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341화 (34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41화>

    ***

    「성은을 입고 과학기술사 별제에 제수 된 신은 진실로 황공하여 오직 머리만 조아리면서 주상 전하께 글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저는 변변치 못 한 위인으로서, 주변에서 감히 애송이 따위가 사체(事體)를 알지 못 하고 날뛴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별제에 제수하시고 벼슬에 나아갔어도 또렷한 업적 하나 남기지 못 하였으니 과연 하찮은 선비(竪儒)라 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만···중략. 이제 헛된 명성을 갈구하기 보다 초야로 물러가 실용한 일을 하려 하니 부디 사직을 윤허 하여주십시오.」

    휘릭-.

    사직소를 고이 접어 던졌다.

    “꼴에 머리좀 굴렸겠다?”

    털썩!

    “전하!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한없이 진지하고 간절하기 까지 한 경덕이의 모습.

    이건 내가 아는 경덕이가 아니다.

    혹시 경덕이가 수천번 사직하려 애 썼다던 황희 귀신에 빙의······.

    됐을 리가 없지.

    어쨌건 이상한 일이다.

    나는 눈을 샐쭉하게 치켜 떴다. 그러자 날 힐끗거리던 경덕이 얼른 시선을 내리 깔았다.

    “무슨 바람이라도 들었냐?”

    “무슨 바람이라고 하옵시면 소신······.”

    “그리 말하면 낯간지러워서 못 듣잖아. 우리 하던대로 하자, 하던 대로.”

    “···이 제자, 무슨 바람이 들어서가 아니오라 사직소에 적은대로 딱히 업적을 남기지도 못 했거니와, 그저 이대로 물러가서 조용히 지내고자 하옵니다.”

    “하이고, 너가 무슨 바람이 든 게 아니라서 이런 사직소를 올렸다고?”

    “예.”

    “차라리 개똥이가 황제 조카 됐다는 말을 믿지.”

    “···”

    “너 혹시 시위 하냐?”

    “시위라니···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신은 불경한 언행은 감히 내뱉지 않사옵니다.”

    “시위 맞네, 이거. 너 어제 내가 황이한테 허풍쟁이라고 한 거 들었지? 그래서 그러지?”

    짐작 가는 게 이거 밖에 없어서 확신하다시피 하고 물었는데 웬 걸?

    경덕이 놈이 마치 전장터 나가는 장수의 그것처럼 비장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옵니다. 전하의 덕택으로 출사하여 이른 나이에 부모께 효하였으니 이만한 성은이 어딨겠사옵니까? 말씀 드린대로 그저 초야로 물러나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을 만들거나,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자 할 따름이옵니다.”

    “나가서 뭐 할 건데?”

    “말씀 드렸다시피 이런저런 연구라던가···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찾아서 하고자 하옵니다.”

    “근데 말투는 언제 고칠 거냐? 평소 하던 대로 하라니까?”

    “그럴까요, 그럼?”

    “그래. 훨씬 낫잖아. 자, 그래서. 나가서 나라에 도움 되는 일 뭘 할 건데?”

    “그래서 말인데요, 스승님.”

    확실히 경덕이한테는 전하 소리 보다는 스승님 소리 듣는 게 더 마음이 편하다.

    뭐랄까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떠받드는 주변의 성화에 사라지는 내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실 같은 존재랄까?

    “편히 말해봐.”

    “저 돈 좀 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갑자기 돈? 빌려 주는 거야 문제 될 게 없다만··· 무슨 돈을 얼만큼 빌려달란 거냐?”

    잠시 멈칫하던 경덕이가 말했다.

    “뭐, 저도 장사치나 좀 해볼까 싶어서요.”

    “장사치는 뭘 팔아야 장사친데 넌 뭘 팔게?”

    “장사치란 게 꼭 거창할 거 팔아야 장사치겠습니까? 짚신을 팔아도 양심이랑 같이 팔면 다 장사치지.”

    “흠.”

    나는 경덕이를 직시했다.

    이 녀석,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밑도끝도 없이 사직소를 제출 한 것도 이상하고, 평소와 달리 공손한 언행도 이상하고······.

    그런데 이제는 장사하게 한밑천 대달라?

    아니, 진짜로 빌려주는 거야 문제 될 게 없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알다시피 나 부자다.

    왕이 되고 나서 부자 된 게 아니라, 부자 였다가 왕이 된 거다. 가뜩이나 부자가 왕이 되니 돈 벌기가 또 좀 쉽겠어?

    가끔 정치적으로다가 삼성 후원도 해주고··· 뭐, 대내전과의 거래도 1:1로 주선도 좀 해주고, 명나라와의 거래도 주선 해주고, 등등.

    아, 오해는 마라.

    절대 비리는 아니다.

    명이나 대내전과 거래 주선 한 건, 두 집단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납품할 정도의 거상이 조선에서는 없어서 그렇다.

