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365화 (완결) (36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65화>

    ***

    여기는 망망대해.

    나는 지금 망망대해에 나와있다.

    그것도 형님과 같이 말이지.

    “거의 다 도착 했다는구나.”

    “···”

    “설마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건 아니지? 언제는 화가 다 풀렸다면서?”

    화.

    다 풀렸다, 풀렸고 말고.

    비록 버킷리스트들을 실행에 옮기고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이 망망대해에 까지 나와있지만, 그래도 화는 다 풀렸다.

    진짜로 다 풀렸고 말고!

    “진성아?”

    “왜요, 왜요, 왜!”

    “왜 또 소리를 지르고 그러느냐. 진성이 너도 참 변했다. 옛날에는 참 순진하고, 착하고 그랬는데······.”

    “세상사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타락하고, 변심하고, 예? 게다가 사람 마음이 한결 같으면 그게 더 이상하죠. 지금 내가 에? 어후!”

    말을 말자, 말어.

    나만 답답해질 뿐이다.

    긁적긁적.

    “화 풀거라. 그래도 이 방법 밖에는 없지 않았느냐. 오죽하면 대사헌도 묘수라고 했고.”

    묘수······.

    비록 버킷리스트에는 추가 시키지 않았지만, 퇴위하고 나서 다짐한 게 하나 있다.

    이제 끔찍했던 왕위에서 내려왔으니 착하고 바른 마음으로, 예쁜 말만 하고 살자.

    그래서 욕은 절대 하지 말자.

    미안하지만 마지막으로 욕 한 번 해야겠다.

    시발! 시발!

    아주 시발x1000이다.

    묘수는 묘수지.

    형님이 편전에서 방법이라고 제시한 건, 다음과 같았다.

    1. 이미 황제에게 정예군을 몰고 구원을 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2. 이건 하늘이 두쪽 나도,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물릴 수 없는 일이다.

    3. 때마침 부산진에 건조 중인, 건조 된 거선(巨船)들이 있다.

    4. 직접 진수(進水)도 해봐야 한다.

    5. 이 거선들 전부 아메리카 까지 갈 목적으로 만든 배인데 진수한 김에 튼튼한 지 확인도 해봐야 할 것 같다. 침몰하면 곤란하니까.

    6. 튼튼한 지 확인하는 김에 황제와의 약조를 지키면 된다.

    7. 그럼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논리라고는 1도 찾아 볼 수 없는 게 바로 형님이 제시한 방법이었다.

    그랬는데······.

    글쎄, 대신들이 뭐라는 줄 알아?

    묘수라나 뭐라나.

    사신을 다시 보내서 말을 정정 할 수도 없고, 이제와서 말을 도로 물릴 수도 없으니 대신들 입장에서 가장 퍼펙트한 방법이 정덕제에게 보낸 친서처럼 내가 친정을 가는 거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묘수라니!

    이게 묘수라니!

    하, 시발!

    하고 욕이 절로 나오지만, 아까 마지막으로 욕 하기로 했으니 이제 더 이상 욕은 않겠다.

    “형님이 그런 편지만 안 쓰셨으면 굳이 이럴 필요도 없었잖습니까······.”

    “하하. 그건 미안하게 됐다니까, 그러는 구나. 내가 다 너랑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런다. 형제 간에 이 뭐랄까··· 우애가 좀 부족해지는 어떤 느낌이었달까? 한데 이리 시간을 보내게 됐으니 우애도 다지고 얼마나 좋으냐?”

    “···약조는 꼭 지키세요.”

    “그럼. 지켜야지.”

    어쩔 수 없이 또 전장터에 끌려가게 됐지만 난 살아야겠다.

    그래서 형님한테 세 가지 약조를 좀 받았다.

    첫째, 조선군은 참전하지 않기.

    둘째, 전쟁 마무리 되는 대로 무조건 돌아가기.

    셋째, 얼렁뚱땅 아메리카 가지 않기.

    이렇게 세 가지 약조 말이다.

    첫 번째는, 남의 나라 전쟁이다. 괜히 전장 나갔다가 눈 먼 화살 맞고 다치면 그만큼 억울한 일이 없을 거다.

    두 번째도 같다. 지금 명나라는 톈진성의 일만 해결 한다고 내분이 정리 되는 게 아니었다. 괜히 주둔해 있다가 내분에 휩싸이면 곤란하다.

    마지막 세 번째.

    사실 이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

    그렇잖아, 굳이 부산진에서 건조한 거선들을 진수 목적으로, 시험을 핑계로 몰고 나온 것부터가 그 의도가 의심 되잖아.

    진수야 부산진 앞바다에 띄우면 되는 거고, 시범 운행?

    수군들 시켜서 한바퀴 돌게 하면 그게 시범 운행이다.

    근데 굳이, 굳이 이 거선들로 함대를 만들어서 톈진까지 가니 의심이 될 수 밖에.

    그래서 약조를 받아낸 거다.

    얼렁뚱땅 미대륙 탐험하겠다고 할까봐.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 형의 말을 그리도 못 믿는 게냐. 아무렴 내가 널 속이려고.”

    “한 두 번이어야죠. 섭정 했을 때도 그렇고······.”

    대리청정 조금만 맡아 달라더니, 그 조금이 몇 년으로 늘어났고, 그러다가 얼렁뚱땅 양위까지 받았었다.

    한 두 번 속아?

    “그나저나 그 버킷 뭔지는 다 썼더냐?”

    못 미더워하는 눈치를 계속해서 보내자 형님이 머쓱해졌는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화제를 전환하셨다.

    끌려온 게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 나서 계속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고 오죽하면 화제까지 전환 하실까 싶어 응해드렸다.

    “네, 누구 덕에요.”

    알다시피 내 버킷리스트는 퇴위 후,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이었다.

    그런데 역시나 알다시피 그게 톈진행이 결정되면서 말짱 도루묵이 됐다.

    뭐, 망망대해에서 무예를 연마할 거야, 망망대해에서 요리를 배워 볼 거야?

    그나마 시 쓰기 정도는 할 수 있겠네.

    배에서 할 것도 없고 복잡한 머리도 정리할 겸, <퇴위 후, 버킷리스트>에서 <귀국 후, 버킷리스트>로 바꿔서 버킷리스트도 정리, 추가를 좀 해봤다.

    “흠, 어째 말에 가시가 돋힌 것 같긴 하다만 착각이겠지?”

    “예. 착각이십니다.”

    “하하, 그럼 내것도 좀 봐주거라. 나도 좀 써봤는데 이렇게 쓰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구나.”

    아니, 무슨 버킷리스트에 맞고 틀리고가 어딨어요!

    또 한 번 버럭 소리쳐버릴 뻔 했다.

    이거 확실히 릴렉스 해야 되겠다. 이러다 일 치르겠어.

    심호흡 몇 번과 함께 형님이 쓴 버킷리스트를 건네받았다.

    “풉.”

    그러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왜, 뭐가 이상한 것이냐? 아니면 그 버킷 뭔지의 목적에 맞지 않게 쓴 것이냐?”

    “아뇨, 아뇨. 잘 쓰셨어요.”

    “근데 왜 웃는 것이냐.”

    “생각보다 소박하셔서요.”

    긁적긁적.

    “그래? 한데 네가 버킷 뭔지란 게 원래 크든 작든, 하고 싶었던 걸 쓰는 거라면서? 내 그래서 써본 것이다.”

    “네네, 맞아요. 잘 쓰셨어요.”

    쓰긴 잘 썼다.

    봐라.

    《불혹이 되기 전까지 이룰, 할 일들》

    一. 창우로서 극에 도전하기

    二. 나례에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처용무 추기

    三. 예흥청 정재인들에게 가(歌)를 배우고 뽐내기

    四. 공신들에게 어제시 하사하기

    생각보다 소박하지 않나?

    아, 창우는 21세기 말로 하면 배우를 뜻한다.

    정재인은 굳이 비유하면 뮤지컬 배우 정도?

    그러니까, 창우로서 극에 도전한다는 건 배우가 돼서 연극 주연을 맡아보겠다는 거고, 예흥청 정재인들에게 가를 배우고 뽐낸다는 건 뮤지컬 배우에게 노래를 직접 배우고 노래자랑을 하겠다는 뜻이다.

    뭔가 거창한 것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다.

    근데······.

    “형님 이건 뭡니까?”

    十六. 벗과 함께 여행가기(어디든)

    형님의 버킷리스트를 읽어내려가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벗과 함께 여행가기 라니.

    내가 알기로 형님한테 벗은 없다.

    나는 동생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신하잖나.

    “아, 그거.”

    “네. 형님한테 제가 모르는 벗도 있으셨습니까?”

    “있지.”

    “누군데요.”

    “주수 있잖느냐.”

    주수?

    “주수가 누군데요?”

    “명나라 대장군.”

    내가 아는 명나라 대장군은··· 엥?

    “황제를 말씀하십니까?”

    “아니, 대장군을 이름이다.”

    “그러니까, 황제요.”

    “뭐, 그렇게 생각하려면 그렇게 생각하거라.”

    “언제부터 황제랑 친구하기로 하셨습니까?”

    “언제부터였더라··· 글쎄, 좀 된 것 같구나.”

    “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터져나왔다.

    그런 내 모습이 불안해서였을까.

    “왜, 그 버킷 뭔지를 내가 잘 이해 못 하고 쓴 것이냐?”

    “아뇨, 아뇨. 잘 쓰셨다니까요. 정말 잘 쓰셨어요.”

    “그래?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내 그것들 고르느라 밤을 다 샜을 지경이다. 어찌나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던지··· 하하.”

