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21화 (21/225)

< 21. 이심전심 >

과연 8강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경기는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전반전이 진행되던 25분 동안 공이 쉼 없이 양 팀의 진영을 오가니 어느 누구도 쉽사리 경기장에서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호종초의 감독이 했던 말처럼 비록 에이스는 없었지만 조직력으로 똘똘 뭉친 호종초는 재혁의 발끝에서 시작되는 중앙초의 공세를 꿋꿋하게 막아내다가 기회가 오면 빠르게 전방으로 공을 길게 넘겨 역습을 노렸는데, 평소 같았으면 실점했을 위기들이 몇 번 있었으나 중앙초의 선수들이 끈질기게 공을 따라가 육탄 방어로 어떻게든 골문을 지켜내면서 점수

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또 한 번 호종초의 공격수가 때린 슈팅으로 몸으로 막아낸 뒤, 이를 악물고 허공에 붕 뜬 공을 수비수가 머리로 걷어내면서 바닥을 굴렀다.

“나이스 수비!”

“그런 말을 할 시간에 공이나 쫓아!”

왼쪽 풀백을 보고 있던 문영이 센터백, 고명성의 플레이를 보고 입술을 모았는데, 명성은 오히려 문영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재혁이가 함께 해서 올라올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친구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재혁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까 진다면 나머지 10명의 실력이 모자랐기 때문이야.’

4학년 때부터 축구부에 들어왔던 명성은 매년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는 경험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비록 선배들이 8강까지 올라갔던 역사가 있다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없었을 때의 축구부였으니.

‘올해가 마지막이야.’

중학교에 올라가면 더 이상 축구가 아니라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올해가 최선을 다해 운동에 집중할 수 있는 마지막 해가 되리라.

그래서 오늘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기필코 이번 경기도 이겨서 조금이라도 더 축구를 하고 싶다는 마음에 명성이 흙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자리를 찾아 움직이면서 공을 쫓아 시선을 옮겼고, 이내 눈썹을 구겼다.

‘제기랄. 결국 또 막혔어.’

명성이 머리로 걷어내고 문영이 길게 찼던 공은 호종초의 수비수들 사이에 뚝 떨어졌고, 다시 한 번 공격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호종초의 선수들이 서로를 향해 공을 돌리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호종초의 조직력이 지금까지 상대해온 팀들과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던 명성은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도 일단 어떻게든 막아내면···, 재혁이가 무언가를 해줄거야.’

그러기 위해선 최대한 실점을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간 명성이 양옆의 수비수들을 향해 소리쳤다.

“라인 올려! 맘대로 활동하고, 패스할 수 있는 공간을 주지 마!”

명성의 목소리에 맞춰 명성을 포함한 중앙초의 4백이 한 걸음씩 앞으로 쭉 이동했는데, 그런 수비수들 사이로 누군가 뛰어들었고, 동시에 허공에 붕 뜬 공이 수비수들의 키를 넘어 날아들었다.

상황을 빠르게 읽어낸 명성이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오프사이드.

늦은 패스로 이번 호종초의 공격을 오프사이드 트랩으로 잡아냈다는 확신에 찬 손놀림이었다.

하지만···.

“?!”

부심의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다.

당황한 명성이 뒤늦게 공을 쫓아 움직였으나, 공은 이미 호종초의 공격수 발밑에 떨어진 상황이었고, 골키퍼를 보고 있던 재우가 공격수가 몰고 오는 공을 향해 손을 쭉 뻗으며 몸을 날렸지만···.

철썩!

공은 무심하게도 골키퍼의 장갑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 그대로 골망에 박혔다.

벤치에 앉아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임종철 감독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흔들면서 오프사이드가 아니냐고 소리쳤지만 이미 주심이 휘슬을 불어 골로 인정한 상황.

종철이 억울하다는 듯이 재차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해진 결과가 바뀔리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멍한 얼굴로 자기 진영의 골대 안에서 구르는 공을 멍하니 쳐다보던 고명성이 고개를 떨궜다.

그 뒤로 전반전의 끝을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이어졌는데, 그 휘슬 소리가 명성의 귀에는 마치 중앙초의 패배가 선언되는 소리처럼 들렸다.

오심을 따지기 전에 만약 자신이 조금만 더 신중했다면 실점을 하진 않았을 텐데.

그런 자책이 담긴 마음을 곱씹으면서 터덜터덜 벤치로 돌아가던 중.

