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20화 (20/225)

< 20. 미래에는... >

“양팀 선수들, 집합!”

센터 서클에서 심판이 호각 소리를 내며 선수들을 모았다.

곧 22명의 선수들이 중앙에 모여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양팀 주장들만 남은 뒤 흩어졌고, 선공과 진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주장들도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손을 한 곳에 모은 호종초의 선수들이 힘차게 화이팅을 외치고 자리를 찾아가는 것에 비해 중앙초의 선수들은 재혁을 중심으로 모여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 경기만 이기면 준결승이고, 그 다음까지 이기면 결승이야. 기왕 여기까지 올라온 김에 우승을 목표로 달려봐야 하지 않겠어?”

재혁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동료들을 둘러보며 말했는데, 대부분의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이곤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특히 7번을 달고 있는 김주성의 경우,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재혁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러면 좋겠지만···, 우리가 네 발목을 붙잡고 있는 거 같아서···.”

“내 발목을?”

갑작스런 주성의 말에 재혁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주성을 시작으로 아이들이 하나둘 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게, 그렇잖아. 여기까지 올라온 건 어디까지나 재혁이 네가 축구를 잘해서 올라온 거니까.”

“맞아. 나는 맨날 실수만 해서 뚫리기만 하는데···.”

“나도 재혁이가 주는 패스를 받을 때보다 못 받을 때가 더 많아. 지난 경기에서도 실수해서 실점할 뻔 했다고.”

“지금까지 골문으로 넘겨준 패스들만 다 넣었어도 나는 대회 득점왕 경쟁을 하고 있었을 걸?”

작년까지 주장이었던 주성이 자신감을 잃은 얼굴로 한 소리를 내자, 다른 선수들도 그를 따라 힘없는 목소리로 한 마디씩을 보탰다.

그런 선수들을 한 차례 슥 둘러본 재혁이 턱을 긁적였다.

‘부담감도 그렇지만 슬슬 압박을 느끼고 있나 보네.’

작년까지 그저 즐겁게 축구를 했을 아이들일 터다.

대회에 나왔어도 지금 팀을 운영하고 있는 임감독의 성격을 보면 팀의 성적보다는 아이들이 축구에 흥미를 붙이길 바래왔을 공산이 컸다. 위에서 압박이 들어오기 전까지 성적에 대해 욕심이 크게 없었던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자신이 합류한 이후로 우승이 가시권에 들어오고, 주위에서 아이들에게 하나둘 부담이 가는 이야기들을 해주었을 테니···.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

그렇게 모두가 속에 담아두고 있는 이야기를 모두 꺼낼 때까지 재혁은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서서히 말소리가 잦아들 때 즈음, 재혁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너희들은 나 때문에 팀이 이곳에 있다고 말하는데, 나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고 있어.”

“반대로 생각하다니?”

되묻는 주성을 향해 재혁이 덤덤하지만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팀에 합류할 수 있었고, 그렇게 11명이 되어 함께 경기를 뛰면서 지금 이곳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거야. 막말로 나는 이미 너희들이 뛰고 있던 팀에 뒤늦게 합류했을 뿐이잖아? 오히려 나 때문에 자리를 잃게 된 정우에게 미안하지.”

“!”

“그걸 빼고도 재우가 있어서 골키퍼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문영이, 명성이, 강호, 그리고 동엽이가 있어서 내가 안심하고 미드필드에 설 수 있어. 그리고 내 뒤를 받쳐주는 승옥이랑 진태가 있어서 공을 이어 받아 전방으로 이동할 수 있지.”

재혁에게 이름을 호명 받을 때마다 아이들이 눈동자에 빛을 담아 반짝였다.

마지막에 윙을 포함해 공격수 세 사람의 이름까지 부르며 자신을 제외한 10명의 동료들을 모두 언급한 재혁이 한 차례 그들을 살펴본 뒤 웃었다.

“그러니까 고맙다. 나랑 같이 축구해줘서. 너희들은 내 발목을 붙잡는 존재가 아니라 나랑 함께 공을 차고 있는 동료야.”

“···.”

“물론 지금도 나 때문에 팀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렇게 말하니까 오히려 네가 우리한테 고마워해야겠네, 흐흐.”

머리를 긁적이고 이면서 말을 이어가던 재혁을 향해 주성이 대뜸 목소리를 낸 뒤 말했다.

“네가 물론 좀 잘하긴 하지만, 역시 우리가 모두 함께라 11명이 필드 위에 설 수 있는 거잖아.”

“하긴,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재혁이는 우리가 꼭 필요한 거네? 축구를 계속 하고 싶다면 말야.”

