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360화 (360/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60화>

***

돌아가는 길이었다.

요동의 혼란한 상황은 잠시 동안이나마 잊기로 했다.

솔직히, 이미 조선으로 돌아가고 있는 내가 그거 조금 걱정한다고 상황이 스팩타클하게 바뀔 것도 아니고, 누구 말마따나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을 건데 굳이 걱정을 할 필요도 없고······.

괜히 신경 쓰면 내 머리숱만 빠질 뿐이다.

그래도 잊지 못 할 경험을 한 건 맞았다.

아주 개고생한 경험.

그렇잖아, 왕 노릇 진저리나서 의주로 도망왔는데 일 터져··· 그거 수습해··· 수습하니까, 또 일 생겨······.

뫼비우스의 띠도 이렇게 반복되진 않았을 테니 개고생도 이런 개고생이 없었다.

하지만 개고생에도 급이 있는 법.

개고생한 보람이 없으면 개고생으로 끝났겠지만, 개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무슨 보람이냐면······.

“천세! 천세! 천천세!”

“전하께서 내려주신 복록은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복록이니 종사가 억만년은 이어나갈 것입니다! 천천세!”

“도로 돌아가시더라도 전하의 덕스러운 일에 감복한 하늘이 전하를 도울 것이고, 전하의 탕탕(蕩蕩)한 성지에 감응한 귀신들은 하늘을 보필하여 전하의 태평성대가 만대에 이르도록 할 것이니 만수무강하시기를 축수합니다, 천천세!”

지금 여기는 금주다.

금주에 왔고, 이제 정박 시켜둔 배를 타고 돌아갈 일만 남았다.

그런데 보다시피 돌아가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날 보기 위해 모여든 인파들 때문이었다.

물론 호위 문제 때문에 선을 치고, 선을 넘어 오는 자들에게는 제재가 가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응은 지금처럼 뜨거웠다.

심지어는 어가(御駕) 안에 있어서 내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도 않을 텐데 위험천만하게 층루 누각 지붕에 올라 절을 올리는 사람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층루 누각에 오른 사람은 사정이 나은 축에 속했다.

층루 누각은 상대적으로 안전하기라도 하지, 아무런 안전장비 없이 기다랗고 큰 나무에 올라가서 미친 듯 손을 흔들어 대는 사람도 있었다.

한인이건 조선인이건.

핏줄을 떠나 나한테 감사해 하는 요동 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게 바로 보람이었다.

무진장 힘들긴 힘들었어도 내가 한 일이 헛되진 않았구나.

여러 사람들에게 용기를 심어줬구나.

뭐, 이런 거?

요동 사람들의 환대를 생각하면 며칠 더 머물까란 찰나간 떠오르기도 했지만, 말그대로 찰나에 불과한 잡념이었다.

갈팡질팡 하다가 팔자에도 없는 왕 노릇 했는데 3년··· 아니지.

해 바뀐지 반만년이 지났으니 4년차겠다.

4년 동안 팔자에도 없는 왕노릇 했으면 많이 한 거다. 더 갈팡질팡 하다간 뒤에 0이 하나 더 붙을지도 몰랐다.

요동 사람들의 환대에 약해진 마음을 애써 추스른 나는 숭재 씨에게 뒷일을 부탁한 채 배에 올랐다.

갑판에 올라 보니 해안가를 인파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인파들은 배가 출발하기 전까지 눈을 떼지 못 하고 있다가, 출발하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오체투지로 절을 올렸다.

“임 사관.”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흐릿해질 즈음 사관 임추(任樞)를 불렀다.

그러자 구석에 찌그러져서 글을 끄적거리던 임 사관이 고개를 든다.

“하교하시옵소서, 전하.”

“사초에 그림은 첨부 할 수 없나?”

“그림이라 하오시면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저기 모인 인파들 화공들한테 그리라고 한 다음에 사초에 첨부하면 후세 사람들이 오늘날을 더 상세히 떠올릴 수 있지 않겠나?”

“하오나 그건 전례에 없는 일인지라 신도 알지 못 하겠나이다.”

“돌아가자마자 알아보도록 하고.”

“예.”

“그리고······.”

“하문하시옵소서.”

“”이번에도 그, 최대한··· 알지?

“···”

“이번에도 내 입으로 말하게 할 참인가? 군신의 도리가 어찌 그리 간신 속내처럼 좁단 말인가. 척하면 탁, 탁하면 척. 알지?”

“···예, 전하.”

