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23화 (23/225)
  • < 23. 시작을 위한 선택 >

    “나이스 패스였어.”

    “나는 그냥 네가 하라고 했던 말대로 패스를 했을 뿐인 걸.”

    “그런 걸 두고 나이스 패스라고 하는 거야.”

    골을 성공시키기 무섭게 동료들이 달려들어 축하해준 것에 재혁이 씨익 웃다가 마지막으로 주성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난 뒤 진영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맞췄다.

    별 거 아닌 듯 하지만 비어있는 공간을 확인하고 패스를 찔러주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재혁이기에, 방금 전에 찔러준 패스는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는 말로 주성을 칭찬했고, 그런 재혁의 칭찬에 뒷머리를 긁적이던 주성이 벤치 쪽에서 들리는 큰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아저씨는 갑자기 왜 저런데?”

    “나야 모르지.”

    호종초의 감독이 선수들을 향해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을 주성과 함께 지켜보던 재혁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저쪽에서 크게 당황하고 있다는 거겠지.”

    “확실히···.”

    전반전에 자신들의 의도대로 경기를 이끌어 갈 때와 1점을 리드하고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지금의 상대편을 보면서 재혁이 웃었고, 주성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런 변화를 쉬이 이해할 수 없었던 주성이 기울어진 얼굴로 재혁에게 재차 물었다.

    “따지고 보면 이제 동점이니까 사실 전반전하곤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은 거 아니야?”

    “아니. 전반전하곤 완전히 다른 상황이지. 지금까지는 계속 거리를 벌리고 있던 중이었는데 이제는 따라 잡히고, 어쩌면 추월당할 상황에 놓여 있으니까 말야.”

    “어렵네.”

    “오히려 단순한 거지.”

    스포츠란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 말인즉 단순하게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심리적인 요인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말이었고, 어린 만큼 이런 상황 속에서 심리적으로 크게 흔들린 호종초의 선수들을 살펴보면서 재혁이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그가 슬쩍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살피다가 살며시 미소를 띠며 혼잣말을 속삭였다.

    “슬슬 지칠 텐데.”

    전반 25분, 그리고 후반 25분으로 총 50분.

    성인 축구팀들이 90분을 뛰는 것에 비하면 40분이나 적은 시간이었지만, 그 50분을 뛰는 선수들이 초등학생이라면 50분도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경기 내내 강도 높은 압박을 유지하기 위해 전체적으로 체력 소모가 컸을 선수들이라면?

    거기에 이기고 있던 중 뒤늦게 동점을 허용하고 만 상황이라면?

    지금까지 잊고 있던 피로감이 서서히 발목을 붙잡기 시작할 것이리라.

    그것을 호종초의 감독도 이해하고 몇몇 선수들을 바꿔주었지만···.

    ‘저 둘은 여전히 그대로군.’

    아직까지 자리에 남아 있는 두 선수를 확인한 재혁이 쓰게 웃었다.

    전반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재혁을 마크 하고 있는 호종초의 두 선수는 여전히 필드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체력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선수들이기 때문에 운동장 위에 남겨둔 것이겠지만, 과연 저 둘은 아침저녁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체력 훈련을 해온 자신과 같은 수준의 체력을 지니고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은 아마 이어지는 경기를 통해 알 수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을 떠올린 재혁이 호흡을 골랐고, 동시에 주심이 휘슬을 불면서 경기가 다시 시작되는 것을 알렸다.

    호종초는 후반전이 끝나기 전에 승리를 확정지으려는 심산이었는지, 전반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페이스를 올려 중앙초의 공략을 시도했다.

    ‘하지만 역시 체력 소모가 크긴 했나 보군!’

    퉁!

    패스를 돌리면서 중앙초의 빈틈을 노리려던 호종초의 패스가 어긋나는 바람에 중앙초의 선수 발끝에 걸리고 만 것이다.

    짧은 패스가 제대로 된 길을 찾지 못하고 잘린 것을 보면서 호종초 선수들의 집중력이 크게 떨어진 것을 확인한 재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고, 그런 재혁을 향해 패스를 끊어냈던 중앙초의 미드필더가 재빨리 공을 연결해주었다.

    재혁이 발밑으로 굴러들어온 공을 가볍게 터치하면서 재빠른 턴으로 상대 골대를 향해 방향을 잡은 뒤 호흡을 골랐다.

