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9화 (19/225)
  • < 19. 마음가짐 >

    사실 차범수를 만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금이 아닌 과거의 삶에서 청소년 대표로 선출되었을 때.

    국가 대항전에 나가는 선수들에게 힘내라며 응원의 한 마디와 함께 선물로 홍삼 음료를 청소년 대표들에게 주고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자리에서 아주 짧게 악수를 나눈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엔 공적인 자리에서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았던 것이고, 또 지금은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이야기었으니.

    현생의 차범수가 개인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것은 그때와 전혀 다른 이야기 때문일 것이리라.

    그런 점을 떠올리면서 재혁이 애써 자신을 진정시킨 뒤 물었다.

    “그런데 제게 볼 일이 있으신가요?”

    “으음?”

    재혁의 한 마디에 차범수의 두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보통의 아이들은 대부분 조용히 있다가 내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던데, 이 친구는 다르군.’

    재혁이 차범수 본인도 한 때 축구 선수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신기했는데, 이렇게 망설임 없이 바로 대화를 걸어오는 모습이라니.

    아직 신체적으로 전부 발달하지 못해 머리가 두세 개 정도 작은 재혁이 밑에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마주보면서 차범수가 생긋 웃었다.

    ‘축구를 할 때만 당당한 게 아니라, 성격 자체가 똑 부러지는 녀석이었어.’

    차범수는 재혁의 그런 행동 하나, 하나가 전부 마음에 든 것이다.

    어른을 향해 예의는 지키지만, 숨기지 못하고 드러나는 타고난 당당함.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차범수는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숨기지 못하면서 밝은 얼굴로 답했다.

    “사실 특별한 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찾아온 거란다.”

    “저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너는 축구가 재밌니?”

    짧지만 많은 의미가 함축된 질문.

    아무것도 모를 꼬마라면 아주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을 질문이었지만, 재혁의 입술은 멎었고, 그 점을 눈치 챈 차범수는 신중한 얼굴로 이어질 재혁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게 짧지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기다린 차범수는 숨을 죽이고 있다가 천천히 벌어지는 재혁의 입술에 눈을 모았다.

    “재밌지만 그냥 재밌게만 해서는 안 돼요. 축구는 제가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축구를 잘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거니?”

    “돈도 중요하지만, 돈이 성공의 전부는 아니에요.”

    “돈이 성공은 아니다?”

    제법이라는 듯, 그럼 뭐가 더 있는지를 차범수가 물었고, 재혁은 특유의 당당한 어조로 대답하면서 곁에 있는 동생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결국 중요한 건 가족이니까요.”

    “!”

    “동생도, 할머니도. 제가 지켜낼 거에요. 제가 하는 축구로 말예요. 그런 목표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다보면 돈은 당연히 따라오겠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돈은 제 가족만 지켜낼 수 있을 정도면 돼요.”

    재혁의 말을 모두 들은 차범수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비록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재혁의 말에 깊이 공감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재혁의 말을 곱씹어보던 차범수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마음가짐은 이미 훌륭하구나. 돈을 받고 운동을 하는 프로라고 생각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야.”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직 프로가 되려면 멀었죠.”

    “하하하! 그렇다고 너무 조급해 하진 마렴. 너는 이미 프로가 되는 길을 걷고 있으니까 말야. 그저 지금처럼 꾸준히 축구를 하면 돼.”

    그 뒤로 몇 마디의 덕담을 더 던져준 차범수는 이제 돌아가 봐야겠다며 재혁을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재혁과 손을 나눈 뒤 그렇게 등을 돌리고 멀어졌고, 그런 차범수의 뒷모습을 운동장에 우뚝 서서 빤히 바라보고 있던 재혁에게 동생인 재희가 물었다.

    “오빠. 저 아저씨 누구야?”

    “세상에서 축구를 가장 잘하던 걸로 손에 꼽히던 유명한 사람이야.”

    “진짜? 그러면 오빠보다 축구를 더 잘해?”

    동글동글, 순수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묻는 재희를 향해 재혁은 환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당연하지. 말했잖아. 세상에서 축구를 가장 잘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히잉. 나는 우리 오빠가 가장 잘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걱정하지 마.”

    그동안 멈추고 있던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면서 재희와 함께 운동장 밖으로 벗어나기 시작한 재혁이 동생의 손을 잡아주면서 말했다.

