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363화 (36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63화>

    ***

    《환종실록(桓宗實錄) 1511년 3월 27일》

    「중종이 강녕전에서 잠저로 이어(移御)하였다. 중종이 이어하려 하니 상【중종의 조카이니 훗날의 환종이다】이 무종【금상의 생부이며 태상왕으로 추대됐다】과 함께 강녕전을 찾아 아뢰기를,

    “숙부 전하 어찌 황망하게 이어 하신단 말입니까? 궁에 더 머무소서.”

    중종이 말하기를,

    “주상. 나는 하루라도 더 여기 있기 싫소.”

    상이 놀라서 고개를 조아렸다.

    무종이 껄껄 웃으면서 말하기를,

    “사왕(새로 왕위를 이은 임금)은 아직 그 마음을 모를 것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백날 설명한들 어찌 일깨우겠는가?”

    중종이 마주 웃으면서 곧 잠저로 이어했다. 이날 상이 일체의 정무를 중단하게 하고 잠저로 이어하는 동안 문무백관과 사민(四民)들이 생업을 중단하고 뛰쳐나와 이어하는 상왕을 배웅하였다.

    이사는 모두 끝냈다.

    이 몸의 인기는 퇴위를 했어도 사그라 들 줄을 모르는지, 경복궁~북촌까지 오는 데만 장장 한시진이 꼬박 걸려버릴 정도였다.

    손을 하도 흔들어서 그런지 손목에 염증도 생긴 것 같다.

    “돌아오셨사옵니까요.”

    어가에서 내리자 덕산이가 날 반긴다.

    궁에서 볼 때랑은 역시 다른 느낌이다. 그 느낌에 드디어 퇴위를 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느낌과 함께, 이제는 잠저가 된 북촌 집을 돌아봤다.

    나 없는 동안 식솔들이 그럭저럭 관리를 잘 해서인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인 잠저였다.

    새삼 그대로인 잠저를 보니, 4년이란 시간 속에 나만 바뀐 것 같아서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아니지, 그러고 보면 나만 바뀐 건 아니지.

    “중전마마.”

    여울이.

    예나 지금이나 예쁜 건 같지만, 여울이의 호칭도 바뀌었다.

    중전마마로.

    뭐, 진지 빨고 말하자면 이젠 중전마마가 아니라 왕대비(王大妃) 전하긴 하지만, 그런 팩트 체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어가를 뒤따르던 가교(駕轎)에서 여울이가 내리자 옛 몸종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여울이를 반겼다.

    어디 여울이만 바뀌었겠나.

    신배도 바뀌었다.

    여울이 뱃속에 있을 때, 어떻게 이름 지을까 고민하다가 이역의 이(李) 신여울의 신(愼), 마지막으로 베이비의 배를 합쳐서 이신배.

    나중에 여울이가 들으면 서운해 할지도 모를 만큼 대충 지은 것 같은 이 이신배란 이름에서 어엿한 의온공주(懿溫公主)라는 작위가 추가됐고, 주변에서는 아기씨 대신 공주마마라 불리며, 입궐 전까지는 아장아장 걷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아비가 제 투정 안 들어주면 삐지기도 하는 미운 나이(?) 일곱 살이었다.

    여울이랑 신배만 해도 이 정도니 주변인들까지 합하면 정말 4년이란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게 바뀐 것 같다.

    물론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변화는······.

    “스승님! 제자가 뫼시겠습니다!”

    헐리우드 오바 액션을 선보이며 날 호종하는 이 무사.

    다름 아니라 개똥이다.

    이 녀석, 도대체 크면 뭐가 될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크고 나니 뭐가 되긴 됐다.

    지금만 해도 호위대장으로서 날 잠저까지 호종했거든.

    “다 와서 무슨 유난이냐.”

    “병서에 이르기를, 자객은 상대가 방심하는 시간에 비수를 날린다 하였으니 지금이 가장 조심해야 할··· 아 근데, 비수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흔히 비수가 날아와 꽃힌다고 하지 않습니까? 근데 이 비수를 던져서 적을 살상시키는 게 참 어럽걸랑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 다 변한 건 아니다.

    잠저가 그대로인 것처럼, 개똥이도 그대로인 부분이 있다.

    “그래, 어련하겠시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잠저 안으로 들어갔다.

    ***

    나이 먹고 보니까 시간이 참 빠르게 느껴진다.

    15살 때의 1년이 다르고, 30살 때의 1년이 다른 것처럼.

    아닌 게 아니라 벌써 은퇴한 지도 한달이 흘렀다.

    그냥 눈 깜빡 거린 정도 같은데 한 달이라니······.

    나도 늙긴 늙었나봐.

    아, 물론 한달 동안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지내긴 했었다.

    인사를 좀 다녔다.

    무슨 인사냐고?

