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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미드필더-27화 (27/225)
  • < 27. 미니 게임 >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자신에 찬 대답을 남기고 멀어지는 재혁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트레디는 여전한 얼굴로 뺨을 긁적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지금 자기가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얼굴로 말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1군에 올라가야 돼. 언제까지 2군에서만 머물 수는 없잖아.”

    골키퍼의 바로 앞에서 팀의 최후방을 책임지는 위치.

    본래 뛰는 센터백과 가장 근접한 자리에서 뛰게 되었으니 오늘 감독의 눈에 확실한 눈도장을 찍어 전 경기에 출전하면서 이번 시즌이 끝나면 내년엔 꼭 1군에 데뷔하겠다며 트레디가 마음을 다잡았고, 그런 트레디와 재혁이 대화를 나누던 것을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있던 안토루는 신중한 눈빛으로 계속 재혁을 살피면서 입술을 끌었다.

    “투 페어에서 풀 하우스가 될 수 있는 카드라.”

    포커를 해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재혁이란 저 친구가 평범한 고등학생은 아니라는 의미이리라. 그리고 그걸 확실히 알려면···.

    ‘역시 공을 차는 걸 한 번 직접 보는 수밖엔 없지.’

    “안토루. 준비 됐나?”

    “예.”

    “그럼 시작!”

    코헨 감독이 양 코트에 미니 게임의 시작을 알리자, 안토루는 선축을 함과 동시에 공을 뒤로 보냈고, 재혁의 발끝에 공이 닿는 것을 확인하면서 공간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토루에게 패스를 전해 받은 재혁은 천천히 공을 발등으로 굴리다가 일단 가볍게 주변에 있는 선수들과 짧은 패스를 주고 받았다.

    그런 재혁의 행동을 모든 선수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사실 필드 위에 있는 모두가 신경 쓰고 있었다.

    아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하면서 팀에 합류하게 된 어린 선수를 말이다.

    대체 어떤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걸까?

    무엇으로 코헨 감독을 현혹시킨 것일까, 라는 의문을 한창 품고 있을 때 즈음.

    투웅!

    같은 라인 선상에서 공을 주고받던 동료의 패스를 받은 재혁이 재빠르게 전방을 향해 몸을 틀더니 깔끔한 동작으로 땅볼 패스를 찔러 넣었다.

    매우 빠르게 잔디를 훑으며 굴러간 공은 상대 선수와 등을 지고 있던 안토루의 발밑을 향했고, 재혁의 패스를 받은 안토루는 공을 멈춰 세우면서 일단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주위를 훑었는데, 그의 눈에 빈 공간을 찾아 움직이고 있는 같은 팀 동료가 보였다.

    ‘최재혁!’

    동료에게 패스를 찔러주는 것에서 멈추는 게 아닌, 패스 이후 공간을 쫓아 리턴 패스를 기다리는 팀 전술의 기본인 패스 앤 무브.

    그런 재혁의 행동을 보면서 안토루는 자신도 모르게 받았던 공을 다시 재혁에게 돌려주었고, 재혁이 그랬던 것처럼 공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때론 앞으로, 때로는 뒤로.

    서로 짧지만 확실한 패스를 주고받으면서 계속해서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팀 전원이 유기적으로 행동을 움직였는데, 그 중심에는 항상 재혁이 있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넓은 행동반경을 취하고 움직이니, 선수들은 패스를 할 선택지를 고를 때 매번 재혁이 눈에 밟혔던 것이고, 자연히 그가 팀 내에서 누구보다 많은 터치 수를 쌓아가게 됐다.

    그 점을 상대 팀에서 뛰고 있던 미드필더, 엘비스도 인지하고 눈썹을 모았다.

    ‘일단 저 녀석을 막아야 돼!’

    비록 어린 선수였으나 끊임없이 공을 상하좌우를 향해 뿌리고 있는 재혁이 상대 팀의 윤활제임을 알아차리고 일단 그 흐름을 끊기 위해 재혁에 가까이 다가가던 엘비스는 공이 다시 한 번 재혁의 발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 재혁을 향해 재빨리 거리를 좁혔는데···.

    “어?”

    눈앞에서 재혁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진 것에 당황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대체 어디로?!’

    당황한 엘비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을 때, 이미 재혁은 공과 함께 그를 지나치고 난 뒤였고, 엘비스는 입술을 깨물고 발에 힘을 주어 재혁의 뒤를 쫓기 위해 속력을 붙였다.

