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4화 (14/225)

< 14. 진심? >

벌컥, 벌컥.

처음 몇 모금은 삼키고, 나중에 들이킨 물은 그저 입을 헹구는 용도로만 사용한 뒤 뱉어낸 재혁이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다리를 쭉 펼치고 전반전을 치르는 동안 혹사한 근육들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을 했다.

약간 뻐근한 감각이 느껴지는 것이, 확실히 지금까지 뛰었던 경기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체력을 소모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눈을 감고 전반전에 있었던 내용을 복기해보고 있는 재혁의 옆으로 종철이 다가왔다.

“재혁아. 괜찮겠냐? 오늘 오버 페이스하는 느낌인데.”

지난 3경기에서 보여주었던 모습들과는 전혀 다른 플레이 스타일로 경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재혁을 보면서 종철이 물었고, 그런 종철을 향해 고개를 든 재혁은 가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25분이니까요. 연장전이 없어서 다행이죠.”

“그래? 그렇다면 적어도 후반전까지는 확실히 뛸 수 있다는 말이군.”

재혁의 한 마디로 대충 그의 몸상태를 유추한 종철이 턱을 쓸더니 슬쩍 자세를 숙이면서 말을 이었다.

“항상 말했듯이, 난 매 경기 이기고 싶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지고 싶어서 경기를 뛰는 선수가 있을 리 없잖아요?”

곧바로 답하고, 오히려 되물어오는 재혁을 살핀 종철은 씨익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감독이 이기고 싶어하는 만큼, 선수도 당연히 같은 심정이겠지. 그래서 전반전 내내 고민했다. 지금까지 경기 흐름을 보니 결국 이기려면 한 가지 방법 밖에는 떠오는 게 없었으니까.”

“한 가지 방법이요?”

근육을 넓게 펼쳐주던 스트레칭을 끝내고 재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되묻는 재혁을 향해 종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후 답했다.

“네가 맘대로 날뛸 수 있게 판을 짜 줄테니, 한 번 놀다 와봐.”

***

“후반전도 비슷한 전술이라.”

원정석 벤치를 떠나 운동장 위로 복귀하면서 호준이 중얼거렸고, 그의 말소리를 들은 박민기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 그를 향해 물었다.

“목소리가 왜 그래? 경기 지고 싶어?”

“지고 싶어서 뛰는 선수가 어디 있냐? 그냥 조금 답답해서 그러는 거지.”

“답답?”

무슨 의미냐는 듯 얇아진 눈매로 호준을 바라보며 민기가 물었고, 호준은 콧등을 긁적이면서 답했다.

“너라면 혼자 8번 막을 수 있어?”

“···.”

“바로 답이 안 나오지? 실제로 전반전엔 너도 제대로 뚫렸으니까.”

“그거랑 후반전이랑 무슨 상관인데?”

아픈 곳을 찔리자 민기가 버럭 소리를 높였고, 그런 민기의 목소리에 호준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상관있지. 이제부터 후반전이 시작 될거고, 난 저 8번을 혼자 막을 자신이 없거든. 그리고 못 막으면 팀이 위험하겠지? 에휴. 감독님도 참···.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힘들 거 같은데 대체 왜 나를 그렇게 믿으시는 건지.”

“그러니까 막으면 되잖아.”

“혼자선 못 막는다니까.”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호준이 재차 어깨를 으쓱였는데, 그런 호준을 향해 민기가 차가운 어조로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럼 반칙으로 끊어. 어중간한 거 말고, 하루쯤 푹 쉴 수 있는 정도로.”

“···!”

민기의 말을 들은 호준의 표정이 굳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민기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물었다.

“그 말 진심이냐?”

냉랭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호준이 물은 것에 민기는 훤히 이가 드러나는 미소까지 보이면서 답했다.

“이기고 싶다며. 이기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발목에 태클 좀 한다고 사람이 죽진 않아.”

“아. 하긴, 그래. 다리 좀 전다고 사람이 죽는 건 아니지. 발톱이 깨져도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고.”

“그래. 이제야 내가 하는 말을 좀 이해하는 구나···, 뭐야? 어디가?”

민기과 대화를 나누던 중, 호준이 갑자기 자리를 떠나 벤치로 돌아가더니 쇠로 된 철제 의자를 앞에 두고 멈춰 섰다.

그리고 슬쩍 의자의 다리 부분을 살피더니.

까아앙!

“뭐, 뭐야?! 호준아! 갑자기 왜 그래?”

냅다 발을 내질러 쇠로 된 의자 다리를 강하게 찼다.

