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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미드필더-24화 (24/225)
  • < 24. 과거는 남겨진다 >

    “재혁이를? 혹시 어른들 일에 애를 끼워 넣을 생각인 거라면···.”

    “아직도 내 성격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종철의 걱정어린 목소리를 중간에 끊은 차범수는 다시 한 번 진중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선수 본인의 미래를 위한 선택을 내려야 할 자리니까. 당연히 선수 본인이 있었으면 할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야.”

    차범수의 진지한 눈빛을 마주한 종철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강코치에게 재혁을 데리고 올 것을 부탁했다.

    ***

    “또 만났구나.”

    “어, 안녕하세요.”

    사무실로 들어온 재혁을 향해 차범수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재혁이 곧장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였고, 둘이 어디서 만났는지에 대해 종철이 궁금해 하며 물었다.

    그런 종철을 향해 네가 딴 짓하고 있을 때 경기장에서 만났다며, 다시 한 번 종철에게 핀잔을 주었고, 차범수에게 한 마디를 들은 종철은 구겨진 눈썹으로 친구를 노려보다가 퉁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이제 재혁이도 왔으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건지 꺼내놔 봐.”

    “가장 먼저 재혁아. 네가 경기를 뛴 것 때문에 중앙초가 이번 대회에서 탈락하게 된 건 알고 있니?”

    “야, 차범수! 느닷없이 애한테···!”

    “네. 알고 있어요.”

    “올해 더 이상 공식 경기에 나갈 수 없는 것도?”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거니, 그 정도 처분은 약과겠죠.”

    시작부터 안 좋은 이야기를 꺼낸 것에 종철이 놀란 것과 달리, 재혁은 한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질문들에 답했고, 그런 재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차범수가 말을 이었다.

    “그러면 네가 바라던 축구로 성공하는 길에 약간의 장애가 생긴 것도 이해하고 있겠구나.”

    “어느 정도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걱정하진 않아요.”

    “호오. 왜지?”

    “겨우 이만한 일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기엔 아직 제 축구 인생은 제대로 시작도 안했으니까요.”

    재혁의 답을 들은 차범수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가 이내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더욱 진하게 그렸다.

    다만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종철은 대체 왜 둘이 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곧 이어진 차범수의 말이 종철의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맞다. 네 축구 인생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지. 그래서 네게 묻고 싶어서 오늘 너를 찾아온 거란다.”

    “제게 묻는다고요? 뭘요?”

    “네 축구 인생의 시작을 유학으로 해볼 생각은 없느냐?”

    “유학···, 이요?”

    차범수의 말에 재혁이 순간 굳은 얼굴로 되물었고, 차범수는 재혁을 향해 고개를 재차 끄덕이며 말했다.

    “한국에서 축구를 할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축구를 하는 건 힘들 것 같니?”

    “힘들 것 같은 게 아니라 불가능하죠.”

    재혁이 얼굴을 쓸어내면서 단호하게 대꾸한 뒤 말을 이었다.

    “일단 그럴만한 경제력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단순히 어딘가로 떠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축구 유학이란 게 말예요.”

    스페인에 머물던 유소년들에게 중징계가 내려졌었다.

    피파측에서 선수 이적에 관한 조항을 들어 만 18세가 되지 않은 선수들의 이적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해당 조항은 대략 세 가지 예외 규정이 있었는데, 부모님이 선수와 현지에서 살되 축구 관련 인이 아니어야 하거나, 출생 대륙 혹은 연합에 속한 선수여야 한다는 점, 혹은 인근 국가 클럽으로 이적해야 한다는 규정들이었지만 징계를 받은 유소년들은 어느 것 하나 속한 것이 없었고, 그것은 재혁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지금의 재혁을 뒷받침 해줄 경제력이 없었다.

    근근이 생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재혁의 할머니가 어찌 그의 유학비용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비록 재혁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차범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바로 이해하고 재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지. 규정이란 것들이 좀 복잡한 게 아니니까 말야. 오늘 너와 중앙 초등학교가 징계를 받게 된 것처럼 말이지.”

    “그러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건가요?”

    “그건 또 그렇지 않단다.”

    재혁의 짧은 말에 차범수가 생수로 목을 축인 뒤 답을 이었다.

    “사실 이번 대회가 시작되기 전, 한 기업에서 나에게 연락을 취해왔었단다. 국내 스포츠클럽이라면 모두가 알만한 그런 기업이었지.”

    “그게 지금 이 이야기랑 상관이 있나요?”

    “물론 있지. 그곳에서 내게 따로 또 연락을 주면서 상담을 요청해 왔거든. 기업 차원에서 ‘스포츠 장학생’으로 뽑아 지원을 하고 싶은 선수가 있는데 과연 내 생각은 어떠냐고 말야.”

    “···스포츠 장학생이요?”

