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자신 있지? >
통화 연결 음은 대략 두어 번 정도 울렸고, 상대는 연호의 전화를 받기 무섭게 인사를 건넸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어, 장비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우리 스포츠 브랜드 스폰서 자리 T.O.가 아직 남아 있던가?”
[스포츠 스폰서 자리 T.O. 말씀이십니까? 네. 아직 한 자리 남아 있습니다만.]
“그러면 내가 한 명을 추천해보고 싶은데···.”
[사장님께서 추천을요?]
평소 인사와 관련된 일에는 잘 나서지 않는 사장이 추천을 하고 싶다는 말에 장비서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묻자, 연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기왕 뽑은 거면 우리나라의 대들보가 될 아이를 쓰는 게 좋지 않겠어?”
***
5명의 중년 남성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 회의실.
그들은 느닷없이 열린 미팅이 당황스러웠는데, 그 내용을 듣고 또 기가 막혔다.
“스포츠 스폰서 자리에 초등학생을요?”
“아무리 사장님이라고 하셔도 이건 무리 아닙니까?”
스포츠 브랜드 스폰서 자리의 T.O.를 채우고 싶다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으나, 무명의 초등학생 선수에게 그 자리를 주고 싶다는 사장의 말에 다들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숨기지 않았다.
“스포츠 브랜드란 마케팅과 스폰을 받는 대상의 이미지를 통해 즉각적으로 효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써야 하는 게 업계에서 불문율처럼 여겨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요즘 축구 붐이 뜨겁긴 합니다만, 그 효과를 제대로 누리려면 이름값이 무거운 선수를 쓰는 게 효과적입니다. 치맛바람이 무서운 만큼 어린 선수를 내세우면 물론 그 부분은 노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바르셀로나라의 유스로 뛰고 있는 백영호라던가, 이승준같은 선수를 써야 효과가 있는 거죠. 대한민국의 평범한 초등학생 선수로는 무리가 있습니다.”
케이 브랜드 스포츠에서 각각 마케팅과 홍보팀을 맡고 있는 두 남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평소 충돌하는 부분이 많다보니 옥신각신하던 둘이었지만 이번 일만큼은 마치 한 사람인양 같은 의견을 내고 있었다.
그런 둘의 말에 기획과 재정 부서에서 일하는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관련 사항으로 기획을 준비하고 싶어도 배경이 아무 것도 없는 초등학생을 모델로는 준비부터 힘겨울 공산이 큽니다.”
“그리고 과연 사용된 자금만큼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지도 의문이고요. 평소 사장님의 생각을 존중해드리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힘들 것 같다는 게 모두의 생각입니다.”
그렇게 탁자에 둘러앉은 4명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조연호 사장은 턱을 괴고 감고 있던 눈을 조심스레 뜬 후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일리가 있는 말씀들을 해주셨습니다. 이제 겨우 초등학생에 불과한 선수임이 사실이니, 즉각적인 효과는 볼 수 없겠지요.”
“그러면···.”
“그렇지만!”
눈빛에 힘을 실은 것처럼, 중저음의 목소리에도 단단히 힘을 실은 조연호 사장이 끊었던 말을 이었다.
“케이 브랜드 스포츠는 지금까지 종목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운동선수들을 지원해 왔습니다. 그리고 추가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린 선수들에게는 케이 스포츠 장학생이라는 명목으로 매 월 소정의 경제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죠.”
“그렇긴 합니다만···.”
“스포츠 장학생들의 경우 국제 대회에 입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검증된 선수들에게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지요.”
“최실장의 말이 맞습니다. 분명한 기준 선이 존재하고 있는 부분이죠. 그렇기 때문에 예외는 둘 수 없겠지만, 인정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인정이요?”
사장의 말에 최실장이라 불린 남성이 되물었고, 사장은 곧장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우리는 기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 대회 입상이라는 기준을 두었죠. 그 선수가 얼마나 뛰어난지, 제대로 판가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만한 기준을 확실히 제시할 수 있는 선수라면 충분히 인정하고, 스포츠 장학생이든, 브랜드 스폰서든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언뜻 일리가 있는 사장의 말에 모두가 잠시간 입술을 곱씹었고, 좌중을 훑으면서 조사장이 말을 계속 이었다.
