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55화>
***
과도한 긴장에 입이 바싹 말라갔다.
꿀꺽꿀꺽, 있는대로 물을 들이켰지만 여전히 입술은 쩍쩍 갈라지고, 입안 역시 건조했다.
“전하, 내려가 계심이 어떻겠사옵니까?”
그런 우영이 보기 안쓰러웠을까?
전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 하던 충흠이 말했다.
“내려간다 한들 변할 게 있겠소? 차라리 예 있는 것이 더 나을 거요.”
“하오나 너무 신경을 쓰시는 듯 하여······.”
우영은 대답없이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물론 웃어도, 이게 진짜 웃는 건 아니었다. 역정을 낼 순 없으니 어색하게 웃는 것에 불과했다.
“무 태사. 무 태사도 소식을 듣지 않았소. 광녕군을 격퇴했다지 않소. 이제 이 금주를 넘느냐 마느냐가 핵심이요. 금주를 손에 넣으면 요동을 손에 넣을 것이요, 금주를 손에 넣지 못 하면 어찌 될지 모르니 전하께서도 오죽 마음이 쓰시는 거겠소?”
첫 날에 선봉장으로 나섰던 왕황기였다.
“걱정이 돼서 드리는 말이지요.”
“초 치는 소리 마시오. 이미 기세가 올랐구먼, 걱정은 무슨.”
평소 같았으면 신하들의 다툼을 제지했을 우영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데 신경 쓸 엄두도 내지 못 했다.
아니, 여유가 없었다.
장수들도 본 것을 포진해 있던 요동군이라고 선봉대의 활약을 보지 못 했을 리 없었다.
봤기 때문에 기세가 등등했다.
금주성은 비교적 화포군들만 강맹해 보일 뿐, 다른 수비군들은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어 보였다.
반면 요동군은 광녕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군대였다.
일개 군졸들 입장에서는 기세가 등등해질 수 밖에.
그리고 지금은 바짝 오를대로 오른 기세로 진격 중이었다.
이제 곧 요동군과 수비군이 격돌한다.
그 격돌을 보지도 않고 목탑에서 내려가는 건, 황기의 말처럼 초 치는 일에 가까웠다.
게다가 목탑에 있어야 전장을 보면서 제때제때 대처를 할 게 아니던가.
“와아아아아!”
그 순간.
돌격시킨 본대가 드디어 수비군과 격돌했다.
한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전장은 초장부터 치열했다.
방금 평가했던 화포군의 무위는 약과였다. 본대가 투입되자 그 이상의 무위를 뽐내고 있었다.
선봉대에게 쏟아붓던 화차는 말할 것도 없었고, 포혈 마다 불을 내뿜으니 그 기세는 또 얼마나 맹렬한지······.
하지만 그게 다였다.
화포군 정도로는 전장의 판세를 바꾸지 못 한다.
“됐습니다!”
“전하, 승전을 감축드리옵니다!”
화포군은 강맹했다. 하지만 수비군은 오합지졸에 가까웠다.
화포군의 맹렬한 공격에 운제와 공성탑 따위의 공성 병기들이 여럿 파괴 된 건 사실이었다.
다만 화포군의 포격에는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었고, 살아남은 운제와 공성탑 따위는 쉽게 적의 성벽에 도달했다.
운제는 비교적 손쉽게 성벽에 걸렸고, 역시나 병사들은 비교적 손쉽게 성벽에 올랐다.
고작 성벽에 오른 정도로 승전 운운하는 모습도 오만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굳이 제장들을 나무라진 않았다.
오합지졸로 평가했던 수비군이니 만큼, 우영 역시 금방 금주성을 손에 넣으리라 판단했다.
그 판단을 보류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왜, 좀처럼 성벽을 넘어가지 못 하느냐 말이다!”
오합지졸이라 생각했던 수비군.
그 수비군을 상대로 요동군은 고전을 면치 못 하고 있었다. 아니, 고전이라기 보다는 아슬아슬하달까?
성벽을 점령할 듯 말 듯 한 모습.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몰아 붙인다면 성을 넘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대로 일식경을 더 지켜봤지만, 양상은 똑같았다.
점령할 듯 말듯한 모습.
“동위영(東衛營)도 투입시키라!”
참다 못 한 우영이 소리쳤다.
동위영은 친위군 같은 존재였다.
삼천명으로 이루어진 부대인데 요동군에서는 무장 상태도 가장 양호하고, 훈련도 가장 잘 된 부대이기도 했다.
“하오나 전하, 동위영 마저 투입시키면 본영을 지키는 자들이 부족하게 되옵니다.”
