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57화>
***
“그것 보거라, 내 말이 맞지 않는가?”
후조는 한껏 우쭐거렸다.
명색이 황제라는 작자(?)가 거드럭거리는 모습에 대신들은 할 말을 잃었는지, 가타부타 말들이 없었다.
그런 대신들의 모습이 탐탁지 않았을까.
“어찌 말들이 없는 것이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번국으로서의 법도는 술직에 있다··· 요동의 일은 제후가 일으킨 사변이다··· 아주 그냥 조선을 대놓고 역적 취급을 한 경들이 아니던가.”
“···”
“양 대학.”
“···예, 전하.”
“경이 한 번 말해보아라. 주나라의 예를 들면서 백여년 사대의 예가 이럴 수 있냐, 이러쿵 저러쿵 떠들었던 경이 아니냐?”
“···”
“이부좌시랑.”
“···예.”
“아무래도 양 대학이 벙어리가 된 듯 하니 그대가 한 번 말해보아라.”
할 말이 있을 턱이 없는지, 이부좌시랑 왕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에 후조는 쥘부채를 거세게 내리쳤다.
“제후가 분투하며 역도들을 토벌할 때, 안전한 곳에서 세치 혀로 제후를 무함한 자들이 바로 그대들이거늘··· 그대들은 염치가 없는 것이냐?”
이대로 가다가는 면박이 끝이 없겠다 판단한 것인지 이부상서 장채가 말했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신들은 아득하고 두려운 마음에 아뢴 것이었으나 그 의도가 어찌됐든, 성총(聖聰)을 믿지 못 하였으니 그 죄가 참으로 크옵니다. 부디 사세를 바로 보지 못 한 신들을 꾸짖고 노여움 푸소서.”
“짐이 지금 괜한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휙!
후조의 검지가 성채 하나로 향했다.
“저 톈진성에 틀어박힌 유육과 유칠이 같은 역도들도 막지 못 해, 짐이 친정에 나서게 한 그대들이 아니냐?”
말에 어폐가 있었다.
정황을 보자면, 하북에서 세력을 넓혀나가던 유육과 유칠이 설령 토벌 됐어도 친정에 나섰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골이 날대로 난 후조의 말에 토를 달 사람은 없었다.
“짐이 분명 요동총병 개원에게 조선군과 협력해서 적을 막으라 했었다. 그런데 이놈은 제 꼴리는 대로 날뛰다가 병력을 모조리 잃지 않았느냐? 그런데 경들이 시기하고, 음해하던 제후는 어쨌느냐?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어디 제 할 일만 했느냐? 백성을 구하고 역도를 남김없이 토벌하였으니 그 이상의 활약을 했다. 내가 화가 나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총병 개원이는 싸우다 잡히기라도 했지, 너희같은 밥버러지들은 입만 나불거리지 않았느냐? 너희는 명색이 나라의 대부요, 대인이라 불리면서 나보다 잘난 이는 시샘하고, 고꾸라드리려 한단 말이냐?”
“···벌하여주시옵소서.”
마음 같아서야 더 꾸짖고 싶었지만, 이만하면 됐다.
텐진까지 원정와서 대신들을 더 나무라서 뭐하겠나.
사기만 떨어질 뿐이었다.
“옛 성인의 말에 남이 보지 않아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남이 지적하지 않아도 본인의 부끄러움을 아는 자라야 군자와 성인의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된 것이라 했다. 조선왕이 우리 조정의 일을 보지 않았고, 보지 않았으니 지적도 하지 않았다만 명색이 상국의 대부란 작자들이 부끄러움을 몰라서야 쓰겠는가? 내가 다 조선왕에게 미안한 심정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기에 저리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실까.
걱정이 앞서는 대신들에, 후조는 환관을 시켜 연필과 종이를 나눠주었다.
“···황송하오나 이게 무엇이옵니까?”
“써라.”
“어인 말씀이시온지?”
“내 도저히 제후에게 미안하여 제후를 볼 면목이 없다. 그러니 제후에게 저지른 잘못을 쓰고, 제후에게 미안한 감상을 쓰라. 그대들이 쓴 글들은 한데 모아 왕에게 보내고, 상국이 의심한 일에 대해 서운함을 갖지 않게 할 것이다.”
뭐, 정 쓰지 않으려면 안 쓸 수 있는 방도가 있긴 했다.
모가지를 내놔야겠지만.
