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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58화 (35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58화>

    ***

    “봉황성 지휘는 어때? 이제 좀 고분고분 한가?”

    어딜가나 낙하산 인사는 환영 받지 못 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낙하산 중에 상(上) 낙하산인 나를 명나라 지휘관들이 달가워 할 리 없었다.

    그럴 만도 하지.

    하다못해 조정에서 파견한 뜨내기도 아니고, 생판 남인 제후의 호령을 받들게 됐는데 오죽하겠냐고.

    그 부분은 나도 인정하고 이해한다. 그래서 적당히 타이르려고 했는데··· 근데 이게 또, 여러분도 알잖아.

    한 번 얕잡히면 무시 당한다는 거.

    항명(?)이 도가 지나쳤다.

    개중에서 가장 도가 지나친 위인은 봉황성 지휘 전작세였다.

    관내에 패잔병이 남아 있다··· 아직 잔당을 소탕하지 못 했다··· 치안이 안정되지 못 했다···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등등.

    온갖 핑계로 내 부름을 거부하고 있었으니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었던 것이다.

    낙하산 따위에 불과한 날 인정하지 못 하겠단 무언의 제스쳐인지, 아니면 기싸움하잔 건진 몰라도 이런 데서 힘 빼고 싶지 않았다.

    이미 여러차례 기회를 주기도 했고.

    해로를 이용해 톈진으로 사신을 보냈다.

    내가 웬만하면 하려고 했는데 봉황성 지휘 전작세가 내 말 안 따라서 이 짓도 못 해먹겠다, 라고 황제에게 다이렉트로 전달한 것이다.

    이 말은 가뜩이나 곤두서있던 황제의 신경을 건드는 일이었던 것 같다.

    안 그래도 톈진성에 웅거하고 있는 역도들 몰아낸다고 정신이 없는데, 일개 지휘 따위가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으니 불호령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처사지, 뭐.

    그리고 실제로 불호령이 떨어졌고, 그 불호령을 봉황성까지 가서 전작세에게 전달하고 온 게 바로 민천동이었다.

    “이를 말이겠사옵니까. 일전에는 언사에 거침이 없고 불손함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신을 끝까지 대인이라 부르면서 우대했사옵니다.”

    어떻게 보면 기회주의적인 우디르급 태세 전환이 썩 마음에는 안 들지만, 일단 해결은 됐다니 다행이다.

    “그럼 이제 요동의 천장들은 모두 다 길들인 셈이겠군요.”

    숭재 씨의 첨언이다.

    맞말이라서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사실상 전작세 빼면 내 말에 항명(?) 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자, 그럼 이제······.”

    천장들은 다 길들였다.

    이제는 일을 해야 할 차례였다.

    근데 문제는 말이지?

    “이제 뭘 해야 되지.”

    뭘 해야 될질 모르겠다.

    ***

    뭐부터 해야할지, 또 뭐부터 손을 대야할지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일단은 가장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마음 먹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누가 뭐래도 단연 전후 복구였다.

    이번에 요동에서 발생한 전란은 그 기간이 1년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짧은 편이었다.

    하지만 보통 전란이 아니라 역란이라 그런지, 그 파급 만큼은 어마무시하게 컸다.

    군대의 진군 때문에 각지의 전토들이 피해를 입은 경우가 아주 많았고, 중간 관리자들은 전사하거나 역적 무리에 가담해서 이를 대체할 행정 인력도 부족했다.

    게다가 전쟁이 젊은 남자들의 부재, 즉 인력의 공백으로 이어지면서 미처 수확치 못 한 곡물들이 처치 곤란 상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보다 가장 민감하고, 조속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전쟁 고아와 기아 문제였다.

    특히 나같은(?) 지도자 입장에서는 기아 문제가 가장 시급했다.

    왜, 고아 문제가 아니냐고?

    너 새끼 왕 되더니 사람 변한 것 같다고?

    맞다, 변했다.

    잔인하고 냉정한 말이지만, 아직 어린 고아들은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다. 그 수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하지만 기아는 다수인데다 도적을 낳는다. 도적이 많아지면 자연히 결국 치안 문제를 야기시키게 될 거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진우영 같은 제법 걸출한 역적이 나올지도 모르지.

    기껏 종결한 전쟁인데 도처에서 도적이 창궐하고, 역적이 창궐하게 놔두면 전쟁 종결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래서 이런 시국에, 아닌 줄은 알면서도 천장들을 요양성으로 소집시켰다.

