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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47화 (34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47화>

    ***

    이미 한차례 원정을 다녀온 신무위를 또 한 번 소집하는 건 미안한 일이라, 최대한 봉해위와 신무위는 소집 안 하는 선에서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작전을 수립하면서 소집이 불가피하게 됐다.

    처음에는 기병들만 운용해서 구출 작전을 개시하려고 했다.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함경도의 북병영과 남병영에 동원 가능한 기병만 증원을 거쳐서 5,000기에 육박했다.

    거기에 저번적에 장사징가 부락 토벌에 동원 된, 연변진에 있는 천동의 기병대도 증원을 거쳐 지금은 그 수가 1,000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절반씩만 동원해도 3,000기였고 빠르게 치고 빠지는 데에는 기병만한 게 없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전면 수정됐다.

    이러한 기병 동원은 육로를 이용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육로가 연결 된 봉황성 등지 명나라 성보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래서 협조 공문을 보냈다.

    평소에는 사행로로 이용되는 탕참보, 봉황성, 진동보, 통원보 등지의 명나라 지휘관들에게 말이다.

    그런데 하나같이 거절을 했다.

    구출 작전 펼치는 건 좋은데, 대규모 기병이 도강해서 북진하는 건 원치 않는다나 뭐라나.

    아마 우리 기병들이 역적 진우영과 손 잡을 경우를 대비 한 것 같은데, 그럴 일 없다 해도 본인들이 계속 못 믿겠다는데 뭐 어쩌겠나.

    작전은 결국 수군을 이용하는 것으로 수정됐는데 그러자니 스케일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기병들이 성공적으로 상륙해, 구출작전을 펼친다 한들 기병의 한계는 명확했다.

    게다가 상륙 작전을 펼친다면 금주(지금의 다롄시 진저우구)에서 펼칠 가능성이 컸는데, 이 금주는 개주와 함께 역적들이 점령한 지 오래 된 역적들의 거점이었다.

    여기에 상륙 시킨다는 말은 퇴로가 없다는 말이었다.

    퇴로 없는 곳에 기병대를 상륙 시켰다가 자칫 기천에 이르는 기병대를 몰살 시킬 우려가 있었다.

    스케일이 커진 건 그래서였다.

    그런 위험을 감수 할 바에 차라리 금주를 전초 기지로 삼아버리고 구출 작전을 펼치자는 의견이 대두 됐기 때문이다.

    이 의견은 어떻게 보면 효율적인 작전이 될 수도 있었다.

    말했다시피 요동의 조선인들은 개주, 해주, 금주 따위에 집중돼 있었는데 구출 작전에 있어서 모든 화력을 집중 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논의 끝에 이 작전이 채택됐다.

    이 작전은 좀 더 디테일하게 말하자면 수륙 합동 작전에 가까웠다.

    천동을 책임자로 한 기병들을 대략 3,000기 정도 소집하고 이들은 보급 없이 가벼운 차림으로 도강한다.

    이들은 도강 후, 곧장 금주 방면으로 서진.

    그리고 미리 소집시킨 봉해위, 별충위, 신무위, 파진군, 의흥위 갑사 8천명 역시 배에 승선시켜 출진, 금주에 상륙.

    아, 좀 웃픈 사실이긴 한데 수륙 합동 작전을 벌여야만 하는 건, 3,000기에 이르는 천동의 기병대를 태울 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작전은 명나라 측에서 협조를 거부하는 바람에 이렇게 수정이 됐다.

    물론 반대없이 일사천리로만 진행 됐던 건 아니었다.

    당장 의주성에서는 김경의와 이점이 반대했고, 조정에서도 무수한 반대가 있었다.

    경제성을 떠나 명나라 허락 없이 명나라 영토로 쳐들어가 구출 작전을 벌인다는 걸 두려워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반대표를 던졌고 말이다.

    이변이 없었다면 나도 거듭 된 대신들의 주청에 소극적인 구출 작전으로 계획을 변경 시켰을지도 몰랐다.

    말했다시피 이변이 없었다면.

    그 이변은 다름아니라······.

    “오, 아우님!”

    여기는 선사포.

    평범하다면 평범한 선사포구에는 병선들이 북적였는데, 개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배가 있었다

    바로, 왜맹선이었다.

