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9화 (9/225)
  • < 9. 중앙초의 8번 >

    “정신 똑바로 차려! 이제 겨우 5분 지났어! 동점골 넣고, 전반전 끝나기 전에 역전까지 하는 거야!”

    사이드라인에 바짝 다가가 박수를 치면서 채용우 감독이 목청을 높였고, 그의 목소리를 들은 선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채감독이 다시 벤치로 돌아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으나,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단순히 미디어에서만 찾아온 게 아니었다.

    따로 준비된 의자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장문구 협회장의 눈치를 슬쩍 살핀 채감독이 입술을 깨물었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선수 이적에 관해 협회에서 편의까지 봐주었는데, 첫 경기에서 실점부터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말다니.

    부끄러움에 볼이 빨갛게 물이 들었지만 채감독은 애써 고개를 털어내면서 숨을 골랐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누가 웃느냐다.

    ‘이대로 역전해서 오히려 중압감 속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을 어필하면 돼.’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졌던 채감독은 스스로를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채감독의 옆으로 하정수 코치가 다가와 물었다.

    “전술에 변화 없이 이대로 갈까요?”

    “당연하지. 오히려 지금을 유지하는 게 중요해. 중원을 확실히 틀어잡아야 지속적으로 압박을 넣을 수 있으니까.”

    비록 운이 나빠 프리킥으로 실점을 했지만, 기본적인 실력 차이는 달라진 게 없었으니.

    허리를 두텁게 쌓은 전술을 채감독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재개될 경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호각 소리와 함께 영동초 선수들이 공을 돌리는 것으로 멈췄던 경기가 다시 시작됐다.

    일단 수비 진영까지 공을 내린 후, 중앙초의 선수들이 달려들기를 기다리면서 영동초에선 중앙초의 빈틈을 노리기 위해 신중한 움직임으로 계속해서 진영을 흔들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중앙으로, 그리고 중앙에서 다시 한 번 좌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패스 워크를 지켜보면서 채감독의 입가에 마침내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흐름이라면 언제고 득점할 찬스가 찾아올 것이다.

    방금까지 실점으로 흔들렸던 마음은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경기를 지켜보면서 눈 녹듯이 사그라들었다.

    그러던 중, 전반 8분 경.

    마침내 영동초에 기회가 찾아왔다.

    “받아!”

    영동초의 중앙에서 전체적인 패스를 조율하던 김호준이 일순 벌어진 중앙초의 틈 사이로 패스를 찔러 넣은 것이다.

    아주 낮게 깔려서 날아가는 패스는 중앙초의 허리를 빠르게 뚫고 지나가 최전방에서 공을 기다리고 있던 최준의 발밑에서 멈췄고, 마침내 공을 만질 수 있었던 최준은 수비수를 등지고 있다가 재빨리 턴 동작을 취하면서 가볍게 수비수 한 명을 제치고 드리블을 시작했다.

    그의 앞으로 다음 수비수가 그를 막기 위해 달려드는 게 보였고, 어떤 행동을 취할지 고민에 빠졌다.

    패스와 드리블 돌파.

    주어진 두 가지 선택지에서 최준이 선택한 것은···.

    ‘뚫는다!’

    드리블.

    그는 중앙초의 수비수가 거리를 좁히다가 발을 뻗는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공을 옆으로 한 차례 꺾었다가 앞으로 치고 달리면서 순간적으로 생겨난 빈 공간을 노리고 돌파를 시도했고, 중앙초의 수비수는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최준을 두 눈 뜨고 바라보면서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수비수의 표정을 슬쩍 훔쳐본 최준의 입술이 미소를 그렸다.

    매번 저런 표정을 볼 때면 희열이 느껴지니 드리블을 끊을 수 없다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렇게 수비수를 제치고 이제 골대와의 거리는 25미터.

    조금만 더 치고 들어가면 패널티 에어리어였고, 그의 앞을 막고 있는 사람은 잔뜩 긴장한 모습의 골키퍼가 유일했다.

    어떤 식으로 요리해줄까?

    지금 눈앞에 상황이 호화롭게 차려진 만찬 같다고 느끼면서 최준은 여유롭게 공을 치고 달리다가 가뿐하게 슈팅을 시도했다···, 가 갑자기 튀어나온 축구화를 뒤늦게 발견하고 두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투웅!

    최준의 발등에 제대로 걸렸던 슈팅은 슬라이딩과 함께 튀어나온 축구화에 걸려서 허공에 붕 떠버렸고, 골대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 멀리 튕겨져 나가면서 득점이 아닌 코너킥이 되어버렸다.