    “재희의 생각이 틀리지 않게, 나중에 가면 오빠도 세상에서 누구보다 축구를 잘하는 사람이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

    ***

    재혁과 짧았던 만남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차범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슬쩍 발신자를 확인하니 그의 아들 차진수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가져간 차범수는 평소의 근엄한 모습이 아닌, 부드러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아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했어? 훈련은 다 끝난 거야?”

    [내일 경기가 있으니까 오늘은 컨디션 조절 훈련만 하고 바로 퇴근했죠. 엄마가 저녁 같이 먹자고 하셔서 전 지금 집 앞인데, 아빠는 어디에요?]

    “다 큰 녀석이 아직도 아빠, 엄마가 뭐냐?”

    [아빠가 할머니한테 엄마라고 부르는 거 보고 자란 탓인 걸 누구 탓으로 돌리시려구요?]

    아들의 따끔한 한 마디에 무어라 대꾸할 말을 떠올리지 못한 차범수는 그저 머리칼을 긁적인 뒤 대화를 이었다.

    “나라의 미래가 될 학생들을 좀 보고 왔지.”

    [아, 초등학교 리그요? 벌써 전국대회 기간이었구나.]

    “벌써가 이제 8강이다.”

    [한창 치열할 때네요.]

    항상 이맘때면 누구보다 바쁘게 활동하는 아버지의 일상을 떠올린 차진수가 고개를 주억이더니 차범수에게 물었다.

    [그래서 눈에 띄는 선수는 좀 있던가요? 저도 내년이나 내후년이면 슬슬 은퇴를 준비할 텐데, 저만한 선수는 찾기 힘들죠?]

    “뭐? 큭큭. 이게 요즘 서울 물 좀 먹었다고 농담이 늘었구나.”

    아들의 말에 미소를 되찾은 차범수는 축구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자못 진지한 어조로 대화를 이었다.

    “하지만 네 걱정과는 달리 요즘 어린 선수들은 무섭다. 덕분에 미래가 기대될 정도야.”

    [하긴, 벌써부터 바르셀로나며 영국에 나가는 선수들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요즘은 국내에도 유망한 선수들이 많다던데, 누구 특별히 눈이 가던 아이가 있던가요?]

    “지금 말해주지 않아도 언젠가 너도 알게 될 꼬마가 하나 있긴 하지. 마침 오늘 그 친구를 만나보고 오는 길이거든.”

    [호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궁금해지네요. 이따가 저랑 오랜만에 이야기 좀 하시죠.]

    “싫다, 이놈아. 이게 이제는 내 취미 생활까지 건들려고 하네.”

    에둘러 툴툴거렸지만, 차범수는 이내 밝게 웃으면서 한 마디를 더했다.

    “하지만 정말 머지않아 빛이 날 아이야. 지금 말해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거다.”

    [흐음. 뭐, 그렇게까지 혼자만 알고 싶어 하시면 그렇게 하세요. 어차피 언제고 다 기사로 나오겠지만 말예요.]

    “사람이 기다리는 재미도 느낄 줄 알아야지.”

    [아 맞다. 기다리라는 말 때문에 생각났네요. 엄마가 돌아오시는 길에 대파랑 양파 좀 사오래요. 그래서 전화했던 거였어요.]

    “뭐? 그걸 내가 왜···.”

    갑자기 전환된 화제에 차범수가 당황했으나, 아들은 어깨를 으쓱이며 짧은 한 마디로 대답한 뒤 통화를 끝냈다.

    [전 몰라요. 아무튼 전 엄마가 부탁한 거 전했어요. 그럼 끊습니다. 이따가 뵈요. 대파랑 양파도 같이요.]

    “···.”

    그 뒤로 곧장 뚝 끊어진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던 차범수는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더니 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근처 슈퍼로 향했다.

    한 때 세계 최고의 선수, 현재 국민들에게 존경 받는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결국 그도 사람이었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가장이었으니.

    이제는 그의 양손에 축구공 보다 마트의 비닐봉지들이 들리는 날들이 더 많았으나, 이 또한 시대가 흘렀다는 자연스러운 증거일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 꼬마의 시대는 언제쯤 찾아오려나?’

    바스락거리는 비닐 봉투를 양손에 쥐고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를 따라 걸으면서 차범수가 기대에 찬 상상을 떠올렸다.