    내 재위 기간 동안 날 보좌해준 사람들 집에 고마웠다고 선물 꾸러미 들고 인사를 다녔다.

    4년간 날 보좌한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었겠나?

    그마저도 서울~경기도권에 사는 사람들만 추려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1년이 꼬박 걸릴 일이었다.

    상왕이 된 내가 신하들 집에 인사 다닌다고 말이 좀 많긴 했지만, 그 인사도 이 집을 마지막으로 끝이다.

    문제는······.

    “형님은 바쁘다면서 왜 따라오셨어요?”

    얼마 전 태상왕에 추대 된 형님이시다.

    태상왕-상왕-주상의 수직 관계에서 최고에 계신 형님이시니 만큼, 한가하기로는 조선 제일 일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어떻게 보면 이제 막 보위에 오른 황이보다 바쁘다.

    위사들 불러다가 축구해야지, 사냥 나가야지, 책 써야지, 경덕이가 부산에서 건조중인 배들 잘 만들어지고 있는지 보고도 받아야지······.

    이걸로도 성에 안 차는지 요즘에는 나한테 요리 강습도 받고 계시다.

    엄밀히 말하면 꽈배기 만드는 방법이지만.

    배워서, 설탕이 특산물인 오키나와에 전파할 거라나 뭐라나.

    그렇게 몸이 두 개라도 모자른 형님이신데 굳이 마지막 집 인사하는 데 따라오셨다.

    “뭐, 긴히 상의 할 것도 있고··· 크흠.”

    “혹시나 하고 말씀드리지만 전 안 갑니다.”

    “아니, 누가 보면 오해하겠구나. 오늘은 너 설득 시키려고 온 거 아니다.”

    내가 퇴위하고 한 일주일 쯤 지나서였나.

    형님은 부산진에 건조중 인 군선들의 건조 목적을 밝히셨다.

    아메리카에 가기 위함이노라고.

    뒷목 잡을 일이지만, 그래. 여기까진 이해했다.

    문제는 그 날부터 아메리카 같이 가자고 떼를 쓰신다.

    물론 난 죽기 살기로 안 간다고 버티는 중이고.

    근데 오늘은 나 설득시키러 온 게 아니라고?

    도저히 믿지 못 하겠어서 눈을 샐쭉하게 치켜떴다.

    “크크흠. 이거, 집이 왜 이리 누추한 것이냐. 내가 옛날에 역적들 재산 적몰하면서 하사한 집도 있을 텐데.”

    너무 노골적인 화제 전환이었지만 내가 이해해야지, 뭐.

    다만 아메리카 가자고 또 떼(?)나 안 썼으면 좋겠다.

    뱃길도 모르고, 설령 알아도 수 년은 걸릴 일이라 진짜 가기 싫은데.

    “그래도 청백리에 녹선 됐잖아요.”

    “요새 염리(廉吏)들은 다 얼어 죽었다더냐? 뽑을 사람이 없어서··· 쯧즛.”

    절레절레.

    “이리오너라!”

    “누구시오?”

    수백명의 사람들한테 인사 다니느라, 거짓말 않고 수백 군데의 집을 다녔던 것 같다.

    당연히 이리오너라도 수백번은 족히 외쳤을 거고.

    그런데 그 수백번의 이리오너라에 가노가 아니라 안주인이 반응한 건 몇 없는 일이었다.

    그마저도 정경부인(종1품 문무관의 처에게 주어지던 작호의 일종)이 나온 일은 처음이었다.

    “부인은 속히 예를 갖추시오. 상왕 전하와 태상왕 전하시오.”

    위사의 말에 선뜻 이해가 안 되는지, 눈만 끔뻑거리고 있던 부인이 이내 화들짝 놀라 부복했다.

    그런 부인을 일으켜세우고 말했다.

    “대사헌은 출타했습니까?”

    청백리에 녹선 된 인물.

    요새 염리들은 다 얼어죽었냐며 형님이 비아냥 거린 인물.

    다름 아닌 대사헌 김전이었다.

    ***

    뒷 돈 써서 청백리에 녹선 된 게 아님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안내 된 방은 굉장히 협소하면서도 볼품 없었다.

    방 인테리어라고는 서안과 촛대, 침구, 문갑이 전부였고, 그 흔한 병풍 하나 없었다.

    이게 명색이 대신의 집인지 서민의 집인지 구분이 안 갈 즈음.

    “미리 기별 하셨다면 의복을 정제했을 텐데 송구하옵니다.”

    자고로 쉬는 날, 집에서 꽉 끼는 청바지 입고 있는 사람이 어딨던가.

    김전도 마찬가지였다.

    지극히 편한 복색, 심지어는 여러번 기운 흔적이 있는 옷이었다.

    물론 인사하러 왔는데 옷이 좀 낡았다고 나무랄 생각은 없다.