“마침 초등학생 축구 선수들을 대상으로는 ‘차범수 유소년 축구상’이라는 전문가의 눈으로 시상을 주는 상이 있습니다. 이만한 상이라면 분명 그에 걸맞은 기준 점이 되어주지 않겠습니까?”
차범수 유소년 축구상.
일단 차범수라는 이름값이 밑바탕에 깔렸으니, 분명 사장의 말이 틀리진 않았기에 다들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흐음, 확실히 그렇습니다만···.”
“그렇게 따지신다면 최재혁이라는 개인 선수가 아닌, 차범수 유소년 축구상을 받는 선수를 지원해주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제가 바로 그 점을 짚고 싶었던 겁니다.”
기획 실장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조사장이 그를 향해 밝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이번에 남아 있는 T.O.자리에 미래가 될 수 있는 선수를 추가시키는 것. 올해 차범수 유소년 축구상을 받는 선수들 중 그 후보를 한 번 찍어보자는 거죠. 아마 이번 투자를 통해 기업 이미지와 홍보 효과,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을 겁니다.”
***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뭐가 말인가?”
“최재혁이라는 학생을 뽑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모두가 빠져나가고 조연호 사장과 장비서, 둘만 남은 자리에서 장비서가 물었고, 조사장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로 판을 짜지 않았나?”
“사장님께서 원하는 대로요?”
뜻밖의 대답에 장비서가 되물었고, 조연호 사장은 그를 향해 바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최고의 축구 유망주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했으니, 이정도면 모든 판을 바라던 대로 짠 것이나 마찬가지지.”
장비서에게 대답해주면서 아직 식지 않은 커피를 조사장이 홀짝였고, 장비서는 그런 조사장의 모습을 살피면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사장님께서는 그 최재혁이라는 아이가 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계신 겁니까?”
“단순히 확신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 상은 분명 그 아이가 받을 거야.”
“혹시 심사 측과 거래를 통해···.”
“이 사람아. 내가 그런 짓을 할 사람으로 보이던가?”
“죄송합니다.”
조사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비서가 고개를 숙였고, 조사장은 그저 짧게 웃어 보인 후 또 한 번 커피를 삼키면서 말했다.
“감이야, 감. 이 녀석은 될 거다, 라는 감이 사진을 보는 순간 탁! 하고 내 가슴에 꽂히더라고.”
“그런 허무맹랑한···.”
“이따금 살다보면 감처럼 무서운 게 없어. 근거도, 기반도 없지만, 무언의 확신이 아주 또렷하게 남아서 사람의 머리를 조종하지. 이건 분명히 될 거라고 말야. 그러니까 난 이번 도박이 어떻게 흘러가나, 재밌게 구경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네. 게다가 합법적으로 즐겨볼 수 있는 도박이니, 재미는 덤이지.”
도박이라는 말에 장비서는 잠시간 침을 삼켰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연호 사장의 감이라는 말은 허무맹랑할 수 있었지만, 여태까지 기업을 키우는 데 있어서 그 무엇보다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장비서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공적인 도박으로 기업을 두 배 이상 키웠고, 지금까지도 승승장구 중이었으니. 아마 이번 감이란 녀석도 보통 감으로 끝나지 않을 공산이 컸다.
‘최재혁이란 아이는 아주 복을 타고 났군. 사장님의 눈에 이렇게 띄다니. 다만 그 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실력. 부디 실망시키지 않는다면 좋겠군.’
어느 정도 장비서도 납득을 한 듯 하자, 조사장은 빙그레 웃어 보이면서 커피 잔에 담긴 커피를 찰랑이며 말했다.
“게다가 따지고 본다면 우리한테 주어진 리스크는 0에 가까운 상황이 아닌가? 누구든 상을 타는 선수에게 지원을 해주면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한 번 지켜보자고. 내 감이 아직 쓸 만한지, 아닌지를 말이지.”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끝맺으며 살며시 돌린 고개로 달력을 찾은 조사장이 커피 잔을 내려놓으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조사장이 회의실 밖으로 이동하자 장비서가 얼른 그의 옆에 따라붙으며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장비서의 짧은 질문에 조사장은 빙그레 웃어 보이면서 답했다.
“마침 배팅한 말의 경기가 있는 날이거든. 경기마가 뛰는 모습은 직접 보러 가야 하지 않겠나?”
