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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미드필더-15화 (15/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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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팀을 위해선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었다고 혀를 차면서 공간을 찾아 이동하던 중, 공을 몰고 드리블을 하던 동료가 민기를 향해 패스를 건넸고, 가벼운 터치로 공을 받은 민기가 전방을 살피다가 눈앞에 찾아온 상대를 발견하고 눈을 얇게 좁혔다.

    ‘최재혁.’

    어느날 갑자기 등장해서 자신을 바보로 만들더니 이제는 온갖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기대주.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저 방해물에 눈엣가시 같은 놈일 뿐이었다.

    수비를 하려고 자신에게 바짝 따라붙는 재혁을 곁눈으로 흘겨 살피던 민기가 은근슬쩍 팔을 올렸다.

    어깨 싸움을 걸어오면 그대로 몸을 부딪친 후, 팔꿈치를 사용해 놈의 명치를 찍어 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공을 몰고 이동하던 중 마침내 재혁이 민기의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부딪쳤고, 동시에 민기가 드리블 방향을 틀면서 팔을 크게 휘둘렀다.

    남들이 본다면 방향 전환을 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팔이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말이다.

    곧 쿵 소리와 함께 쓰러질 재혁을 상상하던 민기는···.

    “?!”

    재혁이 오른손을 뻗어 자신의 팔과 몸을 엉겨 붙게 만드는 것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이미 그런 짓거리를 할 거라곤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청소년 대표로 선출이 되었을 때에도 재혁의 신체 조건은 남들에 비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중앙에서 몸싸움에서 빌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손을 쓰는 것이 능숙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손놀림 정도는, 아니. 이보다 더한 손장난을 상대해본 경험이 수두룩했던 재혁은 민기와의 몸싸움을 영리하게 이끌었고, 동시에 발을 뻗어 민기의 발밑에 있던 공을 건드리는 것까지 성공했다.

    “이 새끼가!”

    공이 자신의 제어 권을 떠나자 민기가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면서 멀어지는 공의 뒤를 쫓았으나, 그보다 먼저 주인을 잃은 공을 소유한 사람이 있었다.

    중앙초의 붉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8번, 최재혁.

    재혁은 공을 한 번 길게 치고 난 후 재빨리 공을 따라 이동하면서 빠른 속도로 드리블을 치기 시작했고, 그런 재혁의 뒤를 쫓으면서 민기가 이를 갈았다.

    바닥을 구르고 있어야 할 자식이 공을 뺏더니 반격을 노리고 있다니.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내가 다시 보내주마!’

    독기를 잔뜩 품은 눈동자로 재혁의 뒤꽁무니를 쫓아 달리던 민기가 예의 냉기가 서린 미소를 얼굴에 띠면서 그대로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확실히 보내준다.

    ‘경기장이 아닌, 응원 벤치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쭉 뻗은 스터드로 태클을 날리던 중···.

    “···?!”

    갑자기 눈앞으로 시꺼먼 것이 드리워지더니 귀로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뻐억!

    “크악!”

    삐빅! 삐이익!

    민기의 고통에 찬 비명 소리와 함께 주심의 다급한 휘슬 소리가 울리면서 경기가 중단되었다.

    먼지 구름 위로 재혁이 누워있었고···.

    “끄으윽, 흐아악!”

    재혁의 밑으로는 얼굴을 가리고 잔뜩 웅크린 몸으로 바닥을 뒹굴고 있는 민기가 누워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주심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진행 요원들을 불렀다.

    “응급팀! 얼른 들어와서 애 상태 좀 확인해봐!”

    “가고 있습니다!”

    “흐으윽, 허어억···.”

    “어이, 4번! 계속 숨 셔! 깊게 숨을 쉬라고!”

    “수, 숨을··· 쉴 수가···.”

    “이거 호흡 곤란까지 올 정도면 여기선 해결이 안 되겠는데요. 응급차를 불러야 될 거 같습니다.”

    바닥을 구르고 있는 민기를 앞에 두고 주심과 진행 요원들이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다가 의견을 종합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는 일단 잠시 중지.

    선수의 건강을 위해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들 것에 실려 터치라인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민기를 먼눈으로 바라보던 재혁이 바닥에 침을 뱉었고, 재혁의 침에 피가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한 주심이 놀라 재혁에게 물었다.

    “8번, 넌 괜찮나?”

    “입술이 터진 정도에요. 전 괜찮아요.”

    “후우, 그나마 다행이군. 사실 위험했던 건 너였는데 말야.”

