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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62화 (36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62화>

    ***

    청천벽력.

    권균이 가져온 교서는 대신들에게 있어서 만큼은 청천벽력 그 자체였다.

    아니, 청천벽력 정도가 아니다.

    상왕이 본인을 대장군으로 제수했던 일은 이에 비비지도 못 한다.

    차라리 상왕이 상왕 본인을 대장군으로 제수했던 일은··· 그래, 애교로 볼 수도 있다.

    근데 자폐(自廢)라니······.

    이건 고금의 역사를 상고해봐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생각 이상으로 충격적인 소리여서일까?

    그 누구도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 했다.

    한동안 침묵이 빈청을 지배했다.

    “이게, 그러니까 이게··· 무슨 소리요, 도승지?”

    한참이 지난 후, 우의정 채수가 말까지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권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좌부승지가 급히 승정원에 전달 된 교서라길래 가져온 것이고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릅니다.”

    본인도 뭔 일인지 모르겠단 권균의 말에 도처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금상 전하께서는 괜찮으신 줄 알았건만······.”

    김전의 탄식에는 정확히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는 생략됐지만, 자리한 사람들 중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고금의 역사에 임금이 본인을 폐한 일은 상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전례에 없는 일이니 전하께서 어찌 밀어 붙이실 수 있겠습니까?”

    권균이었고,

    “과연 도승지의 말이 타당하긴 합니다. 군왕이 스스로를 폐한 일을 들은 일은 없으니, 이를 거듭 아뢰면서 전위의 뜻을 거두어달라 계청(啓請) 드린다면 전하께서도 곧 뜻을 접으시겠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호조판서 이손이었으며,

    “그렇지요, 그래요. 거기다가 세자 저하께서도 가세하셨으니 힘을 더 보탠다면, 전하께서는 하찮은 천인들의 말에도 귀 기울이시는 분이니 어찌 말씀을 거두지 않으시겠습니까?”

    좌참찬 안윤덕이었다.

    이들이 돌리는 행복회로(?)는 빈청 대신들 모두의 행복회로였다.

    단, 모두가 행복회로를 돌리는 건 아니었다.

    이상주의자 속에는 현실주의자도 있는 법.

    지금은 대사성 이점이 그러했다.

    “하지만 뜻을 거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자폐를 고집하시면 어쩝니까?”

    “그 무슨 불손하고 두려운 말씀이시오, 대사성.”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꾸 전례에 상고 할 수 없는 일이니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상왕 전하께서 스스로를 대장군에 봉한 일은 뭐, 상고가 가능한 예였습니까? 친정은 또 어떻습니까. 태조, 태종 대왕이래 임금이 친정에 나선 일이 또 언제 있었습니까?”

    “세조대왕이 계시지 않으셨소.”

    “그게 어찌 친정입니까, 다 된 밥에 숟가락 얹기였지.”

    세조의 친정은, 엄밀히 말하면 역적을 때려 잡으러 간 것이었으니 대사성이 언급한 친정의 범위에는 들어오지 못 하기도 했다.

    “좌우지간 당장 상왕 전하만 보더라도 전례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금상 전하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행복회로를 돌리는 호조판서 이손의 질문에 이점은 냉소했다.

    “4년입니다.”

    “뭐가 말이오?”

    “고작 4년 밖에 안 됐다는 말이지요.”

    “아니, 그러니까 뭐가 고작 4년 밖에 안 됐다는 말씀이시오?”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말입니다. 4년 밖에 안 됐는데도 여러분은 전하께서 대원군이던 시절을 잊으신 겝니까? 대군이던 시절은 또 어떻구요. 전례에 얽매이는 분이셔서 장사를 하고 삼성을 만드셨습니까, 전례에 얽매이는 분이셔서 직접 과자를 만들고 해괴한 물건들을 만드셨었습니까.”

    “···”

    “상황을 낙관적으로 볼 게 아니라, 최악의 경우도 상정을 해야 합니다. 자, 전하께서 거듭 주청드려도 자폐를 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는 우리 모두 불충한 신하로 역사에 기록 될 겝니다.”

    “음.”

