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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49화 (349/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49화>

    ***

    여태 전장을 압도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싶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번에 가져온 화포는 공성을 대비한 천자총통과 현자총통, 대완구, 화차.

    네 종류였다.

    천자포는 순수하게 그 강력한 위력으로 공성전을 염두에 두고 가져온 거고, 대완구는 혹시 사용할지도 모를 비격진천뢰 때문에, 현자포는 군선의 현측에 탑재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화차는 야전에서 적들의 기선을 제압할 요량으로 가져왔다.

    보다시피 각각 용처가 분명하다.

    지금 사용 되고 있는 건, 공성전을 염두에 두고 가져온 천자총통 뿐이었다.

    그런데 그 위력이 정말 어마무시하다.

    “방포하라!”

    총 16문의 천자총통을 배에 실어 가져왔고, 12문을 전진 배치시켰다.

    이 12문의 천자총통이 화약장들의 방포령과 함께 불을 뿜을 때면,

    쾅!

    콰콰쾅!

    그 포환들이 여지없이 셩벽을 때렸다. 그런데 그 소리가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꼭 천둥벼락 소리 같았다.

    총통이 낯선 병기도 아니었다.

    내가 또 명색이 임금이다.

    사열을 한다거나, 행사 같은 게 있으면 이따금 접하는 게 총통이란 말이다.

    그런데 전장에서 보는 총통은 기존에 알던 총통과는 달리 뭔가 새로웠다.

    그 위력에 절로 압도 되는 기분이랄까?

    “곧 뚫리겠구나.”

    천자포의 위력에 새삼 감탄하고 있는데, 형님이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다가오신다.

    “어디 계셨습니까?”

    “주수랑 섯다 좀 치고 있었다.”

    “···”

    또, 섯다라니··· 긴장도 안 되시는 모양이다.

    “아, 오해는 말거라. 긴장 좀 풀려고 친 거니라.”

    정말로 긴장 풀려고 섯다를 친 건지, 천자포로 성벽만 때려대는 전투가 지루해서 놀고 있었던 건지.

    아무래도 후자 같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려는데.

    “아니, 이것들이 지금 누굴 농락하나!”

    갑자기 발끈하는 형님에 고개를 돌렸다.

    금주성의 장대가 눈에 들어왔다.

    장대를 보자 왜 형님이 발끈한 지 알 것 같았다. 장대에 있던 깃대의 깃발이 내려가고, 대신 백기가 내걸려 있었다.

    이게 무슨 문제가 있냐고?

    있지, 있고 말고.

    “이제 시작이거늘 이것들이 애매한 시점에!”

    부들부들.

    형님 입장에선 너무 쉽게 끝난 전투가 문제시거든.

    물론 내 입장에선 차라리 별 피해없이 전투가 끝나서 다행이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눈 먼 화살이라도 맞을까 졸라 긴장하고 있었다.

    아무튼 전투가 소강 상태에 접어들고 장대에 적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무장 해제를 한 채 모습을 나타냈다.

    곧 장수가 항복 의사를 보내왔고, 구흥군이 성내로 진입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한 적이었다.

    성을 장악, 정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머잖아 구흥군과 감사군이 차례로 진입해 성을 장악했다.

    제대로 된 전투를 하기도 전에 적이 항복을 해서인지, 아군의 사상자는 경상자 8명에 중상자 2 정도였다.

    반면 적의 사상자는 94명에 포로가 1,726명으로, 대승이었다.

    보고를 받고 정리 된 성에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짐을 풀자 그제야 긴장이 풀리고 잠이 몰려왔다.

    어떻게 보면 첫 실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금주성 전투였다.

    그런 전투가 끝이 났으니 잠이 몰려올 만도 한 것 같다.

    유담년에게 잠깐 눈좀 붙이겠다 말한 채 성주가 사용하던 침소로 향했다.

    ***

    금주성 성주 마도찰(麻都察)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항복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최대한 비굴한 어조로 통사에게 말했다.

    하지만 비굴한 어조까지 전달 할 능력은 통사에게 없는지,

    “격문을 받고 바로 항복을 했어야지. 어찌 감히 대적을 한단 말인가?”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나는 항복을 하려고 했는데 저기 저놈들이 자꾸 내 명을 거역하고 싸우려 들었습니다. 놈들이 목숨까지 위협하면서 항명을 하는데 내게 무슨 수가 있었겠습니까?”

    통사는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으로 마도찰의 말을 융에게 전했다.