갑작스런 호준의 이상 행동에 벤치에 앉아있던 채감독이 놀라 그를 향해 달려왔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신음을 흘리던 호준이 축구화를 벗어 던지면서 말했다.

“감독님. 아무래도 저 발톱이 깨진 거 같아서 더 이상 못 뛸 것 같은데요. 교체 좀 해주세요.”

“뭐, 뭐라고···? 호준아, 대체 왜···?”

“여기 양호실 1층에 있죠? 피나는 거 좀 닦고 오겠습니다. 아무튼 전 오늘 경기에서 빠질게요. 죄송합니다, 감독님.”

그렇게 미안하다는 짧은 말을 남기고 호준은 벤치를 떠났고, 채감독은 얼른 코치를 불러 호준을 양호실까지 부축할 것을 부탁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한숨을 뱉으면서 머리를 긁적이던 채감독은 벤치에 앉아있던 선수들 중 한 명을 불러 준비를 시켰고, 운동장 위에 서있던 팀의 주장인 민기를 불렀다.

“후반전은 센터백이 아니라 호준이가 뛰던 자리로 민기, 네가 들어가라.”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호준이가 갑자기 왜 저런 건지 알고 있니?”

“글쎄요.”

채감독의 질문에 민기는 입술을 비죽인 뒤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래 약간 이상한 애였잖아요. 제가 그 속을 알리가 없죠.”

“그래? 후우. 평소 의젓하던 녀석이었는데···. 일단 오늘은 네가 수고스럽겠지만 고생 좀 해라.”

“알겠습니다.”

감독이 어깨를 토닥여준 것에 민기는 고개를 꾸벅이고 다시 운동장 위로 올라왔고, 어수선한 아이들을 큰 목소리로 다잡은 뒤 경기 준비에 나섰다.

그러던 중 상대편 진영에서 발목을 풀고 있는 8번, 재혁을 발견하고 비릿하게 웃었다.

‘김호준, 이 싸이코 새끼. 벤치에서 똑똑히 봐라. 내가 어떻게 팀을 이기게 하는지 말야.’

그와 동시에 주심의 휘슬에 맞춰 후반전이 재개되었다.

전반전은 영동초의 선축으로 시작되었던 경기라 후반전에 공을 가져간 쪽은 중앙초였다.

공격수들이 밀어낸 공을 중앙으로 돌리고, 재혁이 받은 공을 일단 수비수들에게 건넨 후 자리를 잡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런 재혁의 옆으로 민기가 바짝 따라붙으면서 견제에 나섰다.

공간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던 중, 호준이 아니라 민기가 자신을 마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재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네 팀 6번은 어디 갔어?”

“6번? 김호준을 말하는 거냐?”

아직 공이 근처에 오지도 않았지만 재혁과 어깨를 부딪치면서 신경전을 벌이던 민기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그런 겁쟁이 새끼는 찾아서 뭐하려고? 아, 하긴. 호준이가 상대하기 편했겠지. 간이 콩알만해서 뭐 제대로 몸싸움은 했겠어? 하지만 이제부턴 걱정 좀 해야 할 거다. 내가 네 마크를 맡게 됐거든.”

“아, 그래? 다행이네.”

“?”

다행이라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민기의 눈썹이 잔뜩 찌푸렸고, 여전히 민기를 등진 상태로 자리를 잡고 있던 재혁이 자신을 향해 굴러오는 궁을 받으러 움직이면서 한 마디를 남겼다.

“이제부터는 진심으로 철저하게 부숴버릴 생각이라 상대하기 미안했는데, 상대가 너라면 죄책감이 덜할 거 같아서 말야.”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헙?!”

쉽게 공을 받게 두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재빨리 재혁의 뒤를 쫓아 움직이던 민기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간결한 터치 한 번.

그 터치 한 번으로 등을 지고 있던 상태에서 몸을 돌림과 동시에 재혁은 민기를 가볍게 뚫고 지나간 것이다.

대체 어떻게? 라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의문을 해결하기 전에 민기는 이를 악물고 재빨리 발에 힘을 준 뒤 방향을 꺾어 재혁의 뒤를 쫓았다.

민기의 입장에선 다행히도 재혁은 아직 멀리 가지 못하고 바로 몇 발자국 앞에서 드리블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

재혁의 뒤를 매섭게 쫓으면서 민기가 눈빛을 번득이다가 속도를 그대로 살리는 슬라이딩 태클을 몸을 날려 시도했다.

삐이익!

민기의 태클이 들어가기 무섭게 심판이 호각을 불었고, 곧이어 재혁과 민기, 두 사람이 뒤엉켜 운동장 바닥을 굴렀다.