    말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는 재혁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친 차범수가 말했다.

    “케이 브랜드 스포츠. 그곳에서 너를 지원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아주 좋은 선택이라고 답해주었다. 단순히 브랜드의 이미지뿐만이 아닌, 한국 축구의 미래를 살리는 길이라고 답하면서 말이다.”

    “!”

    “그러니 지금 다시 한 번 물어보마. 경제 후견인이 생긴다면 너는 축구 유학을 떠날 생각이 있느냐?”

    놀라고 있는 재혁을 향해 차범수가 또 다시 물었고, 재혁은 신중한 얼굴로 입술을 곱씹으면서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전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유럽이나 남미 쪽으로는···.”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만으로 17세가 되기 전까지 네가 머물 곳은 유럽이나 남미가 아니니까.”

    재혁의 걱정스러운 말에 차범수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호주. 만 17세가 되기 전까지 재혁이 너는 호주에 있을 거다.”

    “···호주요?”

    너무 낯선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탓에 재혁이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고, 그런 재혁을 향해 차범수는 침착한 어조로 설명을 계속 했다.

    “유소년이 성장하기에 호주는 나쁜 곳이 아니야. 실제로 리그 수준도 점차 올라가는 중이고, 유소년 양성에도 프로 2부리그인

    “···.”

    “일단 상황은 대강 그렇다. 모든 게 이미 준비된 상황이고, 네가 알겠다고 대답하는 순간 케이 브랜드 스포츠에선 경제적인 부분을, 나는 네 신분을 위한 후견인이 되어 줄 거야. 이쯤되면 다시 한 번 물어보겠다. 재혁이 너는 다른 곳에서 축구를 시작할 마음이 있느냐?”

    가라앉은 눈빛으로 진지하게 재혁을 대하며 다시금 묻는 차범수의 말에 재혁은 두 손을 끌어 모아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쁘지 않은, 아니. 다시없을 기회였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차범수가 직접 그의 후견인을 자처해주고 있는 상황이었고, 케이 브랜드라는 국내 최고 스포츠 브랜드가 스폰서를 해주겠다고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라 지워지지 않는 상념에 대해 재혁이 물었다.

    “어째서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시려는 거죠?”

    따지고 보면 아주 남인 관계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오니, 재혁은 자연히 떠오르는 의구심에 대해 차범수에게 물은 것이다.

    재혁의 그런 의중을 바로 파악한 차범수는 옅게 웃으면서 말했다.

    “과연 이상민 기자가 말한 대로, 나이답지 않은 구석이 많구나.”

    “이상민 기자님을 아세요?”

    “모를 수가 있나. 후후, 아무튼 너와 만나기 전에 먼저 그 친구와 대화를 나누었지. 나만큼 너에 대해 관심도 많고, 또 잘 아는 친구인 것 같았거든.”

    고개를 주억이던 차범수는 이내 빛이 담긴 눈동자로 재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친구와 내가 공통적으로 동의한 부분이 있었어. 바로 재혁이, 네가 장차 크게 된다면 우리나라에 다시없을 중요한 선수가 될 것이라는 것이란다.”

    “···!”

    “그러니까 다른 의도는 없어. 그저 과거에 살았던 내가 현재, 미래를 위해 행동 한다는 것 밖에는 말이야.”

    “미래를 도우려 하는 것···.”

    “이제 조금 이해가 됐니? 그럼 이제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겠느냐?”

    다시 한 번 차범수는 똑같은 질문을 던졌고, 재혁은 눈을 감고 차분하게 숨을 고른 다음, 고개를 작게 주억이면서 차범수를 향해 대답했다.

    “네. 좋아요. 오히려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려야겠죠.”

    “감사하다는 말은 앞으로 몇 년 후, 네가 어떤 모습이 되었을 지를 보면서 받도록 하마. 아직은 일러.”

    “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분들의 정성에 최선을 다해 보답하는 게 지금으로서 보여드릴 수 있는 최선이겠네요. 하지만···.”

    “하지만?”

    긍정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던 중, 재혁이 갑자기 말꼬리를 흐리자 차범수가 눈썹을 모은 얼굴로 물었고, 재혁은 그런 차범수를 향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개인적으로 약간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그에 대해 여쭈어 보고 싶어서 말예요.”

    “수정을 하고 싶은 부분?”

    갸우뚱 기울어진 고개로 차범수가 되묻자 재혁이 여전히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보면서 물었다.

    “생계 보조에 대한 부분을 조금 바꾸고 싶은데, 가능한가요?”

    “바꾸고 싶다니? 뭘 어떻게?”

    “저는 호주로 가게 되면 최소한의 생활 보조금만 지원 받을게요.”

    “최소한의 보조금만 지원 받겠다고?”

    “네.”