    정확히 골대까지 향하는 직선 위로 5명의 선수들이 길목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퉁!

    재혁이 드리블을 시작했다.

    ***

    딸깍, 딸깍.

    사무실에 앉아 마우스를 놀리고 있던 영동초의 감독, 채용우가 인터넷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국대회와 관련된 정보들을 쭉 훑어보던 중, 익숙한 이름의 학생에 관한 동영상을 발견한 것이다.

    “이녀석은 이번에 또 엄청난 짓을 했군.”

    중앙초의 최재혁.

    이번에 호종초를 맞아 8강전 경기를 뛰었는데, 동점골을 넣고 후반전이 끝나기 전에는 역전골까지 성공시키면서 중앙초를 개인의 힘으로 준결승에 올려놓은 것이다.

    물론 축구를 혼자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 녀석만큼은 특별했다.

    기술만 좋은 게 아니라 축구를 이해하는 지능까지 뛰어났으니, 어떤 의미에선 초등학생처럼 느껴지지 않는 선수였으니까.

    ‘하지만 마냥 칭찬만 하고 있을 순 없지.’

    딸깍, 딸깍.

    슬슬 마우스 커서를 움직인 채감독이 버튼을 하나 눌렀고, 곧 중앙초 대 호종초의 8강전 경기 하이라이트가 재생되었다. 모니터에 가득 떠오른 영상을 보면서 채감독이 노트와 펜을 손에 쥐었다.

    비록 조별 예선에선 2번을 만나 모두 패배했지만, 이번에 다시 만나는 준결승에서는 분명 다른 결과를 만들 것이라며 중앙초의 약점을 분석하기 위함이었다.

    조용히 전반전을 지켜보던 채감독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팀 단위로 맞서는 게 맞는 판단이긴 했어. 점유율부터 패스 횟수까지, 중앙초에서 전부 밀리고 있으니까. 다만···.’

    딸깍.

    중간 과정을 지나치고 곧장 후반전을 재생시킨 채감독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전반전 내내 고전하던 중앙초가 반격을 시작하는 순간이 찾아왔기 때문이었고, 그 중심에는 역시 이번에도 최재혁, 저 8번이 있었다.

    동점골을 뽑아내는 과정을 빤히 지켜보던 채감독이 푸후, 참고 있던 숨을 내뱉으면서 혀를 찼다.

    “드리블을 치면서 저런 시야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초등학생이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인 거지. 그리고 이 뒤에는···.”

    딸깍.

    또 한 번 영상을 넘긴 채감독이 이어지는 장면을 보면서 눈을 얇게 떴다.

    호종초의 선수 5명을 드리블로 모두 제치고 마지막에는 골키퍼까지 따돌리면서 빈 골대에 골을 넣는 재혁의 모습이 영상에 그려진 것이다.

    남들이 모두 지쳐가고 있을 때, 홀로 저런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니.

    ‘괴물 같은 놈이야.’

    이미 풀 경기를 몇 번이고 돌려봤지만,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괴물.

    아마 지금 대회에 속한 다른 학교들의 감독들도 모두 같은 생각을 하며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

    저 괴물을 어떤 식으로 막아야 할지를 말이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즐거웠다.

    지금은 경쟁의 대상이지만, 후에 재혁이 크게 된다면 그 또한 국가대표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의 선수가 되어 세계무대를 뛰게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직은 경쟁 학교의 선수일 뿐인 거지.’

    그러니 다가올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인터넷을 끌려고 하던 중, 새로 올라온 기사를 발견하고 채감독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자신이 지금 제대로 된 기사를 읽은 것인지, 다시 확인하기 위해 기사 제목을 천천히 소리 내 읽었다.

    “전국대회 4강 진출에 성공한 중앙 초등학교 축구부, 부당 선수 선발로 탈락···?”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채감독이 놀란 얼굴로 황급히 해당 기사를 클릭해 읽기 시작했다.

    ***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파앙!

    손에 쥐고 있던 공문을 책상 위로 던지면서 종철이 고함을 질렀고, 그의 옆에서 조용히 바닥에 흩뿌려진 서류를 주섬주섬 모으던 강코치가 머리를 긁적였다.

    “뭐···. 협회에서 그렇다면 그런 거죠.”

    “분명 자정 전에 로스터 보냈었잖아?”

    “보내긴 했는데···. 당시 서버 상태가 안 좋았고, 실제 확인한 시간이 그 다음 날이라고 하니···.”