“무 태사. 지금 그게 문제요? 동위영만 투입 시키면 필시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오. 게다가 적이 출성한 흔적은 없지 않았소?”
“그렇긴 하오나······.”
“투입시키시오.”
단호한 우영에 충흠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본영을 지키던 동위영이 투입됐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콰콰콰쾅!
콰콰콰쾅!
연쇄적인 폭발음이었다.
아까와는 달리 이제는 비교적 여유롭게 전장을 바라보던 우영은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금껏 보지 못 한 폭발이었기 때문이었다.
성벽 위에서 동그란 물체가 던져지더니, 이윽고 폭발했다.
“저, 저게 무엇인가?”
말까지 더듬거리며 무충흠에게 물었지만, 화차의 존재도 파악하고 있었던 충흠도 이번 만큼은 예외인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그러는 사이.
콰콰쾅!
또 다시 성벽 주변에 폭발이 일었다.
그 폭발에 수하들이 픽픽 쓰러졌다.
쉬쉬쉬쉭!
그간 멎었다 판단한 화차 공격도, 수하들이 갈팡질팡하자 재개됐다.
콰콰콰쾅!
모두가 얼이 나가 있는 그 순간에도 연쇄적인 폭발은 멈추지 않았고, 이미 아비규환이던 전장은 한폭의 지옥도로 바뀌었다.
폭발도 폭발이지만, 시각적인 효과가 기선을 제압해버렸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니 두려움을 가질만 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우영 본인도 두려운데, 현장의 군졸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전하! 피해가 막심하옵니다! 속히 퇴각령을!”
퇴각령을 재촉하는 충흠이었지만 우영은 아쉬은 마음에 일다경 정도를 더 버텼다.
하지만 이젠 아니라고 판단, 퇴각령을 내렸다.
퇴각을 알리는 나팔 소리에, 금주성에 달라붙어 있던 수하들이 걸음아 나살려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변이 생긴 건 그때였다.
푸슈슈슉!
폭죽 두 발과 함께 효시가 창공을 갈랐다.
그리고 이 때아닌 폭죽에 어안이 벙벙할 즈음.
두두두두두-.
지축이 뒤흔들렸다.
***
금주성.
찌르고, 베고, 휘두르는 살육의 현장.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이리저리 뜯긴 살점은 기괴한 형체를 한 채 성벽에 내걸려있다.
고작 한시진 남짓한 전투의 결과물이라고는 볼 수 없는 참상이었지만, 이게 전쟁이었다.
살아 남은 자들은 평생의 무용담을 갖고서 돌아가는 것이지만, 죽은 자들은 말이 없는 전쟁.
담이 걸린 듯 어깨는 무거워지고,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는 한참 동안이나 코끝을 맴돈다.
이 모든 게 지겨워서 다 내려 놓고, 당장이라도 드러누워 코를 드르렁 골고 싶었다.
“적이 퇴각하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드러눕는 일은, 이제는 그 목적까지 잊은 전투를 완전히 끝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감사군은!”
한시진 전까진 말끔한 모습이던 융은, 고작 한시진 만에 초췌해져버렸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고 목은 다 쉬었고, 뜨거운 열기에 덥다며 풀어헤친 투구드림이 바람에 흔들거리며 뺨을 때리는 통에, 볼은 퉁퉁 부어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건, 죽거나 부상 당한 자들에 비하면 한없이 감사한 일임을 융은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감사군이 절실했다. 죽거나 부상 당한 이들의 사상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직이옵니다!”
“지금이 적기거늘······.”
지금처럼 초조했던 적은 서른 넷 인생을 통틀어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굳이 꼽자면 과거 윤필상 등의 난신들을 쳐냈을 때?
박원종에게 쫓겨 시신으로 변장한 채 성문을 빠져 나갔을 때?
지금이 딱 적기였다.
육골참단,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일부러 적이 방심하게끔 성벽의 수비를 약하게 둘렀다.
그 과정에서 사상 당한 자들이 어림잡아 기백이 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하고 적을 일거에 소탕하기 위해서였다.
전쟁은 장기전이 돼서는 안 됐다.
전투도 마찬가지였다.
본대가 움직이고 난 뒤의 전투는 최대한 빨리 끝내야만 했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피해는 중첩 될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 성벽의 수비를 비교적 약하게 둘렀던 것이고, 다행히 적은 그 꾀임에 빠졌다.
그런데 감사군이 제때 안 나타난다면 이 모든 게 허사가 된다.
“언제 오는 것이냐··· 대체, 언제······.”
초조함에 입이 바싹 말라갔다.
지금 시점에선 퇴각하는 적을 쳐야 의미가 있었다. 이미 퇴각하고 난 뒤, 진형까지 완전히 갖춘 적을 치는 건 큰 의미가 없었다.