    잘 길들여 둔 덕택인지 불러 들이는 것 까진 괜찮았다.

    문제는 다른 데서 발생했다.

    “없다고 하옵니다.”

    통사의 통역에 고개를 돌려 심양위 지휘사 범동심(范同瀋)을 바라봤다.

    “없다고? 하나도?”

    “예. 조정에서 지원이 없는 한, 군사들 먹일 것 까지 부족하다고 하옵니다.”

    다른 데서 발생한 문제란 게 바로 이거다.

    내가 부르자마자 천장들은 냉큼 달려왔다. 그런데 그런 빠릿한 움직임이 무색하게도 구라를 치고 있다.

    이게 문제인 거다.

    입벌구도 아니고 말이야.

    “이보시오, 범 지휘사.”

    “말씀하시라 하옵니다.”

    “심양에 군사들 먹일 양곡도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말이나 됩니까? 심양군이 움직였으면 또 몰라. 사태가 종결되기 전까지 붙박이 마냥 관내에 있던 심양군이 아니었습니까? 아니, 뭐 여기까진 그렇다 치자고. 하다못해 심양군이 백성들한테 군량미를 풀었으면 양곡이 부족하다는 말을 내 이해라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안 그랬잖아?”

    심양에서 난민들을 구휼했다는 소식은 요동왕(?)이 되기 전에도 들은 기억이 없다.

    “···”

    “이보십시오, 장 지휘사?”

    “···”

    “오 지휘사?”

    “···”

    장 지휘사는, 철령위를 맡고 있는 장훤개(张暄愷)였고 오 지휘사는 개원위를 맡고 있는 오세빈(吳世贇)이었다.

    근데 다들 꿀먹은 벙어리라도 된 양 말들이 없다.

    그래, 좋다 이거야.

    철령위랑 심양위는 없을 수도 있다고 치자.

    근데.

    “오 지휘사. 개원위에 군량미가 800석도 없다는 건, 이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일단 내가 요동총병에게 인수인계 받은 장부상, 개원성에 비축 된 군량미만 1,200석이 살짝 넘는다.

    장부가 뻥튀기 됐을 수도 있겠다만, 일단 굳이 군량미를 뻥튀기 시킬 이유도 없거니와 특히 개원위는 철령위나 심양위에 비하면 부가 급격히 쏠리는 동네다.

    몽골과 여진족들을 상대로 한 마시(馬市) 때문이다.

    “이건 뭡니까?”

    나는 총병에게 인수 받은 장부를 내밀었다.

    장부를 받아든 오 지휘사는 잠깐 당혹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신색을 가다듬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건 역란이 발생하기 전에 총병께 보낸 장부라고 하옵니다.”

    아무래도 입벌구가 맞는 것 같다.

    일단 1200석이나 되는 군량미를 출성도 안 한, 심지어 구휼미도 안 베푼 개원위에서 모두 다 썼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개원위 뿐만이 아니다. 철령위나 심양위도 같다.

    저들의 말대로 내놓을 군량미가 없다는 건 셋 중 하나다.

    무능하거나, 착복했거나, 구휼미로 내놓긴 아깝거나.

    물론 100% 후자 같다. 아까운 거다.

    낙하산 인사인 내가 주도하는 구휼 행사(?)에 출연(出捐)하긴 아깝겠지.

    이건 아니지 않나?

    내가 무슨 대중적 명성을 좀 얻으려고 구휼 행사(?) 벌이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아 보여서 출연좀 하라는 건데······.

    더 화딱지나는 건 말이다?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요동 백성들, 엄밀히 말하자면 내 백성도 아니다.

    다 자기네들 백성이지.

    근데 이건 무슨 공치사에 환장하는 소인배들도 아니고, 왜 이렇게 소극적으로 구는지 그 심보가 괘씸하고 또 괘씸하다.

    최대한 공조 관계를 이어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안 되겠다.

    “영상.”

    “예, 전하.”

    “우리측에 군량미 얼마나 있죠?”

    “화공으로 인한 화재만 아니었어도 9만석은 남았을 텐데, 6만석이 비축되어 있사옵니다.”

    “그럼 일단 우리 걸로 구휼 하지요.”

    우리가 가진 걸로 구휼하잔 말에 그 인자하던 허침 할아버지도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뜨신다.

    “예? 하오나 어찌··· 게다가 6만석으론 부족할 것이옵니다.”

