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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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에서 온 공문에 의하면 지금 그 정세가 급박한 듯 하오니 놀라움을 금치 못 하겠사옵니다.”
대사헌 김전이 운을 뗐다.
여담인데 저런 말투도 궁중의 어투 중 하나다.
저런 식으로 운을 뗀 건, 요동의 일을 좀 논해 보자는 무언의 제스쳐다.
다른 날도 아니고, 바로 어제 삐뚤어지기로 다짐하긴 했지만 조금만 더 뒤로 미뤄야 될 것 같다.
아무리 삐뚤어지기로 마음 먹었어도, 요동의 일은 차일피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내가 그 정도로 무책임한 왕은 아니다.
“성보들이 함락 됐다죠?”
조선 조정은 명나라 조정보다 요동 도사와 문서를 더 자주 주고 받는다.
이번에는 특히나 많은 요동발 공문들이 도착했는데, 공문에 의하면 해주와 동승보, 동창보가 함락됐고 도사의 치소가 있는 요양과 인접한 장녕보는 아예 싸우지도 않고 적괴에 투항했다는 게 공문의 내용이었다.
“예. 천조(명나라 조정)에서도 아직 갈피를 잡지 못 했는지 따로 도사에게 지시한 것은 없는 듯 하온데 장녕보가 함락 된 것이 걸리옵니다.”
“장녕보가 왜요?”
“장녕보는 요양과 지척인 보이옵니다. 만약 요양성을 친다는 가정을 한다면 이 장녕보를 배후에 두고서는 요양성을 칠 수가 없는 일인 것이옵니다. 그런데 이 장녕보가 적의 수중에 넘어 갔으니 혹 역적 무리가 요양을 노리는 것은 아닐는지······.”
요동 지리에는 젬병인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의문 제기에 편전이 웅성거리는 걸 보니, 그 말대로 장녕보란 곳이 요충지긴 요충지인가 보다.
“정말로 요양을 노리는 거라면 큰 일 아닙니까? 역적들의 기세가 파죽지세 같거늘··· 혹시라도 요양이 적의 수중에 떨어진다면은······.”
명나라와 육로로 사신을 주고 받는 게 어려워질 터였다.
“이거, 원병이라도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넌씨눈 노공필의 설레발에 난 눈살을 찌푸렸다.
한 번 삐뚤어지기로 마음 먹으니 눈에 뵈는 게 없다.
“이제 막 돌아온 신무정왜군입니다. 가뜩이나 피로에 절어 있는데, 무슨 원병입니까?”
“하지만 요양이 떨어지면 요동이 역적 무리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과 진배가 없사옵니다, 전하.”
“황제께서도 별 말씀 않으셨잖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상국에 사대의 예를 갖추고 있다지만은, 따로 언질도 없는데 원병까지 보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요동의 일이 긴급하다 하지만 원병을 보내는 일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왜 해?
다만 김전은 내 생각과는 다른 듯 싶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옛말에 이르기를, 부모의 집에 급한 화가 생겼는데 그 아들이 보고만 있고 구하지 않는다면 되겠는가? 라는 말이 있사옵니다. 기회를 봐서 역적 무리를 정벌 하는 것이 이치에 옳은 줄로 사료 되옵니다.”
사람은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김전은 참 일관성이 있다.
다른 사람들 다 중국 사랑이 식었는데, 혼자만 중국 사랑이 넘친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대사헌.”
중국 사랑이 불편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지 숭재 씨가 딴지를 건다.
“요동의 정세가 바야흐로 역적에 의해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게 되었으니 통분함은 마땅한 일이겠고, 의(義)로서 비분강개해서 난을 타파 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 또한 지당한 말이나 전하의 말씀대로 아직 황제께서도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셨는데 군대를 일으키자니요. 지나친 말씀이십니다.”
“허어, 지나치다니··· 제예야 말로 말씀이 지나치시네. 요동과 우리 조선은 그 경계가 엎드리면 코 닿을 만큼 가깝네. 한데 요동에서 변란이 생긴 걸 알면서도 방관만 하고 원병을 보내지 않는다면 천조에서는 어찌 여기겠는가? 일부러 구하지 않는다고 책 잡지 않겠는가 말일세.”
