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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미드필더-5화 (5/225)
  • < 5. 가장 좋아하는 것 >

    아직 어스름한 하늘을 배경으로 운동장 위에 선 재혁은 먼저 리프팅을 시작했다.

    축구의 기본이 되는 트래핑과 공에 대한 지속적인 감각을 연습할 수 있고, 발등을 이용한 리프팅은 분명 슈팅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으니, 연습의 시작으로 이만한 훈련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낮은 자세로 지속적으로 리프팅을 이어간다면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훈련에도 도움이 될 터. 이는 당장 근육을 쌓을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재혁에게 꼭 필요한 훈련이었다.

    ‘지금 당장 근육량을 갑자기 늘리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 해. 그러니 기본기부터 다시금 다지면서 조급해 하지 말고 천천히 준비해야 한다.’

    처음엔 발등. 발등에 조금 익숙해지자 발 안쪽으로 차는 방법을 섞었고, 다음으로 아웃사이드, 후에는 무릎과 허벅지, 마지막으로 머리로 공을 다루는 것까지 순차적으로 공을 다루는 부위와 면적을 바꿔가면서 재혁은 공을 다루는 감각에 점차 능숙해져갔다.

    그렇게 대략 한 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리프팅으로만 시간을 보낸 재혁은 다음 개인 훈련에 들어갔다.

    먼저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민혁의 눈으로 여유있게 넓은 공간과 평평한 벽이 세워져 있는 장소가 들어왔다.

    곧장 그곳으로 향한 재혁은 잠시간 눈을 감고 이미지를 떠올렸다.

    ‘만약 실제 경기 중 나에게 패스가 온다면 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주어질 보기가 다양한 했던 것처럼 선택지도 한 가지가 아니었다.

    땅볼 패스,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패스, 발을 뻗어 트래핑을 시도해야 할 패스 등등, 시작점이 매번 달랐고, 패스를 받을 때 등뒤에 상대편 선수가 있을 수도, 혹은 없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 중에서도 만약 상대 선수가 내가 패스를 받으려는 것을 방해하려 한다면?

    ‘나는 당연히 공을 지키기 위해 등을 진 후,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동작으로 이어가야겠지. 상대가 바짝 뒤에 붙었을 때에 적절한 행동으로는···.’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이미지를 떠올리고, 행동하기를 머릿속으로 수십 번.

    재혁은 대략적으로 자주 일어날 법한 몇 가지 상황들에 대한 대처법을 주로 생각하다가 마침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몸을 움직였다.

    빠른 속도로 제자리에서 잔발로 드리블을 치던 재혁은 비스듬한 각도로 벽을 향해 공을 차더니, 공이 벽에서 튕겨져 다시 돌아올 위치를 향해 전력으로 내달린 후, 튕겨 나온 공을 발로 받아냄과 동시에 그동안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던 연결 동작을 취하면서 이미지 속의 상대에게서 벗어나려 노력했다.

    보이지 않는 상대와 등을 지고 있다가 발을 향해 날아드는 공을 한 차례 가볍게 건드리면서 곧장 뒤꿈치로 각도만 살짝 꺾어냄과 함께 몸을 틀어 이미지 속 상대를 제친 재혁이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나쁘지 않았어. 몸이 어려서 신체적인 단련을 하긴 힘들지만, 반대로 관절이 유연하니까 연결 동작이 부드럽구나.”

    확실히 중학생 때 훈련을 시작하던 것에 비하면 습득 속도가 빨랐다.

    이미 머리로 행동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도 분명히 한 몫하고 있었겠지만, 유연한 관절은 그가 원하던 동작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언뜻 무너질 뻔한 몸의 균형도 손쉽게 되찾아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이리라. 뇌의 기억력처럼 몸의 기억력도 결국 신체 나이를 따라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초등학생 6학년이라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앞으로 성장할 잠재적인 기간이 무궁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재혁은 멈췄던 발과 몸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을 더 운동하고 나서야 재혁은 교실로 향했다.

    ***

    학교 수업은 어렵지는 않았지만 지루했다.

    아무리 어릴 때 공부를 하지 않았고 수업 중에는 잠만 잤던 그였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전생동안 경험했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으니 초등학교 과정 정도는 우스웠던 것이다.

    덕분에 짬이 날 때면 간간이 눈을 붙이고 조각 잠을 잘 수 있었는데, 새벽 훈련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쉬는 시간에 드르륵 뒷문이 열리더니 동생 재희가 울상이 된 얼굴로 재혁을 찾아온 것이다.

