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일단 한 골 >
‘재희가 오늘은 놀이터에 안 갔구나.’
필드 위에서 재희를 발견했던 재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깨어난 뒤 고개를 털었다.
동생이 반가웠지만, 지금은 경기에 집중할 때였으니까.
경기는 벌써 전반 15분까지 진행이 되었지만 점수는 아직까지 0대0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수가 0대0이라는 소리였을 뿐, 경기 내용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했다.
영동초의 골키퍼가 골킥을 준비하는 모습을 중앙에서 바라보면서 재혁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영동초에서 준비를 많이 했어. 특히 수비에.’
포메이션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
중앙에 많은 선수들을 투입하고, 수비 라인은 최대한 중앙선에 근접하게 끌어올린 모습.
하지만 한 가지가 전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달랐다.
골키퍼가 길게 찬 공을 쫓아 눈동자를 움직이면서 재혁이 슬쩍 주변을 살폈다.
‘나를 제외하고 우리 팀 공격진에 모두 맨투맨을 붙였어.’
영동초에서는 지역 방어를 포기하고 철저하게 대인 수비를 지시한 것이다.
그 결과, 재혁의 패스에 공이 공간을 침투하는 일은 있어도, 중앙초의 공격수들이 공을 가져가는 것만큼은 쉽사리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공을 가져갈 수 없었으니 당연하게도 득점 찬스도 찾아오지 않았고, 점수는 위에서 서술했듯 0대0으로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영동초와 중앙초 선수들 간의 개인 기량 차이.
그 점을 노린 영동초의 수비 전술은 전체적인 공간 지배에 관한 효율은 비록 떨어질지 몰라도, 적어도 재혁의 패스를 다른 선수들이 이용할 수 없게 만드는 데에는 크게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수비에서 효과를 보고 있다는 이야기였을 뿐.
아직까지도 경기를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중앙초의 8번, 재혁이었다.
이번에도 떨어지는 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재혁이 공을 컨트롤 하면서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게다가 나한테 달려드는 선수도 거의 없고 말이지.’
공이 자신의 발밑에만 붙으면 영동초의 선수들 중 호준을 제외하곤 모두 다른 선수들을 맨 마크를 하고 있었다. 거기다 호준도 달려들어 공을 뺏는 수비를 하려는 것이 아닌, 자리를 지키면서 앞공간의 침투만 막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할까.
계속 센터 서클 주변을 맴돌면서 어떤 판단을 내릴지 고민하던 재혁의 눈에 순간적으로 공간을 파고들려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동료 공격수가 들어왔고, 재혁은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재빨리 스루 패스를 찔러주었다.
“칫!”
호준이 재혁의 발을 떠나는 패스를 향해 몸을 날렸지만, 공은 낮고 빠르게 굴러가면서 호준의 발끝을 피했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재혁이 원하는 공간을 향해 파고들었다.
패널티 박스 바깥으로, 받기만 한다면 확실한 득점 찬스로 이어갈 수 있는 치명적인 위치로 향하는 결정적인 패스였다.
하지만···.
뻐엉!
“또 걸렸네.”
결정적인 패스라는 것도 동료에게 공이 닿아야 성립이 되는 것이다.
이번에도 결국 동료 공격수의 발에 패스가 닿는 게 아닌, 상대 수비수의 발에 먼저 걸리면서 재혁이 만들어 보려던 기회는 무산 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걷어낸 공이 골라인 바깥으로 넘어가면서 코너킥이 선언되었다는 점일까.
하지만 막상 코너킥을 차기 위해 코너 플래그로 향한 재혁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 박스 안을 살펴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도저히 어디다 줘야 할지 감이 안 오네.’
신체 조건이 가장 좋은 영동초의 최전방 공격수 최준까지 수비를 위해 내려온 모습을 보면서 재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래서야 코너킥을 통해 공격 기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칫하면 상대에게 역습의 기회를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재혁은 그래도 일단 공을 길게 뽑아 골키퍼의 손이 닿지 않을 위치로 공을 보냈지만, 혹시나는 역시나, 공은 아군 공격수의 이마가 아니라 영동초 수비수의 머리에 맞았고.
“달려! 지금이다!”
영동초의 역습이 시작됐다.
