선 재혁.

    한 발, 두 발. 물기가 남아 있는 잔디를 밟으면서 필드 중앙까지 이동한 재혁이 슬쩍 주위를 살핀 뒤 웃으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야 한 발자국 걸었다.”

    < 29. 마지막 조각 > 끝

    ⓒ 권주호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