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346화 (346/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46화>

    ***

    내가 공대에 비하면 비전이라고는 1도 찾아 볼 수 없는··· 아니지.

    굳이 공대까지 갈 것도 없겠네.

    인사대 안에서도 취직률이 제로에 가까운 문창과에 진학한 건 모르다시피 글이 주는 매력 때문이었다.

    낱말과 낱말이 연결돼서 하나의 문장이 되고, 문장과 문장이 어우러져 하나의 글이 된다.

    그러면서도 또 읽는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라 긍정적일수도, 부정적일수도 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이런 거다.

    「···그러므로 요동군에는 기백이 넘는 학자들이 모신(참모)을 자처하였고, 수만이 넘는 무사들이 맹사(용맹한 군사) 되기를 바라고 있으니 오직 나의 칼끝만 바라보면서 진격의 명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노라. 아아! 나는 지금 천하에 대의를 떨치고자 하니 그대가 비록 어리석다 할지라도 속히 휘하에 들라. 이는 일신으로서는 전화위복의 기회요, 가문으로서는 만세에 영예로울 일이니, 그대가 끝끝내 요양성의 험한 것만 믿고 조아리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신책(神策)을 휘둘러 그대 성을 함락시키고, 성의 백성들을 모조리 잡아 도륙하리라.」

    자, 이게 바로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라 달리 느껴지는 글의 매력이다.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고?

    이 글을 보고 요동 도사 손경이 백기를 들었단다.

    근데 나나 여러분은 아무렇지도 않잖아?

    아마 이 글을 읽은 손경은 우리와 다르게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따위 격문도 격문이랍시고 냉큼 백기를 들어버리지.

    어떤가?

    글이란 게 새삼 대단해보이지 않······.

    “전하? 전하? 괜찮으세요?”

    덕산이의 검지가 눈앞에서 좌우로 춤을 춘다.

    “아.”

    “아이구, 얼마나 놀라신 거예요. 아니지. 놀라실 만도 하지. 명나라 장수가 항복을 했다는데······.”

    덕산이가 혼자 북치고 장구칠 즈음.

    둥! 둥! 둥!

    진짜 북소리가 들려왔다.

    적침이 있거나 이변이 있을 때 치는 게 북임을 감안하면, 어떤 일이든 터지긴 터졌다는 말이었다.

    “악재가 아주 쌍쌍으로 들이닥치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상황에 여진족의 침입인 거라면, 보통 혼란해지는 게 아니다.

    아찔한 마음에 냉큼 숙소를 뛰쳐나가, 바로 아까까지 압록강의 경치를 감상했던 통군정에 다시 올랐다.

    그러자 압록강변 너머의 모습이 확연히 보였는데······.

    “아니, 저게 지금 무슨······.”

    “호복(오랑캐 복장) 차림은 아닌 듯 한데··· 목사. 목사가 보시기에 한인이요, 호인이요?”

    “송구합니다. 거리가 멀어 소인도 분간이 잘 안 갑니다.”

    어느 새, 통군정에 함께 오른 의주목사 김경의와, 변경행을 호종한 채수, 유담년, 임숭재 등이 말을 주고 받았다.

    압록강변 너머.

    그 너머로 수십인지 수백인지 정확한 수도 알기 어려운 무리가 한데 뭉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의주성으로 넘어오고 싶어도 변변한 나룻배 하나 없어서 못 넘어오는 것 같았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발만 동동 구르던 몇몇 장정들이 아낙들에게 봇짐을 맡기고 강으로 뛰어 들었다.

    이목이 나에게 집중됐다.

    중국인인지 여진인인지 모를 저것들(?)을 건져내냐 마냐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설사 여진족일지라도 건져내서 자초지종을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건져내라 명하니 김경의가 의주성 군사들을 부려 강변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강변의 나룻배를 띄워 장정들을 태워 돌아왔다.

    알고보니 장정들과 강변 너머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조선인이었다.

    개중에 여진족이나 중국인이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조선인과 혼인한 이들이었으니 수백의 사람들 모두 조선인이라 해도 무방했다.

    출신이 어쨌건, 왜 압록강 너머에 모습을 나타낸 거냐 심문했다.

    그러자 본인을 만삼이라 밝힌 장년인이 사연을 털어놨다.

    사연인 즉슨.

    무리는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이들이 아니라, 각각 강너머 봉황성이면 봉황성, 탕참보면 탕참보, 진동보면 진동보 같은 요충지 일대에 흩어져 살던 이들이라고 했다.

    그러던 것이 알다시피 요양성에서 변고가 생겼다.

    요양성을 차지한 역적들은 여세를 몰아 곧바로 총병이 있는 광녕을 칠지, 배후를 안정시킬지 고민 중인 것 같았는데, 문제는 봉황성, 탕참보, 진동보 같은 배후에 있는 성보들이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요양성 역적들에게 신경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한 때에 봉황성 지휘(指擂) 전작세(全爵世)가 탕참보, 진동보 같은 성들에 명을 내렸단다.

