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64화>
***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보이진 않는다.
“없지? 확실히 없지? 없는 거 맞지?”
그래도 확인사살은 필요했다. 확인사살을 위해 덕산이에게도 물어보자, 덕산이는 명색이 상왕인 내가 숨어 다니는 게 한심한 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 없습니다요.”
“후··· 다행이다. 가자.”
안도의 한숨과 함께 보무도 당당히 대문을 통과했다.
정말 얼마 만에 대문을 통과해 보는 건지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요 며칠 동안은 가노들이 이용하던 후문을 썼거든.
아, 왜 멀쩡한 대문 놔두고 후문으로 들락날락거렸냐고?
자꾸 형님이 찾아오잖아, 아메리카 가자고.
가기 싫다고, 싫다고 해도 가자고, 가자고 떼를 쓰니 나도 모르게 피하게 된다.
게다가 내가 하도 피하니까, 어쨌는 줄 아나?
글쎄, 사흘 전에는 행랑 마루 밑에서 기다리더라니까?
마루 밑이 어떤 곳이던가.
구조상 청소하기가 힘들어서 1년에 한 번 청소할까 말까한 곳이다.
그래서 먼지가 풀풀 휘날리고, 쥐동또 한가득인 곳이다.
그런 곳에 숨어 있다가 내가 나타나니까 아메리카 가자고 성화셨다.
그 정성과 노력에 감동해서 가야되나··· 혹 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아, 물론 그 정성과 노력에 감동해서 가야되나··· 싶었던 건 찰나에 불과하고, 당연히 안 갈 거다.
요즘처럼 살 맛 나는 때가 또 없는데 사서 고생을 왜 해?
“그럼 이거 안채에 갖다드려라.”
“이거 사러 나갔다 오신 거에요?”
“응. 안채에 갖다 드리고나 와.”
“네.”
덕산이에게 만두를 건넸다.
이 만두는 요즘 저잣거리에서 맛집으로 떠오르고 있는 화병점이란 곳에서 사온 만두다.
여울이가 특히 좋아하는 만두집 만두기도 하다.
씻고 방으로 건너왔다.
여울이 심부름도 했으니 이제 나머지 일을 할 차례다.
서안을 펴고, 연필과 종이를 준비했다.
“자, 시작해볼까나.”
1. 무작정 놀아보기(나 혼자)
2. 싫어하던 대신이랑 화해하기(특히 대사헌)
3. 고주망태 될 때까지 취해보기
4. 여울이랑 데이트하기
5.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 쓰고 기록하기.
6. 화공 불러서 그림 배우기(그래서 자화상 그려보기)
7. 춤 배우기(특히 처용무)
이게 뭐냐고?
뭐긴 뭐야, 버킷리스트지.
내가 퇴위하고 나서 할 버킷리스트.
내가 요즘 이것들 하는 맛에 사는데, 대부분은 전부 다 했거나, 하고 있거나.
밑줄 쳐진 것들이다.
그나마 현재진행형인 건 5번, 6번, 7번이다. 5번은 일기의 특성상 평생 현재진행형일 수 밖에 없고, 6번하고 7번은 지금 배우고 있다.
그림 같은 경우는 화공에게, 춤 같은 경우는 창우(배우)들에게.
다른 건 몰라도 7번은 얼른 마스터하고 밑줄 그어야 한다.
나례 때 형님이랑 같이 처용무 추기로 했다.
뭐, 이 세 가지만 빼면 나머지 네 가지는 퇴위 후, 이뤘다.
다만 새삼스럽게 버킷리스트를 꺼낸 건, 추가 할 게 있어서였다.
8. 역관 불러서 1:1로 오키나와어 과외받기
9. 시 쓰기(시집 내기)
10. 고추로 만든 음식 먹기
11. 전문적으로 요리 배워보기
12. 무예 연마하기(운동 목적으로)
이렇게 다섯 개다.
8번은 별 생각 없이 외국어 하나 쯤은 마스터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추가한 거다.
9번은 아무래도 요새 너무 놀기만 한 것 같달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놀기만 하다 보니 왕이 아닌 시인으로서의 이름도 남기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추가 한 거다.
10번은 사실 새삼스럽게 퇴위 후,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진성대군이 되고 난 직후부터 이루고 싶었던 일이었다.
옛날에는 그래서 만국의 나라들과 교역을 하자고 형님께 주청 드리고 대신들 설득 할 정도 였었는데 그 결과 교역은 늘었다.
근데 교역이 늘면 뭐하나.
그 어디에도 고추가 없는 걸.
다만 내 사전에 포기는 없다. 무조건 이룬다는 마인드로 버킷리스트에 추가시켰다.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내가 죽기 전에는 꼭 이룬다.
