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361화 (36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61화>

    ***

    ···라고 말하면 내 정성을 대신들이 알아주고, 오죽 하기 싫으면 저럴까.

    일말의 동정심을 가져줄지 알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줄 거라 생각했다.

    “전하의 뜻대로 교서를 반포하소서!”

    교서 반포는 개뿔!

    착각이었다.

    “전하께서 아까 편전에서 하교하신 것을 새삼 생각해보자니 아찔할 따름이옵니다. 전하께서는 아까 말씀하시길, ‘이 다음부터는 일체의 공사(公事)를 동궁이 알아서 처결할 것이며, 경들도 다음부터는 동궁에게 재가를 받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 말씀은 전하께서 요동에 가시면서 ‘세자가 대리하라.’ 라는 말과는 분명하게 다르니 황망함을 감히 형용이나 할 수 있겠나이까?”

    “그렇사옵니다. 이제 비로소 변경을 안정시키고, 나라의 대업을 회복시키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하교를 내리신 데 모자라, ‘이는 경들의 충심을 시험하려는 것도 아니요, 정치적인 뜻도 아니다’ 하시니 더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전하께서 설령 동궁에게 전위할 뜻을 두셨다 하더라도, 신민의 소망은 전위에 있지 아니하고 전하의 치세를 하루라도 더 누림에 있사오니 바라건대 하교를 거두어주시옵소서. 황공하고 또 황공하여 거듭 머리 조아려 아뢰옵나이다.”

    봐라, 내 말에 일말의 동정심을 가졌다면 밖에 저리 진을 치고 있진 않았겠지.

    “얼마나 되냐?”

    골치가 아파서 골을 꾹꾹 누르며 덕산이에게 물었다.

    “더 늘었는뎁쇼?”

    “얼마나 더?”

    “하나, 둘, 셋······.”

    덕산이가 일일이 머릿수를 세기 시작했다.

    그 수가 정확히 250이 넘어갈 즈음, 관두라 말했다.

    그 정도면 대신이라 부를 수 있는 자들만 멍석 깔러 온 게 아니다.

    그 이하의 관리들까지 멍석 깔러 온 거다.

    “제기랄. 은퇴도 마음대로 못 하고······.”

    이럴 때 그나마 마음 통하는 숭재 씨라도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겠고, 미리 왕위 팽개치고 도망한 전력이 있는 형님이라도 있으면 역시나 도움을 구해보겠는데 이마저도 쉽지가 않다.

    숭재 씨는 요동에 있어서 쉽지가 않고, 형님은 웬일인지 귀국하자마자 며칠 서울에 머물더니 부산에 콕 틀어박혀 계시다지 뭔가.

    내 귀국 소식 듣고 예정일에 맞춰 상경하려 했는데 알다시피 내가 예정일을 훨씬 앞당겨 도착하지 않았나.

    형님에게 조언 구하려면 족히 2~3일은 더 있어야 할 거다.

    “그리 왕노릇 하기 싫으십니까요? 아니, 싫으시옵니까요?”

    땅이 꺼져라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으니 덕산이가 약간은 한심스럽다는 듯 쳐다보며 묻는다.

    “그럼 싫지, 좋겠냐?”

    이 자리는 책임을 엄청 지는 자리다. 그리고 져야만 하는 자리다.

    뇌성벽력이 어디에 내리치건, 홍수가 나건 폭우가 내리건, 가뭄이 들건.

    이 모든 현상과 재해들은 자연의 이치일 뿐이라 설명을 해도, 그래서 일정 부분 납득을 했다손 치더라도.

    이에 대한 완전한 책임회피는 불가하다.

    일종의 쇼라도 해줘야 한달까?

    예컨대 이런 거지.

    가뭄이 들면 백성들은 내가 기우제를 지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내가 백날 기우제 지낸다고 비 오는 게 아니라 설명해도, 그래도 일정 부분 납득을 했다손 쳐도 백성들은 마음 한켠에 ‘그래도 기우제는 지내야지 않나······.’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을 외면 할 수 없어 약식으로나마 기우제를 지내야 하는 거고.

    물론 왕위에 있으면 얻은 것도 많긴 했다만, 이런 책임만 지는 자리는 한시라도 더 있기 싫다.

    “그럼요. 이건 진성대원군댁 가신(家臣)으로서 드리는 말씀인뎁쇼.”

    시큰둥하게 덕산이를 쳐다봤다. 표정만 보면, 뭐 대단 한 거라도 말해주려는지 심히 비장하기 까지 하다.

    “뭔데?”

    “전하께서도 상왕 전하처럼 하시면 안 됩니까요?”

    “상왕 전하 처럼이라니, 뭔 소린데 또?”

    가뜩이나 사람들이 내 의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열불이 나는데 별 같잖은 소릴 대단한 소리라도 하는양 말하는 덕산이에 짜증이 확 났다.

    “아뇨. 들어보세요.”

    “듣고 있다.”

