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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45화 (34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45화>

    ***

    “총병은 아직이란 말이냐?”

    높디 높은 요양성 누각에 오른 요동 도사 손경은 안절부절 못 했다.

    설마 하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해주를 점령한 역적들이 이제는 감히 요양으로까지 진격하고 있었다.

    “예, 아직······.”

    “온다고 한 게 언제인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란 말인가!”

    “걱정마십시오. 제때 도착 하실 것이옵니다.”

    겁 먹은 본인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란 걸 모르지 않았지만, 그걸 감안 하더라도 너무 낙관적인 말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과 다름이 없거늘 제때 도착 할 테니 안심하라니······.

    놀리는 것 같아 열불이 났다.

    “이러다가 역적들이 먼저 당도하기라도 하면! 그러면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이냐!”

    “고정 하십시오, 대인. 아랫것들이 보고 있사옵니다.”

    수하들이 다 보는 앞에서 추태를 부리고 싶진 않았다.

    지휘관이 추태를 보이는 순간, 군사의 사기가 떨어진다는 건 병사(兵事)에 어두운 용장(庸將)도 알 만한 일이니까.

    하지만 본인도 모르게 추태를 부리게 된다.

    정말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 같아서.

    천하의 여포도 조조에게 목숨을 구걸 했는데 하물며 범부보다 약간 나은 수준인 자신은 오죽하랴.

    추태를 안 부리는 부관 놈이 이상한 것이었다.

    “보라지!”

    계속해서 추태를 부리는 상관이 한심할 법도 하건만, 그의 부관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를 안심 시켰다.

    겉모습만 보면 상관은 손경이 아니라 부관이었다.

    “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이곳 요양성은 난공불락의 성이옵니다. 설령 개 총병께서 제때 당도하지 못 한다 하신들, 지금 성에 있는 군사만 삼천이 넘사옵고, 피신한 백성이 기만에 달하니 이들로 하여금 능히 막아낼 수 있는 것이옵니다.”

    역시, 본인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란 걸 잘 알았지만 짜증이 확 치밀었다.

    “그놈의 난공불락의 성이 어찌 백여년 전에는 그리도 쉽게 점령 당했단 말이냐!”

    손경의 말처럼 요양성은 150년 전, 고려에 손쉽게 점령 당한 전적(?)이 있는 성이었다.

    “당시 점령 당한 요양성은 원나라 장수가 지휘하고 있었사옵니다. 어찌 그런 오랑캐가 고려에 함락 당한 일을 생각하시면서 두려워하시옵니까. 두려워 할 게 못 되옵니다.”

    손경은 한마디 더 하려다 말았다.

    한마디 더 보태면서 성낸다고 해서 안전이 보장 되는 것도 아니었고, 출군했다는 역적들이 회군하지도 않을 터였다.

    “제길! 보아하니 그놈의 만반의 준비만 갖추다가 요양성이 함락 될 것 같으니 어서 광녕(총병의 치소가 있던 곳)에 사람을 보내도록 하라!”

    어제도 광녕에 전령을 보내고, 그제도 보냈지만 어쩌겠는가.

    상관을 안심시킬 수 있는 수단이 그뿐인 걸.

    부관이 군례를 올리고 누각을 내려가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손경은 쯧쯧 혀를 찼다.

    “하여간 고려 놈들은 믿을 게 못 된단 말이야.”

    아닌 게 아니라, 이 요동에는 가뜩이나 없는 인구의 절반인 5할이 고려인이란 말이 있을 지경이었다.

    그만큼 조선인들이 많이 이주해 살았는데, 그 부관도 조부가 조선인이었다.

    그렇게 쯧쯧 혀를 차며, 누각 너머로 시선을 옮긴 손경이 별안간 두 눈을 부릅 떴다.

    저 멀리 먼지 바람이 일고 있었다.

    ***

    진우영의 요동군은 달아오른 기세로 단숨에 동숭보와 동창보를 격파했다.

    요양의 서남 지역에 위치한 두 보가 함락되고 요동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배후 걱정이 사라진 요동군은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그대로 요양까지 진격했다.

    그 기세가 어찌나 파죽지세와 같고 불 같았는지, 요동군의 진격로에 있지도 않은 장녕보의 백호는 굳이 격문(檄文)을 보내지도 않았는데 투항을 해올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요동군에 몸을 의탁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아쉽지만, 군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20일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군을 정비한 우영은 행군을 재개했다.