“당연하지. 얘가 나로토처럼 분신술을 쓸 수 있겠냐? 물론 엄청 빨리 뛰면 두 명이 되는 것 같긴 하던데.”

이제야 아이들 사이의 분위기가 크게 누그러든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재혁이 입가에 미소를 뗬고, 그런 재혁을 향해 아이들이 모두 오른손을 던지면서 말했다.

“그럼 우리도 화이팅하고 갈까?”

“기왕 하려면 멋진 걸로 해야지.”

“만화 투피스에서 나왔던 것처럼 외치고 오른손을 위로 번쩍 드는 거 어때?”

“오, 좋다.”

금방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와 어제 본 만화 영화에 대해 재잘거리는 중앙초의 선수들은 센터 서클에 서있던 심판이 얼른 준비하라는 호령에 자기들끼리 고개를 끄덕이더니 화이팅을 외치고 지정된 자리로 달려갔다.

그 중심에 자리를 잡고 선 재혁이 다시 한 번 필드 위에 선 10명의 동료들을 살피곤 생긋 웃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녀석들이 있는가하면, 또 이렇게 순수한 애들도 있는 거지.’

중앙초는 다른 학교와 달리 취미로 재미삼아 축구를 하는 아이들이 많은 학교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따로 프로 팀의 유스로 지정된 중학교로 진학할 생각이 없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오히려 이 사이에 자신과 같은 선수가 있다는 게 어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애들이 원체 착한 탓인지, 같이 어울려 섞이는데 무리가 없었다.

‘물론 다시 생각하면 전생에 내가 결혼만 빨리 했으면 아들 뻘 되는 녀석들이지만 말야.’

그러니까 기특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기특하니까 함께 데리고 가고 싶었다.

결승전까지.

‘그러니까 이번 경기도 전력으로 간다.’

삐이익!

양팀 선수들이 모두 위치에 선 것을 확인한 심판이 호각을 불러 경기의 시작을 알렸고, 발에 힘을 주어 앞으로 내달리는 재혁은 공을 쫓으면서 날카롭게 간 집중력을 경기장 위에 전부 쏟아낼 요량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또 한 가지를 떠올렸다.

‘결승전에 할머니를 초대하려면 오늘도 절대 질 수 없으니까!’

지금 재혁이 운동장 위에서 뛰고 있을 순간에도 자신에 대해 걱정하고 있을 한 분에 대해서 말이다.

***

근방에서 가장 먼저 하루를 시작하고, 어디보다 늦은 시간까지 운영되는 중앙 시장.

그곳 구석에 위치한 조그마한 분식집에 자리를 잡고 앉은 두 여대생들이 시켜놓은 음식들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넌지시 손을 들고 말했다.

“할머니, 저희 튀김 좀 더 주세요.”

“너 더 먹게? 그러다가 살쪄!”

“그치만 이거 진짜 맛있잖아. 우리 조금만 더 먹자. 응? 그리고 오늘만 먹고 다이어트 하자고 했잖아. 그럼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둬야지!”

음식을 더 시키자는 친구가 방금까지 나누던 다이어트 이야기를 꺼내자, 건너편에 앉은 여성이 입술을 구기면서 끄응, 앓는 소리를 냈고, 그런 둘의 이야기를 바깥에서 듣고 있던 재혁의 할머니, 말숙이 갓 튀긴 튀김 한 바구니를 둘 사이에 내려놓으면서 웃으며 말했다.

“예쁜 아가씨들이 먹는 것도 참 복스럽네. 이건 내가 특별히 싸게 줄테니께 맛있게 묵어야.”

“와아! 감사합니다!”

“헤헤, 그러면 할머니가 챙겨주신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다 먹고 가야겠네요. 할머니 음식이 제일 맛있어서 맨날 여기만 온다니까요!”

“다 알아야. 이렇게 이쁜 얼굴들이 자주 오니께 내가 노망이 들어도 까먹지 않을 거여.”

튀김 한 바구니에 기쁜 듯 비명을 지르는 여대생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말숙의 입가에 걸죽한 미소가 걸렸다.

젊은 친구들이 맛있게 음식을 먹는 모습일 보니 지금쯤 밖에서 뛰어 놀고 있을 손자, 손녀 생각이 난 것이다.

체하지 말라고 여대생들에게 물도 한 잔 챙겨준 말숙이 다시 밖으로 나와 떡볶이가 담긴 판을 뒤집개로 슬슬 뒤집고 있을 때, 분식집 주인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아이고 할머니, 정말 죄송해요. 하필 아들놈이 아프다고 연락이 와가지고···.”

“그래서 아는 괜찮고?”