    아이처럼 기뻐하는 형님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뭐.

    내가 이해야지. 오죽하면 저러시겠어.

    “아, 그리고 진성아.”

    “말씀하세요.”

    “네가 불안해 하는 듯 해서 하는 말인데 말이다. 전쟁이라고 불안해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내 아까 잠깐 졸았는데 글쎄, 길몽을 꾼 것 같지 뭐냐.”

    “길몽이요? 어떤 꿈이었길래 그러십니까?”

    “그게 그러니까, 어떤 꿈이었냐면 말이다······.”

    꿈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지만, 그 말도 형님과 나 사이에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형님이 곧 길몽이라고 꾼 꿈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

    2019년 상반기 대한제국의 기대작을 꼽자면 단연《왕과 동생》을 꼽을 수 있을 터였다.

    소재 자체도 대한제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1, 2위를 다투는 무종과 중종의 우애를 다루고 있는데다, 2014년 혜성처럼 등장해서 지난 몇 년 간 브라운관~스크린을 넘나들면서 대활약을 하고 있는 배우 이백돌이 처음으로 선보이는 사극 영화기도 해서 영화인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영화라 할 수 있었다.

    제국 호텔 무종 홀에서 진행 된 시사회 현장은 당연히 사람들로 붐빌 수 밖에 없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관객들의 호평일색이 이어지면서 곧 기자간담회도 진행이 됐다.

    톱스타 이백돌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의 시사회&기자간담회 답게 현장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시간에 맞춰 감독과 배우진들이 차례로 현장에 들어왔다.

    시사회에서 호평을 받았으니 원래라면 감독에게 질문공세가 쏟아졌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중용일보의 의강석 기자입니다. 이백돌 씨. 첫 사극에 도전하셨는데 영화를 본 관객들의 호평이 아주 대단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극에 도전 할 생각을 하셨습니까?”

    다소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던 배우 이백돌은 의강석 기자의 말에 꼰 다리를 풀고 왼쪽 출입문을 흘겼다.

    “동생의 권유였소.”

    “아, 동생이라면 매니저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소.”

    “그러고 보니 매니저 분과의 우정도 인터넷 상에서는 화제인데요. 매니저 분이 어떻게 권유 하셨길래 여태 반려하던 사극에 도전하신 겁니까?”

    “내가 잘 하는 것이니 오랜만에 한 번 해보라고 했소이다.”

    “잘 하는 것이라면···?”

    “무종 역할 말이오. 무종 역을 맡을 나만한 배우가 또 없다고 하더이다. 하핫.”

    “네, 과연 매니저 분의 안목이 대단한데요. 영화를 보고 나서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익히 알려진 무종의 이미지와도 100% 일치 하는 것 같아서 소름이 다 돋을 정도였습니다. 영화 잘 봤습니다.”

    “별 말씀을······.”

    “대한일보의 상형중 기자입니다. 알려진 바로는 영화 촬영 중에 감독님과 시나리오 문제로 약간의 트러블이 있다고 들었는데 정확히 어떤 트러블이었나요?”

    “아, 그거요. 시나리오를 보는데 무종의 이미지를 감독 양반이 잘못 해석 했지 뭐요.”

    “잘못 해석을 했다니 어떤 말씀이십니까?”

    “무종을 냉혈한으로 묘사하려 했소이다. 근데, 냉혈한이 아니거든. 무종은 요즘 말로 애정결핍이었던 거요. 어미의 사랑도 받지 못 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또 무시를 당했으니 자연스럽게 성격에 문제가 생겼던 게지. 그래도 그걸 잘 참고서 정사를 돌봤으니 어찌 냉혈한으로 묘사를 해야만 했겠소. 이 부분에서 항의를 좀 했을 뿐이오.”

    “아··· 그럼 방금 시사회에서 본 무종은 이백돌 씨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요.”

    “뭐, 감독 양반이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도 할 수 있소.”

    “네, 다음 질문입니다. 관객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중에, 작중 장면 중에 키스 씬이 있었는데요. 이 부분은······.”

    기자간담회는 장장 세시간이나 더 이어졌다.

    그리고 세시간 뒤, 간담회가 끝이났다.

    이백돌이 찌부등한 몸도 풀 겸, 스트레칭을 하고 있자 그의 곁으로 청자켓이 인상적인 청년이 다가오더니 콜라를 건넸다.

    “형, 여기 콜라요.”

    “오, 콜라. 먹어도 먹어도 이 목구멍이 짜르르한 느낌은 적응이 안 되는 콜라.”

    피식.

    “콜라가 그렇게 좋으세요?”

    “아, 그럼 좋다 마다. 얼마나 시원한지 모른다, 진성아.”

    “아, 또. 여기서는 현호라니까요.”

    “맞다. 깜빡했다. 근데 다음 일정은 뭐냐?”

    현호가 빠릿하게 수첩을 꺼내들었다.

    “아, 다음 일정은요······.”

    [나무옥희 검색어 : 중종]

    검색어 : 중종

    조선 제11대 국왕/추존황제

    묘호 : 중종(中宗)

    사후 시호 : 문경휘무흠인성혜통천선원명헌목강(文景徽武欽仁成惠通天善元明獻穆康)

    추존 시호 : 문경휘무흠인성혜통천선원명헌목강계극덕흥운장철효성황제(文景徽武欽仁成惠通天善元明獻穆康繼極德弘運章哲孝成皇帝)

    성 : 이(李)

    휘 : 역(懌)

    자 : 낙천(樂天)

    별칭 : 장수왕【장수해서 장수왕이다...】, 애처왕【애처가라고 해서 애처왕이다...】, 당구왕【다들 무종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당구의 창시자는 중종이다】

    작위 : 조선왕, 요동왕, 중산왕

    사망지 : 경창궁 태성전

    능묘 : 정릉(靖陵)

    왕비 : 공선왕후(公善王后)

    자녀 : 의온공주(懿溫公主) 이신배, 심양대군(瀋陽大君) 이인곤(李仁滾)

    생몰기간 : 1488년 3월 5일 ~ 1561년 7월1일

    재위기간 : 1508년 8월 20일 ~ 1511년 3월 25일

    1) 개요.

    조선의 제11대 국왕, 조선 역사상... 아니,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형에게 강제로(?) 옹립 된 왕.

    강제로 옹립 됐지만, 형인 무종에 의해 옹립 됐기 때문에 매우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다. 학자들은 이 무종~중종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의 신권이 대폭 축소 됐다고 본다.

    2) 생애.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왕이 되기 전까지 진성대군으로 불리다가 무종에 의해 대원군【조선 최초의 작위이며 대군들 중 으뜸이라 해서 대원군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에 봉해진다

    무종과는 이복 형제지간으로, 무종은 폐비 윤씨【제헌왕후(齊獻王后)는 무종이 존호와 함께 올린 시호이다. 그전에는 폐비 윤씨라고만 불렸다. 패왕효자ㄷㄷ】의 자식이며 중종은 정실 소생이므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경우 권력을 위협한다 오해받고 희생될 소지가 다분한데도 용케 살았다.

    아니, 거기다가 왕까지【드문 케이스라 학자들에게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하는 모양...】됐다!

    처음부터 무종과 사이가 매끄러웠던 것은 아니고 언제부턴가 갑자기 변했다고 한다.

    실제로 무종이 남긴 회고록 《군일록(君日錄)》에 보면 아주 상세히 나와있는데, 무종은 ‘갑자기 진성이 다른 사람처럼 행동해 당황스러웠지만 남 눈치 안 보고, 이전처럼 내 눈치를 안 보는 호탕한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라는 기록을 남겼다.

    어색한 형제의 사이가 가까워진 것 역시 《군일록》에 아주 잘 나와있다. 《군일록》에 의하면 간적들 때문에 난처함을 겪을 때마다 진성이 구원투수로 등판한 모양이고, 무종은 이를 꽤 고마워 한 듯【사실 고마워 할 수 밖에 없었던 게 이때는 환국이 있기 전이라 무종도 지금의 패왕 이미지와는 거리가 좀 멀었다】 무종대 있었던 여러 환국들이 모두 이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도 있을 정도.

    어쨌든 무종과 친해진 중종은 당시에는 천시되던 장사로 큰 돈을 거머쥔다.

    참고로 당시 종친 세력들이 재산을 불리던 방법은 소작과 고리대였는데, 이때 당시에는 법적 제제는 물론이거니와 도의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지금에야 법적, 도의적으로 문제가 되는 거지...

    이런 보편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천시 되던 장사로 돈을 번 것은 확실히 무종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단, 여기에는 이견이 꽤 있으니 자세한 건 중종/삼성 문서를 참고할 것.

    대군으로, 삼성의 회장으로 탱자탱자 잘 먹고 잘 살던 중종의 평온한 일상에 변화가 생긴 건 전쟁이었다. 중종은 선비들이 말로만 식자의 의무를 외치고 실제로는 행동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자, 매우 실망하며 왕자인 본인이 전쟁에 나가겠다고 한다.

    무종이 말렸는데도 나간 걸 보면 어지간히 식자들에게 실망한 모양... 은 아니고, 중종의 회고록 《대군으로 살어리랏다》에 보면 당시의 일화가 아주 자세히 담겨 있는데 본인은 저렇게 우기다 보면 대신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돈도 좀 내놓고, 자발적으로 참가할 줄 알았다고 한다. 판단미스였던 셈.

    뭐, 전쟁에 나가서도 보급을 책임졌지만 때마침 반정이 터진다. 자세한 건 박원종의 난 문서를 참고할 것.

