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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40화 (340/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40화>

    ***

    “조종조(祖宗朝)의 개선에 대한 예는 영의정이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올려 진하하는 것이 바로 조종조의 개선에 대한 예이옵니다만, 이미 수차례 보훈청에 나아가 진하하는 예로 바뀌었으니 이번에도 보훈청에서 진하함이 어떻겠사옵니까?”

    형님이 귀국하고 있다는 소식에 우리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사실 형님과 원정군의 귀국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개선식이었다.

    이번에는 특히 더 중요했다.

    신무정왜군 도원수 이백돌의 전공은 거짓말 2%정도만 보태서 말하자면 가히 태조 이성계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왜구의 근거지를 박살내버리고 돌아왔으니, 왜구에 박살나고 있던 고려를 구한 이성계와 다를 게 뭐겠나.

    뭐, 살짝은 다르긴 하지만··· 크흠.

    어쨌거나 저쨌거나.

    형님은 이번에 제주를 침략한 왜구들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지바 다네시게를 생포하셨다.

    다네시게만 잡은 게 아니라 쇼니의 수족들 다수를 함께 포로로 잡았다.

    이번 개선식이 특히 중요하다는 게 바로 이점 때문이다.

    놈들을 효수시키면 선전이 가능해지거든.

    이제 옛날처럼 무기력하게 당하지만도 않는다.

    우리의 변경을 조금만 어지럽혀도 그 근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

    같은 선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조판서 김봉의 말이 타당해보인다.

    “이견이 없으면 예판의 말처럼 전례대로 행하는 게 좋겠습니다.”

    혹시나 하고 좌중을 돌아봤는데 딱히 이견은 없는 눈치다.

    확실히 이제는 보훈청에서 모든 의식을 행하는 것 같다.

    출정식도 보훈청에서.

    개선식도 보훈청에서.

    보훈청이란 곳이 나름 의미도 있고, 뜻도 있는 곳이니 만큼 이렇게 자리 잡는 게 나쁜 것만도 아닌 것 같긴 하다.

    아무튼, 개선식에 대한 부분은 이견 없이 진행이 됐다.

    이후에도 다른 안건들이 올라왔지만 큰 문제가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그나마 굵직한 일이라고 해봐야, 요새 목포를 찾는 무역상들이 많아졌는데 그중 하나가 술 먹고 깽판 부리다 관에 잡혀간 일과, 함흥을 중심으로 생겨난 신흥 상인 집단들이 나라에서 낡은 군선을 좀 팔아달라 집단으로 상언(上言) 올린 정도?

    그리고는 뭐가 없다.

    나라가 잘 돌아간다는 뜻인 거지.

    회의가 파하고, 편전을 빠져 나갔다.

    강녕전으로 갈까 당구각으로 갈까 하다가······.

    “어디로 뫼시오리까?”

    갈팡질팡 하다, 끝내 발길을 돌린 내 모습에 상선 할아버지가 묻는다.

    “동궁으로 가지요.”

    “예.”

    뒤따르는 남녀궁인들과 함께 동궁에 행차했다.

    동궁 내관들이 임금의 행차를 알아보고 알은 체를 해왔다.

    “주상 전하 납······.”

    “쉿.”

    “···”

    “잠깐 세자를 보러 온 건데 공부하는 사람을 방해하면 쓰겠나. 근데 세자는 언제부터 공부하고 있었나?”

    어리둥절해 하던 동궁 내관1이 말했다.

    “서연을 마친 연후 줄곧 공부하고 계신 줄로 아옵니다.”

    “밖에는 한 발자국도 안 나오고?”

    “예.”

    자연히 미소가 그려진다.

    이제 고작 열 네 살에인 세자는 참 공부 벌레다.

    말이 열 네 살이지, 만 나이로 따지면 고작 열 세 살에 불과하다.

    기껏 초등학교 6학년~중학교1학년의 나이인데 자율적으로 공부를 하는 셈이다.

    물론 아주 바람직한 태도다.

    바람직한 태도로 공부하는데 괜히 알짱거리면 방대 될 테니 돌아갈까 싶었지만, 문득 무슨 공부를 저리 오랫동안 하나 궁금해졌다.

    자선당 앞까지 왔다.

    모르다시피 자선당은 세자가 강의받고 회강(會講)도 하는, 일종의 세자 전용 교실이었다.

    그 자선당의 섬돌에 신발이 네 켤레나 놓여 있었다.

    하나는 세자의 것일 테고, 나머지 셋은 서연관들의 것일 터였다.

