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월드클래스가 본 잠재력 >
“매 주 따로 칼럼까지 내주시면서 대회를 정리해주시니, 저로서는 덕분에 재밌게 읽을 글이 하나 더 생겨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또, 유의 깊게 살피게 된 선수도 한 명 알게 되었고요.”
“호오, 이기자 덕분에 알게 된 선수가 있으시다니. 그건 또 새로운 정보로군요. 혹시 그 친구가 내년 차범수 축구상의 수상자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까?”
대한민국 유소년들이 보다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차범수가 자신의 이름을 따 제정한 상에 대해 김기자가 언급하자, 차범수는 그저 한결같은 미소로 응대하며 답했다.
“그거야 계속 두고 볼 일이지요. 대회는 이제 시작되었으니까 말입니다.”
“혹 모르니 그 선수의 이름이라도···.”
“최재혁 선수가 아닌가요?”
지금까지 옆에서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던 수습기자의 말을 들은 차범수가 놀란 듯 크게 떠진 눈으로 수습기자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어떻게 알고 계시죠?”
“이상민 기자님이 최재혁 선수를 취재하러 나가셨을 때 제가 몇 번 따라간 적이 있거든요.”
“호오. 최재혁 선수를 실제로 만나봤단 말입니까? 어떤 선수였습니까? 전 아직까지 동영상으로밖에 본 적이 없거든요.”
수습기자의 말에 흥미를 나타낸 차범수가 계속해서 물었고, 수습기자는 자신이 경험한 재혁에 대해 짧게 설명해주었다.
“나이답지 않은 선수였어요. 초등학생이면서 단어 선택에도 생각이 깊었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도 조심할 줄 아는 선수였죠. 만나서 진행한 인터뷰가 아니라 전화나 이메일을 통해 인터뷰를 진행했었다면 초등학생이라는 걸 못 믿을 정도였어요.”
“호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궁금해지는군요. 전 그동안 최재혁 선수의 플레이만 보아온 지라 실제 성격이라던가, 이런 부분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상태거든요.”
“동영상도 이상민 기자님이 직접 편집하신 걸 보셨겠죠? 나중엔 한 번 직접 경기장에 가보세요. 실제로 보여주는 움직임이 더 좋아요.”
“꼭 경기장을 방문해 봐야겠군요. 하하, 정말 기대가 됩니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차범수와 수습기자가 신이 난 듯 대화를 나누는 중간에 끼어든 김기자가 차범수를 향해 물었다.
“최재혁이라는 선수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초등학교 리그에 출전 중이면 아직 어린 선수가 아닌가요?”
“아무리 어린 선수라도 공이 발에 닿는 순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자질을 숨기지 못하고 뽐내기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생각했을 때 최재혁, 그 선수는 장차 보통 선수가 되진 않을 거라고 봅니다.”
“보통 선수가 아니라면?”
“월드 클래스.”
짧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를 읊조리면서 차범수가 웃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잠재력이라면 장차 세계적인 선수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전 생각합니다.”
***
중앙초의 조별 예선 최종 결과는 4승 1무 1패.
최종 점수 13점으로 조 1위를 달성하면서 전국 64강을 확정지었다.
당연히 조 선두로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영동초가 2위를 달성한 것에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대체 어떻게 중앙초가 이런 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는지, 신기해하는 부류가 하나였고.
“우리 첫 상대가 중앙초라고? 영동초에서 로테이션을 너무 빡세게 돌렸나? 무슨 짓을 하다가 2위로 내려앉았데?”
중앙초라는 이름을 발견하기 무섭게 일단 미소를 보이며 승리를 예견하는 부류가 또 하나였다.
64강 첫 경기를 위해 중앙 초등학교의 운동장에 도착한 초현 초등학교의 감독은 영동초의 채감독이 이번에 큰 실수를 했다면서 절레절레 고개를 젓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아직 64강 경기일 뿐인데 무슨 매스컴에서 벌써 취재를 와있어?”