    일반 맹선과는 다르게 큰 크기도 크기지만 남해정토군과 신무정왜군 총사령관 이백돌의 대장선으로 사용된 게 신문에 삽화와 함께 실리면서 지금 조선에서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거북선과 같은 이미지가 생긴 전선이기도 했다.

    그 왜맹선에서 누군가 천진난만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하선하고 있었다.

    짐작했겠지만 부산에 틀어박혀(?) 계시던 형님이었다.

    그리고 아까 말한 이변이 바로 형님이시다.

    구출 작전을 들으신 형님은 단 한마디로 반대 여론을 일축시켰다.

    -백성을 구하는 일을 반대하는 자는 역적이다!

    노비 조합의 탄생이 불과 3년 전쯤에 있었다.

    이 말 한마디에 반대 여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수그러들었다.

    “전하! 신(臣) 의주목사 김경의. 저 커다란 전선을 바라보며 호배(신하가 임금을 보고 절하는 것)하오니 과연 우리의 무위를 크게 떨치심과 전승의 희보가 어찌 퍼졌는지 알 것 같사옵니다. 실로 눈물로서······.”

    형님이 손을 휘 내저었다.

    “그러다 숨 넘어가겠구나.”

    라고 말한 형님은 곧 호종 대신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인사라고 해봤자 손을 흔들고 만 수준이지만.

    “아우님. 이 형님이 먼길을 달려왔는데도 멀뚱멀뚱 서있을 참인가? 내 옛날에 듣기로 통군정에서 바라보는 압록강이 그리 절경이라 하니 통군정에 올라 회포라도 품이 어떻겠는가?”

    “예, 가시죠.”

    “거기, 경들도 멀뚱멀뚱 서있지 말고 따라오거라. 내 경들도 1년만에 보는데 회포를 풀더라도 함께 풀어야함이 온당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겸사겸사 금주로 상륙하는 일 또한 논하고 말이다.”

    1년만에 보는 형님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모두를 포용하는 인싸력 만큼은 변함없이 만렙이다.

    ***

    “이름··· 이라니요?”

    여기는 통군정.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입에 침까지 튀겨가며 본인 무용담을 뽐내는 형님의 재담을 안주 삼아 부어라 마셔라 해댔다.

    그러다가 화두가 바뀌었다.

    상륙 작전으로 말이다.

    “친정(親征)이 아니냐?”

    엄밀히 말하면 구출 작전이긴 한데··· 뭐, 임금이 군대를 지휘한다는 면에서 보면 친정의 성격이긴 하지?

    “예. 그런데요?”

    “나는 어릴 적 아명을 쓰지 않았더냐. 너도 친정에 나서려면 이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순간 인지부조화가 일었지만, 형님 원투데이 겪는 게 아닌지라 금방 무슨 말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신무정왜군 도원수 이백돌처럼, 요동전 총사령관에 걸맞는 이름을 지으라는 소리셨다.

    긁적긁적.

    “그것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물론 굳이 지을 필요성도 못 느끼지만.

    “생각을 안 해보다니··· 큰 일 날 소리. 친정에 가명은 중요하다. 오죽하면 황제도 친정에서 가명을 썼겠느냐?”

    그거야 형님이랑 황제가 이상한 거구요.

    라는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새삼스럽지도 않아서.

    “마땅한 이름이 안 떠오르는 것이냐?”

    “네, 뭐.”

    “그럼··· 흠.”

    고심에 잠긴 형님이 불안하다.

    나만 불안한 게 아닌지, 기분 좋게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대신들도 멈칫거렸다.

    “신출귀몰하다는 뜻에서 신귀(神鬼)가 어떠하냐?”

    “신귀요.”

    “왜, 마음에 안 드는 것이냐?”

    “마음에 안 든다기보다는······.”

    얼른 우의정 채수에게 눈치를 줬다.

    숭재 씨가 따라주는 술잔을 받고 있던 채수가, 퍼뜩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귀라는 이름은 제아무리 가명이라 한들 귀신 신(神)자가 들어가기 때문에 사, 상서롭지 못 한 줄로 아뢰옵나이다.”

    “그렇사옵니다. 또한 이번 친정은 백성을 구출 함에 거병한 의의가 있는 것이니 요동에 들어가서도 굳이 가명을 내세울 필요 없이 임금으로서 교서를 내리는 것이 온당하다 사료되옵니다.”