    이 반정을 중종이 회군하며 막는데 이때의 회군이 조선조 통틀어 가장 유명한 <벽단 회군>이다. 이때 중종의 회군이 없었다면 멍청한【제안대군이 일부러 멍청한 척 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당대 기록을 보면 정말로 약간 모자란 위인이었던 건 맞는 듯... 역대 반정으로 추대 된 왕들은 어떻게든 죽임을 당하는데 안 죽은 걸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제안대군이 왕위에 올라 지금의 대한제국도 없었을지 모른다.

    가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혼동하게끔 시험 문제를 출제하기도 하는 듯.

    아무튼 성공적으로 반군을 말고, 중종이 무종을 복위시키는데 무종의 신임이야 이루 말할 것도 없고, 두 형제의 우애도 깊어진다.

    자세한 건 중종/생애 참고할 것.

    2-1) 섭정승으로 살어리랏다

    어쩌다 보니 섭정승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섭정승 문서를 참고.

    3) 업적.

    ...많다 많아도 더럽게 많아서 이 문서 안에 다 담기도 힘들 지경이다. 오죽하면 무종~환종에 이르는 삼군의 시대를 중종이 열었다고 할까? 그래도 대표적인 것들만 적어본다.

    학자들마다 일치 된 의견을 보이는 중종의 업적은 계몽에 있다. 중종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결과론적으로 중종이 보인 행동은 지식인 계층을 계몽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는데 중용일보의 초대 사장 조광조의 《선비란 무엇이냐》와, 열기구의 아버지【만들기는 중종이 만들었지만 써먹기는 서경덕이 써먹었다】라고 불리는 서경덕의 《씹선비 론(論)》에도 아주 잘 나와있다.

    조광조는 본인의 사상을 중종이 타파 시켰다는 기록을 남기며 중종을 찬양했고, 중종의 제자였던 서경덕은 《씹선비 론(論)》에서 입이 닳도록 중종을 찬양했는데, ‘내가 전하를 뵙지 않았다면 나는 씹선비로 늙어 죽었을 것이다’라는 구절까지 남겼을 정도였다.

    이건 무종도 다르지 않는데 《군일록》에 의하면 미국【혹시나 하고 첨언하자면 나라 국(國)자가 붙지만 당연히 나라는 아니다. 그런데도 왜, 미국이냐면... 그냥. 오키나와랑 같다. 중종이 유구국이라 불리던 오키나와를 오키나와라고 불러 오키나와가 된 것처럼, 알려지지 않았던 미지의 대륙 미국을 미국이라 불러 미국이라 불렸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륙을 발견한 것도 중종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불가 했을 거라 기록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천연두가 불치병 취급 받아서 온갖 사람들이 죽어 나갔는데 이걸 중종이 박멸시켰다. 이게 의학이 발달한 요즘에야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지만 당시 열에 다섯은 이 천연두 때문에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치사율을 보인 병이었으니 사실 이것만으로도 성군으로 추앙받기 모자람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민족 무적 치트키 중종 답게 업적이 이게 전부가 아니었으니......

    여라 나라와 교역하게 해서 국부를 쌓게 했고, 꼰대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던 씹선비들을 박멸【심지어 일본에 수출까지 했다!!!】시키며 사치를 장려했고, 그 결과 나라에 돈이 돌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영토도 넓히는데 일조하는데 당시 대한제국의 영토는 한반도가 고작이었다. 무종~중종 시점을 기점으로 영토가 늘어나는데, 무종 때는 유구국을 오키나와로 편입시키며 늘어났고, 중종 때는 요동【알다시피 요동은 얼떨결에 꿀꺽하게 된 케이스긴 하다. 조선황제 정덕제가 내란 막기 힘들어서 잠깐 조선한테 맡긴 건데 그게 어쩌다 보니 500년 동안 이어져오고 있다... 그럼에도 영토 분쟁이 없는 건 정덕제가 중종을 요동왕에 봉하고 영토를 봉지로 하사한 내용이 확실하기 때문】을 영토로 편입시키며 비약적으로 영토가 커졌다.

    거기에 현대군가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데 지금도 군가로 사용되는 진짜 사나이라던가, 멸적의 횃불, 전선을 간다 등등의 군가는 모조리 중종이 작사, 작곡했다......

    또 조선 최초의 대학 기관도 중종때 탄생했다.

    이처럼 다방면에서 업적을 쌓았는데, 중종의 엉뚱하고 가벼운 이미지 때문에 이런 면이 간과되는 것이지, 이런 업적을 한 사람이 쌓았다는 건 사실 세계사적으로도 유일무이하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 할 것.

    4. 외모

    한마디로 요약 가능하다.

    잘 생겼다.

    중종은 역대 왕들과는 달리 어진(御眞)을 수십개 남겼는데 대군 시절의 초상화, 대원군 시절의 초상화, 임금 시절 초상화, 상왕 시절 초상화... 지금까지 발견 된 초상화만 40점이 넘는다.

    조선 최다 어진인셈...... 초상화도 각기 다른 화공들한테 맡겼는지 배경과 기법도 각양각색이라 전공자들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다.

    자화상도 직접 그렸는데 5점을 남긴 걸로 확인 되지만, 현재 알려진 건 3점이다.

    아무튼 이 어진을 통해 중종의 외모를 확인 할 수가 있는데 현대 기준으로도 잘 생겼다. 당대 문인들의 기록이라던가 실록, 심지어 죽을 때까지 중종을 보필한 하성군【중종의 가노이고 이름은 덕산... 환종이 상왕을 보필한 공이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여 면천과 함께 봉군하며 공신으로 책봉했다. 하성군을 시조로 하는 가문이 바로 한양 공씨.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고 할 것】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양갓집 규수들도 중종을 보면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한다.

    다만 중종 본인도 본인이 잘 생긴걸 자각했는지 가끔 잘 난 체도 했던 모양.

    4-1) 이미지

    순둥순둥한 모습, 애처가적인 면모만 보면 별 생각 없을 수 있겠지만 희한하게 바람둥이 이미지가 있다...

    사실 이건 중종 본인이 자초한(?) 사실이기도 한데 만날 본인이 소싯적에 어쨌네 저쨌네 하면서 거들먹거린 게 한 두 번이 아니어서 생긴 당대의 이미지가, 현대까지 이어진 거라고 볼 수 있다.

    자칭 연애박사(?) 인 게 거짓말이 아니긴 한 모양인지 하성군과 군부인【중종의 잠저 시절 몸종이었다. 이름은 전금】을 엮어준 게 바로 중종이다...

    하성군-군부인 뿐만이 아니라 영평군【익히 알려진 이름은 개똥이...】과 군부인【역시 중종의 몸종으로 있었는데 이름은 사혜다】을 엮어 준 것도 중종이다.

    이렇게만 보면 매파 이미지가 있어야 하는데 바람둥이 이미지가 있는 게 희한한 대목.

    5) 저서.

    바람둥이 이미지인 동시에 학구적인 이미지도 있는 건 저서 때문.

    꽤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익히 알려진 《대군으로 살어리랏다》외에도 각종 소설과, 시집을 남겼다.

    환종이 즉위한 지 7년쯤 되던 해부터는 역사에도 관심이 생겼는지 금석문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취미로 금석학을 시작했다. 【근데 말이 취미지, 돈 있고 빽 있는 사람의 취미라 그런지 금석학계에서는 금석학의 대부라고 불린다......】취미로 시작했지만, 취미로 끝내지 않고 연구를 거듭해 《해동금석》이라는 연구저서도 남겼다.

    6) 가치관, 성격

    특이 그 자체.

    어떤 면에서는 무종 보다 더 기인같다.

    일단 귀차니즘이 만렙인 건 확실하다는 게 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실제로 누군 못 해서 안달인(?) 왕자리를 4년만에 박차고 내려온 것도 그렇고, 정덕제가 봉지【요동왕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명목상의 봉지였다】로 하사한 요동도 됐다고, 새로 관직까지 신설해서 임숭재에게 맡겼을 정도다.

    <톈진성 구원작전> 이후 귀국 길에 무종은 중종과의 약조를 어기고 얼렁뚱땅 미국을 탐험하려 했는데, 이걸 눈치 챈 중종이 도망치다가 태풍에 표류를 한 적도 있었다.

    이게 그 유명한 중종의 저서《표해일록》의 배경이 된 그 표류 맞다......

    다만 귀차니즘과 별개로 마음씨는 굉장히 따뜻한 위인이었던 듯.

    엄청난 애처가였다는 것도 현대에는 잘 알려진 사실인데 자세한 건 해당 문서 내용 참고.

    7) 유물.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8) 평가.

    그 어떤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설명이 부족할 만큼, 한민족 역사 최고의 성군, 위인으로 손꼽힌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9) 말, 말, 말!

    요즘말로 트러블 메이커였다...

    당장 대신들을 씹선비라고 매도(?)한 발언들만 해도 그렇고, 공자니 맹자니 하는 성인들을 씹선비의 대명사라 씹어 댄 것만 해도 논란 제조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 발언들이었다. 공식석상에서는 이런 발언을 자제해서 망정이지, 만약 공식석상에서 저 말들을 했다면......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10) 이야깃거리.

    어느날은 하늘을 날아보이겠다고 선언했는데 당시 사람들이 모두 콧방귀를 뀌었다가 진짜 하늘을 날자 벙쪘다는 일화는 유명한 일화이고 그 외에도 각종 미담과 이야기가 참 많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11) 의혹

    툭 까놓고 미국이 왜 미국이고, 오키나와가 왜 오키나와인지에 대한 설명이 안 된다.