마치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수비수가 걷어낸 공을 재빨리 호준이 달려가 컨트롤 했고, 재혁이 코너킥을 준비했던 반대쪽 측면에서 기다리고 있던 윙에게 패스를 건네주었다.
혹시 모를 재혁의 수비 개입을 피하기 위해 짜놓았던 영동초의 약속된 전략적인 선택이 드디어 빛을 발한 것이다.
그렇게 공을 받기 무섭게 우측면을 목표로 공을 몰고 움직이던 영동초의 윙 앞으로 중앙초의 풀백이 헐레벌떡 뛰어와 길을 막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영동초 공격수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투웅!
풀백이 달려드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공을 툭 차놓고 가볍게 풀백을 제친 공격수는 다시 한 번 전력을 다해 공을 몰고 움직이다가 오른쪽 박스 바깥에서 반대쪽을 향해 패스를 찔러 넣었고, 역습이 시작되기 무섭게 공을 쫓아 움직이던 최준이 그의 패스를 받아 침착하게 골대 구석으로 공을 밀어 넣으면서 마무리했다.
"됐다!"
"나이스! 잘 마무리했다!"
"좋아, 좋아. 계속 이대로만 가자!"
그야말로 기습처럼 이루어진 역습에 선취점을 내어주고 만 중앙초의 선수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골대 안에서 구르는 축구공을 바라보았지만, 성공적으로 역습을 마무리한 영동초의 선수들은 기쁜 듯이 득점 세레머니를 이어가면서 서로를 얼싸 안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아쉬운 듯 바라보던 재혁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경기 끝나고 따로 체력 훈련은 못 하겠네. 재희한테는 미안하지만 가방도 못 들어줄 수 있겠어.”
남들이 듣는다면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 못 할 혼잣말이었으나, 재혁은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이다.
오늘 경기도 어떻게든 승리로 장식하겠다고 말이다.
실점을 한 탓에 중앙초의 공으로 경기가 재개되었고, 공격수를 거쳐 중앙에 자리를 잡고 서있던 재혁에게 공이 굴러왔다.
재혁이 발밑에서 공을 몇 차례 굴리자, 영동초는 역시나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맨 마킹에 들어갔다.
“그리고 내 앞에는 역시 네가 오는 구나.”
“내가 아니면 누가 널 막겠냐?”
“글쎄.”
당당하게 대답하며 잔발을 재고 있는 호준.
그런 호준을 앞에 두고서 부드럽게 공을 몇 번 터치하던 재혁은···.
“너도 나는 못 막아.”
“···?!”
사라락.
너무도 자연스럽게 호준의 다리 사이로 공을 빼내 그를 돌파해버렸다.
어이없게 돌파를 허용한 호준이 황급히 몸을 돌리고 멀어지려는 재혁의 뒤를 쫓기 위해 발에 힘을 주었다.
‘대체 어떻게 드리블을 한거야?!’
바로 눈앞에서 당했지만 어떤 식으로 공을 빼낸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호준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재혁을 향해 계속해서 달려들었는데···.
사라락.
“아.”
이번에 또 다시 공이 그의 다리 사이를 통과해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말 못 막겠네.’
재혁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촤아악!
순간적으로 가속도를 내 쫓다가 방향이 어긋나면서 발이 꼬였던 호준이 균형을 잃고 흙바닥을 굴렀고, 두 번에 걸쳐 완벽하게 호준을 벗겨낸 재혁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드리블을 치고 나가면서 반격의 시작을 알렸다.
“일단 한 명.”
“···뭐?”
재혁이 속삭였던 혼잣말을 주워 들은 영동초의 수비수 중 하나가 발끈했다.
그의 귀에 재혁이 한 말이 마치 몇 명이 덤비든 전부 제쳐주겠다는 것처럼 들린 것이다.
입술을 꾹 깨문 수비수가 매서운 눈빛으로 재혁을 째려보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고, 그 모습을 본 최종 수비수, 박민기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어디가?”
“어차피 누가 막아야 할 거 아니야? 내가 막을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드리블을 치고 오는 상대의 발을 누군가는 묶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을 본 박민기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비명을 질렀다.
“막으러 간 놈이 돌파를 당하면 어떡해? 전혀 도움이 안 되잖아!”
호기롭게 소리치면서 달려든 것과 달리, 수비수는 재혁이 몰고 오는 공에 발도 건드려 보지 못하고 돌파를 당하고 만 것이다.