    서연이 끝났는데도 이리 늦은 시간까지 스승들을 뫼시고 공부 하는 세자를 보니 아주 흐뭇하다.

    황이는 필시 성군이 될······.

    “···그 나라의 국명이 아메리카인데 이 아메리카에 대한 유래는 신도 알 길이 없사오나 다만 그 땅이 남북으로는 수천, 수만리에 걸쳐 있고 동서로도 수천, 수만리에 걸쳐 있으니 땅은 비옥하고 기후는 순해서 사람이 살기도 아주 좋다고 합니다. 아! 또 이 나라에는······.”

    이상하다.

    내 귀가 잘 못 된 게 아니면 왜 경덕이 목소리가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경덕이 목소리가 들리는 건 들리는 건데··· 황이 표현을 빌려 왜, ‘천하의 재미난 이야기’를 경덕이가 하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성큼성큼 마루를 올라 방문을 벌컥 열었다.

    대뜸 방안의 문이 벌컥 열려서일까?

    황이를 필두로 한 방안의 인물들이 불륜이라도 저지르다 걸린 상간남녀들처럼 화들짝 놀란다.

    ***

    상간남녀(?) 경덕이와 세자시강원 필선(弼善) 김안국, 좌빈객(左賓客) 정붕이 물러가고, 나는 황이와 숙부 대 조카로 면담(?)을 했다.

    “어떻게 된 것이냐?”

    사건의 전말은 간단했다.

    이야기꾼 경덕이를 불러다가 ‘천하의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서연관 김안국과 정붕이 찾아왔고 어쩌다 같이 듣게 됐다.

    이게 사건의 전말이었고, 황이는 이 전말을 아주 담백하게 털어놨다.

    그리고 담백한 게 문제였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야단을 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지만, 그래··· 황이도 이제 질풍노도의 시기다.

    한참 놀고 싶고, 한참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란 말이지.

    잠깐 엇나간 걸 갖다가 야단치면 더 앗나갈 뿐이다.

    잘 타일러야 한다. 잘 타일러서 내 후계를 잇게 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해방 될 수 있다.

    “황아.”

    나는 왕이고 황이는 세자라서 갑을 관계를 따지자면 당연히 내가 갑이지만, 세상만사 평생 갑이 어딨고 평생 을이 어딨겠나?

    지금의 을은 당연히 나다.

    나는 최대한 황이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게끔 녀석을 불렀다.

    “죄송해요, 숙부 전하.”

    말했다시피 난 을이다.

    사죄하는 황이에게 나는 손사래까지 쳤다.

    “아니다, 네가 뭐가 죄송해? 잘못한 게 있으면 경덕이 놈이 잘못했지. 우리 황이 같은 어? 저기, 뭐야.”

    범생이란 말은 황이의 심기를 언짢게 할 수도 있었다.

    적절한 순화가 필요했다.

    “아! 한 눈 안 파는 정직한 사람을 꼬드겼으니, 서 별제가 잘 못 했지 네가 무슨 잘 못을 했겠느냐. 넌 절대로다가 잘 못 한 게 없다, 황아.”

    “아닙니다. 제가 서 별제를 불러서 ‘천하의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는 걸요.”

    “아이고, 우리 황이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의도 바를까. 역시 황이는 왕재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

    황이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저기다, 바로 저곳이 빈틈이다.

    자고로 빈틈이란 마구 공략해야 한다. 계속 공략하다 보면 터지기 마련이거든.

    “생각해보면 황이만한 조카가 또 없지. 잘 생겼지, 공부 잘 하지··· 근데 딱 한 가지 흠이 있어요.”

    “말씀해주시면 소질(小姪), 고치겠사옵니다.”

    “아, 고칠 만한 문제도 아니다. 순진해서 그런 거니까. 자고로 사기를 당한 사람과 친 사람이 있으면 친 사람이 나쁜 놈이지, 당한 사람이 무슨 죄겠느냐?”

    “순진··· 이요?”

    “그래, 순진. 오죽 순진하면 서 별제의 허풍을 진실로 믿었겠느냐 이 말이다. 황이 너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 별제 저놈이 아주 악질이다. 악질 중의 상악질이 따로 없지. 허풍을 아주 그냥 입에 달고 살아.”

    황이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 별제가요? 그런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예끼,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거다. 서 별제 저놈이 허우대는 멀쩡해도 허풍쟁이가 따로 없다니까? 그래, 허풍쟁이 서 별제한테 어디까지 들은 것이냐?”