    강코치가 다 모아놓은 공문을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으면서 말을 끝냈다.

    “재혁이가 추가된 로스터를 받지 못한 협회에서 재혁이를 부정 선수라고 찍어버린다면, 저희야 할 말이 없어지는 거죠.”

    “우리가 로스터를 보낸 시점을 증명하겠다고 한 건? 그에 대한 답변은 왔어?”

    “똑같은 말만 반복하던데요. 중요한 건 서버에 업데이트 된 로스터라고···.”

    “이 새끼들이 진짜! 그런데 이걸 왜 이제 와서 꼬투리를 잡아?”

    쾅!

    종철이 또 한 번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때리자, 강코치가 애써 모아놓은 서류가 다시 허공에 휘날렸고, 서류 더미가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강코치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더니 주섬주섬 그것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모은 서류를 이번엔 계속 품에 안고서 강코치가 말했다.

    “이미 기사로 내보낸 걸 보면 협회에선 무를 생각이 없는 거에요.”

    “그건 알겠는데···. 그보다 대체 왜? 대체 갑자기 왜 지금에 와서 우리를 탈락시키겠다는 거야? 그것도 재혁이를 이유로 들어서?”

    “그야 저도 모르죠. 언제 협회가 하는 행동을 보면서 고개가 끄덕여지던 적이 있으셨습니까? 감독님께서

    “···.”

    “그나마 제지가 이번 대회로 끝나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전혀 다행이지 않아.”

    강코치의 말을 끊으면서 종철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간신히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말을 계속 했다.

    “6학년 학생들한텐 이번 대회가 마지막이었어. 그런데 대회 마무리를 이런 식으로 짓게 하다니···.”

    뿌드득, 이를 갈던 종철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거하게 분노를 토해낸 뒤 외투를 챙겨 입었고, 그런 종철을 향해 강코치가 놀라 물었다.

    “어디 가시게요?”

    “몰라서 물어? 당장 총협으로 가서, 협회장을 만나서 담판을 지어야···!”

    “그런다고 장문구 협회장님이 만나줄 것 같지는 않은데.”

    “이번엔 또 어떤 새끼가···.”

    낯선 목소리에 종철의 입술을 타고 걸죽한 욕설이 또 한 번 새어나오려 했는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물을 발견하고 그가 크흡, 입을 닫았다.

    오랜 만에 보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문틈에 걸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종철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것에 비해, 그의 옆에 같이 서있던 강코치는 상대를 발견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비명을 질렀다.

    “차, 차범수 선수!”

    “여기서도 나를 보고 선수라고 불러주는 친구가 있구만. 허허, 썩 나쁜 기분이 아니군.”

    “다 늙어가지고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벌써 노망이 들 나이야?”

    “어허, 임감독의 그 말투는 여전하구만. 그래서야 제대로 아이들을 가르치겠어? 그것도 초등학생들을 말야.”

    “시끄러워, 자식아.”

    차범수의 말에 퉁명스레 대꾸를 한 종철이 그에게 다가간 뒤 손을 쭉 뻗어 차범수의 손을 맞잡으며 작게 웃더니 물었다.

    “언제 돌아왔어? 당분간 독일에 있을 거 같다며?”

    “그 말을 해준 건 겨울이고, 지금은 여름이 다 끝나가고 있는데?”

    “글쎄다. 난 그저 초등학교 축구부 감독이라 높으신 분의 스케쥴을 다 꿰고 있는 게 아니라서.”

    종철의 뼈가 있는 말에 차범수는 쓴웃음을 흘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무튼 장문구 협회장은 네가 온다고 해도 만나줄 생각이 없을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벌써 다녀오는 길이거든.”

    “네가? 네가 왜?”

    뜻밖의 소식에 종철이 놀란 목소리로 되묻자, 차범수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그의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네가 감독 하고 있는 팀의 8번, 최재혁. 나도 그 꼬마 선수를 눈여겨 지켜보고 있었거든. 이번 제재에 관해 확실히 알아둬야 할 게 있어서 협회에 갔다가 이곳에 온거다.”

    “네가 알아둬야 할 것···? 대체 그게 뭔데?”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터벅, 터벅. 구둣발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차범수가 종철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물었다.

    “최재혁 선수도 이곳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는데, 가능한가?”

    < 23. 시작을 위한 선택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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