    “상왕 전하께서는 본인을 장군으로 임명하지 않으셨어요. 대장군으로요. 맞죠?”

    “어, 그랬지.”

    “전하라고 그렇게 하지 말란 보장 없잖아요.”

    하.

    덕산이가 날 위하는 마음은 알겠다.

    근데 너무 한심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내가 날 장군으로 임명해? 뭐, 그러면 왕위에서는 알아서 내려올 수 있게 되냐?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난 날 장군으로 임명해서 잠깐 여행을 가고 싶은 게 아니다.

    완전한 은퇴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아뇨. 제 말은 그게 아니라요. 상왕 전하께서도 본인을 장군으로 임명하셨는데 이게 얼마나 기행이었습니까? 아니,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기행 정도였어요? 장안에··· 아니, 장안이 뭐야. 팔도 전체가 들썩거렸다면서요?”

    당시의 일을 회상해봤다.

    피식.

    확실히 그랬다.

    그 기행이 어찌나 신박하고 어처구니 없었으면 중용월보는 보름 넘도록 일보를 간행할 정도였다.

    문제는.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지금이랑은 상관 없잖아.”

    “전하께서도 하시면 되잖아요, 기행.”

    “덕산아, 이 자식아. 방금 말했잖아. 내가 날 장군으로 임명한다고 해서 내려올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제 말 좀 끝까지 들어보세요.”

    “그래, 그래. 너 말하고 싶은 데까지 다 말해봐라.”

    “전하께서도 하시면 됩니다, 기행. 단.”

    “단?”

    “상왕 전하랑은 다른 기행을 벌이시는 거죠.”

    “장군 되는 거 아니면 뭐?”

    덕산이는 누가 들을새라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혼자 있고 싶다며 주변은 다 물린 뒤인데도 말이지.

    “폐위입니다요.”

    “뭐, 뭔 위?”

    “폐위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피식거리다가 이내 폭소가 터져나왔다.

    물론 어이가 없어서 터져나온 폭소였다.

    “인마.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아, 그래도 간만에 웃었네. 덕산이 너가 충신이다. 만고에 다시 없을 충신.”

    그래.

    내 마음 알아주는 건 잠저 시절부터 날 보필한 덕산이 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런 말도 해줄 수 있는 거겠지.

    그리고 정말 간만에 웃었던 것 같다.

    하, 폐위라니 진짜.

    생각하니 또 웃겨서 피식거리던 그때였다.

    “전하! 전하! 큰 일 났사옵니다!”

    밖에 멍석 깔고 있는 대신들이 난입(?) 하지 못 하도록 내보내둔 상선 대감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셨다.

    “무슨 일입니까?”

    “세, 세, 세······.”

    “세, 뭐요?”

    “세, 세자 저하께서 멍석을 까셨사옵니다······.”

    끔뻑끔뻑.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안 가서 눈만 끔뻑거렸다.

    그리고······.

    “뭐요! 세자가?”

    세자가 멍석을 깔았다.

    지금까지 그나마 있었던 희망은 세자라 할 수 있었다.

    다른 대신들 모두 멍석 깔 때, 세자만은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세자를 희망이라 여겼다.

    세자 너만은··· 너만 안 나오면 어떻게 비벼 볼 수 있겠는데··· 나오지 말거라.

    근데 나왔다는 건, 멍석 깔기 전 목욕재계를 하고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시간차를 생각해보면 합리적인 추론이다.

    전위의 뜻을 밝힌 게 한시진 전, 편전에서였고 말을 마치마자 나도 목욕하러 갔었고, 목욕하고 나오자마자 대신들이 멍석을 깔았고 그리고 지금 사태에 이르렀으니까.

    “하.”

    이러면 은퇴는커녕 백날 천날 왕 노릇 해야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10년 후, 그만두고 싶은데도 이미 벌인 일이 있어서 그만 두지 못 하고,

    20년 후, 그만두고 싶은데도 대신들이 조금 더 하라 성화고,

    30년 후, 이왕지사 40년은 채워야지 않겠냐는 말에 등떠밀려 그만 못 두고.

    그러다 죽기 전까지 왕위에 있고······.

    그래서 죽고 나면 길 장(長)자 써서 장종(長宗), 장조(長祖), 길 영(永) 자 써서 영종(永宗), 영조(永祖)라는 묘호가 붙을지도 모른다.

    “그건 안 되지!”

    생각 만으로도 끔찍해서,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야, 덕산아.”

    “네?”

    “아까 뭐라 했냐. 폐위 기행? 그거 자세히 좀 설명해봐라.”

    “에, 저도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건 아니지만 일단······.”

    나는 난생 처음으로 덕산이 말에 귀를 기울였다.

    ***

    빈청.

    석고대죄하던 대신들은 교대로 빈청에서 쉬었다.

    옛날 같았으면 교대고 나발이고 몇날 며칠이 되던 간에 봉두난발을 한 채 멍석을 깔고 뜻을 관철 시키려 했겠지만, 그런다고 통하지 않을 왕이란 걸 금상과 상왕의 14년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은 대신들이었다.