뜻밖의 명인 걸 넘어서, 치욕스럽기까지 한 명이었지만 모가지를 내놓지 않을 바에야 쓰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쓱싹쓱싹.
장내에 때아닌 연필 끄적거리는 소리가 가득 울려퍼졌다.
막힘없이(?) 술술 반성문을 써나가는 대신들에 만면 가득 미소를 담은 것도 잠시.
“쓰면서 듣도록 하라.”
“···”
“내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다. 지금은 온신경을 한군데 쏟을 때가 아닌가 싶다. 그 한군데는 그대들도 알다시피 역적 토벌이다. 물론 짐이 그러기 위해서 친히 일군을 몰고 톈진성까지 나온 것이긴 하다만··· 짐이 제아무리 군신(軍神)의 가호를 입었고, 귀신도 놀랄 만한 책략을 능히 구사한다고 한들 이 모든 것도 결국 수족들이 잘 따라줘야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는 법 아니겠느냐? 그런데 보아라. 지금 하는 모양새를 보면 이는 요원한 일에 가까울 것이다. 온신경을 한군데 쏟아야 된다는 말이 바로 이것에서 비롯 된 것이다.”
“···”
“지금은 톈진이다. 다른 건 신경쓰지 말고 오로지 톈진에만 집중 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동의 일은 어떤가? 신경 쓸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닐 것이다. 전사자 문제, 백성 문제, 수축 문제, 구휼 문제, 감시 문제, 포로 문제··· 끝이 없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폐하. 지금 그 문제는 총병에게 일임해도 될 줄로 아뢰옵나이다.”
“패장에게 뭘 맡긴단 말인가?”
“하오면 철령이나 심양의 지휘사(指揮使)들에게······.”
“그건 더 기가 차는 일임을 정녕 모르는가?”
“···”
“총병 개원이는 병사를 몰고 가서 적과 분전하기라도 했지, 철령과 심양의 지휘사들은 대체 뭘 했단 말이냐? 그런 자들에게 후처리를 어찌 맡긴다고··· 한심한지고.”
“하면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는 것이옵니까?”
이부상서 장채의 물음은 지극히 상식적인 물음이었다.
패장에게 후처리는 안 맡길 거다··· 그렇다고 지휘사들에게 맡기는 것도 안 내킨다······.
라는 게 후조의 입장이었으니, 남은 건 조정에서 파견 보내는 것 밖엔 없었다.
말했다시피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이었다.
후조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 상식을 뛰어 넘어서 문제였지.
“말하지 않았느냐. 지금은 온신경을 한군데에 집중할 때라고. 그래서 말인데.”
“···”
“제후에게 맡김이 어떤가?”
“제, 제후라 하오시면··· 조선왕을 이르시옵니까?”
끄덕.
“하, 하오나 요동을 어찌 제후에게 맡길 수 있단 말이옵니까? 백여년 전만 해도 조선이 요동을······.”
“그럼 하북과 하남, 산동 등지의 반란군을 팽개치고 요동에만 총력을 기울이란 말이냐?”
“그건 아니옵고··· 정 개원이가 못 마땅하시다면 총병을 새로이 보내심은 어떠시옵니까?”
“가는 귀가 먹은 것이냐, 일부러 듣지 않는 것이냐. 적임자를 찾는 것도 신경을 분산시키는 일이라 분명히 말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요동을 제후에게 맡긴다.
이건 어이 없어서 말문이 막히는 문제 정도가 아니었다.
대놓고 무시하는 처사에 가까웠다.
“하지만 왕은 이미 적임임을 증명해보이지 않았는가? 상국의 도움 없이 반란군을 토벌했고, 여러 성보를 탈환하였으니 어찌 적임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부상서는 백여년 전의 일을 언급하려 했다만, 어디 백여년 전과 지금이 같은가? 백여년 전의 사대의 예와 지금의 사대의 예가 같냔 말이다.”
“···”
“입 아프게 누차 말하게 된다만, 지금은 온신경을 한 곳에 집중할 때지 신경을 분산시킬 때가 아니다. 더욱이 이번 일로 왕에게 사심 따위는 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설령 요동을 잠시 맡긴다 한들 문제 될 것이 무엇인가? 진우영은 토벌 됐다지만 언제 또 역적이 들고 일어날지 모르는 형세이니 왕으로 하여금 잠재우게 한다면 능히 요동을 보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책략의 일종인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입아프게 왈가왈부 하지 말라.”
“하, 하오나 폐하!”
“왈가왈부 하지 말라지 않느냐!”