    거만하게 자리에 앉아 있던 융은 마도찰이 가리킨 ‘저기 저놈들’을 흘겼다.

    싸늘한 시체가 된 지 오래인 ‘저기 저놈들’이었다.

    다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으쓱.

    “그걸 내가 어찌 믿으랴.”

    나랑은 무관하단 듯 한 태도에, 32년 인생 이만큼 황당했던 적이 없던 도찰이었지만 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내 분명 말하지 않았더냐. 애매한 시점에 투항하려걸랑 투항치 말라고. 그러니 답하거라.”

    “···”

    “박피형(剝皮刑)을 당하겠느냐, 팽형을 당하겠느냐.”

    시부랄!

    얼굴 가죽이 벗겨질래, 산채로 삶아질래?

    어떤 게 되든 선택지라 부를 수 없는 선택지였다.

    울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아야 했다. 참고 이 위기를 넘겨야 했다.

    “제가 듣기로 조선의 왕께서는 대자대비하고 그 어짊이 끝이 없다고 들었······.”

    “네 말에는 어폐가 있다. 첫째로. 나는 조선의 임금이 아니다. 상왕이지.”

    “···”

    “그리고 두 번째. 난 전혀 대자대비하지 않다. 대자대비한 건, 네가 아까 본 그 왕이지, 내가 아니다. 이처럼 나같은 폭군은 고금에도 없었고, 금래(今來)에도 없을 것이니 네 말은 어폐가 있는 것이다.”

    진우영의 세력에 의탁하기 전까진 백호소의 총기(병사 50명을 지휘하던 명나라 군직의 하나)로 있던 마도찰이었다.

    우연히 진우영의 세력에 가담하고, 흔히 말하는 역적이 됐지만 그전까진 관군으로 황제를 받들며 일했으니 이래저래 보고 들은 게 많았다.

    그런데 단언컨대.

    정말 단언컨대 본인더러 폭군이라 칭한 미치광이 왕은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들은 적도 없었다.

    보고 들은 적이 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

    “체념한 것이냐? 자, 그럼······.”

    융이 다시 한 번 박피형과 팽형의 선택지를 제시하려던 그때였다.

    “전하!”

    병조판서 유담년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역적 죄인을 심문 중이라 하지 않았는가.”

    “소, 송구하옵니다. 하오나 밖에 백성들이 찾아왔사옵니다.”

    “백성? 조선인들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그럼 성내로 안내를 하면 될 것이지, 어인 영문으로 날 찾는단 말인가?”

    “목숨을 구명 받았으니 인사를 올리고 싶다고 하여······.”

    잠시 고민하던 융은 손사래를 쳤다.

    인사 받는 일보다는 선택지를 제시하는 게 더 중요했다.

    “금상은 내가 아니다. 주상에게 받게 하라.”

    “송구하오나 금상 전하께오서는 취침에 드신지라······.”

    젠장.

    중얼거린 융이 몸을 일으켰다.

    본격적인 수색군을 보내기도 전에 어떻게 알고 제 발로 찾아온 조선인들이었다.

    그 조선인들이 인사를 올리고 싶다는데, 거절하는 것도 도리는 아니지 싶었다.

    “김 통사.”

    “예, 전하.”

    “이 역적 놈에겐 내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으니 돌아오기 전까지 박피형과 팽형, 둘 중 하나를 꼭 택일하라 전하라.”

    “···예, 전하.”

    “가지.”

    ***

    금주에서 북쪽으로 15리(약 6km) 떨어진 백각촌(白角村).

    2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백각촌의 이칭은 조선촌이었다.

    조선인이 과반이었고, 네 가구 있는 한인 가구도 조선인들과 통혼했으니 조선촌이라 불려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 백각촌의 동네 어귀에는 마을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장산아, 얼른 가져오거라! 그러다 늦겠다!”

    초로한 노인이 장산이라 불린 청년을 닦달했다.

    노인의 닦달에 장산은 허둥거리며 마을로 들어가 수레를 끌고 나왔다.

    장산이 수레를 끌고 나오자, 동네 어귀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이 커다란 보따리나 나무 상자를 수레에 실었다.

    보따리는 꽁꽁 묶여 있고, 나무 상자는 굳게 닫혀 있는지라 내용물은 알 수 없었지만, 보따리와 상자를 싣는 주민의 안타까운 표정으로 보건대 귀중한 건 분명해보였다.