    “흠··· 하기사. 장수가 전면에 나서 백성을 구출 했다는 것보다는 임금이 직접 백성을 구출하러 왔다고 선전하는 것이 보기에는 더 좋겠군.”

    휴.

    살았······.

    “하지만 혹시라도 가명을 써야 할 때가 있다면 신귀로 쓰도록 함이 어떠하냐?”

    “그건······.”

    좀 아닌 듯 합니다.

    정중하게 거절하려 했는데 간절하기 까지 한 형님의 눈빛을 보니 차마 거절을 못 하겠다.

    “···알겠습니다. 훗날에라도 가명 쓸 일이 있으면 신귀라고 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얼마나 좋으냐, 이신귀. 아니 그러하냐, 신귀야?”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

    하늘이 돕는 건지는 몰라도 불행중 다행으로 여름이 아니라 가을이었다.

    방어전 정도면 계절이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먼 길 원정 가는 데에 여름은 부적격하다.

    습하고 더운 날씨 때문에 군수품들을 관리하는 일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병사들이 금방 지치거나 탈 난다.

    시간이 지체되면 지체 될수록 요동에 있는 조선인들의 안전을 보장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런고로.

    나는 조정을 닦달했다.

    보위에 오르고서 처음 있는 닦달이었는데, 닦달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제때 채비를 마친 경기도, 충청도, 평안도, 황해도, 전라도에서 출발한 수군선들이 이번에 소집 된 군사들을 태워 각각 선사포, 광량포, 노강진 같은 포구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이번 구출 작전에 소요 되는 군량미는 모두 삼성에서 후원한다.

    그리고 이 군량미는 잡곡 10만석으로 한양 본점에서 조운선에 태워보내게 했는데, 이 군량미들도 때에 맞춰 도착했다.

    이 정도면, 이변이 없다는 전제 하에 전투병과 보급을 포함한 1만 5천의 군대가 6개월은 버틸 군량미였다.

    체류 기간을 최대 3개월 잡고 있으니, 넉넉하다 못 해 넘치는 군량미였다.

    그리고 넘치는 군량미로는 구출한 조선인들을 구휼할 생각이었다.

    그러는 사이.

    함경도의 남북병영과 연변진의 기병대가 속속들이 도착했고, 조정에서 보낸 장수들도 도착했다.

    기병 3천에, 포병과 궁병을 망라한 보병 8천.

    도합 1만1천.

    이들의 편제는 별충위, 봉해위, 신무위가 그랬듯 나 편한대로 했다.

    먼저, 기병대는 천동을 총지휘관으로 삼고 감사군(敢死軍)이라 이름붙여 독립부대로 편제했다.

    오백에 달하는 파진군, 즉 포병들 역시 갑동을 총지휘관으로 삼고 격뢰군(格雷軍)이라 이름 붙여 독립부대로 편제했고, 나머지만 부르기 쉽게 구흥군(救興軍)이라 이름붙이고, 기억하기 쉽게 짝수로 딱 4개의 연대만 뒀다.

    그리고 그 밑으로 대대와 중대, 소대를 편성했다.

    편성은 금방 끝났지만 합을 맞춰볼 새는 없었다.

    말했다시피 시간을 지체하면 할수록, 조선인들의 안전을 보장 할 수 없기 때문이었는데 무엇보다 봉황성 지휘 전작세가 전령을 보내왔다.

    전령은 요동총병이 드디어 광녕성에서 출병했으므로 조선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그 혹시 모를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금주위에 상륙을 마쳐야 했다.

    그러려면 지체할 시간 따위 없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는데 출정식이 웬말일까.

    시간차를 생각해 출정식 없이 천동의 감사군 부터 먼저 출병시켰다.

    단기라면 말이 거품 물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사흘 노정이지만, 감사군의 삼천기가 서진하려면 이래저래 감안할 게 많았다.

    못 해도 엿새 정도는 걸릴 터였다.

    그렇게 사흘 쯤 지났을 때.

    때에 맞춰 구흥군과 격뢰군 역시 각 도에서 징발한 198척의 전선에 태워 출병했다.

    196척의 전선들은 말로만 듣던 해랑도를 거쳐, 1510년 10월 23일.

    금주 앞바다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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