짜악!

“아 따가!”

누군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등짝을 친 것에 명성이 놀라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돌렸고, 바로 옆에서 재혁이 발걸음을 맞춰 이동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갑자기 왜 때리냐는 말을 묻기도 전에 재혁이 먼저 명성에게 말했다.

“넌 잘하고 있어. 수비라인을 중앙선이랑 타이트하게 맞춰준 덕에 지금까지 실점하지 않고 있었던 거야. 마지막에 골을 먹은 건 아쉽지만, 심판들의 판단이 그런 거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그치만···.”

“그치만 수비수들이 이렇게 잘해주고 있는데 득점을 하지 못 해 이번 경기에서 진다면 아무래도 내 책임이 크겠지.”

“!”

고명성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자신의 책임이라며 말을 자른 재혁.

그런 재혁이 반대편 손으로 오른쪽 팔에 걸린 주장 완장을 툭툭 치며 웃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고생해주라. 후반전엔 반드시 뒤집을 테니까.”

재혁의 말을 들으며 재혁의 얼굴을 바라보던 명성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명성의 입가에 미소를 확인한 재혁이 친구의 어깨를 토닥이며 벤치로 돌아가자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물병을 입에 물고 바짝 마른 입안을 헹궈주던 재혁이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일단 말을 그렇게 했지만, 지금 상황이 너무 불리하다.’

전반전 점유율을 생각하면 아마 우리 쪽에서 크게 밀리고 있으리라.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대략 7대3.

호종초에서 뛰는 10명의 필드 플레이어가 전방위적으로 펼치는 압박의 정도가 여타 팀들과 다를 정도로 강했으니, 중앙초의 다른 선수들은 허둥거리며 공을 빼앗기기 일쑤였던 것이다.

게다가 수비수들도 공을 뺏으면 걷어내기 급급했던 탓에 제대로 된 공격을 펼칠 기회도 없었다.

지금 이 상태로 가다간 결국 분위기와 흐름에서 밀려 패배할 것이 자명해 보인 탓에 재혁이 애꿎은 운동장 바닥만 스터드로 벅벅 긁고 있었는데, 그런 재혁의 옆에 누군가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물었다.

“네가 뛰는 위치를 바꿔야겠다.”

“특별한 생각이 있으신가요?”

감독인 종철이 다가와 건넨 말에 재혁이 물병을 내려놓으며 되물었고, 임종철 감독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답했다.

“오늘 경기에서만큼은 아마 누구보다 이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날꺼다. 적어도 이대로 지고 싶진 않으니까 변화를 줘야겠지.”

“그래서 뭘 어떻게 바꾸실 생각인 건데요?”

“지금 네가 뛰고 있는 위치가 여기잖아.”

종철이 전술판에서 재혁의 번호인 8번이 적힌 동그란 자석을 손에 쥐고 천천히 이동시키면서 말을 이었다.

“앞으로 무조건 여기까지 내려와서 시작해.”

“여기는···.”

종철이 내려놓은 자석의 위치를 확인한 재혁이 눈썹을 꼬았다.

“포백라인 바로 앞이잖아요? 이건 너무 밑에서 시작하는 게 아닌가요?”

“포백라인 앞이 아니라, 센터백들 사이까지도 내려와도 좋아.”

재혁의 위치가 바뀌면서 전체적으로 자석들의 위치를 조금씩 바뀌는 것을 재혁에게 하나씩 보여주면서 종철이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센터백들에게 빌드업을 위해 패스를 받는다면 무조건 이곳까지 내려와서 받아야 한다. 무조건이야. 예외는 없어. 알겠지?”

“아.”

계속해서 전술판 위로 자석들의 위치가 바뀌는 것을 빤히 바라보던 재혁이 짧게 탄성을 흘리더니 옅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종철이 전술판 위에 보여준 ‘미래’를 보니 후반전은 확실히 전반전과 다른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다들 잘해주고 있다! 이대로만 계속 가자!”

호종초의 감독은 벤치로 돌아온 선수들을 향해 박수를 쳐주면서 크게 웃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활약한 선수들을 한 명씩 호명하면서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특히 중앙초의 8번, 최재혁을 번갈아가며 마크하고 있는 두 선수를 향해 감독은 특별히 더 큰 박수를 쳐주었다.

