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28화 (28/225)
  • < 28. 비밀 병기 >

    “그럼 너도 다시 고등학교에 입학하던가.”

    감독의 말에 안토루는 농담도 참 재밌게 잘하시네요, 라고 클클 웃었고, 그를 따라 코헨 감독도 소리 내 웃다가 표정을 굳혔다.

    실력이 뛰어난 비밀 병기인 것은 맞았지만, 그 대상이 고등학생이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갖가지 걱정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떠오른 것이다.

    코헨 감독이 턱을 쓸어내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디 무사히 시즌을 완주했으면 좋겠는데 말야.”

    “무사히요?”

    그런 코헨 감독의 목소리를 들은 안토루는 코웃음을 쳤다.

    “시즌이 끝나면 어떤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데, 겨우 무사히 라는 말로 감독님은 만족하세요?”

    “원래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하는 법이라고. 게다가 재혁이는 이번에 처음으로 데뷔하는 루키라는 점을 떠올리면···.”

    “걔는 평범한 루키랑 거리가 멀어요. 오늘 훈련하는 거 보셨잖아요?”

    코헨 감독의 늘어지는 말을 안토루가 중간에 툭 자른 뒤 예의 미소를 보이면서 말했다.

    “아마 첫 경기부터 사고를 칠 걸요? 그것도 아주 시끄러운 걸로 말이죠. 흐흐, 정말 어떻게 될지 기대가 되서 오늘 밤에 잠은 다 잤네.”

    “그래? 흐음 뭐, 즐거워하는 건 알겠는데···, 왜 네가 더 신이 난거야?”

    “감독님도 한 때 선수를 해봤으니 알 거 아니에요? 그런 동료랑 함께 축구를 한다면 당연히 기대가 되죠.”

    감독의 말에 가뿐히 답을 하며 훈련장 바깥을 향해 걸어 나가면서 안토루가 말을 끝맺었다.

    “이번 시즌은 아무래도 저도 기대가 되네요. 그러면 내일 훈련 때 뵙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코치님도요!”

    멀어지는 안토루를 향해 코헨 감독과 아놀 코치가 손을 흔들어주다가 이내 다시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코헨 감독이 작게 웃었다.

    “비밀 병기라.”

    과연 최재혁을 처음 보게 될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할까.

    그런 호기심에 자연히 떠오른 미소였다.

    ***

    달칵.

    잠겨있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재혁이 손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고, 곧 어두웠던 방안이 밝아졌다.

    잠시간 방안을 살피던 재혁은 뺨을 긁적이면서 중얼거렸다.

    “내일은 꼭 청소 해야겠네.”

    쌓여있는 세탁물과 의자 위에서 탑을 이루기 시작한 옷가지들, 그리고 원래 위치가 어디였는지를 알 수 없는 몇몇 물건들을 보면서 자연히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런데 평소 옷이라곤 운동복 밖에 입질 않는데···.

    대체 왜 주위가 어질러지는 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재혁이 어깨에 메고 있던 운동 가방을 대충 내려놓으면서 의자에 앉다가 박수를 쳤다.

    “아아. 항상 이렇게 대충 놓으니까 어질러지는 거지. 흐음. 앞으로 조금 더 정리정돈에 신경을 써야겠네.”

    똑똑.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재혁의 귓가에 노크 소리가 들렸고, 상대를 향해 재혁이 안에 있다고 답하자 곧 문이 열리고 백인 남성이 재혁의 눈앞에 등장했다.

    녹빛 눈동자로 슬쩍 방안을 살피면서 재혁이 의자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한 중년 백인 남성이 허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평소에 정리 좀 하라니까.”

    “그러게요. 이제부터는 좀 해야 할 것 같네요, 로니.”

    “필드에선 누구보다 깔끔한 녀석이 방은 이렇게 어지럽다니···.”

    “필드에서라도 깔끔하니 다행 아닌가요?”

    로니의 말에 재혁이 배시시 웃으면서 답했고, 그런 재혁을 앞에 두고 실웃음을 흘리던 로니가 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물었다.

    “그래서 첫 훈련은 어땠어?”