    “게다가 이는 법례에도 맞지 않습니다. 말이 좋아 자폐고, 전하 본인을 진성대원군으로 봉하는 일이지. 폐립 된 군왕들의 처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작금의 상황이 역사에 등장하는 폐주들과는 다릅니다만은, 물러나면 상왕이 되시는데 상왕이 어찌 군(君)이 될 수 있겠으며, 군이 된다면 호칭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대감이 되는 것입니까? 하루라도 보위에 있은 자는 천명을 받은 자라 하였는데, 천명을 받은 분을 어찌 대감이라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꿀꺽.

    행복회로를 돌리던 대신들은 상왕을 대감이라 부르는 모습이 저도 모르게 떠올랐는지 마른 침을 꼴깍 거렸다.

    이건 속된 말로 개족보와 같은 일이고, 콩가루 집안 되는 일과 같은 것이었다.

    “혹 대사성께서는 묘안이 있으시오?”

    채수가 기대를 하고 물었다.

    모두의 기대였다.

    하지만.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이 묘안일 듯 합니다.”

    “흐, 흘러가는 대로 두자니··· 무슨 말씀이시오?”

    “전하께서 본인 스스로를 자폐하게 만들고, 군으로 강등시키게 할 순 없지 않습니까. 그 꼴은 어떻게든 면해야지요. 그냥······.”

    꿀꺽.

    “그냥?”

    “세자 저하께 양위하도록 주청 드립시다.”

    “아니, 신하 된 도리로서 어찌 양위를 주청 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스스로를 폐위토록 두는 일은 만고에 다시 없을 충의랍니까?”

    “그, 그건······.”

    “이건 단순한 폐위와 양위가 아닙니다. 상왕을 대감으로 부르느냐, 전하로 부르느냐. 기로에 선 문제인 것입니다. 어느 것이 더 불충한 일인지는 딱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허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 탄식이 터져나왔지만, 탄식은 상황을 바꾸지는 못 하는 법이었다.

    약간의 설왕설래 끝에 이점의 의견은 공론으로 채택됐다.

    ***

    ‘진짜 먹히네.’

    상선 대감이 가져온 바깥 소식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셀프 폐위 협박이 먹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대로 장종조, 영종조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벌인 마지막 발악에 가까웠는데 보기 좋게 먹혀 들어갔다.

    와, 절로 감탄이 나오는 한 편, 지난 날 형님이 왜 그리도 헛짓거리(?)를 하고 다니셨는지 이해가 됐다.

    지극한 진심이 외면 받다가도, 헛짓거리 한 번이면 통하잖나.

    그런 의미에서 형님도 학습을 한 게 아닐까 싶다.

    자꾸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동을 보여줘서 대신들의 허를 찌르는.

    듣고도 믿기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봤다.

    “···하니 매사를 삼가고 조심하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니 신하 된 도리로는 하루라도 더 전하의 치세를 누리고 싶사오나 은택을 받잡고도 어찌 하교를 거역하오리까?”

    “···외람되게도 신들은 감당하기 벅찬 하교를 받았으니 두려운 마음이 넘치는 바, 도대체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어떤 말을 진달하여야 할지 모르겠사오나 전하께오서 동궁에 계사하여 치화(治化)를 잇고, 넓히려 하니 어찌 명을 봉행하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뜻대로 하시옵소서.”

    불과 반시진 전만 해도 황망함을 형용 할 수 없다, 명을 거두어 달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으니 차라리 죽여달라··· 제발 하교를 거두어달라··· 등등.

    극단적으로 석고대죄를 벌이던 대신들이 맞는지 의심이 될 지경이다.

    아, 물론 노골적으로 황이한테 양위하란 말은 없다. 하지만 그건 신하의 도리 때문인 것이다.

    신하 따위가(?) 왕한테 왕위를 넘겨라 마라 할 순 없으니까.

    때문인지 비교적 중립적인 어휘를 사용한 대신들이다.

    “자, 그럼 나가볼까.”

    과유불급이라 했다.

    이미 분위기는 무르익지 않았나 싶다.

    나는 상선대감과 덕산이, 내관들의 안내를 받아 침소를 나섰다.

    “주상 전하 납시오!”

    상선 대감이 가갈하자, 백의 차림으로 강녕전각에 꿇어 앉아 석고대죄하던 대신들이 일제히 읍(揖)을 한다.

    그런데 대신들 모두 어딘가 초조해보인다.

    초조해 보이는 대신들을 보자 괜한 장난기가 발동했다.

    “에··· 교서는 받아들 봤습니까?”

    털썩!

    “황공하여 무슨 말을 아뢸지 모르겠나이다.”