    그러면서 뒤늦게 재혁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제쳤는지를 떠올리면서 얼굴을 붉혔다.

    ‘공이 굴러오는 속력을 그대로 살려 살짝 방향만 바꾸는 뻔한 턴이었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다.’

    조금만 더 재혁의 행동을 유의 깊게 살폈다면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뚫리는 일은 없었을 것인데.

    엘비스가 뒤늦게 자책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재혁에게 압박을 넣어 다음 동작을 자유롭게 취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리라.

    다행히 아직 멀리 달아나지 못한 재혁의 옆에 바짝 따라붙을 수 있었던 엘비스가 재혁의 위치를 살피면서 힘껏 몸을 움직였다.

    ‘그러면 일단 어깨부터 붙이고!’

    투웅!

    재혁의 왼쪽 어깨에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붙이면서 동시에 손으로 재혁의 유니폼을 단단히 움켜쥔 엘비스.

    절대로 이번에는 쉽사리 뚫리지 않으리라는 의지를 담아 재혁을 마크하면서 엘비스는 계속해서 재혁의 발밑에서 구르는 공을 뺏어낼 순간을 노리기 위해 눈빛을 빛냈는데, 두 걸음 정도를 같이 뛰었을 때, 엘비스의 눈에 공이 기묘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반대로 빠진다!’

    공을 안전하게 소유하면서 패스할 상대를 찾으려는 목적인지 자신이 있는 방향에서 반대쪽으로 공을 굴리려는 재혁의 행동이 포착된 것이다.

    아마 자신의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숨쉴 공간을 찾으려는 행동인 것이리라.

    재혁의 행동을 읽어낸 엘비스의 입가에는 자연히 미소가 떠올랐다.

    공을 바깥으로 굴리고, 몸을 트는 바로 그 순간.

    공을 숨기고 있는 몸이 열리는 바로 그 순간의 틈을 노려 태클을 해 공을 빼낼 생각에 떠오른 자신감에 찬 미소였다.

    그렇게 앞으로 한 보 더 디디는 순간 재혁의 오른발의 발바닥으로 공을 바깥으로 한 차례 굴렸고, 그와 동시에 엘비스가 왼쪽 발을 길게 뻗어 비어있는 틈을 노리고 공을 걷어내기 위해 왼쪽 발을 던졌다.

    이번엔 확실히 뺏었다.

    그런 확신에 찬 얼굴로 웃으려던 바로 그 순간.

    “?!”

    또 한 번 믿기 힘든 상황이 벌어진 것에 엘비스의 두 눈이 찢어질듯 커졌다.

    동그랗게 커진 엘비스의 두 눈에 재혁이 발바닥으로 컨트롤 하던 공이···.

    스르륵.

    바닥을 굴러 벌어진 그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는 게 들어온 것이다.

    ‘발바닥으로 컨트롤 하는 척을 하다가 그대로 탄력을 줘 반대로 공을 옮겼어?!’

    바깥으로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였던 공은 재혁의 오른발 인사이드에 걸려 안쪽으로 방향이 바뀌었고, 데굴데굴 느리지만 정확하게 벌어진 엘비스의 다리 사이를 통과해 지나가버렸다.

    당했다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엘비스가 입술을 깨물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무너지는 것뿐이었고,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엘비스를 제친 재혁은 또 다시 드리블을 시작해 골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일련의 상황을 확인한 선수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재혁과 같은 팀인 선수들은 패스를 받기 위한 공간을 찾기 위해 움직였고, 재혁을 상대하는 선수들은 수비를 위해 엘비스가 빠진 구멍을 메우려 진형에 변화를 주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수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먼저 행동을 취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재혁이었다.

    퉁.

    골문을 향해 드리블을 치고 가면서 취할 수 있는 공간을 모두 취하면서 이동하던 재혁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상대 선수가 발을 뻗기 전에 한 발 먼저 공을 툭하고 밀어 넣은 것이다.

    인스텝으로 깎아 보낸 공은 빠르게 이동했지만, 역스핀을 먹은 탓에 한 차례 바닥에 충돌하자 급격히 속도가 줄었고.

    “나이스 패스···!”