    “좋았어요. 아니, 재밌었어요.”

    “재밌었다?”

    말끝을 높이며 되묻는 로니를 향해 재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무래도 그렇잖아요? 지난 3년간 혼자 훈련을 해왔으니까 말이죠. 아, 물론 로니가 함께였지만 여럿이서 하는 축구는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요.”

    재혁의 말에 로니가 하얗게 새어가는 눈썹을 긁적이면서 재차 물었다.

    “그래서···, 우리를 원망하냐?”

    우리라는 단어 속에 단순히 로니 한 사람만 엮인 게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린 재혁은 빙그레 미소를 보인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요. 제가 로니랑 범수 아저씨를 원망하고 있을 리 없잖아요? 오히려 항상 감사드린다고요.”

    “흥. 말로는 뭔들···.”

    “진심이에요.”

    장난기가 섞여 있던 지금까지와의 대화와 달리,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을 한 재혁은 로니의 두눈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말했다.

    “지난 3년간, 제가 로니와 차범수 아저씨한테 받은 도움이 얼마나 큰지를 설명하려면 며칠 밤낮을 새워도 부족하다는 걸 로니도 잘 알잖아요? 제가 잘 표현은 안 하지만 정말 고맙게 생각 한다니까요.”

    “흐음, 뭐. 그야···.”

    “그러니까 삐지지 말아요. 다음 주부터는 또 훈련 시설들을 빌려야 한단 말예요. 로니가 삐지면 곤란한 건 저니까요.”

    “아아, 그렇군. 다음 주부턴 프리 시즌이 시작되던가?”

    “네.”

    재혁이 이번에 합류한 시드니 FC가 프리 시즌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재혁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3주가 지나면 정규 시즌이 시작되죠.”

    “드디어 축구다운 축구를 하겠군.”

    “제게 축구는 항상 같았어요.”

    로니의 말을 들은 재혁이 슬쩍 고개를 들어 바닥에 구르고 있는 축구공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혼자 훈련을 하던 것도 축구였고, 팀에 합류해 이기기 위해 했던 것도 축구였죠. 그 모든 게 성공할 수 있는 축구로 향하는 길이라면, 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축구를 할 거에요.”

    “이것도 축구고 저것도 축구라. 하긴 둘 다 축구공을 가지고 하는 것이니 틀린 말은 아니군.”

    재혁의 말을 들으면서 로니가 실실 웃음을 흘리더니 무언가를 떠올리고 재차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 차범수, 그 친구가 했던 말대로야. 재혁이 네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네가 아직 고등학생이라는 걸 잊게 만든다니까.”

    “그거 칭찬이죠?”

    “아직까지는.”

    재혁에게 짧게 대꾸한 로니는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게 네가 계속 축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원동력이니. 아직까지는 좋은 점이라고 봐야겠지. 다만, 네 인생은 네 거다. 축구가 인생을 대신 할 수는 없는 거야.”

    “명심하고 있을게요.”

    “그래. 그러면 씻고 얼른 자. 내일 학교에 늦지 않으려면 일찍 자야지.”

    로니가 건넨 말에 재혁이 알겠다고 답했고, 로니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가면서 내일 보자고 했다.

    그렇게 이제 혼자 남게 된 방 안에서 재혁이 천천히 창가로 향했다.

    네모난 창틀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살피면서 재혁이 상념에 잠겼다.

    ‘3년이라···. 정말 오래 걸렸다.’

    한국을 떠나 호주에 온 지 3년.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떠올리면서 재혁이 눈을 감았다.

    처음 학교에 들어가 적응을 하기 위해 고생하던 일과 매일 밤 따로 영어 공부를 하던 것, 그리고 차범수와 인연이 있는 독일인 로니가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 홀로 훈련을 하던 일들이 차례로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오늘, 드디어 다른 선수들과 함께 뒤섞여 훈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2부리그고, 남미나 유럽도 아닌 호주였지만, 재혁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16살이야. 오히려 부족한 사람들에 비하면 좋은 경험을 쌓고 있는 거라고. 과거를 생각해라, 재혁. 해이해지지 마라.’