    대체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묻는 듯한 얼굴로 차범수가 눈썹을 모으자, 재혁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신 남는 돈은 모두 한국에 남아 계실 할머니께 드렸으면 해요. 어차피 호주에서 운동만 하면 저는 따로 돈 쓸 일도 없을 테니까요. 그 돈을 모두 할머니께서 받았으면 하는 겁니다. 이 정도는 수정은···, 괜찮겠죠?”

    마지막에 살며시 어둠이 드리운 얼굴로 걱정스럽게 묻는 재혁을 향해 차범수는 생긋 미소를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모든 일들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됐다.

    서류며, 필요한 것들은 모두 차범수와 케이 브랜드에서 알아봐 준 덕에 재혁이 따로 해야 할 일은 없었다.

    그저 호주로 떠날 날을 기다리며 몸을 다지는 것과···.

    “오빠아···, 흐윽···. 진짜로 멀리 가버리는 거야?”

    매일같이 그의 곁에서 울먹이는 동생을 달래는 것밖에는 말이다.

    오늘도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던 재혁의 곁에 다가온 재희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그에게 다가와 투정을 부렸고, 재혁은 그런 동생의 머리칼을 쓸어주면서 눈높이를 맞춘 후 웃었다.

    “아주 잠깐이야. 멀리가도 오빠는 돌아올 거야.”

    “그치만 엄마 아빠도 멀리 간 다음부터 재희를 보러 한 번도 오질 않았잖아···. 그럼 오빠도 멀리가면 재희는···. 흐윽···.”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기억까지 떠올린 재희는 또 다시 눈물샘을 터트렸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동생의 눈가를 재혁이 소매로 닦아주면서 말했다.

    “아냐. 오빠는 진짜 돌아 올 거야.”

    “···흐윽, 언제 돌아 올 건데?”

    “흐음. 어디 보자. 아마 재희가 100밤 정도 자고, 또 학교에서 공부로 1등을 하면 돌아오는 걸로 할까?”

    “100밤? 정말 100밤 자고 나면 돌아올 거야?”

    “물론이지. 대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어야 돼. 안 그러면 돌아오자마자 혼부터 날 테니까. 알겠지?”

    “응! 알겠어! 재희 안 그래도 지난 수학 시험에서 100점 받았어!”

    매일같이 어르고 달랜 덕에 어느 정도 재희가 안정을 되찾은 것을 보면서 재혁이 안도했다.

    아마 100밤이 지나도 그가 돌아오는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꼭 나아져서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아줘라, 재희야.’

    재혁이 애써 동생의 머리칼을 쓸어주다가 해가 지는 것을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했고, 재희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크게 끄덕이며 웃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늦은 밤.

    이불 속에서 잠이 든 재희를 내려 보던 재혁이 바깥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

    대충 신발에 발을 꿰고 밖으로 빠져나가자, 한 짐을 양손 가득 들고서 집으로 들어오는 할머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재혁이 후다닥 할머니 곁으로 달려가 짐을 대신 들어주면서 말했다.

    “오늘도 힘드셨죠? 이건 제가 들게요.”

    “힘들긴야, 이렇게 집에 오면 강아지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힘들 시간이 어딨누?”

    재혁의 얼굴을 보면서 홀홀, 웃던 할머니의 표정이 곧 어두워지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디 네가 그렇게 가버리면 어뜩한다냐. 에구···. 정말 괜찮은겨?”

    “물론이죠.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오히려 전 할머니가 걱정이라고요.”

    “늙은이가 뭐가 걱정이여. 젊은 너그들이 더 걱정이지. 그리고 저 꼬맹이 눔도···.”

    꼬맹이가 재희를 가리킨다는 것을 바로 안 재혁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조금만 참으세요. 제가 다시 돌아올 땐···, 그땐 효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돌아올 거예요.”

    “지금도 몸만 성하면 되는 건디, 뭘 계속 효도를 하겠다고 하는 거다냐? 난 그저 재혁이 네가 사지 멀쩡하게만 다니면 되는겨···.”

    “할머니···.”

    “에휴, 우리 강아지. 떠나기 전에 한 번 안아나 보자.”

    조용한 밤.

    별과 달이 차올라 은은하게 빛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할머니는 한동안 손자를 품에 안고 놓을 줄 몰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재혁이 호주로 떠나는 날이 찾아왔고, 출국심사 끝낸 뒤 탑승구를 찾아 이동하다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앞으로 한동안 볼 수 없는 한국의 마지막 모습이 곧 그의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여러 사람들과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지만, 재혁은 애써 자신을 다잡기 위해 고개를 털었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때는···. 그때는 반드시···.’

    마음속으로 굳게 자신을 다잡은 재혁이 양 뺨을 찰싹 때렸고 멈췄던 발을 움직여 탑승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축구선수 최재혁이라는 이름이 다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였다.

    < 24. 과거는 남겨진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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