“네. 감기약 먹고 막 잠든 걸 애엄마한테 맡기고 왔습니다. 새벽부터 봐주시느라 고생하셨는데, 더 붙잡게 해가지고 정말 죄송하네요.”

“애가 아프면 가야지. 당연한 걸 가지고 미안하다고 할 거 없으요.”

말숙이 손사래를 치자 남성은 연신 고개를 꾸벅이다가 품에 넣어두고 있던 봉투를 꺼내 말숙에게 건넸다.

“오늘은 특별히 조금 더 챙겨드렸어요. 항상 고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유, 나 같은 놈 써주니 내가 고맙제. 그보다 내가 조금 뺄 게 있는디. 저기 있는 손님들한테 튀김 좀 싸게 주기로 해부려서···.”

“그런 것 정도는 걱정하지 마세요. 오히려 자기 가게처럼 일 해주셔서 고마울 뿐이죠.”

“그래도 남의 것인디···.”

“할머니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더 많으니까 정말로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제부터는 자기가 마무리를 지을 터이니 얼른 가보시라며 말숙은 가게 주인에게 등을 떠밀렸고, 그럼 내일 새벽에 나오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뒤 분식집을 빠져나왔다. 할머니가 밖으로 나가자 여학생들이 높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고, 말숙은 허허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굽었던 허리를 조금이나 펴고 밖으로 빠져나온 말숙은 시장 상인들 몇몇과 인사를 나누면서 내일 보자며 중앙 시장을 떠났고, 골목을 돌고 돌아 한 고물상에 들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할배 있능가?”

“뭐여. 또 왔어?”

밖에서 짜투리들을 모아놓고 있던 고물상 할배가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말숙의 얼굴을 발견한 할배가 혀를 쯧쯧 차더니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젠 써주는 곳도 있다매. 그런디 왜 왔어?”

“내일 모레는 쉬니께 리어카 좀 빌려보려고 왔제.”

“그러다가 허리 나가야. 차라리 반찬 가게에서 일을 해 이 할망구야.”

“그래도 하루 온종일을 쏟으면 이게 더 벌이가 나을 때가 있는 거 알자네. 평소처럼 요놈으로 가져가면 되는 겨?”

구석에 놓여 있던 리어카들 중 하나에 손을 얹으며 말숙이 말하자, 고물상 할배가 또 혀를 찼다.

“그러다가 골병들면 할망구가 더 손해여.”

“그래도 새끼들이 잘 먹고 잘 입으면 내가 아픈 게 더 낫제.”

“···재혁이랑 재희? 요즘 고놈들은 뭐한대? 요즘 얼굴을 못 봤네.”

방학 때면 항상 할머니를 따라와 종종거리며 일을 도와주던 두 강아지들에 대해 언급하자, 고물상 할배가 괜한 그리움에 마른 입술을 쩝쩝였고, 말숙은 고물상을 떠날 채비를 하면서 답했다.

“둘 다 잘 있지. 한 놈은 크면 아마 다시없을 미인이 될거고, 한 놈은 요즘 공 차러 다니느라 바뻐.”

“공? 뭔 공?”

뜻밖의 소식에 할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축구. 요즘 그거 한다구 만날 흙먼지 뒤집어쓰고 다니니 꾀죄죄한디, 그래도 건강한 게 최고아니것어?”

“재혁이 고놈은 머리도 좋은게 공부나 좀 더 할 것이지 갑자기 왜 운동이래? 다치면 우짜려고···.”

“뭐 어뗘. 건강하면 되부럿지. 나중에 그걸로 효도하것다는디, 건강한게 빨빨거리는게 나한티 하는 효도지 뭐여.”

리어카 손잡이에 잔뜩 주름이 지고 잔금이 일어난 손을 올리면서 말숙이 헤실헤실 웃었다.

영락없이 아이들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할머니의 미소.

그런 미소를 고물상 할배에게 보인 말숙은 그렇게 천천히 리어카를 끌고 고물상을 떠나면서 한 마디를 남겼다.

“내가 제대로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두 없는디, 그래도 하고 싶은 거 하면 그걸로 된거여. 지금 내가 좀 고생하면 되니께.”

“그것도 평생 할 수 있는 게 아니여.”

“애들 대학갈 때까진 살아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어. 그럼 다음에 보소.”

달그락, 달그락.

할머니가 끄는 리어카의 고무바퀴가 덜컹이면서 구불지고 높은 언덕길 올랐다.

정처 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언덕길을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할머니의 입술은 한결같이 초승달 같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이 고생의 무게만큼, 손자와 손녀가 할머니를 향해 웃어줄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 20. 미래에는...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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