    그 덕에 수비수와 골키퍼 사이에서 공을 편안하게 받을 수 있었던 안토루가 박스 안에서 그대로 원터치 트래핑 이후 빠른 땅볼 슈팅을 때렸다.

    골키퍼가 아직 각을 좁히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열린 틈 사이로 날아간 공은 미니 골대 구석에 박히면서 선취점을 알렸다.

    다만 골을 넣은 쪽도, 골이 먹힌 쪽도,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한 선수를 향해 시선을 옮겼고,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재혁은 가뿐하게 툭툭 유니폼을 털어낸 뒤 자기 자리를 찾아 걸으며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일단 한 점.’

    비록 훈련의 일환인 미니 게임이었지만, 이것도 축구인 이상 절대로 지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재혁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재개될 경기를 기다렸다.

    지난 3년간 그토록 하고 싶었던 축구.

    그 갈증이 겨우 10분만 뛰고 해소될 리 없었으니까.

    ***

    모든 훈련이 끝나고, 스트레칭으로 혹시 모를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몸을 풀어주던 선수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그런 선수들을 향해 코헨 감독은 내일 훈련에 늦지 말라며 당부했고,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몸 관리에 특별히 신경 쓸 것을 재차 강조했다.

    그렇게 모든 선수들이 훈련장을 벗어난 것을 확인한 코헨 감독이 아놀 코치와 함께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정리하다가 멀리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감독님!”

    “응? 안토루. 아직 안 돌아갔나?”

    “실수로 조끼를 그대로 입고 갔지 뭐예요?”

    안토루가 손에 쥐고 있던 푸른 조끼를 흔들면서 감독에게 말했고, 감독은 쯧쯧 혀를 찼다.

    “벌써부터 그러면 늙어선 어쩌려고 그래? 정신 좀 똑바로 차리고 다녀.”

    “뭐, 영양제라도 챙겨먹으면 괜찮겠죠.”

    감독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레 대꾸하던 안토루는 소품들이 담겨 있는 통에 조끼를 던져 넣은 뒤 작별 인사와 함께 자리를 벗어나려다가 한 가지를 떠올리고 다시 등을 돌리고 감독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 녀석은 진짜 고등학생인거죠?”

    “그녀석이라면, 최재혁?”

    “팀에 또 다른 고등학생이 합류할 예정이 아니라면 제가 말하는 고등학생은 그 친구뿐이죠.”

    안토루의 질문에 코헨 감독은 작게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안토루가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안토루의 행동을 살피면서 코헨 감독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왜 그러나?”

    “그런 고등학생이라면 몇 명이고 같이 뛴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서 말이죠. 한 명 뿐이라니 아쉽네요.”

    그런 고등학생.

    중앙에서 홀로 공을 지켜내고, 패스를 뿌리면서, 공간과 패스가 흘러나갈 길을 읽어내는 능력까지 탁월한 고등학생.

    자신이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었는지 안토루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웃음을 흘렸고, 그를 따라 코헨 감독이 짧게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고등학생이 더 있다면 오히려 곤란한 게 아닌가? 미래가 밝다는 건 좋지만 자리를 잃을 선수들이 한둘이 아닐 걸?”

    “그건 또 그렇지만···, 오히려 욕심이 나더라고요. 만약 이 친구랑 시합을 뛰게 된다면 어떤 경기를 펼치게 될지, 그런 욕심이 말예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안토루의 말에 코헨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런 선수를 내가 짠 전술에 맞춰 뛰게 할 생각을 하면 벌써 시작될 시즌이 기다려진다고.”

    “다음 주부터 프리 시즌. 그리고 그 3주 뒤엔 본 시즌이 시작되던가요?”

    “그렇지. 벌써 새 계절, 그리고 새로운 시즌이 시작이 찾아온 거야.”

    이어질 일정에 대해 안토루가 물은 것에 코헨 감독이 짤막하게 답했고, 감독의 답을 들은 안토루가 고개를 주억이더니 씨익 웃었다.

    “일단 프리 시즌에는 못 뛰겠네요, 그 친구.”

    “고등학생이니 수업을 들어야지. 하지만 본 시즌부터는 학교에 협조를 구해 차출이 가능하니까. 그 부분은 걱정이 없어.”

    “이거 완전 비밀 병기 취급 아닌가요? 와, 내가 그 상황에 있었으면 정말 재밌을 것 같은데.”

    < 27. 미니 게임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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