11번은··· 저건 고추를 들여왔을 때를 대비한 버킷리스트다.
고추를 이용한 음식을 만드려면 요리에 대한 제반 지식이 있어야지 않겠는가.
그래야 응용도 하니까.
마지막으로 12번.
12번은 4년 동안 앉아만 있어서 그런가, 체력이 달리는 게 느껴진달까.
운동해서 기초체력을 늘려야겠단 생각이 추가시켰다.
아무튼, 이렇게 7개에서 5개를 더 추가해서 12개가 됐고, 이것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룰 생각이다.
그리고 덕산이가 지금처럼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지 않았다면, 분명 8번부터 실천에 옮겼을 것이다.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지 않았다면 말이지.
우당탕탕!
“전하! 전하! 큰 일 닜사옵니다요!”
덕산이의 호들갑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허둥지둥 일어나 일단 병풍 뒤로 몸을 숨겼다. 한참이 지나 고개를 빼꼼이 내밀어봤다. 다행히 형님의 사주(?)를 받은 것 같진 않다.
“무슨 일인데 그리 소란이야? 안채에 만두는 갖다 드렸어?”
“만두요? 네, 당연히 갖다 드렸죠. 아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요.”
“그럼 뭔데?”
“아, 그게요. 그러니까······.”
덕산이가 곧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내막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내막이 전해지면 전해질수록, 나는 뒷목을 잡았다.
***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입니까?”
실로 오래간만에 편전을 찾았다.
퇴위하고 나서 처음이니 족히 두 달은 됐겠다.
두 달 만에 찾는 편전이고, 퇴위하고 나서 처음 찾는 편전이니 새삼 감상에 젖을 만도 하건만 감상이고 나발이고.
지금 내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
“말을 해보세요, 말을.”
연이은 호통에 버킷리스트 2번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대사헌이 고개를 조아렸다.
“황송하옵니다. 착오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옵······.”
“착오라니? 사람 죽여놓고 착오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나이다. 죽여주시옵소서!”
알다시피 죽여달란 말은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다.
지난 4년간 나는 저 말을 골백번도 더 들었고, 당연히 지난 4년 동안은 저 말을 듣고도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다르다.
죽여달라니 진짜 죽여주고 싶다. 아니, 최소한 입은 꿰매주고 싶다.
왜냐고? 이걸 봐라, 이걸!
「···하므로 짐은 각지에 변란이 들끓은 이래 마음이 편안한 날이 없었는데 이 역적 무리만 생각하면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책봉사로 온 안처직이 왕의 친서를 바치니, 친서에서 왕의 후의를 능히 읽을 수 있었다. 일만의 정예 군사를 몰고 친히 구원을 오겠다니··· 짐이 그깟 역적들을 평정하지 못 해 왕을 번거롭게 하는 듯 하여 민망할 뿐이다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푸근해지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이같은 후의는 짐이 천하를 다스리면서도 받아 보지 못 한 것이니 비록 대신들은 반대한다만, 왕 또한 여러날, 여러번 생각하고 책봉사를 통해 고한 것일 테니 이를 거절 하는 것은 의를 상하게 만드는 일이라. 그저 왕의 후의에 고마움을 전할 따름이다. 길일을 택해 출정하면 요동도평상사 임숭재를 통해 기별토록 하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뭔 놈의 편진가 이렇게 기냐고?
쉽게 설명해주겠다, 쉽게.
보다시피 이거 황제가 보낸 편지다.
편지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내가, 하··· 글쎄 내가 군사를 몰고 구원에 나서겠다고 했다지 뭔가?
난 금시초문인데!
또, 명색이 황제인지라 제후의 도움을 받는 것은 민망한 일이지만 너도 여러번 생각하고 내린 결론일 텐데 이거 거절하면 너가 무안할 테니까 뭐, 돕게는 해주겠다. 라는 편지였다.
난 금시초문인데!
난 진짜 이런 편지를 황제한테 보낸 적이 없다.
아니, 편지는 무슨 얼어죽을!
퇴위하고 나서 편전도 처음인데 편지를 어떻게 썼겠어?
자, 그럼 뭘까?
뭐겠나?
“···어떤 말을 아뢔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신들은 그저 태상왕 전하께오서 상왕 전하가 황제께 전하는 친서라길래 책봉사 편에 달려 보낸 것이온데 설마 이럴 줄은······.”
인감도장(?) 훔쳐서 명의 바꾸고 이런 어마무시한 사기극(?)을 벌일 수 있는 사람.
누가 있겠어.
대사헌의 진술도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젠장! 젠장! 제에에에엔장!”