그 모습을 본 중앙초의 감독 임종철이 큰 소리를 내며 심판을 불렀고, 심판은 주저 없이 민기를 향해 옐로우 카드를 꺼내 보였다.

“4번! 태클을 할 땐 조심해! 공하고 관계없는 태클이 또 나오면 그땐 무조건 퇴장이야!”

“저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요. 같이 굴렀잖아요. 아무튼 죄송합니다.”

심판의 말에 능청스럽게 대꾸하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 민기는 아직 바닥에 앉아서 발목을 내려 보고 있는 재혁을 향해 손을 뻗으며 물었다.

“괜찮지? 태클이 좀 늦었네.”

“···.”

태클이 좀 늦었다?

대꾸하지 않고 민기가 내민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재혁은 어이가 없어 실웃음을 흘렸다.

만약 태클이 조금만 더 빠르고 깊었다면 서로 다리가 엉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스터드가 그대로 자신의 발목을 찢을 수도 있었던 태클이었다.

마치 과거에 그의 다리가 망가질 때처럼 말이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 민기의 태클에 소름이 돋았던 것을 간신히 추스른 재혁이 슬쩍 고개를 들자, 그의 눈에 민기의 얼굴이 들어왔다.

‘지금 이 상황에서 웃고 있어?’

입술이 초승달을 그리고 있는 민기의 얼굴을 발견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던 재혁은 민기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거기서 태클이 빨랐으면 그대로 내 발목이 찢길 뻔 했는데?”

“설마. 빨랐으면 공을 건드렸겠지.”

“그 각도에서?”

다시 한 번 묻는 것에 민기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어떻게 될지는 시도하기 전까지 모르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나중에 한 번 더 태클해줄게.

재혁의 귀에는 민기의 말이 그렇게 들렸고, 민기는 내려간 양말을 다시 끌어 올린 뒤 천천히 멀어지려고 했다.

그런 민기의 등을 향해 재혁이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리 축구를 하자.”

“이것도 축구야.”

재혁의 목소리를 들은 민기는 슬쩍 고개만 틀어 보인 후 짧게 답하고 다시 멀어졌다.

이것도 축구다.

민기의 답을 들은 재혁은 헛웃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런 축구를 하던 놈들 때문에 부상을 당했고, 그대로 은퇴를 해야만 했다.

성인 무대도 아닌, 겨우 청소년 대표를 뛰던 시절에 말이다.

‘그래, 그런 축구를 할 수도 있지.’

주어진 프리킥을 차기 위해 공의 위치를 조정하면서 재혁이 고개를 들어 앞을, 정확히는 민기의 재수 없는 얼굴을 살피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한테 그 짓거리를 하는 새끼들은 앞으로 가만 안 둔다.”

뻐엉!

바닥에 놓여 있던 공을 길게 차면서 멈췄던 경기가 재개되었다.

***

‘자식이 잔뜩 쫄아가지고.’

재개된 경기를 계속 이어나가면서 민기가 비릿하게 웃었다.

역시 저런 잔재주를 부리는 놈은 강하게 휘어잡아주는 게 맞았다고,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스럽게 떠올린 미소였다.

실제로 태클 이후 재혁의 플레이가 눈에 띄게 조심스러워진 것이다.

전처럼 공을 오래 끌지도 않았고, 최전방까지 올라오기보다 중앙에서 경기 조율에 더 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영동초의 입장에선 한결 경기를 풀어나가기 쉬어진 상황.

그렇게 경기가 후반 15분경까지 진행되었을 때, 또 한 번 영동초에게 득점 기회가 찾아왔다.

투웅!

“패스 잘렸다!”

“바로 달려!”

재혁이 건넨 패스를 중앙초의 동료 선수가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하고 길게 튀었고, 그것을 영동초의 미드필더가 뺏어낸 후 드리블을 치고 나간 것이다.

이동하는 공을 쫓으면서 빈틈을 파고들 위치를 찾는 민기의 입가에 또 한 번 미소가 그려졌다.

‘이것도 내가 지른 태클 덕에 나온 결과지!’

중앙초의 허리 진형은 재혁을 중심으로 짜여 있었으니, 그가 뒤로 물러나면서 자연히 전체적인 중앙초의 진영도 뒤로 물러난 그림이 그려진 것이고, 그 덕에 지금처럼 강한 압박 이후 빠른 역습이 가능했던 것이다.

역시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재차 떠올리면서 민기가 머릿속으로 지금 경기장이 아닌 벤치에 앉아 있는 호준에 대해 떠올렸다.

‘새가슴 새끼. 높은 곳을 목표로 한다면 당연히 승리가 목적이 돼야지.’

< 14. 진심?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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