순식간에 뚫린 숫자가 두 명.
대치중인 공수의 숫자는 그래도 아직은 균형을 이룬 3대3이었지만, 민기는 선택을 내려야 했다.
‘···앞을 막긴 막아야 해.’
계속해서 상대가 자유롭게 공간을 침투할 여건을 만들어주면 위험하다.
거기까지 생각을 떠올린 민기가 이번에는 직접 몸을 움직였다.
어차피 중앙초의 다른 두 명의 공격수에는 양쪽 풀백들이 붙어 있었으니, 자신이 재혁만 맡으면 된다는 생각에서 민기가 조심스레 재혁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렇게 5미터, 3미터, 그리고 1미터.
호준이 당했던 것을 기억하면서 공은 보내도 사람만큼은 막아내겠다는 생각으로 재혁을 노려보던 민기는···.
“큭!”
갑자기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한 재혁을 발견하고 황급히 그에 맞춰 속도를 냈다.
아마 이번에는 속도로 제칠 요량인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재혁이 돌파를 노리는 방향을 읽었다.
‘우측면!’
공격자가 노리는 방향만 읽을 수 있다면 이어지는 수비 과정은 쉬운 편이다. 특히 기술이 아니라 속도로 노린다면 더더욱 말이다.
어떻게든 그 방향으로 몸을 던져 공과 사람, 둘 중 하나만 막아내면 되니까.
공을 막으면 최고, 사람을 막아도 파울로 끊은 것이니 최선.
절대로 틀린 선택지는 없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이번에는 확실히 막았다, 라고 생각을 한 민기는 재혁이 노리는 우측면을 미리 점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고, 재혁의 몸이 확실히 우측면으로 기울여지는 것을 발견하고 입가의 미소를 띄우다가···.
“뭐?!”
공이 갑자기 좌측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당황해 헛숨을 삼켰다.
힐찹.
뒤꿈치를 이용해 공이 이동하는 방향을 순간적으로 바꾸는 기술을 통해 재혁은 완벽하게 민기를 속이고 왼쪽 공간을 활짝 연 것이다.
성급한 판단을 내렸던 민기는 방향을 잃었고, 침착하게 상대를 속인 재혁은 열린 공간으로 드리블을 치고 달리면서 박스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곧장 슈팅을 때렸다.
힘보다는 임팩트에 비중을 둔 정확한 슈팅은 비어있는 골키퍼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갔고···.
철썩!
골대 구석을 향해 굴러 들어가 지금까지 조용하던 골망을 때렸다.
운동장 위에 서있는 선수들 모두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인지하고 못하고 있을 때.
“일단 한 골.”
재혁이 검지를 세워 하늘을 가리키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
“그러니까 이게···.”
전반전이 끝나고, 운동장에서 벤치로 돌아가는 선수들을 보면서 경기를 촬영하고 있던 누군가가 조용히 읊조렸다.
“초등학생들 경기라, 이거지?”
점수는 아직까지 1대1.
하지만 경기 내용은 초등학교들 간의 시합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 촬영한 전반전 경기 장면을 돌려보고 있던 남성이 혀를 내둘렀다.
“재혁이라고 했던가? 다시 돌려 봐도 믿기지가 않아. 드리블이야 기술의 영역이니 이해할 수 있어도, 골대를 앞에 두고 그렇게 침착하게 구석을 노려 차다니.”
“저 나이에 저럴 수가 있나?”
“보통은 못 하지.”
“이런 경기가 겨우 조별 예선이라니.”
다들 경기 내용에 넋이 나가 있었지만 지금 치러지는 경기는 아직 전국 대회가 아닌, 지역 조의 선두를 가리기 위한 경기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달았고, 이내 헛웃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주억였다.
“사실상 이게 미리 보는 결승전이지. 다른 학교도 아니고 무려 영동초잖아? 이미 저쪽은 전국 레벨이라고.”
“그런데 그런 영동초의 맞수가 중앙초가 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아무도 못 했지.”
“최재혁이라는 저 꼬마가 있는 지를 몰랐으니까.”
최재혁.
오늘 경기에서, 아니. 지금까지 중앙초가 진행한 시합들에서 매번 돋보이는 활약을 펼치고 있는 재혁에 대해 언급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중앙초가 우승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리고 리그가 시작되기 전까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 했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13. 일단 한 골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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