    그렇게 장산이 끌고 나온 수레를 포함한 7대의 수레가 가득 채워졌다.

    힘들게 짐을 실었건만, 주민들의 얼굴에는 뿌듯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모두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있었다.

    “촌장님, 이거 가지고 될까요? 분명 10대라고 했는데······.”

    장산이 노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검게 칠한 지팡이를 짚고 있던 노인은, 그 지팡이마저 수레에 실었다.

    “오장(烏杖)은 왜 또 실으세요?”

    “돈 나가는 건 하나라도 더 보태야지 않겠느냐.”

    “선친께서 쓰시던 거라면서 아끼셨잖아요.”

    어렵사리 입꼬리를 들어올린 노인이 장산의 머리를 헝클었다.

    “죽은 사람 보단 산 사람이 우선이지.”

    “촌장님······.”

    장산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게 다 금주성의 그놈 때문이었다.

    금주성의 그놈은 실로 야차와 같은 놈이었다.

    아니, 야차가 뭔가? 차라리 야차는 자그마한 인지상정이라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금주성 그놈에게 인지상정이란 사치였다.

    개주에서 들고 일어난 진우영의 졸개인 그놈의 이름은 마도찰.

    물론 놈이 처음부터 재물 긁어 모으는데 혈안이 된 야차였던 건 아니다.

    놈이 처음 금주성의 성주가 됐을 때는 진우영이 이래저래 관심을 쏟던 시기였다.

    이렇게 진우영이 금주성에 관심을 쏟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난리가 일어 난 건지 안 일어난 건지 모를 정도로 평탄했는데 진우영이 북상하고 요양성의 일로 관심이 뜸해지자 본색을 드러내고 닥치는대로 재물을 긁어 모으기 시작했다.

    말로는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대왕, 즉 진우영의 혁명에 쓸 재물이라고 했는데, 개뿔.

    모두 제놈 뱃속에 쳐넣으려는 심보인 건, 암만 무식한 장산도 다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호가호위란 말은 딱 마도찰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진우영의 졸개가 되기 전까지 한낱 총기(병사 50명을 지휘하던 명나라 군직의 하나)로 있었던 주제에 하는 짓은 무슨 황제 저리가라다.

    그렇다고 불만을 품고, 놈이 요구한 재물을 안 갖다 바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된다.

    놈이 왜 ‘금주성 그놈’ 내지는 ‘야차’라 불리겠는가?

    본인 지시를 조금이라도 안 따르는 순간, 반민(叛民)으로 규정해버린다.

    그리고 반민으로 지목이 되는 순간, 반민이 있는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만다.

    이 수레도 마찬가지였다.

    마도찰은 이 가난한 백각촌에도 뭐, 뜯어 먹을 게 없나 휘하 병사를 보냈다.

    병사와 함께 수레 10대도 줬고, 병사는 수레 10대를 가득 채우는 게 백각촌의 할당량이라고 말해주었다.

    이 지시를 안 따르면 어떻게 될진 불보듯 훤했다.

    소문에 의하면, 마도찰의 지시를 따르지 못 한 이웃 마을은 전소됐다고 했다.

    지시를 안 따르면 백각촌도 같은 처지가 될 가능성이 컸다.

    “다 내 죄다. 어린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때 봇짐 싸서 피난 갔어야 했는데······.”

    상념에 잠긴 장산을 흘겨보던 촌장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이 금주 일대에는 제법 많은 조선인들이 산다.

    난리가 터지고 나서 조선인들 뿐만 아니라 한인들도 다수가 피난을 떠났다.

    북쪽의 개주로는 올라 갈 수 없어서 서쪽이나, 서북 쪽으로 말이다.

    난리가 금방 평정 될 줄 알았던 촌장은, 피난가야 되는 거 아니냐는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일축시킨 적이 있었다.

    그게 지금은 뼈저리게 후회 되는 촌장이었다.

    “촌장님, 자책하지 마세요. 촌장님 죄도 아니잖아요.”

    “미안하구나. 어여 다녀오거라.”

    “네.”

    “아! 그리고 꼭 성에는 아저씨들만 들여보내야 한다. 젊은 너희들이 성에 들어갔다가 징병 될지도 모르니. 알았느냐?”

    “걱정마세요.”

    씨익 웃으며 수레를 끄는 장산이었다.

    촌장은 장산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망부석 마냥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한참 후.

    “촌장 어르신. 들어가시지요.”

    마을 사람들의 재촉에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는 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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