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353화 (35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53화>

    ***

    사자를 성내에 들였다가는 실컷 염탐하고 돌아 갈 우려가 있었다.

    내가 또 그 꼴은 못 보지.

    게다가 이런 잔챙이들은 굳이 형님이 상대하게 할 것도 없었다.

    염탐도 못 하게 할 겸, 성문 앞에서 사자를 맞이했다.

    맞이는 했는데······.

    “지금 깃대에 백기를 올리면 귀국은 만세에 이르도록 태평을 얻을 것이요, 깃대에 백기를 올리지 않으면 만세에 이르도록 오늘의 일을 지탄 받을 것이니 속히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오··· 라고, 하옵니다.”

    본인을 우승상 호상균(胡商均)이라 소개한 사자.

    사자의 말은 보다시피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우승상?

    듣도보도 못 한 관직이다.

    아마 진우영이 본인을 요동대왕이라 자칭하면서 신설한 관직이지 싶다.

    아무튼, 기가 차고 코가 차는 말에 뭐라 대답을 하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말도 통하지 않으니 대신 주먹 감자만 선사했다.

    그러자 주먹 감자를 받은 호 씨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묻사옵니다.”

    사자가 눈치코치도 없나보다.

    주먹 감자란 욕이 없는 시대란 걸 감안해도 대충 모욕적인 제스쳐란 것 쯤은 눈치 채지 않나?

    그런데 굳이 의미까지 묻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여러분도 알겠지만 주먹 감자가 내포한 의미는 굉장히 함축적이면서도 선을 딱 그어서 표현하기가 애매한 제스쳐다.

    굳이 입 아프게 구구절절 떠들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대충 얼버무렸다.

    “결사의 각오를 다진 거라고 전하시게.”

    통역이 말을 전하자, 호 씨의 표정이 굳는다.

    “선택을 후회하실 것이라 하옵니다.”

    “너희가 후회할 텐데? 지금이라도 물러나면 용서 정도는 해줄 수 있는데······.”

    피식.

    “사자가 말하길, 배포가 두둑하시니 과연 군왕의 풍모를 알 수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그 배포가 때로는 사람을 잡는 법이지요. 애꿎은 사람들만 죽어날 것입니다.”

    뭔가 생산적인 대화가 오갈 줄 알고 사자를 맞이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알았으면 대충 군관들 보내서 돌려보낼 걸 그랬다.

    더 들을 것도 없다.

    휘휘.

    파리 쫓는 시늉으로 더 이상 대화할 의사가 없음을 나타냈다.

    호 씨는 기분이 언짢은지, 연신 코를 찡긋거렸지만 어쩌란 건가 싶다.

    내가 겁을 먹었던 건, 성앞에 포진한 3만 대군의 위용 때문이지 이따위로 코만 씰룩거리는 샌님 때문이 아니었다.

    다음에 또 보면 그 모가지가 몸에 붙어 있을 일은 없을 테니, 소금에 잘 절여두라는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사자를 돌려보내고, 수성 준비를 이어나갔다.

    군데군데 빈 포혈에는 검게 칠한 옹기 따위를 채워 넣어서 서른 여섯 개의 포혈이 가득 찬 것처럼 꾸몄고, 장병겸(낫 모양의 무기)을 성곽의 각처에 배치시켰으며, 성곽 아래에는 임시 화덕을 만들어 기름을 끓일 솥을 올렸다.

    비격진천뢰 역시 빠질 수 없었다.

    지금은 천자총통 보다는 대완구를 이용한 비격진천뢰가 더 요긴하게 쓰일 터였다. 포혈마다 대완구를 설치하고, 그 곁으로는 비격진천뢰를 준비시켰다.

    성 아래에는 이미 녹각목을 깔아두었고, 성곽과 성벽에는 급히 징수한 이불과 솜 따위를 물에 적셔 적의 화공을 대비해 내걸어두었다.

    농성 준비만 끝났냐? 하면 반격 준비도 돼있었다.

    혹시나 하고 대흑산 방면 숲으로 빼둔 감사군.

    이 감사군은 여차하면 성으로 불러들이려 했지만, 다행히 적들이 벌판이 있는 북문으로 와준 통에 굳이 불러들이지 않아도 됐었다.

    적당한 기회와 함께 성에서 효시를 쏘아올리면, 감사군이 적의 허리를 끊을 터였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적의 본대를 격파하고 북진해서 잔당들까지 쓸어버리는 일 뿐이었다.