    지금이야 옛날부터 미국은 미국이라 불렀고, 오키나와는 오키나와라 불렀으니 미국이고 오키나와지만 중종 시대에는?

    각종 문헌에 의하면 당시 유구국이라 불리던 오키나와를 오키나와라 부른 것도, 미지의 대륙이던 미국을 미국이라 가장 먼저 부른 것도 중종이다.

    다만 중종이 미국을 왜 미국이라 불렀는지, 오키나와를 왜 오키나와라 불렀는지에 대한 의혹은 해결되지 않았다.

    의견만 분분할 뿐인데 그마저도 확실한 건 없다.

    이외에 고추와 같은 것도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고추 하면 중종이 떠오르고, 중종 하면 고추가 떠오른다.

    그 이유는 현대인들 모두 중종이 고추를 입에 달고 살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시에는 고추가 한반도에 없었다...

    미국 대륙 발견 전까지 고추는 넘어오지도 않았고, 알려진 식물도 아니었다. 그런데 중종은 고추의 존재는 물론이거니와 이를 이용한 음식까지 생각해냈으니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첫 아메리카 탐험 실패 이후, 2차 탐험이 성공하고 중종의 명에 의해 3차 탐험에서 탐험대가 고추를 발견, 고추를 들여오자마자 중종은 고추를 이용한 고추장, 떡볶이, 고춧가루, 김치, 김치찌개 등등의 요리를 만들어 먹었다.

    당연히 위와 같은 음식들은 지금이야 친숙한 것들이지만 중종 당대에는 없던 것들로, 모두 중종이 만든 것들이다.

    의아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속시원한 해답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여행자라고 주장 할 수도 없잖은가...

    그나마 생각 할 수 있는 설은 중종 미화설로, 이 모든 게 후대의 기록 조작이란 설이다. 다만 유력하진 않고 술자리 술안주 정도로 치부되는 설이다...

    참고로 시간여행자 설에 대해서는, 2014년에 <우리집 보스>로 데뷔한 영화배우 이백돌이 SNS에 ‘중종 시간 여행한 거 맞소ㅋㅋㅋㅋ’라는 글을 남겨 ‘중종이 니 친구냐?’, ‘허언도 정도껏 해라’ 같은 여론의 몰매를 맞고 글을 내린 적이 있다.

    다음날 이백돌이 취중에 실수로 올린 글이라 해명하며 일단락 된 사건으로 자세한 건 이백돌/SNS논란 문서를 참고 할 것.

    12) 친했던 사람

    원자-세자-왕의 정석적인 테크를 밞았던 게 아니라 대군-대원군-왕의 비주류(?) 테크를 밞았기 때문에 사적으로 교류하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도 대다수인데, 특히 부마인 임숭재와 가장 친했다. 임숭재는 중종보다 4년 일찍 죽었는데 임숭재가 죽었다는 소식에 중종이 꼭 부모가 죽은 것처럼 통곡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며, 잠저【경창궁을 말한다】에 설치한 당구대를 즉각 폐기시켜버렸다.

    임숭재와 특히 그 당구대로 놀이를 많이 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군신의 관계이기도 했지만 사적으로는 죽마고우라고 할 정도로 친했다.

    하성군 공덕산과도 단순히 주종 관계라 볼 수 없을 만큼 가까웠다. 참고로 공덕산은 생전에는 중종이 맨날 잔소리 한다고 툴툴 거렸는데 중종이 죽고 1년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죽기 전, ‘몸종이 된 상왕이, 배우가 된 태상왕을 따라다니는 걸 꿈에서 봤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었다.

    발이 넓었던 중종은 영평군 의주수와도 친했다. 의주수와 친해진 계기는 이야기가 길어질 수 밖에 없으므로 의주수 문서를 참고할 것.

    참고로 영평군 의주수는 훗날 환종의 사돈【영평군의 아들 의재홍이 환종의 딸인 청현공주와 결혼했다】이 된다.

    이외에도 서경덕, 반석평 등과도 친했고, 정덕제와도 친했다.

    다들 수업 시간에 졸지 않았으면 배웠겠지만 조선 최고의 과학자라 불리는 서경덕은 훗날 열기구를 군용으로 개조하는 데 성공한 공과, 미국 탐험을 성공 시킨 공으로 미국군(美國君)에 봉해진다.

    참고로 미국군의 미국은 우리가 아는 그 미국이 맞다.

    여담이지만, 반석평은 훗날 진성대학의 총장이 되고 따로 사비로 삼한대학을 설립하여 2개 대학의 총장을 역임한다.

    [나무옥희 검색어 : 무종]

    검색어 : 무종

    조선 제10대 국왕/추존황제

    묘호 : 무종(武宗)

    사후 시호 : 경천무명현모렬성순덕광운건곤도숙정문(敬天武明顯謨烈聖純德廣運健坤道肅正文)

    추존 시호 : 경천무명현모렬성순덕광운건곤도숙정문현효희경영효선황제(敬天武明顯謨烈聖純德廣運健坤道肅正顯孝熙敬永孝宣皇帝)

    성 : 이(李)

    휘 : 융(㦕)

    자 : 백천(白天), 성군(聖君)

    별칭 : 북장왕【북치고 장구친을 줄인 말로, 본인을 대장군으로 임명한 일만 봐도...】, 패왕【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작위 : 조선왕, 중산왕

    사망지 : 창덕궁 희정당

    능묘 : 선릉(宣陵)

    왕비 : 원덕왕후(元德王后)

    자녀 : 환종 이황, 창녕대군 이성, 휘신공주, 양평대군 이수돈

    생몰기간 : 1476년 11월 6일 ~ 1560년 7월 1일

    재위기간 : 1494년 12월25일 ~1508년 8월 20일

    1) 개요.

    조선의 제10대 국왕이자, 패왕.

    삼군의 시대를 알린 무종 시대를 연, 전무후무한 위인이자 성군.

    무종의 시대는 변혁의 시대라 할 수 있었다. 이때의 환국은 한민족 역사에 큰 변곡점이 되는데, 학자들은 이때 무종이 환국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제국은 없을 거라 평가할 정도다.

    2) 생애.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불우하게 자랐으면서도 잘 자란 사람을 무종에 빗댄다.

    또는 속담 중 하나로 ‘간신 속 무종났다’ 라고들 하는데 이런 말들은 결국 무종이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랐으면서도 성군이 됐기 때문이다.

    물론 후세 입장에서 성군이고 당대 팽형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보면 폭군은 아니더라도 패왕 그 자체였겠지만......

    철혈군주 이융은 성종과 폐비윤씨【제헌왕후라고 사후 무종이 올린 시호가 있지만 편의상 폐비라 칭한다】사이에서 1476년에 경복궁 교태전에서 태어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왕들은 정통성이 크게 없는 편이었는데 부왕인 성종만 보더라도 제안대군【박원종의 난 때 추대됐음에도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같은 일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에게 왕위가 돌아 갔어야 하는데 정희왕후에 의해 왕위에 올랐고, 그 위 세조는 조카 노산군【지금이야 단종으로 익히 알려졌지만 그건 중종이 복위를 시켜줬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노산군이라 불렸다】의 왕위를 강탈했다.

    어쨌거나 성종과 윤씨 사이에 적장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정통성이 세조, 성종과는 달리 또렷하고 확고한 임금이었다.

    연산군의 즉위 초는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 당시의 혼란한 정국에 관해서는 조선/세조~무종대 정치사를 참고 할 것.

    아무튼 아버지 성종처럼 선비들한테 칭송 받는 대단한 범생이(?)는 아니었지만 평범한 수준의 세자였다. 다만 아버지 성종이 언관들한테 시달린 모습을 원자 시절부터 봐왔기 때문인지【무종대 언관들이 찍소리도 못 한 것과 다르게 성종대는 달랐다. 성종이 똥 싸는 것 까지 트집 잡았을 정도......】 이들에 대한 증오심이 엄청났다.

    다만 세자 때는 그냥 싫어하는 수준 정도였다면, 즉위하고 나서는 아예 증오에 이르게 된다. 그들을 증오하게 된 계기가 바로 신하란 자들의 모순되는 행동들 때문이다.

    무종은 세자 때 미행 나갔다가 빈민이 들끓자, 성종에게 말해 이들을 구제한 기록도 있고 재난이 들끓으면 왕이 부덕한 것이라는 대신들의 말에 아버지 성종 대신 반찬 가짓수를 줄인 적도 있을 만큼 애민 정신이 투철한 군주였다.

    근데 이와 반대로 항상 백성을 위하라는 대신들이, 진짜 백성을 위해야 할 때는 백성을 외면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니 토악질이 나올 수 밖에......

    거기다가 무종이 즉위한 시점에는 제헌왕후【폐비윤씨】를 폐위시키는데 동조하거나 방관한 성종 대의 신진 관료들이 기득권이 됐을 즈음인데, 그들의 행태가 참으로 무종 입장에선 뒷목 잡을 일 뿐이었다.

    민휘의 일이라거나, 간신의 대명사로 꼽히는 윤필상이나, 이극균이나.....

    다들 앞뒤가 똑같았으면 모르겠는데 뒤가 구려도 너무 구렸기 때문에 언관과 대신들을 특히 더 증오 할 수 밖에 없었을 거다【이건 무종의 군일록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아무튼 그러다가 중종을 만나(?)면서 패왕의 기질에 눈을 뜨는데......

    라기 보다는 사실 그전부터 환국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정설이긴 하다. 이건 임사홍의 기록을 통해 검증 가능한 부분이니 자세한 건 환국의 중심에 있물/임사홍 문서를 참고할 것.