짜증이 확 나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물론 그런다고 분은 풀리지 않고, 상투만 풀어 헤쳐지지만 이런 자해라도 하지 않는다면 화를 주체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떡할 겁니까, 예!? 어떡할 거냐고요, 진짜!”
“지, 지, 지금이라도 사람을 보내서 착오가 있었음을 전달하올까요?”
“아, 사신을 다시 보내자?”
“예예.”
“그러니까, 이 말이네. 우리 태상왕 전하가 황제폐하를 대상으로 장난을 좀 쳤다, 아니 구라를 좀 쳤다. 구라니까, 구원 가겠다는 말은 철회하겠다, 역란은 알아서 잘 평정시켜라. 이러자는 말이지요?”
영 아니올씨다 였음을 느꼈는지 김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저건 황제를 농락하는 수준이 아니다.
애당초 도와달란 말도 없었는데 도와줄까? 먼저 묻는 것도 명-조선 관계를 생각하면 무례다.
황제가 우리랑 친하니까 별 트집 안 잡고 넘어가는 거지, 다른 황제였으면 힐책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니까 여러분은 무슨 친서를 확인도 안 하고 보냅니까, 보내기는! 예?”
“소, 송구하옵니다. 태, 태상왕 전하의 엄명이셨던지라······.”
그래서 거역 할 수 없었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젠장.
내가 스바 전장터에서 돌아온 지 1년이 됐어, 2년이 됐어?
이제 막 돌아왔다.
근데 또 전쟁터 나가라고?
요동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철옹성을 두고 수비만 하면 되는 입장이었으니까.
여차하면 몸을 뺄 수 있는 형국이었으니까.
근데 톈진성?
황제도 호기롭게 출진했다가 지금까지 함라 시키지 못 해서 어라? 당황하고 있는 그 톈진성?
거길 가라?
아니 왜? 차라리 나가 죽으라고 하지.
요동 보다 더 위험한 곳이다. 당연히 못 간다.
게다가 이건 내 자유의지가 아니었잖나.
다만 무슨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구원군 몰고 친정에 나서야 한다.
그렇잖아.
발송인 조선 상왕, 수신인 황제.
내용은 상왕이 구원가겠음, 허락해주면 고맙겠음.
그리고 허락까지 한 상황인데 갑자기 말을 어떻게 바꿔?
친서 보니 황제도 어지간히 든든하게 여기는 모양인데.
“하, 진짜! 좀 사람이라도 보내서 사실 확인이라도 해주던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다시 한 번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버럭! 역정을 냈지만, 사실 나한테도 잘못은 있다.
4년간 지긋지긋하게 봤던 나랏일이었다.
때문에, 퇴위하면서 엄포를 논 적이 있었다.
일체의 정무와 국정에는 이 시간부로 간여하지 않을 테니 설사 나라에서 전쟁이 터져도 사람 보내서 귀찮게 하지 마라.
라는 엄포.
“하··· 이제 어쩔 겁니까? 어쩌냐구요. 이제와서 안 가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그, 폐하께서 조만간 역란을 평정하실 수도 있는 문제 아니겠사옵니까? 일단 상황을 지켜보시면 어떨는지요?”
대사헌도 지금보니 순 헛똑똑이다.
낙천적이어도 너무 낙천적인 말이다.
이건 패스.
“폐하께 민란이라던가, 봉기 같은 게 일어나서 급히 군사를 쓸 일이 생겼다고 알리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사신이 영영 입조를 안 하면 모르겠지만, 한 번만 입국해도 알 수 있는 뻔한 거짓말이다.
역시 패스.
“하오면 칭병하오시면 어떻겠나이까?”
교성군 노공필의 의견이다.
앞전 두 사람의 의견보다 나은 것이기도 했다.
“칭병?”
“예. 본시 선왕들께서는 피부에 병이 있으셨으니 병이 날 때마다 요양을 가시지 않으셨었습니까. 얼마 전에도 두 상왕 전하께서 온행을 다녀오신 적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그러심이 어떨는지요?”
“그것도 금방 들통 날 거짓말입니다.”
괜찮은 생각인 것 같긴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이것도 패스다.
내가 아는 황제는 그럼 같이 온천욕이나 하자고 놀러 올 양반이다.
놀러 오는 것 자체는 문제 될 게 없지만, 같이 목욕 하다 보면 거짓말도 탄로 날 거다.
“진짜 무슨 방법 없겠습니까?”
편전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쥐죽은 듯 고요해진 편전에 다시금 화딱지가 나려 하던 그때.
“방법이 하나 있긴 하지.”
닫혀있던 편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상왕 전하.”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형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