    최악의 경우 옥쇄를 결심해야 하니 양곡을 최대한 비축하라고.

    그리고 양곡을 비축하려면 군입부터 줄여야 한다.

    궁지에 몰리면 사람은 이기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애석하게도 그 군입은, 요양성의 변고를 듣고 각 성보로 피난 온 조선인들이었다.

    쫓겨난 이 조선인들이 갈 데가 어딨겠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의주까지 왔을 터였다.

    “만삼이라 했느냐?”

    조용히 사연을 털어놓던 만삼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아린다.

    “예, 나리.”

    무복 차림의 나를 평범한 하급 무관 정도로 여긴 모양이다.

    나리란 말에 만삼을 심문하던 목사가 버럭 호통쳤다.

    “이놈! 나리라니! 이분이 뉘신줄 알고··· 속히 예를 갖추지 못 하겠느냐!”

    “괜찮습니다.”

    “송구하옵니다.”

    “그래. 만삼이 너는 고향이 어디더냐?”

    “저, 정주입니다요.

    “고향을 떠난지는?”

    “20년 쯤 된 것 같습니다요.”

    “왜 떠난 것이냐?”

    만삼이 주변 ‘나리’와 ‘영감’들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다. 편히 말해보아라, 왜 떠난 것이냐?”

    “목사또께서 이런저런 구실로 징세하시니 입에 풀칠 하기가 어려워 월강했습지요.”

    나는 만삼과 함께 헤엄쳐 온 사람들을 흘겼다.

    “너희도 비슷한 사연이 있는 것이렷다?”

    “···”

    무언이 곧 긍정이었다.

    그들의 반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일까?

    그리고 한 둘이었을까?

    사연 없는 사람 없다지만, 누군들 고향을 떠나고 싶어서 떠났겠나.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사연 때문에 등진 거겠지.

    “강 너머에 있는 자들은 모두 몇이나 되느냐?”

    “다 세어보진 않았는데, 뒤따라 오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칠팔백쯤 될 겁니다요.”

    “뒤따라 오는 사람들이라니? 저게 전부가 아니란 말이냐?”

    “그러믄입죠. 낙오 된 사람들이나, 병든 사람들, 이래저래 뒤쳐진 사람들도 있습지요.”

    예상한 수를 상회하는, 칠팔백이란 말에 멈칫한 내가 한심해졌다.

    “모두 도강 시키십시오.”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칠팔백이면 적은 수가 아니옵니다. 더욱이 지금이야 칠팔백이지만, 그 뒤를 따라오는 자들이 더 있을지 모르는 일이옵고 봉황성의 전 지휘가 어찌 그같은 영을 내려겠나이까? 이곳 의주와 변경도 양곡을 비축해서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데 이렇듯 막무가내로 피난온 자들을 받아들인다면 유사시 군사들을 먹일 군량도 조달 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안타까운 일이나······.”

    유담년은 말끝을 흐렸다.

    그를 탓하고 싶진 않았다.

    유사시에 대비하는 건 병조판서로서 당연한 소임이다.

    하지만 난 병조판서가 아니다.

    비록 타의로 보위에 올랐고, 지금도 일하기 싫어서 놀러왔다지만 만백성이 어버이라 부르는 임금이었다.

    병조판서의 소임이 유사시를 대비하는 거라면 임금의 소임은 백성의 안녕을 보장하는 일이었다.

    ***

    “시키세요, 도강.”

    “···알겠사옵니다.”

    곧, 유담년과 김경의가 군사들을 부려 강너머 사람들을 도강시키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도강시키는 데에는 두시진이 꼬박 걸렸다.

    칠팔백이란 만삼의 말과는 달리 후미에 기백명이 더 따라 붙었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모두 도강시켰다.

    물론 유담년의 말처럼 군입이 늘어나면 유사시 군량을 조달하기 힘들어지겠다만, 내가 누군가.

    왕이기 이전에 삼성의 회장님 아니시던가.

    저번에 한 번 말했다시피 평안도는 비누 매출이 팔도 중에 가장 높은 곳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교통의 요지인 의주 때문이었다.

    양국 사신들이 의주를 거치면서 비누를 구매하기도 하거니와, 여진족과도 통하기 쉽기 때문에 팔도에선 평안도가 비누 발주는 가장 많다.

    아직도 달마다 덕복에게 보고 받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저번달 평안도 비누 발주량은 9000개가 살짝 넘고, 판매량은 8900갠가 됐었을 것이다.

    백미로 환산할 시에만 18~20만석의 매출이 바로 이 평안도, 의주에서 발생했다.

    물론 매출이 순익은 아니지만 미처 한양 본점으로 운송 못 한 양곡도 꽤 될 거고, 의주 지점에서 소모하려고 비축해둔 것도 꽤 될 터였다.

    의주 지점 지점장을 불러 물어보니 비록 잡곡이긴 하지만, 미처 본점으로 올려보내지 못 한 것들과 여진족들과의 거래에서 대금으로 쓰려고 남겨둔 잡곡이 11만석 정도가 있단다.