“궤변입니다. 비록 후국의 절의를 지키자는 말씀과, 혹 천조에서 할 의심을 미리 떨치자는 말씀도 매우 가(可)한 일이겠으나 우리가 군을 출동 시켰는데 만약 저 역적 무리가 꾀를 내서, 후국인 우리가 틈을 타 상국을 고의로 침략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면 어쩌겠습니까?”
“천조에서 그 따위 망언을 믿을 리가 없네.”
“하면 원병을 보낸 뒤에 저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옮기면요?”
“노여움이 옮다니 무슨 말인가?”
“옛날 고려 때의 홍건적을 생각해보시란 말입니다. 기만에 달하는 저 역적 무리가 변경에 들이 닥친다면 비록 미리 조치가 돼있다 해도 틈이 생길 것이고, 그 틈으로 오랑캐들이 발호 할 수도 있는 문제지 않습니까? 의리로서 대국을 돕자는 취지는 좋지만, 대국을 위해 희생 할 순 없는 법입니다.”
두 사람의 언쟁은 곧 편전의 언쟁으로 변질 되어갔다.
김전을 위시한 소수파는 미리 원병을 보내자.
숭재 씨를 위시한 다수파는 개소리 집어치워라.
물론 나는 후자를 지지한다.
김전의 우려대로 명나라 조정에서 괜한 의심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비약이다.
또, 명나라는 우리보다 훨씬 큰 나라였다.
그런 큰 나라가 설마 역적 무리 하나 토벌 못 하겠어?
설령 도움이 필요해진다 해도 어련히 사신을 보내던가 하겠지.
다만.
‘그러면 핑곗거리가 사라지겠는데.’
말했지?
나 오늘부터 파업에 들어갈 거라고.
그리고 또 말했지?
아무리 삐뚤어지기로 마음 먹었대도, 요동의 일을 차일피일 할 순 없다고.
그런 맥락에서, 적당히 일하는 모양새도 내면서 파업도 할 수 있는 명분으로는 김전의 주장만한 게 없다.
아, 물론 원병을 보내자는 건 아니다.
그 대신.
“큼큼. 그만들 좀 하세요.”
“···”
“듣고보니 누구의 말도 틀렸다고 볼 순 없는 것 같습니다. 대사헌의 말도 일리가 있고, 제예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이를 잘 취합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한 듯 합니다. 아, 그래서 말인데 병판.”
유담년이 읍을 했다.
“하문하소서.”
“지금 변방의 사기는 어떻다고 합니까?”
너무 생뚱맞은 질문이었을까.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인 유담년이다.
“아··· 충천한 상태라고는 할 수 없사오나 다만 적을 맞아서 능히 무찌를 정도는 되오니 유사시 탈영은 염려치 않으셔도 되옵니다.”
“아니죠.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변경이란 곳은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곳 아니겠습니까. 자,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병사의 사기는 어떻게 끌어 올릴 수 있겠습니까?”
“무릇 군의 사기를 진작 시키는 방법에는 장수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것에 있사오니······.”
“장수의 사기 말고 병사의 사기를 물었습니다. 병사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법은 간단합니다.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재우면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간단한가?
근데 훈련을 잘 받고 있다는 전제 하에, 이게 사실인 걸 어쩌겠나.
“아··· 예, 물론 전하의 말씀도 일리가 있사옵······.”
“하지만.”
“···?”
“저 세가지 방법보다 병사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데에 특효한 것이 있으니 그게 뭐겠습니까.”
“어···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이 미욱하고 군략이 영글지 못 한 까닭에 거기까진 알지 못 하겠나이다.”
“사열입니다.”
“···어인 말씀이신지?”
“임금의 사열만큼 병사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데에 특효한 것이 어딨겠습니까?”
“···”
사단장 부대 방문에 병사들 사기가 탱천한단 논리와 같지만, 지금은 이런 약이라도 팔아서 밑밥 깔 때다.