    쉽게 말하면 될일될 이랄까.

    될 일이면 될 거고, 아니면 안 될 거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2교대 방식의 석고대죄 방식이 뿌리 내렸다.

    A조가 투입되면, 현장에서 석고대죄하던 B조는 은근슬쩍 퇴장해서 휴식을 취하는 2교대 방식의 석고대죄 말이다.

    그리고 대사헌 김전, 호조판서 이손, 예조판서 김봉, 우의정 채수, 지부사 노공필 등은 가장 먼저 석고대죄에 투입(?) 됐던 A조였다.

    장장 한시진 가깝게 석고대죄를 하고 몸이 찌뿌등한 찰나 B조가 투입 됐고, 당연히 A조는 빈청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빈청에서 간만의 석고대죄에 찌뿌등해진 몸을 풀던 대신들이었다.

    “그나저나 전하께서 어쩌실까요? 말씀을 거둬주시겠지요?”

    호조판서 이손이 제각각 쉬느라 조용하기 짝이 없던 빈청에 화두를 던졌다.

    “뭐, 거둬주시겠지요. 아니, 거둬주셔야지요. 이제 보위에 오르신 지 4년 밖에 안 되셨고 춘추가 한창이신데 전위를 하겠다니요. 이번 만큼은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뜻이 확고하신 듯 하여··· 막을 수 있으면 다행인 일이련만······.”

    “책봉사 보낸지 4년 밖에 안 됐는데 또 책봉사를 보내면 이만큼 민망한 일이 또 어딨겠어요. 이번에는 무조건 그, 뭐야. 뭐라고 하지요?”

    “뭘 말씀이십니까, 대사헌?”

    “전하께서 종종 하시던 표현 있잖습니까.”

    호조판서 이손이 중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이거 말입니까?”

    “그건 그만하라는 표현 아니었습니까. 파···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상왕 전하께서도 종종 쓰셨고.”

    “아, 파이팅이요.”

    “예. 이번에는 무조건 파이팅해서 저번처럼 계사(系嗣)가 이뤄지게 두진 마십시다들. 아무리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실 때, 세자께서 장성할 때까지만 재위에 있겠다고 하셨어도 일국의 지존이 자주 바뀌는 건 이롭지 못 한 일 아니겠습니까?”

    주변 대신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게다가 금상이 폭군이면 또 모른다.

    상왕 같은(?) 왕을 겪었기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성군도 이런 성군이 없을 지경이었다.

    폭군이 재위에서 내려오겠다고 해도 목숨 걸고 막아야 하는데, 멀쩡하다 못 해 성군의 자질이 넘쳐나는 분이 재위에서 내려오겠따고 하니 이건 결사반대 정도가 아니라 이름 석자를 걸고서 막아야 하는 정도였다.

    “자, 그럼 모두 이번에는 잘들 해보십시다.”

    그렇게 대사헌 김전마저 의기투합을 다짐하던 그때였다.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도승지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도령께선 강녕전에 계셔야지 않소?”

    공필의 질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권균은 석고대죄 B조였다.

    “지금 그,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도승지.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어딨다고 하시오? 백여년 종사가 걸린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외다!”

    버럭 역정부터 내는 노공필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권균은 말없이 소맷자락을 뒤졌다.

    소맷자락에서 그의 손을 따라 달려나온 것은 종이였다.

    아주 큼직한 종이.

    “이게 뭐요?”

    “지금 막 승정원에 전달 된 교서입니다. 일단 다들 읽어들 보십시오.”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교서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후.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

    .

    .

    「지금 과인은 임금으로서의 도리를 잃어 나라의 법령은 어그러질대로 어그러졌고, 민생은 도탄에서 빠져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백여년 종묘사직은 위태롭기가 풍전등화와 같다. 이 모든 건 과인이 보위에 오른 뒤에 생긴 일들이므로 상왕이 계실 적에 종사가 이처럼 위태로운 적이 또 있었던가? 생각건대 어리석은 이를 폐하고 밝은 이를 세우는 것은 고금에 통용되는 의리이며, 우리나라는 태조 강헌대왕이 나라를 개창하신 이래 덕을 쌓은지 백년, 두터운 은택이 민심을 흡족하게 한 것이 또 백년이다. 그런데 지금의 왕인 과인은 어떻던가. 폭정을 일삼고, 도리를 잃어 형정(刑政)은 공평하지 못 하며 민심이 궁핍하여도 구제할 바를 알지 못 하고 생각조차 않는다. 생각이라고는 놀 궁리를 하는 것외에는 하지 않으니, 《서경》이르기를 ‘은나라 거울이 먼 데 있지 않고 하후 때에 있다’ 하였다. 작금에 반면교사를 삼는다면, 모든 죄업은 과인에게 있지 아니한가? 자성은 선비의 도리라 하였으니 이를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과인을 폐하되 원래의 군호를 환원하여 진성대원군에 봉한다. 이에 교시하니 모두가 알고 따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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