    “동쪽으로 쭉 가다보면 대륙이 하나 있고, 그 대륙에도 수많은 오랑캐들이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이 시대 관점으로 오랑캐는 맞다.

    여긴 중화의 문물을 모르면 오랑캐니까.

    좌우지간.

    “그거 허풍이다, 허풍.”

    “하지만 옛날에 숙부 전하께서는 천하에는 참으로 많은 나라들이 있다 하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어··· 맞다. 천하에는 참으로 많은 나라들이 있지. 하지만 동쪽에는 없다. 서역에 많다, 서역에.”

    “음··· 알겠사옵니다.”

    “그래, 황아. 서 별제 같은 허풍쟁이 말 듣지 말거라. 공부만 열심히 하거라.”

    “네.”

    휴, 다행이다.

    ***

    진성이 돌아간 후, 자선당.

    황은 사색에 잠겼다. 한참 사색에 잠겨 있던 황이 누군가를 불렀다.

    그를 따르는 동궁 내관, 상호(尙弧) 김이었다.

    “김 상호(尙弧).”

    “찾아 계시옵니까, 저하.”

    “자네도 정말 서 별제의 말이 허풍 같다고 보는가?”

    “···전하의 말에 내관이 어찌 토를 달겠나이까?”

    “흠. 서 별제는?”

    “아직 좌행랑에 숨어 있사옵니다.”

    황이 반색했다.

    “얼른 불러오게.”

    “예.”

    잠시 후.

    숨어 있던 경덕이 들었다.

    “전하는 가셨습니까?”

    “가셨소.”

    “하여간 스승님도 참··· 시기적절 하시다니까.”

    “한데 서 별제.”

    궁시렁거리던 경덕이 고개를 들었다.

    “숙부 전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시더이다.”

    “어떤 이상한 말을 하셨길래··· 혹시 저에 대한 악담?”

    허풍쟁이란 말도 악담은 악담이었다.

    끄덕.

    “서 별제의 말이 죄 허풍이니 믿지 말라셨소. 정말이오? 정말 그 아메리카라는 곳은 없는 곳이오?”

    “전하께서 그러셨습니까?”

    “그러셨소. 전부 허풍이니 믿지 말라고······.”

    “전하께서 거짓을 말씀하신 듯 합니다.”

    “하지만 굳이 전하께서 왜?”

    “전하께서 저하가 공부에 소홀할까봐 거짓을 이르신 듯 합니다.”

    “아······.”

    “그런 의미에서 확실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동쪽에는 아메리카가 있습니다. 무조건 있습니다.

    단호히 말하는 경덕이었다.

    그에 굳어있던 황의 안색이 조금은 풀어졌다.

    “아, 다행이오. 한데 궁금한 게 있소.”

    “하문하십시오.”

    “서 별제는 어찌 그리 확신을 하시오?”

    “뭘 말씀이십니까?”

    “숙부 전하야 그렇다고 치지만··· 서 별제는 그 아메리카라는 곳을 아니 가보지 않으셨소? 그런데 어찌 아메리카가 있다고 확신을 하는 건지 궁금하오.”

    “그야 전하께서······.”

    있다고 말씀 하셨으니 확신을 하지요.

    라고, 말하려던 경덕은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전하께서 있다고는 하셨지만 직접 눈으로 보지 못 했다.

    그저, 전하의 말이 믿음의 전부였다.

    물론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아는 건 아니라지만, 지금 시점에선 뭔가 말문이 막혔다.

    말로 형용 할 수 없는,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가 뜻밖의 질문을 받았을 때 마주하는 그런 궁색함 같았다.

    경덕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 했다.

    한참 동안이나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황이 그를 불렀다.

    “서 별제? 서 별제?”

    “아, 예.”

    “괜찮으시오?”

    “저하.”

    “음?”

    “저하께서 제게 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갑자기 말이오?”

    “본시 깨달음이란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법이지요. 맞습니다. 저하의 말씀처럼 신은 아메리카를 눈으로 본 적도 없거니와, 직접 가본 적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확신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진지해진 경덕에 황이가 당혹해 할 즈음.

    벌떡!

    경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저하.”

    마음에서 우러나는 90도 인사를 올린 경덕이 자선당을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과학기술사였다.

    잠시 후, 퇴청한 그가 과학기술사를 찾자 과학기술사에 속한 아전들이 영문을 물었다.

    “김 서리. 연필하고 종이좀 갖다 주시게.”

    장난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진지한 그 모습에 아전이 금방 종이와 연필을 갖다줬다.

    경덕은 종이의 여백에 글을 써내려갔다.

    사직소(辭職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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