“아, 맞다. 내가 이런 부탁한다고 부담 느끼고 그런 거 아니지?”

“아니옵니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이건 권력자가 언론을 좌지우지 하고 있는 부정한 모습이 아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 좀 더 극적으로, 좀 더 멋있게 묘사 해달라는 게 부정청탁은 아니잖아.

앞전 일도 그렇고··· 어쩌면 후세에 나는 성웅이자 성군이었던 사람으로 불릴지도 모르겠다.

“크크.”

후세 사람들이 성웅, 성군이라 부르는 모습이 자연히 그러져서 나도 모르게 낄낄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 진짜 그럼 좀 곤란한데.

그럼 내 뒤 왕들은 나랑 만날 비교 당할 거 아냐.

기회 되면 후대 왕들한테 미안한단 글이라도 좀 남겨둬야겠다.

《중종실록(中宗實錄) 1511년 2월 19일》

「···하므로 그 뜻은 이전에 하신 것과 같았다.

상이 또 이르시기를,

“여(余)가 이런 부탁을 한다고 부담을 느끼는 건 아니겠지?”

하였다.【직필은 사관의 도리이므로 부담을 느끼진 않았다】의아하여 글로 남긴다. 이르시고 나서는 혼자 웃으셨다. 까닭은 알 수 없다.

***

주제가 주제였던지라 금주에 갈 때는 마음이 무겁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주제가 주제라서 마음은 가볍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넘쳐났다.

이제 그만 은퇴하고 뭘 할까.

행복한 고민이었다.

물론 아직 대신들은 모를 거다.

은퇴의 은 자도 안 꺼냈으니까.

독심술을 익히지 않은 다음에야 모를 수 밖에 없겠지.

물론 알다시피 갑작스러운 은퇴는 아니다.

즉위 했을 때부터 은퇴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 장장 4년에 걸친 고민을 실행에 옮기는 것에 불과하다.

다만.

4년간 마음먹은 은퇴를 실행에 옮기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우리 황제 덕이다.

황제는 날 요동왕에 덜컥 임명했다.

이게 얼마나 간단한 일이 아닌지 여러분은 모른다.

이건 명나라 조정 대신들 입장에서는 경악을 금치 못 할 일이다.

물론 정덕제 씨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일 거다.

본인 생각에는 내가 요동을 책임져 주는 사이에 내분을 정리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 판단했겠지.

뭐가 됐건 간에 확실한 건, 이렇게 되다간 그 가운데 낀 나만 죽어 나겠다는 생각이었다.

요동왕이라는 듣도보도 못 한 왕작까지 만들어서, 왕 타이틀 하나 더 달아주는데 다음에는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을 시킬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또 모르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형님이랑 같이 천하일주하겠다고 설치다가(?) 황태자랑 같이 자기 나라좀 맡아달라고 할지도.

그만큼 정덕제 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이다.

그 덕에 은퇴를 실행에 옮길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고, 나랑 형님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황이가 조정의 의견을 잘 조율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다는 판단도 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이 나이 올해로 벌써 열다섯이다.

세는 나이로 열다섯이긴 하지만, 이만하면 이 나라에서는 어른 취급을 해주는 나이기도 하다.

어린 나이에 일국을 다스린다는 게 어렵긴 하겠지만 뭐, 그건 주변에 뛰어난 신하들 많으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들 오랜만에 뵙는군요. 듣던대로 다들 무탈해 보이니 다행입니다.”

금주에서 서울까지 스무일 만에 주파했다.

안 쉬고 달려온 결과였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하자 대신들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기색들을 보니 예정일에 도착 했으면 거창한 잔치라던가 서프라이즈 파티라도 해 줄 참이었던 것 같다.

형님이 좋아 죽는 개선식이라던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 마음들만 받기로 하고, 씻지도 않은 채 편전에 들었다.

스무일 동안 노상에서 지냈던 지라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를 텐데도 대신들은 불평 한 마디 않고서 날 반겼다.

“전하. 신(臣) 좌의정 임사홍 아뢰옵나이다. 이리 무탈하고 평온한 용안을 뵈오니 눈물이 앞을 가리온데, 앞전 날에 들은 혁혁한 업을 상기한다면 진실로 산호만세를 외치지 않을 수가 없겠나이다.”

“신, 대사헌 김전 아뢰옵나이다. 좌의정의 말에는 다소 어폐가 있고 비약이 있사옵니다만 요동의 역적 무리를 상대로 전승 했다는 소식이 중용월보의 신문을 통해 알려지매 조선 전역에 천세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니 과연 좌의정의 말처럼 산호만세를 외치지 않을 까닭이 없겠나이다.”