“임금은 곧 만백성의 어버이니 변경의 군사라고 다르겠습니까. 특히 지금은 요동의 일로 신경이 곤두서있을 터이니, 임금이 가서 사열하고 다독인다면 어찌 은혜에 감읍하지 않아 하겠으며, 용맹을 부추기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
내가 만화나 영화속 주인공이었다면, 딱 이 타이밍에 효과음이 들어왔을 것 같다.
조용 그 자체다.
태초의 조용함이 이랬을까, 망상에 빠진 것도 잠시.
“아니 되옵니다, 전하! 전하께오서 변경에 행차하신다면··· 물론 변경의 군사들과 토병들에게 있어서는 이만한 광영이 없겠사오나 이는 전례에 없는 일이옵니다. 어느 군주가 사열을 위해 변경에 까지 행차를 한단 말이옵니까?”
대신들이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오니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이런 반대를 예견도 않고, 밑밥을 깔았다면 어불성설일 거다.
이 정도 반대는 이미 예견했다.
“특히 지금은 시급한 안건이 한 두 가지가 아니온······.”
“시급한 안건들 처리하는 일이야 뭐, 삼공들에게 맡겨도 되고요.”
“예부터 군신의 구분이 어찌 생겨났겠사옵니까? 이는 군주가 할 수 있는 일과, 신하가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기 때문이니······.”
“군주가 할 일은 세자한테 대리 맡기면 됩니다.”
“전하,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임사홍 아저씨마저도 통촉을 운운하셨지만, 통촉 못 하겠다.
이미 삐뚤어지기로 다짐한 것도 그 이유중 하나지만, 무엇보다 어제 말했다시피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내가 빈말로 스트레스 운운하고, 분노조절장애 운운했던 게 아니다.
정말로 노이로제 걸릴 것 같고, 가끔은 심장이 벌렁거릴 때도 있을 정도였다.
이걸 좀 더 방치하면 어떻게 될지 나도 장담 못 하겠다.
원래는 이런 스트레스에서 해방도 할 겸, 여울이랑 바다 갈 생각이었는데 바다 못 가게 된 이상 나 혼자 압록강 구경이라도 좀 가련다.
지옥을 가도 지금 여기보단 낫겠지.
대신들의 반대가 계속됐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불도저처럼 밀어붙였고 그 결과.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사기 진작을 위한 변경 사열이라 쓰고 휴가라 읽는 변경행이 결정됐다.
***
부산진.
“걱정이 안 되시옵니까?”
허구헛날 붙어다니다 보면 미운 정이라도 들기 마련이었다.
하루가 머다하고 상왕과 붙어다니니 이제는 융이 제법 친근해진 경덕이었다.
“걱정을 내가 왜 한단 말이냐. 난 이미 10년 동안 뼈 빠지게 일 했느니라.”
“듣자니 생각보다 요동의 정세가 어지럽다고 하던데 말이옵니다.”
융은 귀를 후벼팠다.
설령 요동이 오랑캐에게 함락 당하건.
역적 무리가 산해관을 넘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제 그런 걱정은 내 소관이 아니다.”
“하면 말이옵니다.”
“응?”
“다른 때 같으시면 요동의 역적들 토벌하겠다고 군사 일으켜도 골백번은 일으키셨을 것 같다는 말을, 저는 감히 생각조차 한 적이 없사옵고 다만 첨사께서 하시던 걸 들었사온데 의외이옵니다. 이번에는 역적 토벌 안 하시옵니까?”
“역적 토벌은 내 이미 몇 번이고 해봤으니 흥미가 없다. 하지만!”
“···?”
“아메리카에 닿는 일은 얘기가 다르지. 내 세자 시절부터 정화의 함대가 어찌 수만, 수십만리는 떨어진 목골도속(모가디슈) 까지 닿았는지 동경했는데 이제는 내 직접 수만, 수십만리 떨어진 아메리카에 닿는 것이 아니냐. 이 얼마나 역적 토벌보다 가슴 뛰는 일이란 말인가?”
경덕은 걸음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가 걸음을 멈추자, 융 역시 걸음을 멈췄다.
멈춘 융의 시선이 선창(船廠)으로 향했다. 선창에는 수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달라붙어 새로운 배가 건조되거나, 기존의 배가 개조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