    환국을 통해 강력한 왕권을 얻자 경연도 폐했다. 이때는 폭군이 따로 없다고 욕을 들었지만 실상 지금 성군 소리 듣는 걸 보면 아이러니한 일.

    좌우지간 그 이후에는 옥희러들도 아는 패왕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2-1) 환국과 제헌왕후

    어제 사묘에 나아가 어머니를 뵙고,

    술잔 올리며 눈물로 흠뻑 적셨네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이 없으니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라

    ㅡ무종의 소회라는 시에서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효자설 VS 이용설.

    전자는 정말로 제헌왕후가 폐위 된 일이 환국의 원인이 됐다는 설이고, 후자는 그걸 이용했다는 설이다. 다만 500년간 묻혀 있던 임사홍-무종의 밀서가, 경복궁 강녕전 주춧돌 밑에서【두 군신의 밀서가 왜 여기서 발견 됐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발견 되면서 두 설이 짬뽕됐다.

    확실히 위의 소회라는 시를 보면 무종은 효자 중의 효자였다. 아버지인 성종에게도 연민과 증오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던 걸로 보이는데 특히 제헌왕후에 대해서는, 편전에서 제헌왕후가 언급만 되어도 엉엉 울었을 정도라고 한다.

    야사에 의하면 무종이 환국을 마음먹고 폐비윤씨와 관련 된 인사들을 모조리 궁에 불러 들이고, 처용탈【처용무 출 때 쓰는 탈로 무종이 자주 쓴 탈이기도 하다】을 쓰고 입궐하는 대신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는 설도 있다.

    다만 야사는 야사일 뿐.

    2-2) 무종은 폭군이다? 광증이 있었다?

    알다시피 대한제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신격화 된 왕들이 몇몇 있는데 대표적인 게 세종, 무종, 중종, 환종이다.

    그중에서 특히 인기가 많은 왕은 무종인데 그 무종을 건든다는 건, 국민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예전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학설인데 최근에 조심스럽게 제기 된 학설이다.

    무종이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한 나머지 애정결핍으로 인해 미친 짓을 벌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른 거 다 빼놓고 연산군이 김운열에게 팽형을 가한 일만 보면, 폭군 중의 상폭군이나 할 짓이긴 하다. 고려조~조선조를 통틀어서도 이때를 제외하면 팽형이 시행 된 적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니 말 다 했다.

    참고로 이 학설을 내놓은 학자가 같이 내놓은 학설이, 여기에 중종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폭군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시기적절하게 중종이 역사에 등장하면서 폭군의 탄생을 성군의 탄생으로 바꿔놓았다는 <중종 개입설>이다.

    다만 해당 학설은 굳이 학설로 제기할 필요도 없는 공공연한 사실이긴 하다.

    무종에게 엽기적인 이미지가 많고, 기행을 자주 벌이는 웃긴 양반이란 이미지가 있어서 그렇지 사실 그 엽기적인 행각 자체도 잔인한 일도 많았고 폭군들이나 벌일 법한 일들이 많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종에게 폭군의 이미지 보다 엽기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진 건 무종이 남긴 희대의 명언,

    “나는 너희들을 두려워하기 보다 백성을 두려워하겠다.”

    라는 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말 한 마디 덕에 어떤 잔혹한 형벌도 백성을 위한 일로 미화(?) 된 것.

    참고로 중종 시간여행자 설에 글을 남겨 여론의 몰매를 맞았던 영화배우 이백돌이 2019년 영화 <왕과 동생> 개봉 이후 SNS에 ‘무종이 어떻게 폭군이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무종은 폭군은 아니고 미치광이 왕이었소!!!’ 라는 글을 남기면서 중종 시간여행자 설과는 상반(?) 된 반응을 보인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여론은 ‘이번에는 무종이 니 친구냐...?’ 정도의 반응이 있었다. 네티즌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듯.

    다만 다음날 이백돌이 취중에 실수로 올린 글이라 해명하며 조용히 묻혔다...

    3) 시와 노래를 사랑한 왕

    사실 이 부분은 중종이 더 심했다. 중종은 스스로를 시인이라 언급할 정도였고, 남긴 노래와 시도 엄청나다.

    당대 최고의 작가로 손꼽힌 구사라는 작가도 사실은 중종이 소설을 집필할 때 사용한 필명이란 게 알려지면서 문과생들 사이에서는 신(?)으로 추앙 받고 있는 수준.

    다만 중종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무종도 문학을 사랑했는데 학자들은 여러 기록들을 통해 중종과 무종이 친해진 계기도 시에 있었다고 추측한다.

    실제로 중종은 무종의 시를 칭찬한 일이 많고, 무종은 중종의 시를 칭찬한 일이 엄청 많다.

    또 시에 관해서는 중종 보다 더 각별했는데, 재위 중에는 갑자기 시상이 떠오르면 정사를 돌보고 있다가도 앉은 자리에서 지필묵을 내어오라 하고 시를 끄적거린다거나, 갑자기 승정원에 어제시를 내려서 대신들에게 돌려보게 했다.

    근데 말이 돌려 보게 한 거지, 돌려 말하면 이거다.

    “내 시 어떰?”

    신하들 입장에선 죽을 노릇...

    다만 시적 감각이 뛰어나긴 했는지 호평을 받았다. 삼군의 시대에서 4대 문인으로【구사, 백돌, 채수, 조광조】손꼽히는 채수도 <나재집>에 무종의 어제시를 극찬한 바 있다.

    4) 업적.

    많다.

    많아도 더럽게 많아가지고 괜히 삼군의 시대의 포문을 연 왕이라 불리는 게 아닐 정도다.

    중종이 경제/외교 분야에 큰 기여를 하고 업적을 쌓았다면 무종은 국방과 문화적인 부분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특히 국방 부분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는데 오키나와를 제국령으로 편입한 것도 바로 무종대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중산왕【조선왕들의 작위중 하나였지만 당시에는 유구국왕을 일컬었다】에게 호의를 베풀었는데 중산왕이 개긴(?) 적이 있다. 한마디로 배째라고 배를 내민 격인데......

    무종이 바아아로 배째주러 원정을 나가서 오키나와를 점령...해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중산왕에게 왕위를 양위 받는 기행을 벌이면서 스스로 중산왕에 올랐다.

    자세한 건 무종/업적을 참고할 것.

    5) 외모.

    잘생김의 극치.

    잘생김의 대명사.

    중종이 그냥 잘 생겼다면 무종은 존나 잘 생겼다.

    이건 어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요즘 미남상에도 부합하는 외모이지만, 당시에도 아녀자들에게 통하는(?) 외모였던 것 같다.

    당시 문인과 관리들이 무종의 용안에 대해 남긴 기록들이 참 많은데 하나같이, ‘왕이 행차하면 아녀자들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왕의 미색이 천하제일이므로 명나라 사신이 그 비결을 물었다’ 등등의 코멘트가 달려있다.

    사실 무종의 외모를 볼 수 있게 된 건, 의외(?)일지 몰라도 중종 덕이다.

    중종은 초상화만 수십점 남길 정도의 초상화 덕후였는데 그 덕력을 무종한테도 전이시켰다. 퇴위하고 나서는 직접 그림을 배워 무종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는데 무종의 외모를 볼 수 있게 됐다는 게 바로 이때문.

    이때 남겼던 초상화 외에 무종이 재위 당시 공식적으로 남겼던 어진들은 모두 화재로 불탔기 때문이다. 만약 중종이 덕력을 전파하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지......

    다만 끼리끼리라는 말이 있듯이, 덕력을 전파 당한(?) 무종은 원덕왕후에게도 덕력을 전파해 같이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참고로 무종-원덕왕후 부부가 그림을 함께 배우는 게 질투났는지 중종은 곧 공선왕후를 꼬드겨 함께 그림을 배운다.

    참으로 그 형에 그 아우...

    5-1) 이미지

    무종의 이미지는 희한하게도 여러 가지다.

    대표적인 게 바로 네 가지다.

    패왕 이미지, 장난꾸러기 이미지, 국민 삼촌, 탐험가.

    한 사람에게 한 가지 이상의 이미지가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사실 패왕 이미지와 장난꾸러기 이미지가 공존하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다만 모두들 무종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이 네가지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무종은 카리스마가 어마무시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강력한 왕권으로 ‘너 죽어’ 하면 지명 받은 신하는 죽는 시늉이 아니라 진짜 죽어야만 했다... 실제로 무종이 그런 명을 내리진 않았다만 비슷한 예로 무종은 교성군 노공필이 입방정을 자주 떨자 신언패를 차게 했고 나중에는 신언복이라는 관복을 따로 만들어서 입궐할 때, 본인을 알현할 때는 꼭 입게 했는데 노공필은 이 말을 잊지 않고 무종을 뵐 때면 늘 신언복을 입을 정도였다.

    왕의 권력이 약했다면, 그 말도 허투루 들을 수 있었을 텐데 평생을 신언복만 입고 배알 했을 정도니......

    참고로 무종의 장난꾸러기 이미지가 구축 된 데에는 이 신언패도 일조했다.

    엄근진 할 것 같은 편전에 ‘입방정 떨지 말고 신언패 차고 입 다무셈!’이라고 명하는 게 생각하면 좀 웃기긴 하잖나...

    아무튼 이 이미지 덕에 무종을 연기한 배우들은 극이 끝나고 난 뒤, 다중인격자가 된 것 같았다고 술회하곤 한다.

    국민 삼촌의 이미지를 갖게 된 건 영평군 의주수【개똥이】와의 관계 때문이다.