“계속 그렇게만 해주면 돼. 후반전도 전반전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호흡을 맞춰 주변에 압박을 넣어. 근처에 그 8번이 있으면 중앙초에선 무조건 8번한테 공을 줄 테니까 말이지.”

감독의 말에 특별히 체력이 좋아 오늘 경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부여받은 두 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초에서 센터 서클 근처에서 공을 소유하면 한 명이 공을 쫓고 나머지 한 명은 재혁을 쫓는다. 방향이 반대라면 서로 역할을 바꿔 또 압박을 넣는다.

그런 식으로 둘은 전반전 25분 내내 중앙초가 공을 잡을 때마다 쉽게 흐름을 이어갈 틈을 주지 않았고, 그덕에 호종초의 입장에선 손쉽게 경기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재혁을 강제하는 것이 아닌, 재혁의 주변에서 공이 흐를 틈을 조이는 식으로 전술을 펼친 탓에 중앙초에선 쉽사리 패스의 길을 열 수가 없었으니, 전반전 동안 제대로 된 플레이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공이 어떻게든 재혁에게 자유롭게 가지 않으면 된다.

그런 생각으로 호종초의 감독은 10명의 필드 플레이어들을 재혁을 중심으로 두고 짜 맞췄고, 현재까지 좋은 흐름을 이어갈 수 있었으니, 그의 입술이 자연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이제 앞으로 남은 시간은 25분. 여기서 추가 득점까지 성공해서 4강 진출을 확정 짓겠다.’

선수들이 다시 필드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벤치에서 지켜보면서 감독이 고개를 주억였다.

비록 누구 한 명 특출 나진 않지만, 치열하게 짜 맞춘 전술 훈련이 바로 오늘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중앙초의 벤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곤 쓰게 웃었다.

‘이게 바로 너와 나의 차이다. 축구는 선수 놀음이 아니라 감독들의 머리싸움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겠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벤치에 앉아 있는 중앙초의 감독, 임종철.

올해 운 좋게 8강까지 올라온 것이 결국 특출 난 선수 덕이라는 것이 이번 경기를 통해 증명이 될 것이니, 선수로 같이 활동할 시절에 쌓였던 앙금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떫은 미소를 흘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던 호종초의 감독의 귀로 심판이 휘슬을 부는 소리가 들렸고, 감독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 운동장을 살펴보다가 눈썹을 모았다.

‘중앙초에서 진형에 변화를 줬어?’

지금까지 중앙초가 일관되게 유지했던 진형은 4-3-3.

그 중 중앙에 배정된 세 명의 미드필더의 구성이 일반적인 팀들이 짜놓은 4-3-3과 조금 달랐다.

보통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 명 두면 그 중 한 명에게 빌드업을 요구하는 것과 달리, 중앙초는 기형적이게도 좀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재혁에게 패스의 뿌리를 맡겼는데, 이는 선수의 실력과 팀의 상황에 맞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다시 재정비된 세 명의 미드필더가 이룬 삼각형은 재혁이 홀로 포백 라인을 지키게 되는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평소 보여준 적이 없는 진형을 이루고 있는 중앙초의 선수들을 노려보면서 감독이 잔뜩 찌푸린 미간을 검지로 꾹꾹 눌렀다.

‘임종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니지, 오히려 별 생각이 없는 것일 지도···.’

그저 선수에게 의지하는 축구 밖에 보여줄 수 없는 감독이다.

그런 녀석이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실점을 하고 탈락이 눈앞에 다가오니, 마음이 급해져서 자멸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을 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 감독이 편하게 벤치 등받이에 몸을 받쳤고, 곧 재개된 후반전을 지켜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저 8번을 뒤로 내리니 자연히 진영이 전체적으로 뒤로 물러나 버렸어. 이래서야 제대로 된 공격 시도는 물건너 갔군.’

결국 현재 중앙초에선 역습에 의존하는 플레이로 일관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

하지만 수비수들의 조직력에 자신이 있었던 호종초의 감독은 중앙초 정도의 학교가 펼치는 역습 따위에 당할 것이란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한 압박을 펼쳐 추가점을 뽑아내 승리를 확정지을 것을 목표로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선수들을 다독였다.

“공보다 선수! 공은 놓쳐도 선수는 놓치지 마! 그렇게 계속 압박을 넣는 거다! 페이스를 조금 더 끌어 올려!”

< 21. 이심전심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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