    “한 15만석 정도는 제가 더 조달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합이 20만석인데, 20만석이면 뭐, 얼추 못 버티겠습니까?”

    “이미 삼성에서 쏟아 부은 돈이 천문학적인데 굳이··· 게다가 우리측이 부담하는 것은 천장들이 바라는 바일 것이옵니다.”

    요동왕이란 왕작이 주어졌다지만, 난 금방 돌아갈 사람일 테고 본인들은 아닐 테고.

    그러니까, 최대한 내 돈 써서 전후 복구해주면 본인들 입장에선 이만한 봉사가 또 없는 셈이긴 하겠지.

    “이제 겨울이잖습니까. 8천이 아사할지도 모른다면서요.”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사람들을 방치 시켰다가는 2만에 달하는 아사자가 속출할 거란 추정이 있었다.

    문제는 이게 미니멈 8천이란 것이다.

    최대치는 2만이다.

    최소든 최대든, 이대로 방치하면 수천 수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건 같았다.

    그래서 아깝진 않다.

    사람 있고 돈있는 거지, 돈 있고 사람 있는 건 아니니까.

    돈이 아깝기 보다도 그냥 저것들이 괘씸할 뿐이다.

    확, 또 한 번 사신 보내서 설설 기게 만들까 싶었는데 관뒀다.

    사신이 오며 가며 황제한테 승인 받는 시간만 해도 최소 일주일은 걸릴 텐데, 그 시간이면 수백명은 더 구할 수 있는 시간일 거다.

    물론 보고서에는 천장들 태도 그대로 적을 거다.

    개자슥들.

    ***

    진성이 개자식(?)들을 벼르고 있던 그 시각.

    “전하, 부디 통촉 하여주시옵소서!”

    오랜만에 듣는 통촉 소리.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군왕의 체모는 위엄에 있고, 위엄은 곧 정당함에 있으니 작금의 일이 어찌 정당하다 할 수 있겠나이까? 바라건대 통촉 하여주시옵소서!”

    후비적.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보내던 잔소리를 이번에는 귀를 후벼파며 털어냈다.

    다만 이전처럼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진 않았다.

    “경들은 말이다.”

    “···”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

    전하야 말로 왜 그러시옵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에 맴도는지, 울상이 된 대신들이었다.

    그에 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촉해달란 말을 하면, 내 통촉을 했더냔 말이다.”

    도리도리.

    “근데 왜 자꾸 통촉을 해달라 울부 짖는 것이란 말인가? 이제는 날 알 때도 되지 않았는가 말이야.”

    “하오나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지금 부산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울다시피, 아니. 애원하듯 말하는 채수였다.

    물론 그 말은 채 맺지도 못 했다.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

    “게다가 내가 무슨 예정에 없던 일을 벌리고 있는 것인가? 진성이도 이런 때를 대비해서 명나라에 조선공(造船工)들을 요청했었던 것이 아닌가 말이다. 명나라에서 보내온 조선공들이, 당초 목적대로 배는 안 만들고 빈둥거리면서 국고를 축내는데 어찌 가만 놔둔단 말인가. 그들에게 배를 만들게 한 까닭은 진실로 이 때문인 것이다.”

    “하오나 부산진에는 아메리카에 닿기 위해 건조 중이란 말이 관내에 파다 하옵니다. 또한, 전(前) 과학기술원 별제 서경덕은 취중에 ‘이는 아메리카에 닿기 위한 함대들이니 아름답지 아니한가?’ 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고 다녔으니 이는 어디서 비롯된 말이겠나이까.”

    “뭐, 배라는 것이 다 쓰임이 있어서 만드는 것이고 애써 건조시켰는데 썩힐 순 없지 않은가. 겸사겸사 가볼 수도 있는 것이지, 무슨 걱정이 그리도 태산이란 말인가.”

    “전하!”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정화의 함대는 목골도속(모가디슈)에 까지 이르렀다. 풍문에 의하면 그 목골도속이란 곳과 근방에는 까마귀처럼 새까만 오인(烏人)들이 산다고 하였는데 나는 참말로 목골도속과 같은 이역만리에는 오인과 같은 사람들이 사는지 궁금하도다. 배를 띄우려는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너무도 당당한(?) 태도에 대꾸 할 말 마저 잃은 것인지, 채수는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에 융은 일월오봉도 병풍 대신 내걸린 세계전도 병풍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꼭 저기에 닿을 것이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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