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54화>
***
하늘을 가득 메운 것은 화살이었다.
맑던 하늘이 거뭇해진 것도 모자라 갑자기 왜 화살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내릴 새도 없었다.
푸푸푸푹!
곡선을 그리던 화살이 이윽고 금주성으로 달려가던 수하들에게 박힌 것이다.
이미 포격을 염두에 두고 대열을 산개 시킨 관계로 그 피해는 생각보다는 크지 않았다.
다만.
“···”
화살비는 황기로 하여금 섣불리 입을 떼지 못 하게 할 만큼의 시각적 효과를 선사했다.
곡선을 그리며 날아든 수천발의 화살.
그 화살에 맥도 못 추리고 픽픽 쓰러져가는 수하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
시야는 좁아지고, 정신은 멍- 해졌다.
뭔가 저 나락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나락 깊은 곳으로 가라 앉는 그의 정신을 일깨운 건 후방의 본대에서 들려온 나팔 소리였다.
뿌우우우우-!
뿌우우우!
길게 울려퍼진 나팔 소리는 진격을 독려하는 신호였다.
맞다.
고작 이따위 곳에서 고꾸라질 순 없었다.
진우영과 함께 봉기를 일으켰던 건, 썩은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고자 함이었다.
이대로 고꾸라진다면 세상을 바꾸긴 커녕 역사에 이름 한줄 남기지도 못 할 터였다.
황기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상황을 반전 시킬 수단을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을 반전 시킬 수 있을 거란 황기의 생각은 오만에 가까웠다.
“방포하라!”
금주성 장대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융은 적들이 주춤거리자, 속히 방포령을 내렸다.
그러자,
쾅!
콰콰콰쾅!
천자총통과 현자총통이 굉음과 함께 일제히 불을 내뿜었다.
포환 중 일부는 적의 선봉대가 끌고 오던 공성탑에 직격했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공성탑이 쿵, 모로 쓰러졌다.
먼지 바람이 일자, 융이 소리쳤다.
“총통의 장전은 포환으로 하고, 비격진천뢰는 대기하라!”
비격진천뢰는 본대를 위해 아껴둬야 했다.
아직 적들은 비격진천뢰의 위용을 잘 모른다.
비격진천뢰의 효용이 극대화 되는 건, 본대가 본격적으로 성을 넘기 위해 진군했을 때일 것이다.
약간의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그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화차의 교대는 멀었느냐!”
“끝났사옵니다!”
“적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발사하라!”
“발사하랍신다!”
쉬쉬쉬쉭!
수백, 수천발의 화살비가 패닉에 빠진 선봉대의 머리 위로 다시금 날아들었다.
장대에서 보니 적이 주춤거리다 못 해, 아예 멈칫하기 까지 했다.
적은 선봉대였다.
선봉대가 이대로 물러나게 된다면, 적 수뇌부가 착각을 할 수가 있었다.
조선군이 생각보다 강맹하다고, 신중을 기해야겠다고.
그럼 곤란하다.
일거에 쓸어버려야 했다.
“되도록 야차뢰와 낭아박 같은 무기 사용은 금하고, 장병겸(낫 종류의 무기)으로 적을 떨쳐내도록 하라!”
***
진우영과 수뇌부는 숨죽인 채 선봉대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에 내준 4천의 군사는 왕황기가 수차례 지휘한 부대기도 했다.
분간하기 쉽게 개주군(開州軍)이라 부르던 부대였는데, 개주군은 관군을 수차례 격파한 전례가 있는 부대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개주군은 대오를 맞춰서 호기롭게 진군했다.
그런데 그 호기로움은 반시진도 채 가지 않았다.
금주성에서 쏟아진 화살비가 원인이었다.
“화차 같습니다.”
개주군이 정체불명의 화살비에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무충흠이 툭 하고 말했다.
“화차?”
“예.”
“내가 아는 화차는 화살을 퍼붓진 않소만.”
우영이 알고 있는 화차는 공성측이 성문이나 성벽 따위를 헐기 위해 사용하는 공성무기였다.
“조선식 화차를 이름이옵니다.”
“조선식 화차?”
“신도 자세히는 잘 모르옵니다. 다만 예전에 듣기로, 조선군의 성보에 침입하려던 어느 부족의 전사들이 성보에 접근하자 하늘에서 내린 천시(天矢) 때문에 도망간 일이 있다고 했었사옵니다. 우연히 정조사로 황성에 가던 사신을 만나 이 이야기를 해주니 화차라고 하더군요.”
“멀찍이서 바라봐도 그 위용이 느껴지니 현장에서는 효과가 배가 되겠소이다.”
“예. 사신도 화차는 살상용이라기 보다 기세를 꺾는 무기라 했었사옵니다.”