입이 바싹 말라가다 못 해, 쩍쩍 갈라지던 그 때였다.
두두두두두-.
지축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왔다!”
너무 고대했기 때문일까.
융은 이 소리가 미치도록 반가웠다.
체통도 잊고 반길 만큼.
조금씩 흔들리던 지축은, 이윽고 지진이라도 온 듯 땅을 흔들어댔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감사군.
감사군의 위용은 정말이지, 말로는 형용 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삼천에 육박하는 기병이 쐐기진을 이뤄 용감하게 치돌 하는 장면은, 일국의 왕이었던 융이라고 해도 본 적이 없는 장면이었다.
일대 장관이었다.
“전하, 속히 령을······.”
오죽하면 넋까지 놓고 있었을까.
“아··· 속히 출성하라!”
“출성하랍신다!”
둥! 둥! 둥!
명과 함께 성문이 열리고, 대기 중이던 보병들이 뛰쳐 나갔다.
그러는 사이.
콰쾅!
퇴각하던 적의 측면에 감사군이 들이쳤다.
충격음이 어찌나 크던지, 그 소리가 꼭 포성과 흡사했다.
충격음과 함께, 쐐기 부분을 이루던 선두의 창기병들이 꼬치 꿰듯 적을 관통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게 끝은 아니었다.
선두의 뒤를 따라오던 중위와 후위의 감사군들이 기사(말을 타고 활을 쏨)를 시전했다.
이미 창기병들의 관통에 허리가 끊어져 좌우로 나뉘어진 적의 부대는 뒤이은 감사군의 기사에 혼비백산 달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달아난다고 달아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선두의 창기병들은, 적의 허리를 완전히 관통한 뒤 우회했다.
그리고 기창을 내버린 채, 중위와 후위의 감사군들처럼 소지한 활을 꺼내 들었다.
빙글빙글 원을 그리면서 두 동강 난 적을 유린하려는 계책 같았다.
그리고 그 작전은 유효했다.
두동강 난 부대의 좌측은 출성한 보병들에, 우측은 기병들에 유린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
“으아아악!”
“사, 살려줘!”
도처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애걸.
이건 단순히 아비규환 네 자로는 설명 불가한 참상이었다.
모두 자신이 빚어낸 참상이었으니까.
그 참상에 우영은 할 말을 잃었다.
분명 다 이겼다고 생각했다.
광녕군마저 박살을 냈으니 정말로 요동을 수중에 다 넣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박살이 났다.
보통 박살이 아니었다. 철저히 박살이 났다.
“허.”
너무 허탈해서 이 상황을 두고도 웃음이 다 나왔다.
조선군은 액면대로 받아들여서 과소평가 할 게 아니라, 과대평가를 했어야 했다.
그래서 좀 더 신중히 움직였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참상은 피할 수 있었을 터였다.
기병이라니······.
동위영마저 투입 시킨 터라 말그대로 씨몰살을 당할 판이었다.
퇴각하는 중에 난입한 기병이었다. 허리는 끊겼고, 부대는 좌우로 갈라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금주성 수비군들은 출성까지 했다.
일련의 과정이 있기 까지 고작 일다경도 채 안 걸렸고, 출성하는 수비군들의 상태는 개끗하면서도 질서정연했으니, 이 모든 건 철저한 계산 하에 세워진 작전일 터였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성을 함락 시킬 수 있다고 여겼던 본인을 조선 임금은 얼마나 비웃었을까?
부끄럽고 비참했다.
“전하, 신이 퇴로를 만들어보겠사옵니다. 속히 피신할 채비를 하시옵소서!”
상황이 역전 되면서 도망갔다고 여긴 충흠이 피칠갑을 한 채 다가왔다.
굳고 비장하기 까지 했지만, 그래서 그 성의를 감히 무시하는 것 조차 실례일 것 같았지만, 우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투항합시다.”
“하오나!”
“도망간다 한들 훗날을 도모 할 수 있겠소이까?”
“요양성으로 퇴각한다면 능히 후일을 도모 할 수 있사옵······.”
“퇴로를 확보하려면 수백, 수천이 더 목숨을 잃어야 할 텐데 내가 뭐라고 그들의 목숨을 담보 잡을 수 있겠소. 됐소, 다 끝났소.”
그렇게 말한 우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당세 호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관리들의 수탈에 발버둥치다 보니 이 지경까지 왔을 뿐이다.
그래서 딱히 후회는 없었다.
세상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언젠가 본인처럼 조정을 전복시키려는 세력은 또 등장할 테지.
그거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