    노상에서 시간을 버린지라, 혹시라도 광녕에서 군사를 모으고 있다던 총병 개원이 놈이 요양성을 구원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하늘이 돕는 건지, 수차례 패퇴로 너무 신중을 기하고 있는 건지 총병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는 첩보였다.

    20일이나 시간을 지체 했는데도 광녕의 총병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에, 요동군은 또 다시 고무됐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총병은 요동의 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자가 요동군에 수차례 패퇴했고, 이제는 겁에 질렸는지 어쨌는지 모습을 안 비친다.

    소식이 알려지기 전까지의 요동군은 반란군이었을지 몰라도, 소식이 알려진 후로는 역성 혁명군이었다.

    그렇게 기세가 오를대로 오른 채, 요동군은 요양벌판을 가로질러 요양성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직접 본 요양성은 비록 평지에 위치해 있었지만 난공불락과 같았다.

    그 성벽의 높이만 해도 고개를 올려 들어야 할 정도였으니, 이전까지 손쉽게 수중에 넣었던 동창보나 해주, 탑산보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단 여장을 풀어서 병사들의 피로를 풀게 한 우영은, 휘하 장수들을 불러들였다.

    장수들이 하나, 둘 장막으로 모이자 우영이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록 평지에 위치한 성이오만, 틈이 없고 견고해 보이니 수비군이 천명만 되어도 최소 오천은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자태요. 이전처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성은 아닌 듯 하니 어찌하면 좋을지 기탄없이 의견들을 내어보시오.”

    “이 문렴이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사옵니까?”

    “물론.”

    “전하께서는 지금 천명만 되어도 최소 오천은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자태라고 저 성을 평가하셨사옵니다마는, 여태 난공불락이 아닌 곳이 어디 있었겠사옵니까?”

    “방법이 있는가?”

    “여태 방법이랄 게 따로 있었사옵니까? 신에게 선봉으로 삼천만 주시옵소서. 여태 한 것처럼 모조리 쳐부숴버리겠나이다.”

    도적떼 시절부터 함께한 건 물론이고,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깨복장이 친구가 바로 이 문렴이었다.

    그런 문렴은 다 좋았다. 다 좋은데, 다만 머리 쓰는 일이 부족했다.

    배운 게 없는지라 어쩔 수 없는 한계겠지만.

    “이번에는 섣불리 나설 필요는 없는 듯 하옵니다.”

    요동군의 공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무충흠이었다.

    “무 태사(太師)께서는 수가 있으시오?”

    “보소서, 적도들에게서는 싸울 의지가 아니 보입니다.”

    “그런가?”

    “어째서 싸울 의지가 없겠사옵니까? 우리 요동군이 연전연승을 거뒀기 때문이옵고, 지금이야 이 요양성 뒤에 숨어 있지만 역부족임을 알기 때문이옵니다. 무엇보다.”

    “무엇보다?”

    “장대에 장수가 없사옵니다.”

    물론 충흠의 말처럼 아예 없진 않았다. 다만 갑주의 모양으로 보건대 총책임자는 아닌 듯 싶었다.

    “지금 적장이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총병의 구원병일 것인데, 구원병은 코빼기도 안 보이니 장수 조차 낙담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사옵니까?”

    “으음. 그럴 수도 있겠구만.”

    “저런 군기로 싸운다면 얼마나 싸우겠습니까마는, 지금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요동 전체를 수중에 넣을 수 없음이옵니다.”

    “어째서 말이오?”

    “옛 병법에 이르길, 무략이 무력을 앞선다 했사옵니다. 지금까지는 무력을 앞세웠습니다만, 언제까지 무력으로 격파해나갈 수 있겠사옵니까. 간계(奸計)로서 성을 얻으소서.”

    “간계라면 어떤···?”

    “거창하게 생각할 것도 없사옵고, 그저 사자를 적장에게 보내 격문만 읊게 하시면 될 것이옵니다. 적장이 격문을 받아보고 투항한다면 상책이요, 투항하지 않더라도 내부에 분열이 생긴다면 중책이니 어찌 무력만이 답이 될 수 있겠사옵니까?”

    “음, 좋소. 격문은 무 태사가 한 번 써보시오.”

    ***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다년간의 경험에 비추어본다면, 안 될 것 같은 게 아니라 안 됐다.

    시간을 지체하는 순간 내 휴가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간다.

    어떻게 얻은 휴간데··· 날려먹을 순 없었다.

    변경행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고, 행차를 서둘렀다.