기세를 꺾는 무기.
우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렇게 먼발치에서 바라봐도 오금이 저리는데, 현장에서 전우들이 픽픽 쓰러져나간다면 기세만 꺾일 게 아닐 것 같았다.
우영은 다시금 상황을 지켜봤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화포군들은 듣던대로 그 이름값을 하는 듯 하오만, 병사들은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될 것 같소이다.”
적어도 요동에 살던 주민들이라면 조선의 화포군 명성은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우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차라는 무기로 선봉대의 예봉을 꺾은 다음, 주춤하는 순간을 이용해 집중포격을 쏟아부었다.
그로인해 공성탑 1좌와 운제 2대가 부서졌으니 과연 화포군의 명성은 듣던대로였다.
하지만 거기까지.
화포군의 명성과 다르게 일반 병사들의 수준은 특기할 만한 정도까진 아닌 것 같았다.
뭔가 딱 이것 때문이다 꼬집어 말할 순 없었지만, 하는 양상을 보면 그랬다.
선봉대가 슬슬 성벽에 달라붙었다. 맹렬히 공격을 쏟아 붓고는 있는데, 어설프다.
수준 이상의 실력이었다면 감히 어설프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아마 어설픈 야차뢰와 낭아박 사용 때문인 것 같았다.
사용이 어설프다는 건, 훈련이 덜됐다는 것이고 훈련이 덜됐다는 것은 급조한 군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화포군은 염두에 두고 작전을 진행 해야겠소만, 다행히 수성군은 오합지졸 같소.”
결론을 내렸다.
그 결론에 제장들도 이견을 제시하진 않았다.
다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우영은 일단 선봉대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약간의 휴식과 함께 다시 내보냈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두차례에 걸쳐 선봉대를 더 보내봤지만 결과는 엇비슷했다.
엇비슷한 결과에 자신감을 얻었는데, 또 다른 희소식이 요양성에서 전해졌다.
희소식은 요양성 수비를 맡겼던 문렴이 보내온 것으로, 개원의 광녕군이 요양성을 침략해왔는데 능히 격파한 데 모자라, 거기에 더해 퇴각하는 총병관 개원을 추격해 생포까지 했다는 소식이었다.
이건 분명한 희소식이었다.
개원이 요양성이 아니라, 금주성으로 와서 후미에 진을 쳤다면 요동군의 진퇴는 어렵게 됐을 텐데, 요양성에서 생포 돼줬으니 더 이상 후방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거리낄 것도 없었다.
이제 금주성.
이 금주성만 함락시키면 요동 전체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딱 이곳만, 여기만 넘으면 된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우영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고, 본대를 진격시켰다.
***
한 편, 그 시각 금주성.
둥! 둥! 둥!
북소리가 금주성 일대를 가득메웠다. 그러자 포진하면서 깔짝거리기만 하던 적도들의 진형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런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드디어 적이 전력을 다하려는 듯 하옵니다.”
유담년이었다.
양동이의 물로 세안을 하던 융은 대꾸없이 손을 뻗었다.
군관 한 명이 수건을 건네주었다.
“생각보다 빠르구만.”
못 해도 달포 정도는 대치를 할 줄 알았다.
세차례나 선봉대만 보내서 간을 보는 것만 봐도 그랬다.
얼마나 신중하면 세차례나 선봉대를 보내왔겠는가.
그런데 사흘.
사흘만에 전력을 다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적진에 무슨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리라.
그 변화는 아군에 긍정적일수도, 부정적일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가 뭐냐에 따라 선택할 전술도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적진의 변화가 아군에 긍정적인 거라면, 이쪽도 이제는 총력을 기울어야 한다.
반대로 부정적인 거라면, 지금처럼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함부로 비장의 수를 꺼냈다가, 적이 경계하게 만들어선 곤란하니까.
융은 고심에 잠겼다.
이번 전쟁에서 지지 않는다. 하지만 피해는 최소화해야 한다.
그러려면 판단이 중요했다.
어떤 판단이냐에 따라 피해는 극명하게 갈릴 테니까.
고심하던 그때였다.
“전하, 여순(지금의 뤼순)에서 전령이 왔사옵니다.”
적이 포진한 상태에서 금주에 배를 정박 시킬 순 없어서, 군선들은 모두 여순으로 옮겨둔 뒤였다.
책임자는 허침으로 삼았고, 허침에게는 군선을 지킴과 동시에 영원성이 됐든 광녕성이 됐든, 전령을 보내 이곳 금주의 상황을 알리란 지시를 내렸었다.
적의 본대를 조선군이 막고 있다는 사실을 천장(명나라 장수)들이 혹시라도 모를 수 있고, 모르고 있다가 알게 되면 다른 전략을 세워 잔병들을 몰아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여순에서 온 전령이라면, 가벼운 소식을 들고 오진 않았을 터였다.