    완벽한 찬스였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허무하게 날아가자 최준은 구겨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그의 눈에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흙먼지가 묻은 반바지를 툭툭 털어내는 재혁의 모습이 들어왔다.

    또 이자식이야? 라는 생각을 품고서 재혁을 노려보는 최준과 달리, 재혁은 가볍게 숨을 뱉으면서 진땀을 식히곤 경기에 집중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하마터면 위험할 뻔 했네.’

    애써 올린 선취점이 동점이 되어 버릴 뻔 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상대 미드필더가 예리하게 찌른 패스를 확인과 동시에 수비 뒷공간으로 달려간 것이 유효했다.

    아마 조금만 늦었다면 저 공은 코너 플래그가 아니라 골대 안에서 뒹굴고 있었을 것이리라.

    그 덕에 바닥에 쓸린 왼쪽 무릎이 조금 까졌지만, 이정도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영동초에서 코너킥을 준비하는 동안 중앙초의 선수들이 재혁을 향해 고맙다는 말을 전했지만, 재혁은 오히려 그런 선수들을 향해 정신 똑바로 차리고 계속해서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정호! 경기 시작하기 전에도 말했지만 최종 수비수는 발 함부로 뻗는 거 아니야! 넌 우리 팀의 마지막 벽이 되어야 한다고!”

    “아, 알겠어.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만 하지 말고, 경기에 더 집중해. 마크 확실히 잡고! 끝까지 힘내자!”

    축구부에 합류한지 겨우 한 달이었지만, 주장 완장을 차고 있는 재혁이 목소리를 높이자 다른 부원들이 그에 맞춰 호응했다.

    다들 은연중에 믿고 있었던 것이다.

    재혁의 실력을, 그리고 재혁이 있기 때문에 이번 경기에서 쉽게 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삐이익, 주심의 휘슬 소리와 함께 영동초에서 준비했던 코너킥을 찼고, 원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떨어지는 공을 향해 여러 선수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공에 이마를 맞춘 것은 영동초의 공격수, 최준이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누구보다 재빨리 낙하 지점을 파악하고 높게 뛰어오른 그의 이마에 축구공이 걸린 것이다.

    허나 쉽사리 헤딩슛을 성공시키게 두지 않겠다는 의지로 같이 몸을 날린 중앙초의 수비수들 때문에 다행히도 그의 헤딩슛은 골대를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렇게 이제는 중앙초의 골킥이 된 상황.

    골 에어리어에 공을 놓고 골킥을 준비하면서 중앙초의 골키퍼, 양민호가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공은 최대한 중앙으로···, 재혁이가 있는 곳 근처로만···, 공은 최대한 중앙으로···. 흐압!”

    뻐엉!

    잔뜩 찌푸린 얼굴로 힘을 실어 찬 공이 쭉 뻗어 나가 센터 서클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민호가 웃었고, 공이 떨어지는 위치를 확인하면서 영동초의 미드필더, 호준도 웃었다.

    ‘이렇게 정직하게 차주다니. 이건 압박해서 뺏어 올 수 있겠어.’

    중원에 쌓아둔 선수들만 두 줄이었다.

    이 말인즉, 정직하게 중앙으로 떨어지는 공은 강하게 압박을 넣어 언제든 뺏어 올 수 있다는 소리.

    호준의 생각처럼 다른 영동초의 선수들도 공을 잡으려는 재혁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공이 바닥에 떨어지면 그 즉시 압박을 넣을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렇게 공이 떨어지기까지 10미터, 5미터, 그리고 1미터.

    ‘지금이다!’

    떨어지는 공을 향해 재혁이 발등을 내미는 것을 신호로 영동초의 선수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허나 이어지는 상황에 모두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

    재혁은 공을 트래핑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이 재차 튕겨 오를 수 있도록 발목에 단단히 힘을 준 것이다.

    떨어지던 공은 정확히 재혁의 발에 맞으면서 다시 한 번 높이 솟아올랐고, 트래핑을 할 것이라 예상하고 몸을 날리던 영동초의 선수들은 역동작에 걸려 멀어지는 재혁과 공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터치 한 번으로 3명의 선수들을 벗겨내는 완벽한 탈압박.

    영동초의 입장에선 당황스러운 장면이었으나, 중앙초의 입장에선 빠른 공격 전개가 이어질 찬스였고, 재혁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재빨리 공을 우측면으로 뿌렸다.

    ‘현재 우리 팀에서 나를 제외하면 가장 믿을 만한 녀석이 있는 게 바로 오른쪽 측면이지.’