    미래에 세계무대를 호령하고 있는 한국 선수들, 그리고 최재혁의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그런 미래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중앙초의 8강전 경기였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중앙초를 홈에서 맞이한 호종 초등학교의 감독이 그의 앞에 모여 있는 기자들을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초현초의 장감독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고. 비록 당시 경기에서는 중앙초가 이겼지만, 저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오늘 경기를 통해 선수 혼자 하는 축구로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호종초의 감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자들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 말씀은 최재혁 선수에 대한 대비가 확실하다는 말씀이신가요?”

    “그 전에 저희 팀은 다른 팀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확실히 말씀드려야겠죠.”

    기자의 말에 답변하면서 슬쩍 선수들을 살핀 호종초의 감독이 말을 계속 했다.

    “저희 팀은 8강전을 준비하고 있는 다른 학교들과 다르게 에이스라 부를만한 선수가 없습니다. 중앙초의 최재혁, 영동초의 미래 트리오, 그 외 다른 학교들도 현재 팀을 리드하고 있는 번득이는 선수들이 한두 명씩 있지만, 저희 학교는 팀의 구성원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여기까지 온 겁니다.”

    말을 이어가는 내내, 양손을 불끈 쥔 호종초의 감독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본 뒤 멈췄던 입술을 움직였다.

    “중앙초의 최재혁 선수가 분명 뛰어난 선수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축구는 골키퍼가 필요하고, 공격을 막아줄 수비수가 필요하며, 중간을 이어줄 미드필더, 그리고 마무리를 지어줄 공격수인 11명이 하는 운동이라는 것을 중앙초의 임감독에게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려주겠습니다. 이상입니다.”

    “감독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전술적인 부분에서 따로 준비하신 것이 무엇인지···!”

    기자들이 등을 돌리고 멀어지는 호종초의 감독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는 사람들의 부름에도 묵묵히 운동장으로 걸어 나가 몸을 풀고 있던 선수들에게 합류했다.

    그런 호종초의 모습을 건너편에서 빤히 바라보던 종철이 혀를 찼고, 강코치가 그를 향해 말을 붙였다.

    “누구 하나 튀는 사람은 없지만 팀이라는 매개체로 엮인 하나라는데요?”

    “지랄.”

    강코치의 말에 종철이 툭하고 한 마디를 뱉은 뒤 잔뜩 구겨진 얼굴로 뒷말을 붙였다.

    “호종초에서 가장 튀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바로 저 놈이야. 하여간 선수 때도 그랬지만 감독이 되어서도 자기가 제일 튀어 보이려고 삽질하는 건 그대로구만.”

    “하지만 팀에 튀는 선수가 없다는 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 않아요?”

    “호종초도 8강까지 올라온 팀이야. 그런 팀의 선수들의 실력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라고 밖에 난 듣지 못했어. 부디 저 말이 진심이 아니길 빌 뿐이다.”

    “흐음.”

    종철에 말에 강코치는 끌어당긴 턱을 주억였고, 종철은 계속해서 혼잣말을 투덜거렸다.

    뭐가 팀이고, 뭐가 에이스냐, 결국 자기 잘났다고 말하고 싶은 걸 빙 돌렸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런 종철을 옆에서 빤히 바라보던 강코치가 넌지시 한 마디를 둘 사이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은 한창 선수로 활약할 때 시도 때도 없이 치고 박으셨죠?”

    “저 녀석의 입이 방정이었으니까. 오히려 그 정도로 넘겼던 젊은 시절의 내가 대견하다.”

    “과연 물과 기름. 적어도 저는 커피 정도는 되는 것 같으니 다행이네요.”

    “뭐? 그거 무슨 의미야?”

    “딱히 별로 큰 의미는 없습니다. 그저 혼나지 않으려면 확실히 이겨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당연한 말이잖아.”

    강코치의 말을 종철이 중간에 툭 자르고 말했다.

    “이 무대 자체가 학생들과 선수들을 위한 곳이야. 우리 역할은 그런 선수들이 가장 밝은 빛을 낼 수 있게 돕는 거라고.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이겨야지.”

    그리곤 매서운 눈빛으로 호종초의 감독이 선수들을 앞에 두고 일장연설을 펼치고 있는 모습을 노려보더니 등을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자. 애들 기다린다.”

    < 19. 마음가짐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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