    비누로 시작한 삼성이었지만 지금은 취급하는 물품이 어마무시하게 많다.

    각종 생필품부터 시작해서, 농사기구인 소풍대풍까지 취급하고 심지어는 군영에서 방출한 낡은 군선들 따위를 내 도움으로 사들이고 약간 보수해서 다시 되팔기도 하니까.

    좌우지간, 이제는 이 나라의 전반적인 산업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는 삼성의 회장인 내가 그깟 돈 빌려주는 게 문제되겠나?

    빌려주는 게 아니라 줄 수도 있다.

    문제는······.

    “왜 눈을 피해?”

    이 녀석, 이상하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뭔가’가 대달라는 장사 밑천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생각해 낼 수 있는 추론인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피, 피하다뇨. 피곤해서 눈이 감겼을 뿐입니다.”

    “진짜로 장사하려는 거 맞어?”

    “예, 그럼요.”

    “얼마나 필요한대?”

    “어··· 좀 많이 필요한데······.”

    “그래서 얼마나?”

    녀석이 셈을 하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필요하긴 한 모양이었다.

    “어디보자··· 2만석에, 3만에, 다시 3만에··· 아! 10만석 정도는 필요하겠는데요?”

    “10만석이나? 그건 장사 밑천 정도가 아닌데?”

    “구상한 사업이 돈이 좀 많이 들긴 합니다. 근데 어쩌겠어요. 제 주변에 돈 많은 사람이라곤 스승님 밖에 없는데.”

    나는 굳이 너가 구상한 사업이 뭐냐고 물어보진 않았다.

    돈이 겁나게 많아서도 맞긴 한데, 그것보다도 10만석이나 되는 거금을 경덕이가 허튼 데 쓸 것 같진 않아서였다. 그리고 좀 그렇잖아.

    뭔가, 꼬치꼬치 캐물으면 10만석을 빌미로 갑질 하는 것 같달까?

    “10만석이면 되냐?”

    “더 들 것 같으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염치불구하고 부탁드린 김에 군선도 좀 불하 받을 수 있을까요?”

    낡은 군선도 가끔 민간에 불하하곤 하니, 어려운 일은 아니다.

    “뭐, 그러던가.”

    “감사합니다, 스승님. 역시 스승님 밖에 없습니다. 스승님은 어쩜 그렇게 사람 됨이 한결같이 우수하시고, 또 뭐야··· 군자 같으시고 그러신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난 사람은 다릅니다.”

    “아부도 그만하면 간신 소리 듣겠다.”

    “헤헤.”

    “아! 그러고 보니까, 조건이 있다.”

    “조건이요?”

    “너가 무슨 일 하려는지는 내가 굳이 안 물어볼 건데. 우리 확실히 하자. 제발 황이한테 헛바람 넣지 마라. 어? 나도 상왕으로 물러 나봐야지 않겠냐?”

    “크흠. 거, 거, 걱정마십시오.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그럼 다행이다.

    나도 진짜 상왕 되고 싶다.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

    “미쳤군, 미쳤어.”

    숭덕이 혀를 내둘렀다.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경덕은 대꾸 조차 않고, 사업 구상(?)에 여념이 없었다.

    “아니, 형님!”

    “아, 왜!”

    “미쳤냐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살아갈 수 없는 게 세상이거늘······.”

    “고승 대덕도 그따위 선문답은 안 하겠네. 아니, 형님 나랏밥 먹게 됐다고 송도에서 부모님이 소 잡은 게 언제인 줄은 아쇼?”

    “알지.”

    “그걸 아는 사람이 다 때려치고 그, 뭐야··· 뭐라 했지?”

    “아메리카.”

    “그 아메리칸지 뭔지 탐사를 하겠다는 거요.”

    역시나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숭덕이었다.

    “너는 아메리카의 존재를 스승님께 들었던 그 날 가슴 뛴, 내 심정을 모른다.”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이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동쪽으로든 서쪽으로든 계속 가면 언젠가는 나온다는 아메리카.

    이건 천원지방의 상식을 깨는 동시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중화의 문물이 닿지 않아도 사람이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꺼져가던 그 열정에 저하께서 기름을 부으셨다.”

    -어찌 아메리카가 있다고 확신을 하는 건지 궁금하오.

    있다고 굳게 믿었지만 이를 증명할 길은 없었다.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본 것도 아니고, 거기까지 닿았다는 사람도 없는데.

    결국 탐사 밖엔 답이 없었다.

    증명해보이겠다, 직접 몸으로 부딪혀서라도.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비켜 이 자식아.”

    “아니, 대체 거기까진 어떻게 가는데? 뭐, 황천길 가서 염라대왕한테 물어볼 것도 아니고.”

    “뱁새가 봉황의 깊은 뜻을 어찌 알리오······.”

    “아니, 그래서 어떻게 갈 거냐니까?”

    경덕은 벽 한켠에 걸린 천하도를 가리켰다.