안으로 들이자, 군례마저 생략한 전령이 급히 말했다.
“총병 대인이 적에게 생포되었사옵니다!”
융은 당혹을 금치 못 했다.
총병이 생포되다니······.
“어떻게 된 것이냐?”
말문을 잃은 융을 대신해 유담년이 내막을 캐물었다.
전령의 입에서 전말이 흘러나왔고, 그 전말을 들은 융은······.
“그런 머저리가 또 있단 말이냐?”
실소를 내뱉었다.
출성한 광녕군이 요양성을 수복하려다가 패퇴했고, 퇴각하던 총병은 추격 나온 적장에게 생포가 됐다.
명색이 천장이란 작자가, 적의 본대가 금주로 남하했다는 소식에 들떠서 요양성의 규모를 간과한 게 분명했다.
지금껏 광녕군이 연전연패를 했던 게 우연만은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그 병력을 고스란히 살려두고 남하시켜서, 복주를 수복하든 하다못해 적의 후미에 진을 쳤다면 적을 압박 할 수단이라도 됐을 텐데 이건 말그대로 기껏 모은 병력을 헌납한 수준이었다.
좌우지간.
이거라면 적괴가 갑자기 병력을 움직인 것도 설명이 된다.
요양성-복주-금주의 길목, 즉 육로를 장악한 적들이다.
요양성의 소식도 필시 전달됐을 테고, 금주만 탈환하면 끝이라 생각했겠지.
뭐, 어쨌든 이 소식은 조선군 입장에서 아쉬운 소식이었지, 부정적인 소식까진 아니었다.
“전하, 속히 결단을······.”
결단을 재촉하는 유담년에 적진을 바라보자, 본대가 슬슬 움직일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우리도 전력을 다한다. 비격진천뢰를 사용토록 하고, 전군에 모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적을 막으라 전하라.”
“아, 감사군은 어찌 하올까요?”
“감사군은······.”
***
“명이 떨어졌다, 채비하라!”
대흑산 남쪽 기슭에 숙진(宿陣)을 세웠던 감사군 대장 민천동은 금주성 방면에서 폭죽과 함께 효시 소리가 들려오자, 군을 소집했다.
출성한 지 사흘.
사흘 만의 대기 명령이었다.
말이 사흘이지, 엄청난 고욕이었다.
적 몰래 성을 빠져 나왔기 때문에 적에게 발각 될 일은 최대한 삼가야 했다.
불을 때울 수도 없었고, 불을 못 때우니 식사는 간편식으로 해결해야 했다.
출성하면서 싸온 다 식어 깡깡 얼어붙은 떡이나, 주먹밥, 말린 육포 따위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이 간편식은 고욕 축에도 끼지 못 했다. 오히려 호사였다.
고가의 음식인 떡은 평소에 접하기 힘들다 보니 꽁꽁 얼어 붙었다 해도 질리지 않았고, 육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추위 만큼은 정말 곤욕이었다.
최대한 추위에 버티기 위해 이불이나 솜 따위를 가져왔지만, 그걸로도 모자라 다 큰 남정네들이 얼싸안아야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고욕도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말했다시피 금주성 방면에서 폭죽과 효시 소리가 들려왔다.
사전에 주고 받은 대기 명령이었다.
채비를 명하긴 했지만, 항상 대기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크게 준비할 건 없었다.
지난 사흘간, 그리고 간밤에 추위 때문에 기동 시킬 수 없는 말 163필을 제외시키고 반시진도 안 되는 사이에 출격 준비가 끝이 났다.
총 2,852기가 출격 할 수 있는 상태였다.
이중에 치돌(馳突)에 자신 있는 건, 부르기 쉽게 1대대라 명명한 800기의 기병들이었다.
이들은 함경도의 남북병영에서 차출한 기병들로, 전통적으로 치돌에 약한 조선 기병들도 함경도의 기병들은 달랐다.
여진족과의 전투가 많다 보니 여타 조선군과는 달리 치돌에도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이들은 기창(旗槍) 따위를 휴대케 하고 치돌을 위해 최일선에 배치시켰다.
이들이 치돌하면서 기창을 내세워 적진의 허리를 끊으면 나머지가 뒤따르면서 기사(말을 타고 활을 쏨)로 적을 유린케 하기 위한 전략적 배치였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이제 폭죽 두 발과 효시 한 번.
이 소리가 들려온다면 적진을 향해 돌격하면 됐다.
일다경, 일식경, 반시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금주성 방면에선 함성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한시진 쯤 흘렀을 때.
기다리던 두 발의 폭죽과 효시 소리가 들려왔다.
“출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