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38화>
***
“가버렸군.”
선단은 거친 물살을 가르며 망망대해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융은 선단이 마침내 수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추자 입맛을 다셨다.
“아쉬우시옵니까?”
그의 곁으로 장임이 다가왔다.
“아쉽지, 정인을 떠나 보내면 이와 같을까?”
누가 듣는다면 오해할 소지가 다분한 표현이었다.
장임은 황망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그 말고 엿듣는 귀는 없었다.
“전하. 듣기 망측하옵니다. 말씀을 삼가소서.”
“거, 부원수도 참···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걸 또 정색을 하고 그러나. 사람 무안하게. 내 아무리 광질(狂疾)이 중증이라 한들 비역질까지 하진 않네.”
“···송구하옵니다.”
“송구할 짓은 하지 말고.”
“송구하··· 크흠. 전하, 채비는 언제부터 하면 되겠사옵니까?”
“채비? 무슨 채비?”
너무도 맑게 되물어서, 장임은 본인이 질문을 잘 못 한 줄로만 알았다.
“천병도 귀국하였으니 저희도 이제 귀국을 해야지 않겠사옵니까?”
이 박다에 뼈묻을 것도 아니니 귀국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당연한 일도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는 일이 될 수도 있는 법이란 사실을 장임은 미처 몰랐다.
“지금 돌아가기는 좀 아쉽지 않을까 싶은데······.”
“하오나 전하, 지금······.”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이제 귀국하면 언제나 올 수 있겠는가?”
아마 못 올 것이었다.
근데 생각해보면 못 오는 게 당연했다.
비록 상왕으로 물러났다지만, 임금 된 몸으로 외국을 제집처럼 드나 든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하지만 말했다시피 당연한 일도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될 수 있는 법.
“설마 임금 된 자가 저리 나대서는 종사가 위태롭다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겠지?”
“신이 어찌 참람하게 그런 불측한 생각을 했겠사옵니까? 다만 금상 전하께서도 서신을 자주 보내오시는 걸 보면, 귀국을 기다리시는 듯 하여 간언(諫言) 했을 따름이나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래도 아쉽지 않은가 말이다. 부원수.”
“하문하소서.”
“그대의 나이가 올해로 몇 인가?”
제주목사 시절까지만 해도 상왕이 기행을 자주 벌인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리고 막상 부원수로 종군하며 상왕을 보필하는 입장이 되니 그 소문이 약과임을 알게 되었다.
상왕의 기행은 가히 종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종잡을 수 없는 기행에는 동문서답도 포함되었다. 상왕은 뜬금없이 질문하고, 뜬금없는 대답을 내놓을 때가 많았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이제는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장임이었다.
그는 최대한 침착히 답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불혹을 넘긴지 두 해가 되었사옵니다.”
“마흔 둘.”
“예.”
고개를 조아리자, 상왕이 갑자기 어깨동무를 해왔다.
깜짝 놀란 장임이었다. 부복하려하자, 상왕은 부복도 못 하게 막더니 멀리 해안가 너머를 가리켰다.
“그대는 마흔 두 해를 살아오면서 이런 절경을 본 적이 있는가?”
“신이 미욱하여 어지를 미처 헤아리지 못 하였나이다. 어인 말씀이시온지 쉽게······.”
“일평생 이런 절경을 눈에 담은 적이 얼마나 되는가 물었네.”
절경이란 말에 장임은 새삼스레 하카타만을 눈에 담았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바다는 파르스름한 옥색이었고, 물은 굉장히 맑았다. 해안가 너머, 한가운데에는 현지인들이 노코노시마라 부르는 섬이 그림처럼 떠있었다.
엎친 데 덮친격(?)으로 때마침 수평선 너머로는 놀까지 지고 있었다.
가히 천상의 절경이란 표현이 부족할 만큼의 경치였다.
그나마 제주에 비슷한 곳이 몇 곳 있었지만, 사실 목사 시절에는 이래저래 일만 하느라 절경이라 이름난 곳에는 가보질 못 했었다.
그런고로 답은 정해졌다.
“···없사옵니다.”
“근데 지금 가면 되겠냐 이 말일세. 조금만 더 놀다 간다고 해서 뭐, 누가 질책이라도 한다던가? 게다가 옛시에 말하기를 ‘군자는 절경을 보며 공부한다’ 하였네.”
묘하게 설득 당하는 기분을 느끼던 장임은 고개를 휘휘 털었다.
설득 당하면 안 된다.
“하오나 포로들도 있사옵니다.”
정덕제는 포로들을 모조리 조선에 하사(?)하고 갔다.
하사 받은 포로들은 모두 1,948명.
적은 수는 아니었다.
이들의 처분 문제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2천에 육박하는 포로를 관리하기란 사실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포로들은 흥방(오키후사)이 사간다고 했네.”