    “오빠! 왜 오늘 나 버리고 혼자 갔어?”

    “어? 버리다니. 오빠가 재희를 왜 버려?”

    당황한 목소리로 재혁이 되묻자 재희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재혁의 품에서 울기 시작했다.

    “그치만 오늘 학교 혼자 갔잖아! 히힝···, 재희가 자는 사이에 혼자서 학교가구···. 오늘 혼자 학교 오면서 얼마나 울었는데! 오빠도 재희 버리고 멀리 가버릴꺼야? 아빠, 엄마처럼?”

    사고로 돌아가신 두 분에 대한 이야기를 재희가 꺼내자 재혁의 몸이 순간적으로 얼었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이미 머릿속으로 두 분의 죽음을 진즉에 이해하고 있었지만, 어린 재희는 아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두 분이 죽은 게 아니라 멀리 떠나버렸다고 믿고 있는 재희의 말을 듣고 재혁이 동생의 머리칼을 쓸어주면서 말했다.

    “아냐. 그냥 오늘은 운동하려고 일찍 나왔던 거야. 내일부터는 다시 같이 등교하자.”

    “정말이지?”

    “그럼.”

    손을 쭉 내밀어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을 찍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배시시 웃기 시작한 재희는 학교 끝나고 꼭 같이 집에 가자고 소리치더니 6학년 교실을 빠져나갔다.

    ‘내일부터는 조금 일찍 끝내고 마무리로 조깅을 해야겠다. 가방은 교실에 놓고 집까지 뛰어가면 체력 훈련으로는 딱이겠네.’

    재희 덕에 새로이 추가된 훈련 스케쥴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재혁이 자리로 돌아와 앉았고, 그의 곁으로 세훈이 다가와 웃으면서 물었다.

    “오빠 노릇 좀 잘하지 그랬어?”

    “잘하고 있거든.”

    “그런데 동생이 우냐? 에잉, 나쁜 오빠놈.”

    “아직 어려서 그래. 아마 사춘기라도 오면 오빠고 뭐고 다 자기가 혼자서 하겠다고 하겠지.”

    “그런 말을 하는 넌 사춘기 안 오냐?”

    “이미 오춘기시다.”

    세훈의 장난스러운 말을 재혁이 장난으로 받으면서 책상을 정리했고, 그런 재혁을 빤히 바라보던 세훈이 또 한 번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거야?”

    “뭘?”

    “알면서 뭘 물어? 축구부 말야. 들어갈 거지?”

    새삼 진지하게 묻는 세훈을 빤히 바라보던 재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오늘부터 함께 운동할 친구다. 아마 같은 학교니까 이미 서로 아는 애들도 있겠지만, 아직 모르는 친구들을 위해 짧게 자기소개를 해줄래?”

    종철이 운동장 위에서 축구부 학생들을 앞에 두고서 옆에 나란히 서있는 재혁을 향해 물었고, 재혁은 알겠다는 말과 함께 소개를 이었다.

    “중앙초등학교 6학년 2반 최재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게 끝?”

    “딱히 뭐 더 할 게 있나요?”

    당황한 감독을 향해 재혁이 되묻자, 종철이 뺨을 긁적였다.

    “뭐, 특기라던가, 좋아하는 거. 이런 기본적인 것들 많잖아?”

    “하지만 그건 축구랑 관계없는 거잖아요?”

    “흐음. 그러면 축구랑 관계있는 소개를 하는 건 어때?”

    감독이 재차 묻는 것에 재혁은 잠시간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계속 했다.

    “특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패스하기를 좋아하고, 가능하다면 드리블은 필요할 때만 하는 주의입니다. 주로 사용하는 발은 오른발이니까 이쪽으로 패스를 주면 좋겠네요. 포지션은 미드필더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축구부원들을 향해 말을 이어가던 재혁이 다시금 진지한 눈빛으로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이곳에는 대회에서 우승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게 경기에서 이기는 거거든요.”

    ***

    똑똑.

    “감독님, 들어가겠습니다.”

    가볍게 노크를 한 후, 영동초등학교의 코치 하정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자리에 앉아 서류더미를 살펴보고 있던 영동초의 감독, 채용우가 고개를 들었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팔자를 그리고 있는 눈썹이 유난히 고집스러워 보이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는데, 실제 성격도 불같은 채용우 감독은 하정수 코치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곧장 물었다.

    “이적 서류 깨끗하게 해결 됐어?”

    “네. 세 명 모두 문제없을 거라고 협회에서 공식 문서를 보내줬습니다.”

