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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37화 (33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37화>

    ***

    “그걸 순순히 넘기겠다 회답했단 말입니까?”

    어처구니 없어서 되물었다.

    내가 묻자 도승지 권균이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정말?”

    “예.”

    “아니, 뭐··· 순순히 넘기겠다니까 받으면 우리로서는 고마운 일인데.”

    편전이었다.

    데카르트가 그랬던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나는 생각한다, 도로 왕위를 넘겨주고 은퇴할까.

    아닌 게 아니라 하루에 열 두 번도 더 은퇴하고 싶단 생각이 든다.

    요즘은 바빠도 너무 바쁘거든.

    특히 변경에서는 툭하면 치보를 보내온다.

    요동도적 진우용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바빠진 것도 이 진우용 새끼 때문이다. 이놈이 가만히만 있으면 좀 나을 텐데, 툭하면 명나라 군한테 시비를 걸어댄다.

    시비만 걸면 모르겠는데, 싸움 걸고 또 이겨버리네?

    요동의 판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나라 변장들로서는 당연히 진우용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치보를 보내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치보를 받으면 나는 패초를 보내 대신들을 소집한다.

    일종의, 어··· 긴급 안보회의라고나 할까나?

    안보회의를 주최하고 또 결론이 나면 몰라.

    마땅한 결론도 안 난다.

    어제 했던 말, 그제 했던 말 반복 할 수 밖에 없다.

    도적떼가 압록강 넘지 못 하게 철저히 감시하고 방어하라.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의주에서 치보가 왔고, 어제 했던 말, 그제 했던 말 또 반복하고 있었다.

    철저히 감시하고 방어하라.

    그런데, 또 급보가 왔다.

    이번에는 변경이 아니라 하카타에서 온 거였는데, 하카타에서 부산까지 익일특급(?)으로 등기가 부쳐졌고, 부산진 첨사 윤성경이 급보로 보내온 것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간단했다.

    조명 연합군이 소이전 무찔러준 댓가로 대내전에게 그에 상응하는 물품을 받기로 했단다.

    명나라는 일본국왕 책봉주청사를 받기로 했고, 우리나라는 각종 토산품들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뭐가 문제냐고?

    그 토산품들 중에 유황과 염초가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모르다시피 유황과 염초는 화약을 제조하는데 긴히 사용되는 군수물자의 하나였다. 그런데 일본에서 군수물자로 사용되는 유황과 염초를, 그것도 소량도 아니고 다량을 순순히 넘기겠다고 했다니 놀랄 수 밖에.

    “고마운 일인 건 맞는데, 왜 순순히 준답니까?”

    원래 일본 놈들은 그 속을 알 수가 없는 족속들이다.

    무려 군수물자 씩이나 되는 물건들을 각각 2만근, 8천근씩 가타부타 말없이 주기로 했다면 무슨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것까진 알 길이 없사오나 아마 명의 오만대군이 부담 되지 않았겠사옵니까?”

    “거기에 서계를 보면 파진군의 활약도 대단했다 하니 대내전으로서는 다소 놀랐을 것이옵니다.”

    “그렇사옵니다. 듣자니 지금 대내전에게 반기를 든 이들이 나타나서 대내전도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 듯 한데 조명 연합군이 동시에 구주에 진을 친다면, 대내전으로서는 속수 무책으로 구주를 내줄 수 밖에 없었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거절 할 수 있었겠사옵니까?”

    그럴 거면 그냥 구주 전체를 꿀꺽 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긴 했지만, 이건 좀 현실성이 없는 것 같고.

    뭐, 아무튼 그런 거라면 수긍이 가지.

    수긍은 가는데 이해는 안 된다.

    “흠. 대내전이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나 봅니다. 아니면 정말 정세가 생각보다 불리하던지.”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유황이랑 염초가 각각 2만근에 8천근이지 않습니까. 당장 유황 2만근이면 10년은 너끈히 쓸 양이고, 염초가 8천근이면 2년은 족히 쓸 양 아닙니까?”

    “그렇사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유황이랑 염초로 화약 만들어서 제놈들 압박하면 낭패일 텐데 이걸 요구한대로 순순히 준다고 하니, 대내전이 순진한 구석이 있건 아니면 정세가 불리하건 둘중 하나 아니겠냔 말입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고개를 돌렸다.

    병조판서 유담년이다.

    “말씀하세요, 병판.”

    “왜인들은 화약 제조법을 모르옵니다.”

    “뭘 몰라요?”

