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8화 (8/225)
  • < 8. 첫 경기 >

    “중앙초! 영동초! 양 팀, 정렬!”

    호각을 목에 걸고 운동장 중앙에서 심판이 소리를 내자 양 팀의 선수들이 일렬로 줄을 맞췄다.

    각 11명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심판이 확인하고 선수들을 둘러보면서 계속 말했다.

    “올해 첫 시합이고, 사람들의 관심도 많은 경기이니까 다들 페어플레이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도록 합시다. 보호대를 착용하지 않은 선수가 있다면 지금 당장 착용하고 오고, 주장만 남고 모두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네!”

    심판의 지시에 따라 선수들이 자리를 벗어나자 주장인 두 선수들만이 자리에 남았다.

    중앙초에선 재혁이 남았고, 영동초에선 중앙 수비수 유망주로 잘 알려진 박민기가 남았다.

    심판이 둘을 향해 물었다.

    “선공과 진영, 취하고 싶은 게 있나?”

    “저희는 진영이요.”

    심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민기가 번쩍 손을 들고 말했고, 둘의 눈치를 슬쩍 살핀 재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희는 선공이 좋으니 안 겹치네요.”

    “좋아. 그러면 중앙초에서 선공으로 시작하고, 영동초에선 진영을 고르도록 하지. 그러면 마지막으로 당부하겠는데 보는 눈이 많은 경기야. 서로 좋은 모습만 보여주도록 하자고.”

    “예.”

    심판이 그렇게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였기에 재혁은 자연히 손을 앞으로 쭉 뻗었는데, 그런 재혁의 손을 박민기는 힐끗 내려 보더니 맞잡지 않고 그냥 그대로 등을 돌리고 멀어졌다.

    결국 뻘쭘하게 허공을 쥔 재혁은 손을 그대로 올려 머리칼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축구는 손이 아니라 발로 하는 거니까.”

    다만 발로 공을 차는 건 제의가 아닐 것이다.

    너의 숨을 움켜쥐려는 공격이 될 것이리라.

    재혁은 그 점을 상대가 명심해줬으면 하면서 자리로 돌아갔다.

    ***

    “악수 했어?”

    “그걸 왜 해?”

    박민기가 돌아오자 같은 팀의 공격수 최준이 물었고, 민기는 혀를 차면서 멀어지는 재혁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랬다가 못하는 실력이라도 묻으면 어떡하려고? 악수 같은 건 맘대로 하는 게 아니지. 그냥 경기에서 이겨주면 다 끝인 거야.”

    “안 그래도 아까 누가 몇 대 몇으로 이길 거 같냐고 물어봤던데. 체면 좀 차려서 3 대 1이라고 해줬다.”

    “3 대 1? 너는 지금 내가 지키는 수비라인이 실점을 할 거라고 생각한 거냐?”

    “그러는 너는 내가 겨우 3골만 넣을 걸 그대로 수긍한 거야?”

    “워워, 왜 우리들끼리 싸우고 그래? 어차피 시합 시작되면 우리가 싸울 상대는 저쪽이라고.”

    목소리가 높아지려는 민기와 최준을 미드필더로 뛰게 될 호준이 말리면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호준의 말에 잠시간 흥분했던 것을 진정시킬 수 있었던 두 사람이 이내 호흡을 골랐고, 그런 둘을 바라보면서 호준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중앙초 주장이란 녀석 처음 보는 얼굴이지 않아?”

    “뭐, 어디서 주워온 거겠지. 저 학교 수준이 그거밖에 더 돼? 어차피 올해도 작년처럼 비참하게 깨질 학교야.”

    “흐음.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시끄럽고, 이제 자리로 다들 돌아가. 곧 경기 시작이니까.”

    박민기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한 말에 다른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각자 위치를 찾아 움직였고, 민기도 자신의 자리인 센터백의 위치로 돌아가 눈에 불을 켰다.

    첫 경기인 만큼 확실히 각인 시켜줄 것이다.

    너와 나의 실력 차이를.

    ‘그때에도 건방지게 먼저 손을 내미나 보자.’

    삐이익!

    민기가 이를 뿌득 가는 것과 동시에 심판의 휘슬이 울렸고, 마침내 첫 경기가 중앙초의 선축으로 시작 됐다.

    ***

    투웅, 투웅.

    공격수가 앞으로 밀었던 공이 두 차례 돌았다.

    처음에는 오른쪽 미드필더, 그 다음은 중앙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 중앙초에서 패스를 건넨 상대는···.

    “그럼 어디로 가볼까.”

    등번호 8번의 최재혁.

    발바닥으로 굴러온 공을 가볍게 한 차례 굴린 재혁이 침착하게 전방을 살폈고, 공간을 발견하기 무섭게 눈동자를 빛내면서 경기 첫 번째 패스를 뿌렸다.