“신분이 미천한 포로들은 어떻게 팔아넘겨서 해결한다 하더라도, 자정(스케사다)과 윤명(다네아키), 윤번(다네시게) 같은 왜장들은 하루라도 빨리 본국에 보내야지 않겠사옵니까? 특히 윤번은 윤상(다네히사)의 이복형으로, 그를 사주해 제주를 침략케 한 원흉이기도 하옵니다.”
“왜장들만 골라서 호송시키면 될 일이네.”
장임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오면 언제쯤 귀국하실 생각이시온지······.”
긁적긁적.
“수를 다 채우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채우면 그때 귀국 할 걸세. 그러니 귀 아프게 잔소리 그만하시게.”
잦은 기행과 함께 잦은 동문서답을 내놓는 상왕에 적응이 될대로 된 장임이었지만, 그런 그도 방금의 동문서답은 이해하질 못 했다.
“어떤 수를 말씀하시옵니까?”
“그런 게 있네.”
***
하카타만 서북쪽에 위치한 아카촌(赤村).
“얼른 안 움직여?”
촌장 사부로(三郎)가 도끼눈을 치켜 든 채 호통치자, 잔뜩 주눅이 든 순남은 맨발로 방을 나섰다.
방을 나오자 마당에는 그와 같이 종 살이 중인 조선인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이봐, 순남이. 이게 무슨 일이대?”
아랫방 쓰는 강삼이었다.
똑같이 고성군에서 농사 짓다 끌려온 팔자라 특히 순남과 잘 어울리는 이였다.
다만 영문 모른 채 끌려나온 건 순남 역시 같았다.
“자네도 모르는데 내가 알 턱이 있나. 나도 모르지.”
순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강삼의 시선이 다른 데로 옮겨갔다.
“석춘 할아범. 할아범도 모르시오?”
강삼과 순남은 18년 전, 고성을 노략질한 왜구들에게 끌려와서 이 어촌 마을에까지 팔려오게 됐다.
둘은 그나마 언제 끌려왔는지 기억이라도 하지만, 석춘은 달랐다.
말에 따르면, 12년째 까지는 셌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는 아예 세지도 않아서 언제 끌려 왔는지 조차 까먹었다고 한다.
“나도 모르겠구만. 한데 이츠키(一樹)가 안 보이는구만?”
종 살이는 서러웠다.
아니, 서러운 정도가 아니었다. 가축과 가까운 대접을 받았다.
그나마 조선인들을 사람 대우 해주는 이가 있다면, 촌장의 아들인 이츠키였다.
이츠키 말고는 모두가 그들을 가축처럼 대했고, 부렸다.
특히나 석춘은 이츠키에게 목숨을 구함 받은 적이 있었다.
매질을 당해 죽을 뻔 한 걸, 이츠키가 살려 낸 것이다. 때문에 이츠키 없이 소집 되면 불안해하는 석춘이었다.
“순남이. 정말 뭔 일이라도 난 거 아니겠는가?”
“일은 무슨······.”
“하, 이 왜놈의 새끼들 가타부타 말이라도 하고 좀 끌고 오던가··· 사람 불안해 죽겠네.”
강삼이 불안에 떨면서 중얼거리는 사이, 마을의 조선인들이 모두 소집됐다.
총 일곱이었다.
촌장이 자신들을 데리고 뒷산을 오르자, 조선인들 사이에 불안감이 증폭됐다.
“이것들이 또 우리 쳐죽이려는 거 아녀?”
강삼이 말했다.
원래 아카촌에 일곱의 조선인이 종살이를 했던 건 아니었다. 원래는 열 세명이 있었다.
이중 둘은 배 타고 나가서 못 돌아왔고, 나머지 넷은 마을에 뭔 일만 일어나면 죽여대서 지금은 일곱이 다였다.
“하지만 올해는 아무 일도 없었잖는가? 배가 뒤 집어지지도 않았고··· 뭐, 풍랑이 거세지도 않았고, 또 뭐야. 흉어(凶漁)도 아니었잖나.”
조선인이 죽어 나갔을 때는 마을에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였다.
그런데 올해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평탄했다.
“근데 왜 뒷산으로 끌고 가? 도망쳐야 되는 거 아니겠지?”
“도망은 무슨··· 도망치다가 잡혀서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고. 도망칠 데도 없잖은가?”
“아니, 그건 그런데··· 이것들 기세가 심상찮아서 말이지.”
“괜히 입 놀렸다가 매 맞지 말고 가기나 하게.”
조선인들이 불안에 떨며 사부로와 마을 주민들을 뒤따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움막 하나가 나타났다.
사부로는 조선인들을 움막에 밀어넣고 말했다.
“너희 모두 죽기 싫거들랑 꼼짝말고 예 있거라. 알겠느냐?”