“···”
“아무래도 이런 짐의 지극한 뜻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양 대학이 전하고 오는 것이 좋겠도다.”
할 말이 많긴 커녕, 할 말을 잃어버린 양정화였다.
***
「조선국왕 이 아무개에게 이르노라. 세상이 혼란하고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히려는 자들이 넘쳐나니, 지금의 사태를 두고 짐은 할 말이 없고 오직 미안할 뿐이다. 다만 미안함과 별개로 긴히 이를 말이 있으니, 요동을 보전하라. 왕이 역도를 토벌 하였다지만, 아직도 그 잔당들이 눈알을 굴리면서 발호할 기회만 엿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일단 왕이 남아 요동을 보전하라. 이에 칙서하니 자세한 건, 칙사에게 듣도록 하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판단 미스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판단 미스였다.
요동을 책임지라니······.
형님이 있는 때에 이런 칙서를 받아 봤다면 개의치 않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개의치 않아 했을 거다.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하면서 말이지.
근데 형님은 이미 조선으로 돌아가신 지 반만년 쯤 됐다.
아무리 늦어도 평안도 어딘가에 계실 테고, 빠르면 지금쯤 입궐 하셨을 것이다.
그랬으니 판단 미스가 아니면 뭔가.
이럴 줄 알았으면 형님이 조선행 자원하게 두지 말 걸 그랬다.
아니, 무슨 소리냐고, 내가 가겠다고 선수 칠 걸 그랬다.
젠장할.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칙사로 온 불친절한 양정화 씨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제한적이었다.
“안 하겠다면? 아니, 못 하겠다면요?”
“칙사께서 말씀하시길, 그건 저도 바라고 또 바라는 일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지금 같은 시국에 누굴 믿을 수 있겠으며, 신경을 분산시킨다면 어찌 각지에서 창궐한 역도들을 수월히 막아 낼 수 있겠냐고 하시옵니다.”
누굴 믿을지 말지는 내가 결정할 일 아니고.
역도들을 수월히 막건 못 막건, 그것도 내 문제 아니고.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하, 이럴 줄 알았으면 옛날에 황제가 조선에 왔을 때, 친해지지 말 걸 그랬다.
이것도 다 친하니까, 하는 부탁일 거다.
원래 친한 사람 부탁은 특히 더 거절하기가 어려우니까.
황제도 그걸 아는 거지.
새삼 황제랑 괜히 친해졌다는 생각이 드는 한 편, 오죽 이런 일 맡길 신하가 없으면 나한테까지 부탁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 그런데 괜히 천장들 대신해서 요동땅 관리하다가 오해 사는 거 아닙니까?”
“그건 걱정 말라 하시옵니다. 그 옛날 원나라 시절 고려왕들은 고려왕인 동시에 심양왕의 왕작을 갖고 있었으니, 어찌 지금에 이르러 그게 어려운 일이겠냐고 하시옵니다.”
뜬금없이 코가 간지러워서 코를 후비적거렸다.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이쯤하면 알아서 알아 쳐들었겠거니 여긴 건지, 뭔 말인지 하나도 몰라서 코만 후비적거리는 내 태도에 불친절한 정화 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히 나한테 요동땅 맡기기 싫은 모양이다.
아주 티가 팍팍 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못 알아 듣는 날 위해 정화 씨가 친절히 설명을 시작했다.
설명은, 직업윤리상 최대한 냉정함을 지켜야 하는 통사에게도 충격적인 건지 당황하는 기색이 눈에 훤했다.
“사신이 뭐라는데?”
“그, 그게······.”
“얼른 말해보게.”
“지, 지금에 이르러서 그 옛날 오랑캐들이 설치한 왕작을 어찌 감히 백여년 동안 사대의 예를 지키고, 선대에서 지금에 이르도록 공순히 상국을 섬긴 제후에게 줄 수 있겠냐면서, 요동왕이란 왕작을 신설하고 그걸 전하께······.”
통사가 당황할 만 하다.
“아니 잠깐 동안 맡기는 거라면서 무슨 왕작까지 준다는 건가?”
나만의 의문은 아니었던지, 통사가 황급히 물었다.
잠시 후.
“권위가 없다면 천장이라 한들 어찌 따르겠냐면서 폐하께서 그 대안을 골몰하다 나온 방책이라 하옵니다.”
“음.”
뭐, 듣고 보니 일리는 있네.
그럼 나 이제 조선왕인 동시에 요동왕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