    아주 가벼운, 평범한 동작으로 뿌린 패스였기에 영동초의 어느 누구도 재혁이 보낸 패스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센터백을 보고 있는 박민기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들어 높게 날아오는 공을 눈으로 쫓으면서 뒷걸음질을 치던 민기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시작하자마자 무작정 지르고 보는 뻥축구라니. 저렇게 공을 버릴 거면 선축은 왜 하겠다고 했던 거야?’

    참 의미 없는 패스다, 라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공의 속도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누군가 옆에서 어깨를 부딪치는 것을 느낀 민기가 고개를 돌렸고, 그의 눈에 언제 달려왔는지 중앙초의 공격수가 공중볼 경합을 시도하고 있는 게 들어왔다.

    ‘···어느 틈에?’

    쯧, 혀를 찬 민기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비릿한 미소를 떠올렸다.

    패스를 쫓아 달려온 것은 분명 칭찬해줄 만한 모습이었으나, 자신이라면 절대로 공을 뺏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여유 있게 상대와 어깨를 맞대면서 떨어지는 공을 그대로 걷어내기 위해 발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 했다.

    “?!”

    같은 팀의 골키퍼와 수비 동선이 겹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아군 골키퍼를 뒤늦게 발견한 민기가 헛숨을 삼켰고, 재빨리 몸을 비틀어 골키퍼와 충돌할 뻔한 것을 피하고 머리로 떨어지는 공을 간신히 걷어냈다.

    우당탕! 발로 걷으려 했던 것을 억지로 머리를 이용해 걷어내는 바람에 허공에서 반 바퀴 회전했던 민기의 몸이 흙바닥을 거칠게 굴렀고,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바닥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골키퍼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뭐하는 거야! 내가 걷어내려던 거 못 봤어?”

    “아, 아니. 나는 공이 애매한 위치에 떨어지길래 내가 걷어내려고 했던 건데···.”

    “뭐?”

    애매한 위치라니?

    이건 분명 자신이 건드렸어야 할 공이었는데···, 라고 생각을 하던 민기의 눈에 현재 위치와 패널티 에어리어와의 거리가 눈에 들어왔고, 곧 애매한 위치라는 골키퍼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틀어 패스를 뿌렸던 상대, 재혁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털었다.

    우연이다.

    ‘녀석이 내 위치와 골키퍼 사이의 애매한 지점을 노리고 패스했을리 없어. 단순하게 질렀던 패스가 우연히 그곳에 걸쳤던 거야.’

    민기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면서 수비 라인과 자신의 위치를 점검할 때, 드로잉으로 멈췄던 경기가 재개되었고, 중앙초에서는 다시 공을 재혁에게 밀어주었다.

    데굴데굴 굴러 재혁의 발에 한 차례 닿았던 공은 아까 그랬던 것처럼.

    뻐엉!

    또 한 번 지체 없이 허공으로 떠올랐고, 이번에도 공은 센터백과 골키퍼 사이의 공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마치 민기의 생각을 비웃으려는 듯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말이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상대 공격수가 어깨를 들이 밀면서 공을 향해 달려오는 똑같은 패턴이 이어졌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두 번이나 같은 방식에 당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확실히 안정적으로 공을 걷어내겠다, 라고 생각을 한 민기가 위치를 잡기 위해 열심히 내달렸는데, 같은 패스 코스였지만 상대 공격수의 행동에 변화가 있었다.

    중앙초의 공격수는 어깨로 몸싸움을 하는 척 하더니 재빨리 몸을 빼고 전력을 다해 공을 향해 달려들다가 헤딩을 시도하기 위해서 높게 뛰어오른 것이다.

    갑작스런 상대의 행동에 민기의 인상이 또 한 번 구겨졌다.

    ‘미친놈인가? 여기서 몸을 날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위치에서 공을 향해 몸을 날려봐야 헤딩이 닿을 리 없어 보였지만, 수비수라면 어쩔 수 없이 상대의 행동에 따라야만 했다.

    수비란 결국 상대의 공세에 맞춰 공격을 막기 위해 따라가는 작업의 반복이었으니 말이다.

    당장이라도 끓어오르는 분을 입 밖으로 뱉어내고 싶었지만 민기는 일단 배운 대로 상대의 행동에 맞춰 같이 몸을 날렸고, 당연하게도 둘의 몸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재혁이 시도한 패스는 무안하게도 둘의 머리를 그대로 지나쳐 바닥에 떨어지더니 골키퍼의 품에 안겼다.

    공을 손에 쥔 골키퍼는 재빨리 공을 차려고 했으나, 플레이는 거기서 멈춰야만 했다.

    삐이익!