    옥희러들도 알겠지만 영평군은 위인으로 불리긴 하는데 살짝... 아주 사아아아알짝 모자란 위인이었다.

    중종과의 첫 만남때도 그런 면을 유감없이 보여줬지만, 무종과의 첫 만남 때도 그랬다.

    무종과의 첫 만남은 박원종의 난이 있었을 때인데, 이때 무종은 상선 김처선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궁을 빠져 나올 수 있었고, 어디로 갈까 하다가 우연히 창산군 의팔석을 만나 그의 집으로 가게 된다【무작정 따라간건 아니고 이미 안면이 있었다】 그리고, 어린 영평군에게는 대충 ‘니 삼촌이다’ 얼버무리는데 문제는......

    곧이곧대로 믿었다!!

    너무 순진했던 건지... 삼촌이 필요했던 건지... 영평군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렸고, 정말 삼촌 대하듯 해버린다. 여타의 왕이라면 역정을 냈겠는데 과연 엽기왕 무종답게 진짜 삼촌 행색을 해버리고 그 이후는....

    이 일화는 학자들 사이에서만 구전되다가 우연히 대중에게 알려졌는데 그 이후로 국민삼촌 이미지가 굳혀졌다.

    좌우지간 한 사람이 네 개의 이미지나 갖고 있다는게 참.....대단하다.

    6) 저서

    수많은 시집과 소설도 남겼지만 대표적인 저서로는 《군일록》과 《안처진전》이 있다. 참고로 안처진전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는 공명정대함의 대명사 안처직이 맞다.

    참고로 2020년 상반기에 방영 될 <판관 안처직>에 영화배우 이백돌이 캐스팅 됐다고 한다.

    태상왕으로 물러나서는 중종이 놀아주지 않고(...) 금석학에 심취해버리자 따라서 금석학을 배운다.

    다만... 금세 싫어졌는지, 연구저서까지 남긴 중종과는 달리 때려치고 다른 것에 몰두한다. 그게 바로 미국 대륙 탐험 때 축적한 항해술......

    7) 가치관과 성격

    중종처럼 특이 그 자체.

    다만 관점에 따라 무종과 비교하면 중종은 정상인일 정도.

    아무리 신임한다 해도, 왕 자리를 동생한테 아무렇지 않게 넘겨주는 것도 그렇지만 동생이 구두로만 ‘저기 가면 미국이란 곳이 있다’, ‘배타고 한바퀴 돌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출발한 곳에 도착 할 수 있다’ 라는 말을 보지도 않고 믿어버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실제로 미국을 탐험하게 된 계기도 잘 알려졌다시피 중종이 ‘저기 가면 미국이란 곳이 있음’이라 설명을 해줬기 때문인데 이 말 한 마디에 세계사가 바뀌어버렸다....

    연안항해에만 집착하던 조선이 이때를 기점으로 대양항해를 시작했기 때문.

    참고로 미국 탐험은 첫 번째는 실패하는데 자세한 건 하단의 문서를 참고할 것.

    중종이 비교적 일관성 있었던 것과는 달리 약간 이랬다 저랬다, 오락가락 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얼마나 오락가락(?) 했으면 오전에는 ‘온천가게 준비해라’ 말해놓고 막상 준비가 다 된 오후에 ‘온천말고 삼림욕이나 가자.’라고 말을 바꾼다거나.....

    매우 즉흥적이었던 건 맞는 것 같다.

    뭐, 이와는 별개로 애민정신만은 투철했다.

    무종하면 떠오르는 팽형도 사실 백성을 기만한 사람들 때문에, 후대의 평가가 어찌 되든 벌인 것이기 때문.

    사실 무종 정도 위치, 그러니까 왕 정도 되는 지위에 오르면 후대의 평가를 아무래도 신경 쓸 수 밖에 없어지는데 무종은 그런 건 신경도 안 썼다.

    대신들이 만류하자, 사관을 직시하면서 ‘후대에 있을 평가 따위 다 좆까고 내가 팽형 집행하라고 했던 거 그대로 받아 적어’라고 말하는 패기까지 보여줬다...

    중종이 사관에게 ‘이건 적지마’ 라던지 ‘나 멋있게 묘사해줄거지?’라고 했던 것과 달리 무종은 ‘시발 적을 거면 적던가.’ 라는 패기스런 모습을 자주 보여줬고, 사관은 그의 명(...)대로 무종의 욕을 필터 없이 받아적었다...

    8) 위대한 탐험가.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친 탐험가 중 한 명이다.

    사실 이건 좀 겸손한 말이고...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친 유일한 탐험가라고 딱 잘라 말 해도 손색이 없다.

    그만큼 세계사적으로 유래 없을 탐험 정신을 발휘 했기 때문인데 중종의 말한마디.

    그러니까, ‘저기 가면 미국이란 곳이 있고 저기 가면 알래스카란 곳이 있고 또 저기가면 북해국이란 곳이 있고, 또 저기에 가면은...’ 이란 말을 확인 절차도 없이 바로 믿고 탐험을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다.

    그만큼 중종을 신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대인 관점에서 보면 ‘저게 뭐야...’ 라는 생각을 가질 법도 한 대목이긴 하다.

    무종은 중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이래 늘 탐험을 하고 싶어했는데 그 욕구를 억누르고만 있다가 결국 서경덕이 미국을 찾아 나서겠다는 말에 후원자를 자처하면서 배를 건조시키고, 미국 탐험을 계획한다【알다시피 중종도 끌고 가려고 별 짓을 다했고, 중종은 안 끌려가려고 별 짓을 다하다 바다에서 표류까지 하며 죽다 살아났다】

    첫 번째 탐험은 <톈진성 구원작전> 이후에 이뤄졌다.

    <톈진성 구원작전>에서 톈진성을 차지하고 있던 역도 유육, 유칠 형제는 조명 연합군에 의해 패퇴하게 된다.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조선군은 회군하게 되고【이때 정덕제도 따라가고 싶어했다. 내부 사정이 허락했으면 따라 갔을 것이다】 탐험을 시작한다.

    다만 결과론적으로 첫 번째 탐험은 실패했다.

    무종은 미국까지 가기 위해서는 연해주【이것도 미국, 오키나와의 지명 유래와 같다. 중종이 연해주라고 부른 뒤 연해주로 굳혀졌고, 훗날 조선이 환종대에 여진족을 포섭, 정복하면서 바다와 인접해 있다고 해서 연해(連海)라고 갖다 붙였다】나 사할린【역시나 지명 유래는 연해주와 같다...】혹은 캄차카【당연히 지명유래는...】등지에 전초기지를 설치해야만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고, 사할린-캄차카 반도의 전초기지를 설치하려고 했다.

    문제는......

    엇나갔다.

    보급 받고 호기롭게 출항해서 연해주를 거쳐 사할린으로 올라갔는데, 폭풍을 만나 남사할린【무종이 가려던 곳은 지금의 북사할린이다】에 표착해버린 것.

    근데 또 알고보니 여기가 무종이 꼭 가고 싶었던 북해국이었고...... 얼떨결에 탐험은 미뤄지다가 좀 지나서 북사할린에 전초기지를 설치한다.

    다시 5년 뒤, 캄차카 반도에 전초기지가 설치됐고 이후 알래스카를 넘어 미국에 닿으려 했지만...

    실패.

    9년 후, 2차 탐험을 조직한다. 이때는 보기 좋게 성공했다.

    참고로 이후 3차 탐험때 고추와 담배【중종은 담배가 전래되자 고추가 전래 된 것만큼 기뻐했고, 골초였다...】가 조선에 유입된다.

    이때가 바로 1534년.

    여담이지만 야사에 의하면 고추를 접한 중종은 고추를 보자마자,

    “고추 보려고 장장 30년을 기다렸구나!” 하며 미친 사람처럼 울어댔다고 한다.

    뭐 아무튼.

    환종의 묘호에 환자가 붙게 만든 결정적 계기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9) 막말 대마왕

    중종과는 궤를 달리하는 막말왕이었다.

    중종이 은근히 돌려까는 식의 막말왕이었다면 무종은 대놓고 욕하는 막말왕이었다...

    사초에 남은 기록들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0) 중종과의 우애

    형제 간에 첫눈 오는 해마다 장난을 쳤는데 점점 장난이 도가 지나쳐져서 말년에는 중종이 반정이 일어났다고 환종이랑 짜고 장난을 쳤을 정도(...)

    다만 이걸 믿은 무종은 역도들 모조리 쓸어버리겠다면서 군대를 소집했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고

    11) 여대생이 데이트하고 싶은 왕?

    앙케트 조사에 여대생이 데이트하고 싶은 왕 1위에 꼽혔다.

    2위는 중종.

    12) 친했던 사람

    단연 무종, 영평군, 임숭재 등과 친했지만, 이 셋을 제외하고 가장 친했던 사람은 정덕제 주후조였다.

    오죽하면 정덕제랑 필담만 나눈다거나, 통역끼고 대화하는 게 답답해져서 나중에는 중국말 까지 손수 배웠을 정도다.

    참고로 무종에게 이 정덕제는 빼놓을 수가 없는 인물인데.......

    무종과 같은 원맨쇼의 대가인 동시에 참 어이없게 죽은 황제다.

    무종과 정덕제는 올해는 내가, 내년에는 너가 식으로 서로의 나라에 왕래 했었는데 1542년은 정덕제가 조선에 오는 해였다.

    당연히 무종 만나러 오다가 뜬금없이 등산하고 싶다며 백두산에 올랐고, 백두산 천지의 모습을 보고 배를 띄워 놀다가 빠지는 일이 발생해버렸다(...)