    등번호 7번, 김주성.

    재혁이 합류하기 전까지 주장이었으나, 재혁이 들어오고 나서 흔쾌히 주장 자리를 그에게 맡긴 주성은 재혁이 뿌린 패스를 쫓아 내달렸고, 무리 없이 공을 받아내면서 속도를 살린 공격 전개에 힘을 실었다.

    최대한 터치라인에 바짝 붙어 공을 몰면서 이동하다가 상대 풀백이 다가오기 무섭게 공을 길게 차고 내달리는 치고 달리기.

    다른 건 몰라도 속도에 자신이 있는 주성이 즐겨 사용하는 돌파 법이었고, 이번에도 효과적으로 풀백을 벗겨내는데 성공한 주성은 패널티 에어리어에 가까이 다가가다가 앞을 가로 막는 상대 센터백을 발견하고 공을 일단 멈춘 뒤···.

    투웅!

    재빨리 공을 옆으로 밀어서 패스로 연결했다.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면서 이동하는 공을 향해 모두가 시선을 옮겼으나, 오직 한 사람.

    ‘아주 좋아! 내가 딱 바라던 공이야!’

    재혁은 단순히 공을 바라보는 게 아닌, 굴러오는 공을 향해 기다렸다는 듯이 발을 뻗었다.

    뻐엉!

    프리킥에 이어 시도하는 재혁의 두 번째 슈팅은 정확하게 발등에 걸렸고, 매서운 속도로 허공을 찢을 듯이 날아가면서 골키퍼의 장갑 사이를 뚫고 골망 안에 틀어박혔다.

    순간적인 공격 전개의 묘를 살려 벌써 2대0.

    올해 누구보다 강할 것이라 알려졌던 영동초는 전반에만 2점을 실점하면서 최악의 개막전을 경험하고 있었고.

    “대체 저 8번 누구야? 어디서 튀어 나온 놈이야?”

    그들의 상대인 재혁은 운동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최강이라 불리는 영동초라는 벽에 균열을 일으킨 존재로서 말이다.

    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재혁의 활약을 지켜보던 이상민 기자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올해 영동초가 최강이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누구였지?”

    “네? 그야 관계자들 전부···.”

    “다시 받아 적어.”

    옆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재혁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고 있는 수습기자를 향해 이상민 기자가 읊조렸다.

    “관계자들은 전부 바보, 멍청이들이라고. 최강이란 단어를 잘못된 상대한테 쓰고 있었어. 바로 저런 걸 두고 최강이라는 거야.”

    이상민 기자의 곧게 뻗은 손은 운동장 위에서 하늘을 향해 포효하고 있는 재혁을 가리키고 있었다.

    ***

    삑, 삑, 삐이익!

    심판의 휘슬 소리가 운동장을 떠돌았고, 모두의 발이 멈췄다.

    전반 25분, 후반 25분.

    그 치열했던 개막전이 마침내 끝이 난 것이다.

    동시에 승자와 패자 사이의 희비가 엇갈렸다.

    이를 악물고, 양 주먹에 잔뜩 힘을 주고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박민기가 분에 찬 목소리로 혼잣말을 뇌까렸다.

    “이런 망할···. 저딴 학교한테 지다니···.”

    “민기야, 정렬해서 상대 팀하고 악수···.”

    “나한테 말 걸지마!”

    어깨로 올라오는 동료 골키퍼의 손을 거칠게 쳐낸 후 박민기가 악에 받쳐 고함을 내질렀다.

    “너 때문에 진 거잖아! 어떻게 저딴 녀석 때린 슈팅을 하나도 못 막아? 네가 그러고도 골키퍼야?”

    “아, 아니···. 나는···.”

    “시끄러! 이런 팀에서 주장이라니. 내가 다 쪽팔려서!”

    철퍽!

    팔뚝에 차고 있던 주장 완장을 거칠게 벗어서 운동장 바닥에 집어던진 민기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운동장을 떠나버렸고, 그런 민기를 향해 골키퍼가 그의 이름을 애처롭게 불렀지만 민기는 결국 끝까지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이 모든 게 자신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골키퍼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지려고 할 때, 김호준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 탓이 아니야.”

    “호준아···.”

    “중앙에서 내가 직접 부딪쳐 봤잖아? 저놈이 대단한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호준이 슬쩍 고갯짓으로 중앙에 정렬하고 있는 중앙초의 8번, 최재혁을 가리켰다.

    < 9. 중앙초의 8번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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