    찰싹! 양손으로 뺨을 때리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을 다잡은 재혁이 창문을 닫고 갈아입을 속옷과 잠옷을 하나둘 손에 쥐다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소포를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재빨리 책상으로 다가간 재혁이 배송지를 확인한 뒤 박스를 뜯었고, 안에 담겨 있는 물건들을 확인하면서 히죽 웃었다.

    그의 눈에 새 축구화와 양말, 그리고 다양한 축구 용품들이 들어왔지만, 다른 무엇보다 그를 웃게 한 것은 그런 물건들이 아닌 조그마한 편지였다.

    손에 쥐고 있던 옷가지들을 내려놓고 손을 뻗어 편지를 쥔 재혁이 나름 예쁘게 쓰여 있는 이름을 발견하고 환한 얼굴이 되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중학생이라고 제법 그럴듯하게 쓸 줄 아네?”

    겉봉에 쓰인 최재희라는 이름과 할머니의 이름이 적힌 편지.

    언제 그랬냐는 듯, 훈련으로 약간 피로했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재혁은 서둘러 편지를 뜯어 안에 내용을 살폈다.

    재혁을 서포트하는 케이 스포츠 브랜드에서 정기적으로 격월마다 오늘처럼 축구 용품들을 보내왔는데, 그럴 때면 동생인 재희의 편지도 항상 끼여져서 날아왔던 것이다.

    3년간 타지 생활을 홀로 하고 있는 재혁에게 동생과 할머니의 소식이 담긴 편지는 세상에 둘도 없을 버팀목이자 원기보충제이었다.

    그렇게 중학교에 입학했다는 소식과 할머니가 어떻게 잘 계시는지를 적은 동생은 마지막에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동봉해 보냈고, 멍하니 사진을 바라보던 재혁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사진을 지갑 속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짧게 숨을 고른 뒤 조그맣게 속삭였다.

    “앞으로 좀만 더 힘내자.”

    처음 호주에 왔을 땐 그저 캄캄하기만 했던 길에 이제는 드문드문 빛이 비추어지는 상황.

    재혁은 다시 한 번 가볍게 뺨을 찰싹인 후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

    지난 3년에 비하면 이어질 3주는 총알처럼 지나갔다.

    그 말인즉 각 팀들의 프리 시즌이 마침내 끝이 났다는 의미였고···.

    “6전, 전패?! 게다가 폴란드 놈이 운영하고 있는 팀한테는 5대0을 당해?!”

    시드니 FC U-21팀의 프리 시즌 결과를 듣게 된 구단주, 알리앙 트라토벤코의 코가 시뻘겋게 물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호주의 축구는 유럽 이민자들의 뿌리를 받아 성장했다.

    그러다 보니 각 팀마다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이민자들이 있었는데, 시드니 FC의 경우에는 구단주인 알리앙이 러시안인 탓에 경쟁 구도에 있는 폴란드 계 이민자들이 뭉쳐 있는 팀들을 극도로 경계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같은 리그에 속해 있는 시드니 유나이티드를 극도로 싫어하던 알리앙이었는데, 결과표에 그들에게 5대0으로 완패했다는 소식이 눈에 보이니 분을 참지 못하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게 말이 되는 결과야? 코헨 감독은 대체 뭘 했어? 그 대머리 놈이 운영하는 팀한테 대패를 하다니. 이런 굴욕이···. 러시아에는 죽더라도 폴란드 군인 놈이 쏜 총알은 피하고 죽으란 말이 있다고!”

    “저, 어차피 우리 구단에나 저쪽 구단에나 러시아 사람이나 폴란드 사람은 없습니다만···.”

    “구단주들이 러시아 출신이고 폴란드 출신이잖아! 그 외에 다른 설명이 또 필요한가?”

    알리앙의 고함을 면전에서 그대로 맞고 있던 퍼스트 팀의 코치, 콕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결과를 처음 확인했을 때 이런 미래가 올 줄 알고 있었던 콕은 당장 코헨 감독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지만 일단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야 그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알리앙 구단주를 향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제가 코헨 감독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 28. 비밀 병기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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