    가까스로 군사들이 구해냈고, 조선에서도 의원과 사신을 급파해서 뫼셔왔지만 이게 원인이 됐는지 독감에 걸렸고 이후 감기가 폐렴으로 변이되면서 1542년, 무종이 보는 앞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때 남긴 유언이 그 유명한... ‘나는 아직 덜 놀았소.’ 이다...

    12-1) 친구의 충격적인 죽음

    정덕제의 죽음이 충격적이었는지 무종은 한동안 칩거 생활을 했고, 이게 나비효과가 되어 정덕제 사후 명나라-조선의 관계도 급속도로 악화됐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정덕제가 조선황제란 별칭으로 불린 배경에는 아낌없이 퍼준 것과 조선이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주던 아량에 있었다. 거기다 무종과는 사적으로 엄청 친하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게 아니꼬왔을 텐데 하필이면 또 자신들의 황제가 조선에서 죽어버렸다... 원수도 이만한 원수가 있었겠나?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주후총.

    정덕제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촌 동생인 주후총을 태자로 삼아 후계를 이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덕제 사후 별 탈 없이 주후총은 제위에 오르는데 이 주후총이 희대의 망나니였다.

    정덕제는 노는 것 좋아하고, 무종처럼 북치고 장구치는 일은 했어도 나름 전쟁에는 일가견도 있었고 놀더라도, 정사는 돌보고 나서 놀았는데 주후총은 그런거 없었다.

    그냥 놀았다... 미친 듯 놀았고, 그 결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도 극에 치달았다.

    그 덕에 정덕제가 7년에 걸쳐 진압한 역도들이 다시 발호해버린다. 그것도 큰 스케일로.......

    정덕제와는 달리 조선을 ‘오랑캐 놈들’이라고 업씬 여기던 주후총은 상황이 생각보다 암담하게 돌아가자, 조선에 구원을 요청한다.

    이때 조선에서는 저딴 놈 말 듣지 말자는 의견이 대세였는데, 태상왕 무종이 ‘그래도 상황과의 의리가 있는데 어찌 외면한단 말이냐!’ 친히 군사를 몰고 포위 된 북경을 구원했다.

    어찌, 어찌 역도들은 진압했지만 이미 푸젠성과 광동성에는 왕초진의 제나라가 세워진 뒤였고, 후난성에는 유소격의 양나라가 세워진 뒤였다...

    뭐, 어쨌건 이때의 구원에 조선도 제법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무종은 이에 대한 댓가로 요동을 봉지로 하사해줄 것을 요구【그전까지는 봉지가 없는, 명목상의 요동왕이었다】하고, 융경제 주후총은 요구를 들어준다.

    13) 호부호자

    흔히 호부견자라고 하는데 무종과 환종은 달랐다.

    호부호자였다.

    보통 창업군주가 이룩한 나라를 뒤이은 왕들이 말아 먹는 경우가 많은데, 무종, 중종이 이룩한 조선을 이어 받은 환종은 달랐다.

    1511년 재위에 올라 1572년 죽기 전까지, 61년간【이쯤하면 장수왕 타이틀은 환종아님???】 부려진(?) 환종대에 비로소 세계사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조선은 정덕제 사후 제국을 선포【그전에도 국력은 충분했다】하게 되는데, 이마저도 서양과의 교류 때문이었다.

    자꾸 서양에서 급을 언급하니 오랜 세월 부림당한(?) 환종이 홧김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국을 선포해버린 것.

    이때가 환종의 최대 일탈이었는데 어쨌든 후대에는 무종, 중종이 제국의 기틀을 닦은 왕들로 평가되고, 환종이 제국을 선포한 황제로 인식되면서 무종에게는 호부견자란 말도 통하지 않는 말이 됐다.

    [외전1 - 톱배우와 매니저의 회상]

    ***

    2020년 서울.

    광화문 앞, 삼군의 동상이 내려다 보이는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세계적인 기업인 삼성의 계열사 낙천건설에서 지은 주상복합 아파트이기도 했다.

    그 꼭대기 층인 49층.

    두 사내가 회상에 잠긴 표정으로 광화문 일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기가 바로 육조거리였고, 저 건너편이 선원전 터였는데··· 아니 그러냐?”

    고상한 말투를 자연스럽게 쓰는 사내였다.

    그러고 보면 벽면에는 큼직하게 액자형으로 나온 사내의 프로필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낯익은 사진이었다.

    아니, 낯익은 정도가 아니라 대한제국 내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다는 명배우 이백돌이었다.

    “진성··· 아니, 현호야. 어찌 대답이 없는 것이냐?”

    백돌의 연이은 부름에 사색에 잠겨 있던 현호가 고개를 돌렸다.

    “아, 예.”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것이냐.”

    “저기 종각이 있던 자리가 풍원위의 자택 자리 아니었습니까.”

    “그랬지, 저기로 이사한다고 해서 잔치도 벌이지 않았더냐. 내 직접 굿판도 열어주고.”

    피식.

    그때 생각이 나서 현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난리가 났던 때였다.

    풍원위가 후임에게 요동도평상사 자리를 잘 물려주고 요동에서 돌아오자 황이는, 요동을 잘 관리했다는 공으로 종각에 있던 집을 한 채 하사해 줬었다.

    길일을 점쳐서 풍원위가 이사를 했는데, 이삿날에는 자칫 잘못하면 잡귀가 들끓을 수도 있다면서 태상왕이었던 형님이 직접 무당을 불러다 굿판을 열었었다.

    당연히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근데 새삼스럽게 그건 어찌?”

    현호는 한참이 지나서 입을 열었다.

    “왜, 우리만 온 걸까요?”

    “모르지. 다만 너와 내가 죽은 시점이 가장 가깝지 않았더냐. 그래서 그런 거 아니겠느냐?”

    현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형님의 죽음과 정확히 1년 차이가 났었다.

    시간을 거슬러, 역사의 흐름이 완전히 뒤바뀐 대한제국으로 온 지도 벌써 6년이 지났다.

    당시도 그랬지만 6년이 지난 지금도 왜, 형님과 자신만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형님하고 만난 것도 참 우연이었지.’

    병원에서 깨어났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그가 기억하는 현호의 얼굴이었고, 그가 기억하는 일가친척 없는 혈혈단신의 현호였다.

    다른 게 있다면 현호 본인이 알던 대한민국과는 다른 대한제국의 2014년이란 점이었다.

    얼떨떨해서 일단은 현대 대한제국에 적응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문명이라던가, 생활 풍습 같은 건 그가 아는 대한민국의 그것과 흡사했지만 황실이 존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생하는 국민 정서 같은 부분은 약간씩 달랐다.

    무엇보다 도통 적응이 안 됐다.

    막말로 반세기 넘도록 조선인으로 살아왔다.

    바로 적응한다는 건 무리였다.

    그렇게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묻혔다는 정릉에 간 적이 있었다.

    뭔가 신기하기도 하고 또, 재밌기도 하고······.

    정릉을 시작으로 형님이 묻혔다는 선릉에도 가볼 참이었고, 저 세상(?)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 묘소는 전부 찾아가 볼 참이었다.

    그런데.

    정릉 투어(?) 중에 형님을 만났다.

    얼굴이 달랐다면 당연히 못 알아봤겠지만, 젊을 적 기억하는 형님의 얼굴이었다.

    돌아온 게 나뿐만은 아니구나··· 단번에 알은 체를 했다.

    예상은 맞았다.

    형님은 이 이상한 세상에 혈혈단신으로 떨어진 지 1년이나 됐다나 뭐라나?

    반갑고 고맙기까지 한 마음에 그날부터 쭉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다만.

    “현호야. 이거 어찌 쓴다고 했었지?”

    백돌은 어느 새,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거북이 목을 한 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뚫어지게 쳐다본다고 인터넷 접속이 될 리는 만무.

    바로 저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도통 적응을 못 하는 문제.

    다른 건 다 어느 정도 적응을 했는데 컴퓨터를 사용하는 일은 하루가 지나면 금방, 금방 까먹어버렸다.

    “왜요. 또 SNS 하시게?”

    뜨끔!

    “아, 아, 아니다.”

    “아니긴. 폼이 딱 SNS 할 폼이구만.”

    “아, 아니라니까··· 그냥 거, 검색좀 하려고 했다, 검색 좀.”

    “무슨 검색요? 내가 해드릴게요.”

    잠시 머뭇거리던 백돌이 한참이 지나 입을 열었다.

    “무, 무종?”

    “이미 수백번 검색하셨잖아요.”

    “그래도 새로운 거 또 없나 싶어서 말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현호가 검색란에 무종을 입력했다.

    그러자 최신 기사들이 촤라락 펼쳐졌다.

    “응?”

    “왜요, 뭐 다른 거 있어요?”

    라고 묻자 백돌이 모니터를 가리키며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속보) 경창궁 태성전 마루 밑에서 무종-중종의 서간 발견!

    “이것좀 봐라, 이제야 발견 됐다는구나. 푸하하하!”

    백돌의 파안대소 현호도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때는 조카 놈이 홧김에 제국을 선포했던 천개(天開) 1년.

    어느 날 형님이 집에 찾아왔고, 평소처럼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먹었는데 문득 후손들은 우릴 어찌 생각할까란 형님의 말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래서 술김에 문갑에 있던 서간들을 모조리 마루 밑에 숨겨뒀었다.

    형님에게도 설명하자, 옳다구나 내관을 시켜 편지를 갖고오게 해서는 형님 것도 같이 묻었고.