    “여러분도 알겠지만 과인 만큼 용렬하고 덕이 없는 왕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군 시절에는 탄핵도 무진장 받았고 또 욕도 무진장 들었으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대사헌 김전이다.

    “그건 대사헌이 잘 알지 않습니까. 대군 시절 숱하게 날 탄핵하여 왕자의 체통을 지키라 간언하던 대사헌이 아닙니까.”

    “신이 미욱하고 교만하여 벌인 일이니, 전하께서는 더욱 꾸짖어주시옵소서.”

    진지한 김전에 발동한 장난기가 가라앉았다.

    꼰대처럼 에헴, 헛기침 한 번 터뜨려주고 대충 층계에 걸터앉았다.

    “여러분의 뜻이 지극하니 아마 그 정성은 하늘에도 닿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닿는다 해도 어쩌지 못 할 것이 있으니 바로 나의 치세입니다. 하늘이 협박을 한들 재위에 있을 터럭의 생각도 없으니 이러한 내 뜻은 수차례 밝힌 바가 있습니다. 경들이 마다하니 자폐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이리 내 뜻을 알아주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

    “재위에 4년 있으면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섭섭한 일도 있었고, 때로는 서운한 일도 있었고, 때로는 화가 나는 일도 있었지요. 다사다난하고 복잡한 일들을 어찌 한 줄 말로 설명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지금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래도 부족한 임금을 잘 보필한 여러분들 덕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

    “세자는 듣거라.”

    “말씀하소서, 숙부 전하.”

    “나는 왕으로서 도리를 잃은 지 오래라서 고작 4년을 하고 끝내지만 너는 총명하고 덕이 있으니 40년은 재위에 있으면서 나라를 중흥시키도록 해라.”

    칭찬인지 욕인지 아리송했을까?

    황이가 한 템포 늦게 고개를 조아렸다.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자, 그럼 여러분들. 합의 다 끝난 거지요?”

    대신들은 말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드디어 해방이다.’

    해방이란 생각에 감격의 눈물 대신, 감격의 만세가 자동으로 나왔다.

    “만세!”

    ***

    퇴위식 및 즉위식은 형님이 오면 진행하기로 했다.

    난 한가롭게 형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소식을 전해 들으신 형님은 말을 달려 정확히 이틀 뒤에 도착하셨다.

    왜, 퇴위를 하냐고 나무라실 줄 알았는데 웬 걸.

    “이제 대신들 눈치 안 보고 같이 돌러다닐 수 있겠구나. 사실 부쩍 심심하던 참이었다.”

    라는 말을 하시며 날 황당하게 만들었다.

    뭐, 하루 이틀 겪은 거 아니라서 그러려니 넘어가긴 했지만.

    그리고 보름 뒤.

    관상감에서 이 날이 길일이라며 보고한 3월 25일.

    퇴위식과 즉위식이 진행됐다.

    “과인이 생각하건대 과인은 매우 부덕하고 용렬한 임금이었다. 4년간 재위에 있으면서 부왕처럼 덕치하지 못 했고, 상왕처럼 문치(文治)하지 못 했으니 과연 어질지 못 한 임금이었다. 그런데도 밑으로는 구품관에서 위로는 일품관에 이르기까지, 문무백관이 모두 합심하여 보필해준 덕에 사민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이런 과인이 하루라도 더 재위에 있는다면 필시 하늘이 우리 왕가와 나라에 재앙을 내릴 것이다. 정리(正理)를 바로 세우지 못 하고 성감(聖鑑, 임금의 안목)이 없으며, 오직 화난만 들끓게 했기 때문이다. 이에 세자 이황에게 명하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니, 백여년 종묘사직을 감념(感念)한다면 세자 이황은 능히 백여년 종묘사직을 보전 할 왕재를 지녔다. 다만 세자의 나이가 아직 열다섯에 불과하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바가 약간은 있는데, 그대들 대소신료들은 내 뜻을 잘 본받고, 나의 지극한 말을 잘 헤아려 좌우에서 세자를 보좌하라.”

    교장님 훈화 말씀보다 더 지루한 연설을 하고 단을 내려왔다.

    그러자.

    “상왕 전하. 만세에 무강하시옵고, 복록의 평안을 누리시옵고, 길이길이 수하소서!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우레와 같은 함성과 산호만세 소리와 함께 난 적법하게(?) 상왕으로 추대됐다.

    드디어 은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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