원정 버스에서 내리면서 초현초의 감독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64강부터는 협회 측에서 따로 경기를 녹화하기 위해 미디어 팀을 파견하기는 하지만, 오늘처럼 방송국에서까지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던 적은 그가 감독을 맡아온 10여 년간 처음 보는 풍경이었던 것이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아리송한 상황에 초현초의 감독은 연신 입술을 비죽였으나, 일단은 경기가 우선이었으니 선수들에게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가 몸을 풀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원정석 벤치로 터덜터덜 걸어가던 중.
“장감독님!”
“응?”
장감독이 고개를 돌리자 마이크를 손에 쥔 일단의 기자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고, 곧 그의 앞에 선 기자들은 그를 향해 얼른 질문을 던졌다.
“중앙초를 첫 상대로 맞이하게 되셨는데, 대비 훈련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경기 전 인터뷰라니.
계속해서 처음 겪는 일들이 벌어졌지만, 장감독은 나름 침착하게 대응했다.
“평소대로 준비했습니다. 아직 64강이고, 특별히 무언가를 준비하기엔 이르다는 것이 제 생각이거든요. 그저 운동장 위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축구를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최재혁 선수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소리군요.”
“최재혁 선수요?”
기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을 듣고 기억을 더듬던 장감독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이었다.
“아아, 중앙초의 8번 선수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기록상으로 꽤 좋은 활약을 보여준 선수 같더군요. 지금까지 출전한 6경기에서 모두 골을 넣고 있던가요?”
“네. 6경기 연속 득점 행진을 이어가고 있죠. 그에 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으셨습니까?”
연신 최재혁에 대해 묻는 기자를 앞에 두고 장감독은 짧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훗, 나름 멋지다고 생각되는 미소를 흘리면서 말했다.
“기록상으로 최재혁 선수가 좋은 선수임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축구는 11명의 선수들이 하나의 팀을 이루는 스포츠죠. 저희가 추구하는 축구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드리는 자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네요. 역시 채감독님과 같은 대학 출신이라 어느 정도 대처법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신 건가요?”
“영동초의 채감독이요? 하하. 그 친구와는 연락을 해도 전술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나누질 않아요. 하물며 경기에 관한 정보 공유라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 뒤로 짧게 장감독과 몇 번의 질답을 더 주고받던 기자들은 인터뷰 감사하다며 미디어 존으로 돌아갔고, 원래 목적지였던 원정석 벤치로 돌아온 장감독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익숙한 목소리를 스피커를 통해 들은 장감독이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어이, 채감독. 어쩌다가 예선 2위로 나앉았어?”
[지금 경기 준비 중 아니야? 그런데 전화할 틈이 있어?]
전화기 속 상대, 채감독은 장감독의 목소리를 듣기 무섭게 경기에 대해 물었고, 그런 채감독을 향해 장감독은 여유를 부리면서 답했다.
“아직 시작하려면 1시간은 남았으니까 친구랑 통화할 시간 정도는 있지.”
[그래? 나라면 다른 누구랑 전화할 생각 따위는 전혀 못 할텐데 말야. 다른 누구도 아니고 중앙초를 상대로 두고 있다면 말이지.]
“너도 그 소리냐?”
기자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 채감독을 향해 장감독이 혀를 찼다.
“너도 그 최재혁인가 하는 걔 이야기 하려고 하는 거지? 기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너까지 축구를 선수 혼자 하는 듯한 이야기를···.”
[걔는 혼자 해.]
“뭐?”
중간에 자신의 말이 잘린 탓에 장감독이 놀라 되물었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장감독을 향해 채감독이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걔 혼자서 말도 안 되는 축구를 하는 거지. 필드 위에 올라가 있는 다른 21명을 바보로 보이게 만들 정도로 말야.]
“혼자 축구를 한다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너 올해 성적도 적당히 작년 수준 정도만 유지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러면 딱히 목이 잘릴 위험은 없으니까.]