    “운이 좋았죠.”

    주심의 걱정에 애써 웃으며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둘러대고 자리에서 일어난 재혁은 방금 상황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털었다.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공을 뺏고 드리블을 치는 순간 뒤에서 민기가 따라온다는 것을 바로 감지한 재혁은 그가 태클을 하는 순간만을 노리고 있다가 타이밍에 맞춰 같이 미끄러졌고, 머리로는 눈두덩이를, 팔꿈치로는 놈의 갈비 쪽을 정확히 때리고 바닥을 같이 굴렀던 것이다.

    어떻게 보아도 태클에 당해 같이 뒹구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니, 두말할 여지가 없는 민기의 파울.

    재혁으로서는 피반칙도 얻고, 거치적거리는 상대까지 보낼 수 있었으니 입술이 조금 터진 것 정도는 웃으면서 감내할 수 있었다.

    ‘당분간은 푹 쉬어야 할 거다.’

    들 것 위에서 이제는 응급차에 실려서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는 민기를 보면서 재혁이 혀를 찼다.

    체중에 실려 눌렸으니 아무리 못해도 뼈에 금이 갔을 터다.

    몇 주, 혹은 한 달 이상은 푹 쉬어야 할 것이니, 그동안 인격 수양이라도 하고 있기를 바라면서 재혁이 물로 입을 헹궜고, 종철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정말 다친 곳 없는 거지?”

    “저야 멀쩡하다니까요.”

    “그럼 다행이고. 후우,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이마를 훔치고 있는 종철을 살핀 재혁이 물통을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이번 경기도 이기면 다음 라운드 진출은 확정이죠?”

    “4경기 연승이니까 우리는 12점으로 다음 라운드 진출뿐만 아니라 예선을 조 1위로 통과하게 되는 거야.”

    “그럼 다음 경기부터는 조금은 쉴 수 있겠네요.”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경기장 위로 올라온 재혁이 공이 멈춘 자리 위에 섰다.

    실려나간 선수가 민기였어도, 일단은 태클을 시도한 민기의 파울이었으니 프리킥은 당연히 중앙초의 것으로 주어진 것이다.

    영동초에서 선수 교체를 하고 벽을 세우고 있는 동안, 재혁은 골대와의 거리와 프리킥을 차는 위치를 확인하면서 발목을 풀었다.

    골대와의 거리는 대략 25미터.

    위치는 패널티 아크 왼쪽.

    후우, 하아.

    깊게 삼켰다가 서서히 내뱉은 심호흡 뒤에 주심이 휘슬을 불었고, 한 발자국씩 공을 향해 발을 내딛으면서 재혁이 눈동자를 빛냈다.

    ‘네가 만들어준 기회는 내가 아주 용하게 쓰도록 하마!’

    뻐엉!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공의 밑둥을 정확하게 때린 재혁의 슈팅이 그의 발끝을 떠나 허공에 유려한 반원을 그렸고.

    철썩!

    벽을 지나치고 골키퍼의 장갑까지 피해낸 공은 골대 오른쪽 구석을 향해 빨려 들어가면서 중앙초의 역전을 알렸다.

    ***

    “후우, 떨리네요.”

    “네가 왜 떨어? 우린 인터뷰 취재차 온 건데.”

    한국 스포츠 미디어에서 취재를 나와 카페에 앉아있는 두 사람.

    그 중 수습기자가 손을 모으고 호흡을 고르자,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정식 기자가 그를 향해 물었고, 수습기자는 급격히 높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지만 전설을 만나는 거잖아요? 대한민국을 넘어 역대 아시아 최고의 축구 영웅! 다시없을 월드 클래스! 그런 분을 만나는데 어떻게 안 떨려요?”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얼굴에 홍조까지 띤 수습기자를 보면서 정식 기자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야, 커피 쏟겠다. 가만히 좀 말해. 그 분이 현역으로 활약할 때 넌 태어나지도 않았잖아.”

    “아무튼 축구를 좋아한다면 다 아는 전설 같은 분이잖아요! 전 어젯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이거 소개팅 아니다.”

    쯧쯧, 검지를 곧게 세워 좌우로 까닥이면서 정식 기자가 근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린 기자야. 너도 비록 지금은 수습이지만 언제고 정식 기자가 될 거잖아? 기자란 분야에 상관없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확실히 관철시킬 줄 알아야 하고···.”

    “어허허, 김기자님. 오랜 만인 것 같군요. 제가 좀 늦었나요?”