    아, 그전에.

    “덕산아, 청심환 좀 갖고 와라.”

    청심환부터 좀 먹고.

    ***

    요동군 진영.

    “흐음.”

    금주성을 눈에 담던 우영은 짧게 침음했다.

    몇 달 전 함락시킨 경험이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만만히 생각했던 게 사실이었다.

    생각을 고쳐먹어야 될 것 같았다.

    이전과 비교하면 성이 많이 달라졌다.

    수축한 흔적이 있었다. 장대를 중심으로 빙- 둘러쳐진 성곽에는 여러 개의 포혈이 나있었다.

    지금 당장 눈에 들어온 성곽에만 얼핏 서른 곳 넘는 포혈이 있었는데, 이전에는 그 반에 반도 안 됐던 걸로 기억하는 우영으로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그때는 포혈에 대가리를 내밀고 있는 화포도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포혈마다 화포 대가리가 툭 튀어 나와 있었다.

    저 수십문의 화포가 여차하면 일제히 불을 뿜을 거라 생각하니 소슬바람 덜미를 스치는 기분이었다.

    굳이 조선군과 싸워야 하나··· 이제라도 철수하면 안 되나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다만 이제와서 철수 할 순 없었다.

    금주를 탈환하지 않고서는 광녕성도 넘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때문에 이번만큼 부전이승이 간절한 적이 또 없었다. 하지만 호상균이 가져온 소식은 안타깝게도 비보였다.

    적장, 아니 조선 임금은 투항을 거부했다.

    투항을 거부한 이상, 요동군에게 퇴로는 없었다.

    무조건 성을 넘어야만 한다.

    우영은 신하들을 모은 채, 금주를 어떻게 공략할지 의논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공통 된 의견은 시간을 허비 할 순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자칫 시간을 허비했다가는, 광녕군이 남하해서 앞뒤로 포위 될 수가 있었고, 봉황성의 명군 역시 배제 할 수는 없었다.

    명군이 아니더라도 준비 된 군량미가 고작 60일치에 불과하니 역시나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단, 조바심을 내서는 곤란했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적의 방비가 얼마나 튼튼한지 정도는 알아야 했다.

    우영은 일단 좌승상(左丞相) 왕황기(王璜基)에게 4천의 군사를 주고 선봉에 서게 했다.

    이 4천의 선봉은 이변이 없다면 성을 향해 달려나갔을 것이었다.

    이변이 없었다면 말이다.

    ***

    금주성.

    “주상은?”

    “관제묘로 대피하셨사옵니다.”

    관제묘로 대피라 해봤자, 사당이 성내에 있으니 대피의 의미는 크게 없는 편이었다.

    융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주상은 여순(지금의 뤼순)으로 보낼 걸 그랬구만.”

    “그랬다가는 사기가 꺾였을 것이옵니다.”

    유담년의 말에 융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참 알다가도 모를 아우님이다.

    도적 진우영이 보낸 사자를 만나고 나서는 심장이 벌렁거린다며 청심환을 찾더니만, 그러면서도 끝끝내 몽진은 안 간다지 뭔가.

    그 덕인지는 몰라도 유담년의 말처럼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혹 적이 성벽을 넘더라도 관제묘로는 못 가게 막아야 할 것이다.”

    꼭 진성이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관제묘와 그 일대의 창고에는 피난 온 주민들도 숨어 있었다.

    “염려마시옵소서.”

    “많구나.”

    장대 너머로 적의 진영이 보였다.

    여태 상대해 본 적이 없는 대군이었다.

    “긴장 되시옵니까?”

    숭재가 물었다.

    “긴장.”

    “···”

    “숭재야.”

    “하문하소서, 전하.”

    “너는 내가 긴장한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신의 기억에는 없사옵니다.”

    “그럼 앞으로도 볼 일 없을 것이다.”

    피식, 소리 내서 웃은 융은 금장한 투구의 드림을 꽉 조여맸다.

    눈 먼 화살에 맞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이 즐거움과 짜릿함을 놔두고 비명횡사 할 순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억울해 뒈지실 것 같으니까.

    “움직이옵니다!”

    유담년의 외침에 적진을 바라봤다.

    과연 적의 진영에 변화가 생겼다.

    얼마나 방비가 튼실한 지 확인할 겸, 선봉을 보내려는 것이리라.