    “신하가 군왕을 대면하는데 참으로 편하도다. 너무도 편해서 이게 군신의 관계인지, 친우 관계인지 모르겠도다.”

    단, 형님은 아닌 것 같다.

    형님의 비아냥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여긴 편전이 아닌데······.

    “하하, 뭐 어떻습니까. 공적인 자리도 아니고 사적인 자린 걸요.”

    “다른 사람이 그러면 모르겠지만 늘 꼿꼿하고 바른 말만 해대던 대사헌 아니냐. 그런 대사헌이 군신의 관계를 가벼이 여기는 것 같아 한 소리였다. 자고로 사람은 앞뒤가 똑같아야 하는 법 아니겠느냐.”

    괜히 데려왔다.

    어지간히 대사헌한테 쌓인 게 많은 모양이다.

    하긴, 뭐.

    나도 좋은 감정은 아닌데 사사건건 대사헌과 부딪혔던 형님은 오죽할까 싶다.

    이대로 두면 형님의 비아냥에 대사헌의 잔소리가 또 튀어나올 테고, 그러다 보면 또 서로 감정의 골만 깊어질 것이었다.

    그럴 바에야 빨리 인사하고, 형님 데리고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대사헌도 들어서 알겠지만, 내가 퇴위하고 나서 지난 한달간 고마운 분들한테 인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혹자는 임금이 신하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꼴사납고, 보기 안 좋다고도 합니다만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 군신을 구분 지어서야 되겠습니까? 여기 온 것도 그런 맥락에서구요.”

    편전에서와는 달리 흐뭇히 미소 짓는 대사헌이다.

    “옳은 말씀이시옵니다. 비록 군신의 관계가 엄격하여 하늘이 맺은 관계라고는 하나 무릇 임금도 선비요, 신하도 선비이니 두 선비가 상생하여 일국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설마 전하께서 방문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사옵니다.”

    싫은 사람이 ‘아’ 라고 말하면 ‘아’로 들리는 게 아니라 ‘어’라고 들리는 게 사람 심리다.

    그래서일까.

    흥.

    “와도 꼬장이고 안 와도 꼬장이니 대사헌이야 말로 청백리에 녹선 될 만 하다.”

    “아, 형님.”

    “그렇잖느냐. 네가 방문할 줄 몰랐다니··· 널 얼마나 소인으로 여겼으면 공과 사를 구분 못 한다고 생각했겠느냐 이 말이다.”

    괜히 내가 다 낯뜨거워지는 그때.

    “본인이 나고 자란 나라와 몸 담은 조정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선비는 없사옵니다.”

    김전의 동문서답이 튀어나왔다.

    동문서답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잘 되게 만들고 싶은 것이고, 어떻게든 군왕을 바른 길로 이끌어 요순의 치(治)를 재현하고 싶은 것이 바로 선비의 꿈이요, 욕망인 것이옵니다. 신도 같았나이다.”

    “···”

    “다만 지금에 이르러 보니 신의 방법은 틀렸사옵니다. 소국이 대국을 거스를 순 없다고 여겨 사대의 예를 굳건히 지켜나가길 바랐으나 지금에 이르러 보면 황상이 소국의 제후에게 구원을 청했고, 장사로는 나라를 크게 일으킬 수 없다고 여겨 삼성을 탄핵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 보면 장사의 부가 곧 국부로 이어졌고, 백성이 사치에 물들면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워질 거라 여겼으나 지금에 이르러 보면 백성의 사치가 꼭 그른 것만은 아니었사옵고 마지막으로······.”

    “···”

    “마지막으로, 신하가 군주에게 직언하면 할수록 나라의 백년대계가 바로 선다 여겼으나 지금에 이르러 본다면 그건 군주를 옥죄는 일에 다르지 않았으니 지금 나라를 되돌아본다면 과연 신의 말이 옳았겠나이까, 두 전하의 말이 옳았겠나이까.”

    “···”

    “신의 방법은 틀렸사옵니다. 두 전하에게 서운한 말씀을 수차례 아뢨사오나, 그와 별개로 태평한 시대가 도래했고 만백성은 태평한 시대를 만끽하니 신의 방법은 진실로 틀린 것이옵니다.”

    동문서답으로 시작한 김전의 말이었지만, 나는 어느순간 귀 기울이며 김전의 말을 들었다.

    무슨 의미인지 잘 알 것 같았다.

    비록 방법은 다를지언정 누구나 나라를 이롭게 하고 싶어한다.

    나의 방법으로, 나의 뜻으로, 내가 배운 것으로.

    김전도 같았을 테지.

    “두 전하의 노고는 진실로 컸사옵니다. 후세는 필시 두 전하를 숭배하며 공경해 할 것이니 신 또한 같나이다.”

    동문서답은 김전의 절과 함께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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