    몇 년 전에 경복궁 강녕전 주춧돌 밑에서 발견 됐다는 임사홍-무종의 밀서도 사실 이번 일에서 비롯 된 것이었다.

    후손들 골려주려고 태성전 마루 밑에 숨긴 이 서찰들에 영감을 받은 형님이 본인과 풍원부원군 간의 밀서도 강녕전 밑에 숨겼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대한제국이 어찌나 난리가 났던지······.

    피식, 피식 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그러고 보면 지금은 웃을 때가 아니다.

    “형님.”

    “응?”

    “이번에는 언론이 뭐라고 하건 제발 SNS좀 하지 마세요. 그거 무마한다고 아주 골이 다 깨질 지경입니다, 골이. 예?”

    “아, 알았다. 아, 근데 현호야.”

    “네.”

    “지금 타이밍에 이런 말 하는 건 경우가 아닌 건 안다만··· 콜라 다 떨어졌더구나.”

    “하루라도 콜라 안 드시면 안 됩니까?”

    “안 된다.”

    “···사다둘게요. 매니저가 이런거나 해야지, 뭘 하겠습니까.”

    “하하. 고맙다, 고마워. 내가 너 아니면 이 요지경에 어떻게 적응했을지 상상도 안 된다.”

    “됐고, 그만 가시죠.”

    “어딜?”

    “오늘 2시에 <판관 안처직> 대본 리딩 있잖아요.”

    “아, 맞다!"

    "아, 맞다라니··· 휴. 얼른 준비하고 나오세요. 늦었어요.”

    “그래, 그래 알았다. 금방 준비하고 나오마.”

    후다닥 드레스 룸으로 뛰어 들어가는 백돌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현호였다.

    “나도 그래도 왕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내가 어쩌다······.”

    [외전2 - 신인배우 신여리]

    ***

    -1인당 국민소득이 8천만원을 돌파했습니다. 제국은행이 지난 3일 발표한 2019년 4분기 연간 국민소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해······.

    -중국 주계홍 황태자가 오는 17일에 경복궁에서 열리는 제39차 아시아 정상회의에 참석한다고 명나라 황실 외교관리부를 통해 알려왔습니다. 이에 대해 대한제국 황실은 환영한다는 전문을 발표했지만, 전문가들은 황태자의 방문이 중국-한국 간의 투자협약을 이끌어 내기 위한 황태자의 방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황실 내부에서······.

    -일본 내의 대한제국 주둔군 철수 시위가 날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군대를 주둔 시킨 것은 지난 1621 일본 황실과의 신축약조 때부터인데요. 전문가들은 400년이 지난 지금 일본 내부에서 신축약조가 공정한 조약이 아니었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지금의 시위에 이르렀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대한제국 병무부는 ‘신축약조는 일본측의 침공으로 발생해 일본측에 귀책사유가 있는 사건이었으며, 당시 일본 황실이 먼저 자성하겠다며 배상과 함께 주둔을 청한 공정한 조약이었다. 또한 주둔군은 일본 측이 각각 250년, 300년 조차(租借)한 박다, 장기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으니 법적으로 문제 될 것도 없다’ 라고 발표했습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판관 안처직>에 캐스팅 된 김씨 부인역의 이지현 씨가 교통사고로 입원하면서 결국 신인배우 신여리 씨가 캐스팅······.

    대본리딩을 위해 <판관 안처직> 제작사로 찾아가는 중이었다.

    라디오에 집중하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형님.”

    “감정 잡는 거 안 보이는 것이냐.”

    “아, 죄송해요. 근데 형님 상대 역 있잖아요.”

    “김씨 부인 역?”

    “네. 바뀐 모양인데요.”

    “그 재수없는 이지현이는?”

    재수없는 이지현은 형님과는 악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형님이 톱스타지, 정말이지 6년 전에는 나나 형님이나 엄청 빌빌 거렸었다.

    솔직히 그래서 더 적응이 안 됐다.

    전생(?)에 형님과 나는 존경받는 상왕이고 태상왕이었는데 현생에는 부랄 두쪽 밖에 없는 이현호, 이백돌이었으니까.

    어디가서 내가 무종이네, 중종입네 할 수도 없었다.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 당할 꼴 있나?

    결국 맨 땅에 헤딩하다시피 하면서 이 자리까지 올라온 건데, 형님이 신인시절에 이미 이지현은 톱스타 반열에 있었어서 엄청 무시 당했었다.

    그때 당한 게 아직도 남아있는 모양이다.

    “이지현이 교통사고로 대본리딩 현장 나오네 마네 했었잖아요.”

    “근데?”

    “생각보다 심하게 난 모양인데요. 상대역 바뀌었대요.”

    “푸하하하! 그러니 심보를 곱게 써야 하는 법이거늘··· 신인이라고 무시하고 그러더니 꼴 좋다! 아, 근데. 상대역이 바뀌었는데 감독 양반은 왜 전화가 없어?”

    라고 형님이 말하기 무섭게 핸드폰 벨이 울렸다.

    확인하니 ‘감독 양반’이시다.

    “뭐라느냐?”

    “이제 막 결정 된 거라 늦었다네요.”

    “음. 뭐, 이지현이랑 안 하는 게 어디냐. 그래서 이지현 대타는 누군데?”

    “신여리라는데요.”

    “신여리? 누구지, 처음듣는데······.”

    “신인이래요.”

    “뭐? 감독 양반은 날 뭘로 보고 신인이랑 붙인단 말이냐? 그래도 급이란 게 있는데······.”

    “언제는 심보를 곱게 써야 한다면서요, 신인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아니, 뭐··· 크흠. 도, 도착했군.”

    이미 팬카페에서 나온 건지, 회사 앞에는 소녀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상태였다.

    회사 측에서 제공해준 경호원들과 함께 대본리딩 현장으로 향했다.

    “오, 명품배우 이백돌 씨 아니야. 빨리 왔네?”

    오그라드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며 다가오는 저 사람이 바로 ‘감독 양반’이었다.

    “왜 아무도 없는 거요?”

    “요즘 젊은 것들이 다 그렇지, 뭐.”

    “아, 맞다. 아까 현호 씨한테 상대역 바뀐 거 전달 했는데 들었지?”

    “들었소. 근데 이렇게 갑자기 통보해주는 경우가 어디있단 말이오?”

    “아, 미안해. 우리도 어쩔 수가 없었다니까. 이지현이가 목에 깁스까지 한 주제 할 수 있다고 계속 뻗대고 있었다니까? 오늘 아침에 갑자기 이지현이 매니저한테 전화와서는 못 하겠다고 연락이 오지 뭐야. 촬영 연기 할 수도 없고··· 그래도 이번에 상대역 맡은 신인이 진짜 기똥 차.”

    “연기가?”

    “외모가.”

    “배우가 연기가 기똥 차야지, 외모만 기똥 차면 되나.”

    “맞지, 근데 일단 봐. 이지현이 시대도 이제 갔어. 마스크 진짜 새롭다니까?”

    ‘감독 양반’의 호들갑에 얼마나 괜찮으면 저리 격찬을 하나 싶었다.

    저 ‘감독 양반’이 형님 앞에서 좀 굽신거리기는 해도 신인들 칭찬을 저렇게 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러는 사이.

    캐스팅 된 배우들이 차례, 차례 장내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중종 역을 맡은······.”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임사홍 역을 맡은······.”

    “저는 노공필 역을 맡은······.”

    하나, 둘 들어오다 보니 조연 배우들은 모두 도착했다.

    여주만 빼고.

    “뭐야, 신여리 씨 아직 안 왔어?”

    “그게 차가 막힌다고 하네요.”

    “아니, 누군 교통체증 안 뚫고 왔나.”

    “죄송합니다.”

    “조 감독이 죄송할 건 없지. 신인배우가 무슨 자세가 그래?”

    신인 따위(?)에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들 때문인지 조연 배우들의 불만도 점점 고조되기 시작하던 그때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누군가 굽신거리며 리딩 현장에 들어왔다.

    “아니, 신여리 씨. 선배 배우들도 먼저 와서 기다리는데 이게 무슨 경웁니까?”

    ‘감독 양반’의 호통에 신인배우는 고개를 들 줄 몰라했다.

    그 모습에 형님은 소싯적 본인의 모습이 오버랩되는지, 쯧쯧 혀만 차고 말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미안하긴 한 모양인지, 신인배우는 도통 고개를 들지 않았다.

    “됐어요, 얼른 와서 앉기나 해요!”

    감독의 호통과 함께 신인배우가 준비 된 자리로 향했다.

    문제는······.

    “어라?”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 했다.

    여태 고개를 수그리고만 있던 신인배우의 얼굴을 이제야 봤다. 봤는데······.

    청백하리만치 희고 고운 얼굴에 가녀린 목덜미.

    볼터치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보름달처럼 떠오른 볼의 홍조와 붉은 입술.

    누군가 닮았다.

    아니, 똑같다!

    “형님, 저 보세요.”

    “뭐가 말이··· 허업!”

    나만의 착각은 아닌지 형님도 헛바람을 들이킨다.

    “백돌 씨 무슨 문제 있어? 아니면 어디 아파? 아니, 현호 씨까지 왜 그래?”

    감독 양반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지만, 감독 양반의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 여울아?”

    조심스럽게 신인배우를 불렀다.

    자리에 앉아서도 여전히 굽신거리고만 있던 신인배우 씨가 나와 눈을 맞췄다.

    그러자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여울아!”

    여울이다.

    여울이가 분명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여울이에게 달려갔다.

    정릉에서 형님을 만났듯, 리딩현장에서 여울이를 만났다.

    신인배우 대 톱스타의 매니저로서.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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