***
“약속했던 날이다.”
선수들을 앞에 두고 종철이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일단 모두들 수고했다. 지난 원정 3경기, 힘들었을 텐데 모두 힘을 내서 승리해줬어. 상으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고 싶지만, 뛰기 전에 먹으면 배탈 날테니까 참도록 하지.”
“그럼 경기 끝나고 사주시면 되잖아요!”
“맞아요! 아이스크림 사줘요!”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에 학생들이 빼액, 고함을 질렀고, 그런 학생들을 보면서 종철은 크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알겠어. 이번 경기도 이긴다면 아이스크림을 약속하도록 하지! 그러니까 다들 마지막까지 힘내자!”
“네!”
“그러면 전반 초반에 약속한 플레이에 대해 마지막으로 확실히 짚고 넘어가겠다. 먼저···.”
아이스크림으로 어린 선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전술판을 꺼내 마지막을 점검했던 종철은 선발로 나설 11명의 선수들의 어깨를 한 번씩 토닥여준 뒤 운동장으로 떠나보냈다.
그렇게 이제 마지막으로 주장 완장을 차고 있는 재혁을 앞에 두고 종철이 물었다.
“자신 있지?”
“어떤 부분이요? 경기에서 이기는 거요? 아니면 득점하는 거요?”
“이기려면 득점을 해야 하니, 둘 다였으면 좋겠네.”
흐음, 짧게 혀를 끈 재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없긴 하네요.”
“뭐? 갑자기 왜?”
재혁의 예상 못한 대답에 종철이 놀라 물었고, 재혁은 신고 있는 축구화로 운동장을 쿡쿡, 몇 차례 밟다가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경기에서 질 자신이 말예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짜식이 말야, 사람 긴장시키고 있어.”
멀어지는 재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내쉰 종철이 그 사이에 흘러내린 식은땀을 훔쳤고, 그렇게 홈에서 영동초를 맞이한 중앙초의 조별 예선 4번째 경기가 시작됐다.
***
원정 3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치러진 중앙초의 홈경기.
그 덕에 적지 않은 학생들이 스탠드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대부분이 평소에는 축구부에 관심이 없었으나, 점심시간부터 시작해서 쉬는 시간마다 학교에서 시합에 대해 떠든 탓에 호기심을 갖고 구경차 자리에 앉은 학생들이었다.
축구부에 관심은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었던 학생들이 서로를 향해 묻고 답했다.
“그런데 정말 우리 학교가 조에서 1등이야?”
“영동초에는 걔들 있잖아, 축구 천재라던 그 3명. 그런데도 우리가 진짜 1등이야?”
“그렇다니까. 점심시간에 나왔던 광고에서도 그랬잖아. 3경기를 다 이겨서 지금 1등이라고.”
“크, 우리 학교 잘하네.”
영동초의 미래 트리오.
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학생들은 천재라고 알려진 선수들이 속한 축구부를 상대로도 승리를 거둔 모교의 축구부에 대해 자부심이 느껴졌는지 쉬지 않고 감탄을 흘렸다.
그러다가 운동장 한켠에 방송 장비들을 설치하고 경기를 촬영하고 있는 방송국 사람들을 발견하곤 중얼거렸다.
“오늘 축구하는 거 뉴스에도 나오려나?”
“그건 모르지.”
“일단 이기는 팀은 나오지 않겠어? 그러려고 촬영을 하는 거니까.”
“맞아요! 우리 오빠는 이길 거니까 우리 오빠가 뉴스에 나올 거에요! 그리고 신문에도요! 그러니까 모두 힘내서 응원해주세요!”
“···엉?”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뒤에서 들린 앳된 목소리를 쫓아 학생들이 고개를 돌렸지만, 조그마한 몸집의 여자 아이는 앙증맞은 걸음걸이로 후다닥 멀어졌다. 그리고 스탠드에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양팔을 벌리고 중앙초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중앙초 화이팅! 재혁 오빠도 힘내라!”
꼬마 아이, 최재희는 누구보다 작았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큰 소리를 내 응원했고, 그런 재희의 목소리를 운동장에서 스치듯 주워들은 재혁이 슬쩍 재희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뒤 웃었다.
< 12. 자신 있지?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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