    심판이 호각을 불면서 달려온 탓이다.

    카랑카랑한 호각 소리가 끊기기 무섭게 왼손을 쭉 뻗은 심판이 영동초의 골대를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중앙초의 프리킥!”

    “아니, 이게 왜 반칙이에요?!”

    “경합 과정에서 뒤에서 미는 건 위험한 행동이야. 늦게 뛰었으면 상대의 중심을 흔들지 말았어야지. 크게 다칠 수도 있어.”

    “무슨 소리에요! 처음부터 공이 닿지도 않을 자리에서 점프를 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심판에게 어필을 하던 민기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애매한 패스와 무리한 점프가 모두 프리킥을 얻기 위한 설계였다고?

    거기까지 생각을 떠올렸던 민기는 잔뜩 굳은 얼굴로 천천히 공이 놓인 위치를 향해 다가오는 재혁을 노려보았고, 재혁은 그런 민기를 상대로 무표정하게 자리를 지켰다.

    아니, 무표정한 게 아니었다.

    애초부터 재혁은 자신이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고, 프리킥을 찰 자리에서 골대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뿌드득.

    분노로 이가 갈렸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벽에 네 명! 조금 더 오른쪽으로 움직여!”

    “중앙에서 뛰어 들어가는 사람 놓치지 마!”

    “셋을 세면 동시에 뛰는 거다! 절대로 공이 그냥 넘어가게 두지마!”

    경기가 시작되고 채 3분이 흐르지 않았건만 갑자기 찾아온 위험 지역에서의 프리킥 상황.

    골키퍼는 벽이 된 선수들에게 위치 조정을 위한 지시를 내렸고, 벽에 포함되지 않은 선수들은 각자 달려들 상대 선수들을 마크하기 위해 잔발을 굴리면서 마크를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공이 놓여 있는 프리킥 지점에서 지켜보고 있던 재혁은···.

    “후우, 하아.”

    짧게 숨을 고르고 벽의 위치와 골키퍼, 그리고 골대를 노려보면서 긴장을 풀기 위해 애써 손을 털었다.

    ‘두 번은 안 올 기회야.’

    경기 초반, 상대 성향을 예측하고 프리킥을 얻기 위한 단발성 맞춤 전술.

    이 프리킥을 얻어내기 위해 감독과 코치, 그리고 동료들이 모두 노력을 해줬다.

    이제 찾아온 기회를 살리는 것은 자신의 발에 달려 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재혁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긴장감에 미쳐버린 게 아니었다.

    축구가 주는 이 텐션이 그동안 그리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긴장 뒤에 찾아올 기쁨과 환희.

    그것을 기억하면서 재혁이 천천히 뒤로 물러난 다음 힘차게 도약하며 멈춰있던 공을 찼고, 인프론트에 감긴 공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멋진 궤적을 보여주며 허공을 갈랐다.

    공이 착지하기 전에 이미 그물이 출렁일 것을 예측한 재혁이 불끈 쥔 오른손을 하늘을 향해 뻗었고.

    철썩!

    그 직후 예상대로 공은 골대 오른쪽 상단에 틀어박히면서 중앙초에 선취점을 안겨주었다.

    ***

    재혁의 선취점이 터지기 무섭게 운동장 전역이 술렁였다.

    중앙초가 앉아 있는 원정 석은 기쁨으로 재혁의 이름을 연호했고, 영동초의 진영에선 채용우 감독이 실점하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선수들을 향해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두 진영에 속하지 않고 스탠드 중앙에 위치한 미디어 지역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취재진들은 지금 자신들이 보고 있는 점수판이 맞는 지를 의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지금?”

    “중앙초에서 먼저 골을 넣었다고? 아직 5분도 안 지났는데?”

    “뭐하고 있어? 일단 카메라 들고 찍어! 골 넣은 선수 누구야?”

    “중앙초의 8번입니다!”

    “알면 일단 찍으라고!”

    다른 기자들 사이에서 한국 스포츠 미디어에서 취재를 나온 이상민 기자가 옆에 앉아 있는 수습기자를 향해 호통을 친 후 손을 뻗어 출전 선수 명단을 집었다.

    영동초 선수들에 대한 취재 정보만 잔뜩 적혀 있는 선수 명단에서 검지를 뻗어 중앙초의 8번을 찍은 이상민 기자가 최재혁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뒤 고개를 들어 운동장에서 재혁을 찾았다.

    “저 녀석이 최재혁.”

    동료들에게 환호를 받고 다시 본래 진영으로 돌아가고 있는 재혁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상민이 수첩을 꺼내들었다.

    대한축구협회에 반강제로 동원되어 나온 취재였는데, 아무래도 재밌는 녀석을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말이다.

    < 8. 첫 경기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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