    적진에 변화가 생기자, 성루에 있는 군사들도 교전이 임박했음을 눈치 챈 것인지 모두들 표정이 굳어갔다.

    정예군이라고, 실전을 여럿 겪었다고 긴장이 희석 되는 건 아니었다.

    자연스런 조화였지만, 과도한 긴장은 해가 된다.

    병서에서도 나온 내용이지만, 실제로도 해본 결과 이럴 땐 지휘관의 자신감을 과하게 내보일 필요가 있었다.

    지휘관이 자신에 차있을수록 그 기운은 휘하의 군사들에게도 전염된다.

    “보거라!”

    적진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군사들의 시선이 융에게 옮겨왔다.

    “적은 고작 3만이다! 병서에 이르기를, ‘공성군이 수성군의 3배 병력이면 서로 비등하고, 5배의 병력이면 승산이 있으며, 10배의 병력 앞에는 암만 난공불락의 요새인들 소용이 없다’ 고 하였다. 하지만 지금 보거라! 적은 고작 우리의 곱절도 안 되는 2만에 불과하지 않느냐? 2만의 군사로 공성을 걸어왔으니 적장은 필시 아둔한 자일 것이다. 아둔한 자와 아둔한 군에게 진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장담컨대 역사서에서는 오늘의 전투를 대첩 중의 대첩으로 기록할 것이니 너희는 패전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말고, 죽음 따위도 두려워하지 말라. 죽고 난 뒤가 무슨 소용이겠냐만, 혹 전사자가 나온다면 전사자는 만대에 이르도록 기릴 것이요, 그 유족들은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친다 할 때 까지 보상 할 것이니 두려워말라. 이는 대장군 이백돌이 아니라, 상왕 이융이 약조할 것이다.”

    일장연설과 함께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나왔다.

    그 순간, 적의 선봉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거리도 점점 좁혀졌다.

    “1000보!”

    “500보!”

    “200보!”

    적과의 거리를 관측하던 군관의 입에서 200보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융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금이다, 발사하라!”

    ***

    진우영에게 4천의 군사를 받은 좌승상 왕황기는 자신만만했다.

    비록 적과의 병력 차이가 두 배 밖에 안 난다는 점이 우려스럽긴 하지만, 진다는 상상은 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요동군은 여태 패배한 적이 단 한차례도 없었다.

    하다못해 고전한 적도 없었다.

    요동총병 개원의 광녕군을 수차례 무찔렀고, 그 결과 광녕군을 광녕성에서 꼼짝도 못 하게끔 만들었다.

    어디 광녕성의 광녕군만 꼼짝 못 했겠는가?

    철령과 심양, 봉황성.

    각 성보의 군사들까지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조선군의 뜻밖의 복병인 건 맞다. 방심도 금물인 게 맞다.

    하지만 조선군이 대세에 큰 지장을 준다는 생각은 일절 들지 않았다.

    조선군은 그저 의외의 복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생각에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것은, 조선군의 대응이었다.

    철령 사람인 왕황기는 조선군이 다른 건 몰라도, 화포군들 만큼은 강맹하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었다.

    과장이 좀 섞이긴 했겠지만 그 잔혹하고 무도한 여진족들도 조선의 변경에 가서는 맥을 못 춘다고 하니, 그 말을 굳게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이곳, 금주성에서 조선군과 적으로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거리가 2000보 쯤으로 좁혀졌을 쯤부터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1500보로 줄어들었을 땐, 산개를 명령했고 직접적인 사거리라고 할 수 있는 1000보 안에 들어왔을 땐 하늘에 기도까지 올렸을 정도였다.

    제발 조선군의 화포가 고장나서 선봉대가 성에 도달 할 수 있기를, 하고 말이다.

    하지만 기도가 무색하게 조선군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만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듣기로 조선군의 화포의 사거리는 1300보가 넘는다고 했다.

    그런데 500보까지 좁혀졌음에도 굳이 화포를 쏘지 않는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화포군이 없거나, 화약이 없거나.

    뭐가 됐건 선봉대로서는 이로운 일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또 다른 공을 세울 수 있게 됐으니까.

    그게 착각임이 드러난 건, 금주성과 선봉대의 거리가 200보 정도로 좁혀졌을 때였다.

    쉬쉬쉬쉬쉭!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하늘이 거뭇해졌다.

    “응?”

    갑자기 거뭇해진 하늘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푸푸푸푸푹!

    수천, 수백발의 화살비가 선봉대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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