    “조급히 하면 될 것도 안 될 테지만, 느긋하게 하면 어떤 일이든 오케이다. 저 섬.”

    경덕이 가리킨 건 천하도의 ‘사할린’이라고 표기 된 곳이었다.

    “저 섬에 전초기지를 만든다.”

    “만들고?”

    경덕의 시선이 다시 그 오른쪽으로 옮겨갔다.

    이번에는 ‘캄차카 반도’라고 표기 된 곳이었다.

    “사할린과의 왕래가 용이해지면, 전초기지를 다시 캄차카로 옮기는 거지.”

    “연안을 따라서 이동한다?”

    “바로 그거지.”

    “근데 그 사할린이란 섬하고, 캄차카 반도란 곳이 없으면?”

    순순히 대꾸하던 경덕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니, 근데 이놈이 자꾸 뱁새가 황새의 깊은 뜻을 알려고만 하네? 바쁘니까 그만하고 가, 인마!”

    숭덕을 내쫓은 경덕은 그날부터, 사업이라 쓰고 탐사대라 읽는 일을 진행시켰다.

    전례를 삼을 수 있는 일이 없다보니, 시행착오도 겪을 수 밖에 없었지만 금상의 수제자란 점이 때로는 이점이 되기도 했다.

    ***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는 사병을 키운 꼴이옵니다. 어찌 서경덕과 전하께서 비록 사제의 정이 있다 하나, 사병은 국초부터 반대한 일이니 어찌 용납 할 수 있는 일이겠사옵니까?”

    “그렇사옵니다. 신이 조종조의 일을 살펴보건대, 국초에 사병을 혁파하고 도총부에 병사를 분할하여 소속시켰으니 이는 어인 영문이겠사옵니까? 혹시라도 역적이 창궐하지 않도록 조처한 일이었고, 병권이 특정인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배려한 일이었사옵니다.”

    “이뿐이겠사옵니까? 세조께서는 이조차 걱정되시어 순장(도성 경계를 맡아 지휘하던 군관)을 미리 정하지 않고, 때에 맞춰 낙점하였으니 이는 만에 하나의 일도 종사에 위협이 된다면 간과 할 수 없음이었기 때문이었사옵니다. 하온데 지금 사직소를 올리고 물러난 서경덕을 보소서. 옛 대마도 왜인과 상종하는 일이 잦다 하는데, 상종이 무슨 문제겠사옵니까? 그들에게 삯을 주어 부린다 하니 문제인 것이옵니다. 이는 옛 고려때 세족들이 사병을 부린 것과 똑같은 행태이니 무릇 병권을 아랫사람이 갖게 된다면 국가의 대세를 임금이 갖지 못 하게 되옵니다. 경덕이 대마도 왜인과 상종한 일이 작은 일이라 볼 수 있으나, 하필 삯을 주어 부린다는 것은 그 정황을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사오니 추국(推鞫)하소서.”

    장황한 말들.

    심지어 김전의 입에서는 추국이란 말까지 나왔다.

    단순 정황만 가지고 추국이 이뤄지지 않고, 특정 혐의가 씌워졌을 때 비로소 이뤄지는 게 추국이니 만큼, 추국은 20세기로 치면 남산에 끌고가서 코렁탕 시키란 말에 가까웠다.

    근데 소종도 사람들 고용좀 했다고 코렁탕 시키란 건 에바 참치지.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경덕인데.

    ‘이놈은 하필 고용을 해도 왜인들을 고용해서 문제를 일으켜.’

    사업 할 거라며 꿔 간 돈으로 해적질 할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사실 경덕이가 신체 건장한 사람들이나, 노비들을 사들였다면 이런 말도 안 나왔을 거다.

    그 극악무도한 대마도 왜인을 고용해서 문제가 된 거지.

    다만 김전을 필두로 한 대신들의 말처럼 왜인 조금 고용한 수준 가지고 역모를 걱정하는 건, 엄청난 비약이다.

    일단 소종도 왜인들은 활동 할 수 있는 영역이 동래~부산진 일대다.

    비록 이제는 법적인 조선인이 됐다지만 왜구 였던 과거를 세탁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들이 일으킬 소란을 예측해, 그 이상 넘어가려면 관의 허락을 득하게 했다.

    그러니 만큼, 경덕이가 왜인들 고용한다고 해도 김전이 걱정한 역모는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추국까지 언급하면서 노발대발한 건, 경덕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일 거다.

    성균관 출신이면서도 경덕이 같은 비주류가 조정엔 또 없거든.

    그러니 아직 씹선비 태를 못 벗은 분들께는 경덕이 만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녀석도 없는 셈이다.

    “추국은 무슨 추국입니까. 지나친 비약은 삼가시고, 내일 신무정왜군 귀국하는 날이니까. 그거나 신경 쓰세요.”

    라는 말을 남기고 편전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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