    “후우, 다행이군. 그거 때문에 요즘 밤에 잠을 못 잤는데 말야. 그 녀석들을 데리고 오려고 얼마나 용을 썼는데. 전반기를 통으로 쉬게 할 순 없지.”

    초등학교 리그 조별 예선을 의미하는 전반기를 힘주어 말하면서 채용우 감독이 그제야 눈썹에 힘을 풀었고, 하정수 코치는 감독이 앉아 있는 자리 위로 대한축구협회의 선명한 날인이 찍혀 있는 문서를 내려놓았다.

    가장 위에 ‘이적 허용’이라는 단어가 큼직하게 박혀 있는 문서였다.

    서류가 책상에 닿기 무섭게 냉큼 손으로 집어든 채용우 감독이 실실 웃었다.

    “이걸로 올해 우승 스쿼드가 완성된 거야. 박민기, 김호준, 최준. 수비, 중앙, 공격에 핵심이 될 선수들이 모두 모였으니 말이지.”

    채감독이 언급한 셋은 아직 어린 선수들이나, 모두 프로 선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타고났다고 알려진 아이들이었다.

    못해도 국내 리그, 최대 유럽 진출과 국가대표 선수로 까지 성장할 수 있을 것이리라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었고, 채용우 감독의 기대치도 다른 이들에 비해 절대 낮지 않았다.

    올해에는 이들과 함께 라면 기필코 대회 우승을 노릴 수 있을 것이리라.

    그런 기대감이 이제는 서서히 확신으로 굳어가고 있을 때, 하코치가 또 다른 서류 더미를 그의 책상 위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건 부탁하셨던 같은 조에 엮인 팀들의 전력 보고서입니다. 순서대로 소정초, 대정초, 그리고 중앙초입니다.”

    “고맙군. 리그 시작이 앞으로 한 달 정도 남았나? 딱 필요할 때 마침 정리해줬어.”

    이적 허용 서류를 내려놓고 이제 전력 보고서를 손에 쥔 채감독은 서둘러 보고서를 펼치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앞으로 정확히 한 달 뒤에 리그가 시작될 터이니, 준비해야 할 구석들이 많았던 것이다.

    가장 먼저 소정초와 관련된 보고서를 쭉 훑어보던 채감독이 비릿한 미소를 떠올렸다.

    “3회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도 이제 옛말이지. 결국 제대로 된 스쿼드 구성에 실패했군. 세대교체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한 결과야.”

    “그에 비하면 대정초는 상황이 좋은 편이죠. 자원을 보고 따라온 학생들이 제법 성장해준 케이스니까요.”

    “하지만 거긴 양승훈이가 감독으로 있는 곳이잖아? 감독이 바뀌지 않으면 백날 제자리야. 지지 않는 경기를 하려고 맨날 무만 캐는 곳이잖아? 장비가 좋으면 뭘하나, 그걸 쓰는 머리가 꽝인데. 그런 의미에서 중앙초는···.”

    서류들을 훌훌 넘기면서 읽어보던 채감독이 마지막 장인 중앙초등학교와 관련된 내용들을 눈앞에 두고 미간을 모았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올해도 최약체겠군.”

    “그나마 골키퍼를 보는 아이가 괜찮지 않습니까?”

    “축구에서 골키퍼가 빛이 난다는 건 필드 플레이어들이 전부 물이란 소리야. 특히 이런 초등학교 리그에서는 더더욱 말이지. 그 중에서도 허리, 중원에서 뛸만한 선수가 여전히 한 명도 보이질 않으니···.”

    쯧쯧, 혀를 차던 채감독이 천천히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은 뒤 피식 실소를 흘렸다.

    “올해에는 감독직에서 잘리려나? 그 자식, 협회에서 챙겨 주는 밥이나 조용히 먹을 것이지. 이래서 사람은 튀면 안 돼.”

    “동감입니다. 그러면 대비 훈련은 어떻게 할까요?”

    새로운 메모지를 꺼내 손에 쥔 하코치가 감독에게 물었고, 채감독은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답했다.

    “소정초를 상대할 땐 기본적인 전술을 유지하면 될 것. 대정초는 압박을 최대한 유지할 수 있게, 그리고 중앙초는···.”

    잠시간 뜸을 들이던 채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끊었던 말을 이었다.

    “허리가 약점이니 중앙을 두 겹으로 두텁게 쌓는 식으로 준비하면 되겠어. 우리 첫 경기가 중앙초였지? 맞춤 전술로 나가서 가볍게 1승부터 챙기자고.”

    < 5. 가장 좋아하는 것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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