    “아! 오셨습니까, 차범수 해설위원님! 하하, 늦다니요! 역시 세월이 지나도 정확한 시간 개념은 변치 않으시군요!”

    “···.”

    분야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신념을 뭐?

    수습기자는 방금까지 김기자가 일러준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뚱한 표정을 지었고, 김기자는 애써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그럼 해설위원님, 그럼 일단 마실 것부터 준비할까요?”

    “이거, 맨날 얻어먹기만 해서야. 제가 한 번쯤은 사드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보다 해설위원이라니. 너무 낯간지럽군요.”

    “아닙니다. 내년에 있을 2014년 월드컵에서 특별 해설을 맡으실 예정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불러드려야지요. 하하하! 그보다 흔쾌히 오늘 인터뷰를 허락해주셨으니, 당연히 음료는 저희가 대접하는 게 맞습니다.”

    지갑을 꺼내려는 차범수를 향해 양손을 내저은 뒤 김기자가 수습기자에게 눈짓을 주었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 수습기자는 차범수에게 어떤 것으로 준비해 드릴지를 물었다.

    차범수의 생과일 주스가 좋겠다는 말에 얼른 카운터로 향한 수습기자는 곧 손에 과일 주스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어느 정도 가벼운 대화로 분위기를 풀어놓은 김기자가 서서히 본론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차범수 해설위원님께선 이번 월드컵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일단 예선전이 진행 중인데, 이야기가 많죠?”

    “참 힘겨운 상황이죠. 감독이 갑자기 바뀌어서 대표팀 분위기가 어수선했지만,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모두 자기 자리를 잘 지켜주고 있으니 아직까진 무난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선 일정이 모두 끝난 게 아니니까요.”

    내년에 브라질에서 열리게 될 월드컵.

    오늘 이 카페에서 차범수의 인터뷰를 진행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그에 관한 내용 때문이었던 것이다.

    경기력을 이유로 전 감독이 경질되고, 현재 감독이 대표 팀을 맡은 상황에서 대표 팀은 꾸역꾸역 승점을 쌓아나가고는 있었으나, 역시 해결되지 않은 불안 요소들을 여전히 끌어안고 있는 상황임은 달라진 게 없었다.

    “현재 대표 팀을 맡아주고 계신 조감독님께선 최종 예선까지만 팀을 인솔하고 바로 자리에서 내려오겠다고 말씀하셨죠. 일부 사람들은 스스로 시한부 감독을 자처한 것이 혹 독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깊은데요. 차범수 해설위원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일단 어려운 상황에 감독직을 맡아주신 조감독님께 한국 축구를 응원하는 한 사람으로서 감사하다는 말을 드려야겠죠. 하지만 역시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저희가 기대할 수 있는 일은 협회에서 조감독님께서 벌어준 시간 내에 적당한 인물을 선정하는 것 정도겠지요.”

    “그러면 그 뒤로···.”

    녹음기를 사이에 두고 진행되는 인터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김기자의 이따금 날카로운 질문에 차범수 해설위원은 솔직한 자신의 심경을 특유의 부드러운 어조로 풀어내 답했고, 두 사람의 사이에서 수습기자는 열심히 노트를 적었다.

    그렇게 대략 3시간 정도 이어진 인터뷰는 해 질 녘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오늘 시간을 내주어 감사하다고 김기자가 고개를 꾸벅였고, 차범수는 오랜 만에 축구 이야기를 원 없이 했다며 기쁘게 웃으면서 악수를 건넸다.

    가볍게 손을 나눈 후 카페 밖으로 빠져 나간 뒤 가벼운 대화를 더 나누던 중, 김기자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차범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전국대회 64강 대진표가 완성되었던가요?”

    “하하. 맞습니다. 바로 어제 완성되었죠. 김기자님께서 유소년 쪽에도 관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군요.”

    평소 차범수 해설위원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부분이 유소년과 관련된 일이었는데, 김기자가 그에 관해 언급하자 차범수가 환히 웃으면서 답했고, 김기자는 그런 차범수를 따라 웃으면서 대화를 이었다.

    “아무래도 동료 기자가 요즘 그쪽에 꽂힌 것 같더라고요. 바로 건너편 자리에 있는 친구다보니 자연히 눈길이 가게 되더군요.”

    “한국 스포츠 미디어의 동료 기자 분들 중 초등학교 리그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면···, 이상민 기자님이시겠군요.”

    “어, 이기자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모를 수가 있나요?”

    김기자가 되묻는 것에 차범수는 빙그레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 15. 주고받기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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