뜨끔, 채감독이 일침을 날린 것에 장감독이 목을 가다듬었고, 헛기침을 뱉고 있는 친구를 향해 채감독이 진심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안일한 생각하고 있었다면 넌 올해도 64강에서 탈락이다. 앞으로 1시간 남았으니까, 지금이라도 최재혁에 대한 동영상부터 찾아봐. 뭐, 1시간 안에 대처법이 마련될 리는 없겠지만 말이지. 그럼 끊는다. 나도 이제 슬슬 경기장에 가봐야 해.]
“야, 야! 채용우! 하, 이자식. 또 지 할 말만 하고 끊어버렸네.”
애꿎은 휴대폰 스크린만 노려보던 장감독은 쯧쯧 혀를 차더니 벤치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았다.
그렇게 멍하니 자신이 지도하는 선수들이 운동장에서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건너편에서 공을 가지고 몸을 풀고 있는 중앙초 선수들을 발견하고 장감독이 눈을 좁혔다.
그 사이에서 홀로 리프팅을 하고 있는 8번, 최재혁이 곧 그의 눈동자에 박히듯 들어왔다.
‘흐음. 리프팅은 좀 하네.’
부드러운 발짓으로 공의 밑둥을 퉁퉁 건드리며 몸을 풀고 있는 재혁을 보면서 제법 또래에 비해 발재간이 좋은 선수인가 보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파앙!
“···!”
재혁이 리프팅을 하고 있던 공을 일순 무릎께로 띄우더니 바닥에 공이 떨어지기 전에 하프 발리 슈팅을 시도했다.
누구든 연습 삼아 한 번쯤은 시도해볼만한 행동이었지만, 그 결과를 지켜본 장감독은 지금 자신이 제대로 본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두 눈을 비볐다.
“고, 골대 구석으로 정확하게···! 아니, 그보다 방금 그 궤적은···?!”
지금 자신이 본 게 진짜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연습이라곤 하지만 그 연습의 배경이 노력이고, 그게 곧 실력임을 생각하면 지금 최재혁이란 꼬마가 보여준 슈팅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장감독이 얼른 품에 넣었던 휴대폰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동영상들이 모여 있는 웹사이트에 접속해 최재혁이라는 이름에 초등학생이라는 키워드를 추가해 검색했다.
몇 개 뜨지 않는 동영상들 중 누군가 업로드한 최재혁의 실제 플레이 볼터치 영상을 찾을 수 있었던 장감독은 얼른 검지로 영상을 누르고 로딩이 끝나길 기다렸다.
대략 10분간 재생되었던 영상이 끝나기 무섭게 턱을 괴고 심각한 얼굴로 휴대폰을 노려보던 장감독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채용우, 망할 새끼. 덕분에 진짜로 64강에서 탈락하게 생겼네.”
슈팅이 문제가 아니었다.
채감독이 했던 말.
중앙초의 8번은 혼자서 다른 축구를 한다는 그 말.
그 말의 의미를 영상을 통해 바로 확인할 수 있었던 장감독이 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
“후우, 하아.”
진영을 모두 나누고 필드 위에 선 재혁이 호흡을 골랐다.
그의 머릿속으로 회귀한 이후 지금까지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할머니와 동생을 본 날, 공을 차게 된 날, 축구를 하게 된 날. 그리고 바로 오늘.
‘전국 대회 64강. 어쩌면 진짜 내 축구 인생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 바로 오늘 일거야.’
힐끗, 경기장 바깥을 살피자 재혁의 눈에 카메라와 촬영 기기들을 설치하고 심판의 호각 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 오늘 경기를 보러 온 미디어 팀들이었다.
이제는 끝이 난 예선이 아닌 마침내 시작된 본선을 보러 온 사람들 말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센터 서클을 바라보면서 재혁이 가라앉은 눈동자로 초현초 선수들이 밟고 있는 공을 노려보았다.
검고 하얀 축구공.
저 공을 이용해 세상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알릴 것이다.
자신의 이름, 최재혁이라는 세 글자를 말이다. 그리고 기필코 이번 생에는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이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각오를 다지던 중 마침내 심판이 호각을 입에 물고 바람을 불었고, 날카로운 휘슬 소리와 함께 64강 첫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 16. 월드클래스가 본 잠재력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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