“지중추부사 노공필 아뢰옵나이다. 신은 듣자옵건대 요동의 역란이 전하께서 나서시자마자 하루 아침에 그쳐졌다고 하오니, 과연 지금 대국에서도······.”

다른 사람들 말은 끝까지 듣고, 교성군 말만 자르면 노공필을 무시하는 것 같은데 계속 듣다가는 끝도 없겠다.

내가 굳이 30일은 족히 걸릴 거리를 20일 만에 달려온 이유가 뭔데?

이런 사탕 발린 소리나 듣자고 달려온 게 아니란 말씀이지.

“다 고맙고, 다 여러분들 덕이고, 내가 한 일이 뭐가 있겠고, 다 미안하고, 또··· 어, 뭐 좌우지간 경들에게 따로 할 말이 있으니 그 얘기는 이쯤 하도록 합시다.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경들 부른 거니까요.”

“하교하시옵소서, 전하!”

내가 무슨 거창한 말이라도 꺼낼 줄 알았나 본데, 거창한 말은 맞지.

“세자에게 양위하겠습니다.”

“···?”

“그렇게 눈 끔뻑거리실 필요 없습니다들. 들은 그대로니까요. 세자한테 양위 할 겁니다.”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 하겠는지 멍청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리던 대신들은 어느 순간 깜짝 놀라 부복을 했다.

“저, 전하. 어찌 그리 두려운 말씀을 하시옵니까?”

“그, 그렇사옵니다. 갑자기 일을 당해 무슨 말을 진달해야 할지 모르겠사옵고··· 그리고······.”

“무슨 말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양위하겠다는 겁니다.”

“하, 하오나 어찌··· 혹 신들의 보필이 마음에 차지 않으셨사옵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신들을 체임하소서!”

“보필은 아주 훌륭했고, 여러분들이 없었으면 지금 같은 일 해낼 수도 없었을 테고, 누가 뭐래도 다 여러분들 덕이고··· 그러니까 이제 양위 하겠습니다.”

편전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주 짧은 침묵이었다. 침묵을 깬 건, 형님과 미리 들어오신 우의정 채수였다.

참고로 영의정 허침 할아버지는 노구의 몸으로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 해 천천히 돌아오고 계시다.

“전하! 통촉 하여주시옵소서!”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통촉 못 하겠습니다.”

“신들을 죽여주시옵소서!”

“죽이지도 못 하겠습니다. 양위는 할 수 있습니다.”

“하오나 어찌!”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는 슬쩍 사관들을 흘겼다.

앞으로 내뱉을 말은 왕의 체면에는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말들이 될 거다.

그래서 순화는 좀 하고 내뱉을까 싶었는데, 말을 순화하면 대신들에게 내 뜻이 있는 그대로 전달이 안 될 것 같았다.

사초고 나발이고 일단은 내 은퇴가 중요하니까.

“여러분도 알지 않습니까. 뭐, 이게 사초에는 어떻게 기록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어떻게 미화 됐을지도 모르겠지만··· 막말로다가 내가 보위에 오르고 싶어서 올랐습니까?”

“저, 전하!”

“한 달이 넘도록 죽을 둥, 살 둥 도망 다니지 않았었습니까?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 아니예요, 이거? 어마마마가 쓰러졌다는 소문만 아니었어도, 그래서 불효자식 되는 일만 아니었어도 그 이상 숨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근데 그 소문 때문에 나와가지고는 잡혔고, 엉겁결에 보위에 오른 거잖습니까. 그리고 보위에 오를 때 형님이랑 여러분께 드린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딱 세자가 장성할 때 까지만 왕노릇 해먹겠다, 그 이상은 때려 죽여도 못 한다.”

경박하다 못 해 천박하기까지 한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내자 대신들은 얼이 나간 표정들이었다.

근데, 나는 나도 모르게 쌓인 게 퍽 많았는지 입이 닫히질 않았다.

“아니, 그리고 말이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정도면 나름 잘 해내지 않았습니까? 4년이면 제법 오래 버티기도 했구요. 근데 더하라? 이건 잔인한 말입니다. 자. 세자한테 양위 할 테니까, 괜히 저기 뭐야. 분란 일으키지 맙시다. 이거 충심 시험 하는 것도 아니고, 뭐 정치적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진짜로 양위하려는 거니까 멍석도 깔지 마시구요. 아시겠지요?”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