    온행 갈 때 봐서 알겠지만, 임금의 행차란 마음 내킬 때 떠날 수 있는 드라이브가 아니다.

    하다못해 어가를 호종하는 군사의 수까지 일일이 상의해서 결정한다.

    다만.

    이런 원칙 다 지키면 어느 세월에 의주 가겠나?

    대충 종결시키고 고작(?) 600명의 조촐한 수행원들을 데리고 출발했다.

    나 혼자 놀러 가려니 여울이가 눈에 밞혔지만, 여울이를 의주까지 데려 갈 순 없었고 꿩 대신 닭이라고 개똥이랑 덕산이를 데려갔다.

    한양에서 의주까지는 딱 보름이 걸렸다.

    이 의주가 시작이었다.

    내가 비록 일하기 싫어서 같잖은 핑계대고 이 의주까지 온 거지만서도, 어쨌든 사기 진작을 위한 사열을 명분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이 의주를 시작으로 변경의 최동단 조산보까지 군사들을 사열할 생각이었다.

    고작(?) 병사들 사열 한답시고 여진족과 경계한 곳들을 들락날락 거린다니, 위험천만한 생각인 건 알지만 그만큼 일하기가 싫다.

    그리고 요새는 여진족들도 요동 도적들 때문인지 잠잠하던데 설마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뭐, 어쨌든 도사리는 위험과 휴식을 교환했으니, 최대한 아깝지 않게 1분이 곧 하루 인 것처럼 놀아 제껴야 한다.

    “전하, 신 의주목사 김경의(金敬義). 강녕한 전하를 뵈오니 실로 천하의 복을 다 얻은 듯 한 기분이옵······.”

    그리고 그러려면 이 따위 인사치레는 받는 시늉만 해야 한다.

    휘휘.

    “됐고, 의주 제일의 절경이 어디요?”

    “예?”

    “절경 말입니다, 절경. 설마 이 의주에는 절경 같은 게 없습니까?”

    “아··· 중국의 사신들 사이에서는 석숭산의 기암절벽이 곧 천하를 품은 듯 하다는 말들이 나돌아서 그런지 인기가 많긴 하옵니다.”

    “앞장 서세요.”

    “하오나 사열은···?”

    “이제 도착 했는데 일단 좀 쉽시다.”

    “아! 부, 불충을 용서하소서.”

    허둥거리는 김경의의 안내를 받아 석숭산에 올랐다.

    올랐는데······.

    제길.

    아까운 시간만 버렸다.

    김경의 같은 꼰대(?) 말 듣고 석숭산 오르는 게 아니었다.

    아, 물론 기암절벽은 빼어난 경치를 자랑했다.

    근데, 그게 다였다.

    슬슬 단풍도 들 때라 고즈넉한 느낌이었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안내를 맡은 김경의가 더 좋아라 한 거 보면, 아저씨들 취향이 확실한 곳 같았다.

    나같은 젊은 갬성의 임금에겐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석숭산에 오르락 내리락 한다고 거의 반나절을 소모했다. 더 이상의 시간 소모는 있어서는 안 된다.

    하산하자마자 다음 일정을 잡았다. 어디 먼 데로 갈 수는 없어서 아쉬운대로 의주성 북쪽의 장대(지휘용 누각)로 쓰이고 있는 통군정에 오르고는 경치를 감상했다.

    개인적으로는 석숭산의 기암절벽 보다는 통군정에서 바라보는 압록강의 경치가 더 절경에 가까운 것 같았다.

    비록 급하게 휴가를 떠나오고, 급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으며, 급하게 명승지를 알아봤지만, 통군정 장대 너머로 보이는 압록강의 새파란 강물 사이로 점점이 떠있는 섬들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시상이 떠오른······.

    “전하! 전하!”

    시상 거의 다 떠올랐는데.

    “덕산이 너 방해할래? 이러면 너만 조산보까지 보내 버린다.”

    “아니, 그게 아니구요.”

    “뭔데?”

    “큰 일 났답니다.”

    “그러니까, 무슨 큰 일?”

    “요성인가? 거기가 함락 됐다는뎁쇼?”

    끔뻑끔뻑.

    “어, 어디가, 어디가 함락 돼?”

    “요성이요.”

    요성은 다름 아닌 요양성의 약칭이다.

    그런 요성이 함락 됐다는 건······.

    “아직 제대로 놀지도 못 했는데 일이라니, 젠장.”

    놀러와서 일 터졌다는 걸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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