    이 정도면 크게 부족하진 않을 터였다.

    유사시를 대비해 개중 6만석 정도는 인근의 방산진(方山鎭), 인산진(麟山鎭), 수구보(水口堡), 청수보(靑水堡) 등지로 나눠서 비축하게 하고, 나머지 5만석은 모두 의주성에 비축시켰다.

    그러기까지 딱 열흘이 걸렸는데, 그러는 사이에도 피난민들은 끊임없이 밀려왔다.

    열흘만에 압록강을 넘어 온 피난민만 3천명에 달할 지경이었다.

    자, 열흘이다.

    고작 열흘만에 압록강을 넘은 피난민이 3천명이란 말이었다.

    장수로서 유사시를 대비하겠다는 마음을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아직 역적 무리가 북진할지 남하할지 결심을 굳힌 것도 아니고 어떤 징조를 보인 것도 아닌데 이건 도가 지나친 수준이 아닌가 싶었다.

    특히 도가 지나친 건,

    “할부지, 이거 먹어.”

    “너 먹어, 인석아.”

    다 식은 주먹밥을 서로에게 권하는 조손이 보인다.

    피난 온 사람들 틈에 끼어있던 조손이었는데, 피난민 3천 중에 노인과 아이는 저 둘 뿐만이 아니다.

    봉황성과 탕참보 같은 명나라의 성보에서 아이와 노인들마저 내쫓았다는 소리가 된다.

    조손을 가로질러 막사로 들어갔다.

    막사에는 이미 변경행을 호종한 대신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은 몇 명이나 됩니까?”

    “벌써 서른이 넘었사옵니다.”

    김경의가 말하는 서른은 당연히 도강시킨 피난민이다.

    이른 아침인 걸 감안하면, 저녁 쯤 될 땐 어제처럼 기백명을 도강시키지 않을까 싶다.

    “봉황성에서 연통은요?”

    유담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열흘 전.

    피난민 행렬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나는 봉황성 지휘 전작세에게 사람을 보냈다.

    너희가 왜 조선인들 안 받는지는 알겠는데, 도의적인 차원에서 좀 받아달라는 청탁을 위해서였다.

    근데.

    “아직이옵니다.”

    깔끔하게 씹혔다.

    “열흘째 답이 없다는 거면 본인들도 어쩔 수 없다는 것 같은데.”

    명나라 장수들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건데, 문제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신세의 조선인들이었다.

    그나마 지금 압록강까지 와서 도강한 3천명은 사정이 낫다.

    근데 그거 아나?

    요동은 정말 인구의 절반이 조선인이라고 할 만큼,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주한 조선인이 많다는 거.

    추산만 5만인데, 말이 5만이지 추산이다 보니 10만이 될지, 20만이 될지는 옥황상제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조선인 타운(?)은 요양, 개주, 해주에 집중돼 있다.

    딱 역적 무리가 창궐하거나 점령한 일대 주현들이다.

    피난온 3천명이야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구명했다지만, 피난 못 온 조선인들은 어떻게 되겠나?

    역적 무리에게서 규율을 찾아보긴 어려울 터였다.

    계획적인 역모도 아닌지라, 슬슬 군량미를 조달하는 것도 벅차겠지.

    그렇다면 결국 민간에 손을 뻗칠 수 밖에 없을 테고, 그 과정에서 개주, 요양, 해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조선인들이 피해를 볼 건 자명한 사실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고민이 깊어졌다.

    고민에 잠긴 내 생각을 읽은 걸까.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어쩔 수 없사옵니다. 강 너머에 있는 이들을 어찌 구원하겠사옵니까? 안타까운 일이나 도리가 없사옵니다.”

    유담년이 선수를 쳤고,

    “···송구하오나 신의 생각도 유 판서와 같사옵니다. 이미 나라를 저버린 자들이옵니다. 그들마저 구원하려는 전하의 따뜻한 어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나, 현실적으로 불가한 일이옵니다.”

    대사성 이점이 거들었다.

    “대사성.”

    “예, 전하.”

    “그들이 좋아서 고향을 등지고 월강을 했겠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마는··· 어쨌든 한 번 나라를 버린 자들이니 두 번이야 버리지 못 하겠사옵니까?”

    “그 반댑니다. 만삼의 일처럼 나라에서 그들을 내다 버린 것이지, 그들이 나라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나라에서 그들을 한 번 내다 버렸는데, 두 번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하오나······.”

    “지금 그들은 역적 진우영에게 의탁 할 수도 없고, 명에도 의탁 할 수 없는 신셉니다. 내가 비록 부덕한 임금이지만, 강 너머에 있는 걸 뻔히 아는데 어찌 구출을 마다하겠습니까?”

    명나라 조정에 허락도 안 받고 군사를 보내는 건, 문제 될 소지가 있는 일이지만 명나라 장수들이 방치한 백성들 구하러 가겠다는데 설마 책 잡으려고.

    그 이후 나는 이 내용을 조정에 통보하고, 구체적인 구출 작전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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