조선인들이 주눅 든 채 고개를 끄덕이자, 사부로가 마을 남정들을 대표하는 시치(七)에게 말했다.
“시치 자네는 이놈들 혹시라도 도망 못 치게 감시 잘 하고.”
“알겠습니다, 촌장 어른.”
“절대 도망가면 안 돼, 절대.”
“무슨 일인데 그렇게까지 신신당부를 하십니까?”
시치의 물음에 우물거리던 사부로가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할 때였다.
“촌장 어른! 촌장 어른!”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무슨 일인가?”
“왔습니다! 얼른 내려가보셔요.”
“와, 왔어? 알겠네. 시치. 내가 했던 말 잊지말게. 이것들 절대로 도망치게 놔두면 안 돼. 알았나?”
“아, 예.”
마지막까지 신신당부를 한 사부로가 마을로 내려갔다.
***
“대대장 나리. 저기 저 왜녀좀 보십쇼. 고년 참, 젖이 봉긋하게 솟은 것이 참젖도 저런 참젖이 없지 않습니까?”
전(前) 개똥, 현(現) 주수가 신무정왜군에 배속되면서 보임 된 직책은 대대장이었다.
그는 1연대 1대대를 이끌고 있었다.
따악!
주수가 전리품으로 획득한 군배(지휘용 부채)로 음란한 소리나 늘어놓는 수하의 머리를 내리쳤다.
“억쇠 자넨 다 좋은데, 그놈의 아랫도리 간수가 문제겠다. 자고로 남자는 3가지 끝을 조심해야 하는데.”
“끝이요?”
“이놈의 손끝. 이 손끝으로 여인네 몸을 희롱하다가, 지아비한테 걸리면 제명에 못 살지.”
“예, 손끝. 그리고요?”
“이 혀 끝. 이 말이란 게 참 무섭다니까.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거든. 그렇게 음란한 소릴 지껄여대다가 저 여인 오라비나 아비가 들으면 어떻게 되겠나? 제 명에 못 살 걸?”
“그럼 마지막은 뭡니까요?”
“1끗.”
“1끗요?”
“이 부채도 내가 1끗 패로 딴 거잖아. 남자는 자고로 1끗을 조심해야 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막판 뒤집기가 가능하거든. 아, 억쇠 자네 섯다 모르지? 섯다가 뭐냐면 말이지······.”
이야기가 삼천포로 새던 그때였다.
“대대장 나리. 도착했습니다.”
누군가 도착을 알렸다.
“저긴가?”
“예.”
“여기가 마지막이지?”
“그렇습니다.”
말고삐를 잡아 챈 주수는 몸이 찌부등한 지 기지개를 키곤 말에서 내렸다.
“자, 그럼 얼른 한바퀴 둘러보고 돌아가볼까.”
“여긴 없을 것 같지 않습니까? 딱 봐도 가난해보이는데······.”
“억쇠 자네 내가 아까 혀 끝 조심하라고 조언 했잖아? 안 나오면 오히려 다행이지.”
“다행은요, 괜히 헛심만 쓴 거지 않습니까요?”
“왜놈들 밑에서 종살이 하는 조선인 없으면 그게 다행이지, 무슨 헛심만 쓴 건가?”
“크흠. 아, 그나저나 여긴 촌장 놈이 빠릿빠릿하질 못 하나 봅니다. 아직도 마중을 안 나오고 말이야. 우리 대대장 나리가 어떤 분인줄 알고! 우리 대대장 나리로 말씀 드릴 것 같으면 무려 황제폐하께 이름을 하사 받으시고, 에 또··· 그 뭐냐. 아! 대단한 사랑꾼이시거늘! 안 그렇습니까요? 헤헤.”
“대, 대단한 사랑꾼은 무슨.”
“정인 때문에 고뿔 걸리도록 검 휘둘렀다는 소문이 군영에 파다합니다요.”
“마을 입구가 어딘가, 저긴가? 얼른 가지.”
얼굴이 벌게진 채로 휘적휘적 걷는 그때였다.
마을에서 왜인들이 뛰어나왔다.
“사부로라고 합니다요.”
“조선말을 할 줄 아는군?”
“소싯적에 동래에 왕래를 좀 했습지요.”
“폐 안 끼치도록 빨리 돌아볼 테니 너무 긴장하진 말게.”
“예······.”
양해를 구한 주수는 대대원들과 함께 마을을 이잡듯 뒤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번 마을은 조선인이 없는 것 같았다. 억쇠의 말처럼 헛심 쓴 셈이 됐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끌려온 조선인은 없다는 말이니 그건 또 그것대로 다행한 일이었다.
“자, 철수 하······.”
그렇게 철수령을 내리려던 그때였다.
“사부로라고 했나?”
“예, 나리.”
굽신거리는 사부로에 주수가 도랑 근처의 오솔길에 난 발자국을 가리켰다.
“저 발자국은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