    “화약 제조법 말이옵니다.”

    제조법을 모른다고?

    근데 난 이걸 왜 이제 알았지?

    어쨌든 제조법을 몰라서 그런 거라면 수긍과 동시에 이해도 된다.

    걔들 딴에는 별 쓸모 없는 거 졸라게 요구한다고 생각했겠지.

    긁적.

    “뭐, 그런 거라면··· 흠. 뭐, 하던 얘기나 계속들 하지요. 인천 어디요?”

    태도를 보면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뻘줌해져서 화제를 전환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안보회의에는 경제 부문도 포함하고 있었다.

    채방별감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주유하고 있는 채방별감 김까불이 한 달 전, 인천 주안산 근방에서 금은이 매장 된 곳을 채탐했다지 뭔가.

    광산 발견은 언제나 대특종일 수 밖에 없었다.

    일면에서 보면 늘 똑같은 말만 하는, 그러니까 ‘철저히 감시하고 방어하라’ 앵무새처럼 반복하게 되는 의주의 치보 보다 이 광산 발견이 조정의 입장에선 중한 사안이었다.

    “주안산이라고 하옵니다.”

    “주안산?”

    “예. 이제 막 발견을 한 건지라 얼마나 매장이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광산이 확실하다면 한양과 지척인 곳에 있으니 배편으로 운송도 쉽겠다··· 개발함이 온당할 줄로 아뢰옵나이다.”

    “윤허하겠습니다. 공조에서는 최대한 협조하세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러고 본다면, 요동의 일만 아니면 따로 신경 쓸 거 없이 나랏일이 술술 풀리는 것 같다.

    그런데 선글라스 있지?

    옛날에 세자 선물해주려고 만들다가 얻어 걸린 선글라스.

    이게, 이게 또 명나라에선 못 구해서 안달이라네?

    제법 수요가 있는 것 같아서, 덕산이한테 안경공장 부지 알아보게 한 참이었다.

    근데 거기에다가 광산까지.

    이제 신무정왜군만 잘 귀국하면 될 것 같다.

    ‘언제 오려나?’

    ***

    하카타.

    오키후사와의 협상을 계기로 주수와 이백돌의 인격을 벗어던진 두 제왕이었다.

    비록 동등한 관계였던 주수와 이백돌에서, 상하의 구분이 있는 주후조와 이융인 관계로 다시 돌아갔지만 둘은 여러모로 죽이 참 잘 맞았다.

    아닌 게 아니라, 벌써 사흘이었다.

    벌써 사흘이 넘게······.

    쓰윽.

    “폐하. 7끗입니다. 그럼 이건 제가··· 하하하.”

    장방형 탁자였다.

    탁자 위에는 연합군이 전리품으로 수거한 듯 보이는 일본도와 갑주 따위가 늘어져있었다.

    그 전리품에 입가에 미소가 한가득인 융이 손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 했다.

    “잠깐만요, 삼촌 전하.”

    “···?”

    “소질, 8끗입니다. 헤헤.”

    “그, 그럴 리가!”

    융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개똥의 패를 들여다봤다.

    이제 막 섯다를 배운 개똥이었다.

    섯다의 족보를 잘못 계산한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제 막 섯다를 배운 개똥이 녀석이 다섯 번 연속으로 이길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설마하는 마음으로 확인을 했는데······.

    “8끗······.”

    허무했다.

    벌써 다섯 번이었다.

    다섯 번 연속으로 개똥이한테 지고 있었다.

    “그럼 이건 섯다에 소질 있는 소질(小姪)이 가져가겠습니다. 아, 근데 전리품 중에 장신구 같은 건 없었나요? 다음 판에서는 기왕이면 장신구도 걸었으면 좋겠는데요. 아, 장신구는요. 누굴 주려고 하는 건 아니구요. 그래도 제가 바다 건너 왔는데······.”

    재잘재잘 떠드는 개똥에 허망해져서 황제를 바라봤다.

    어이가 없긴 황제 폐하도 마찬가지인지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전하. 폐하께서, 의 교위(校尉)가 정말로 오늘 섯다를 처음 배운 게 맞냐 여쭙사옵니다.”

    끄덕끄덕.

    “맞습니다. 분명 맞는데······.”

    정말로 소질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적어도 섯다를 들고 있는 순간은 도저히 그 말많은 개똥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어디 표정관리만 잘하던가?

    대담하기 까지 했다.

    바로 전판에는 겨우 1끗으로 이겨서, 황제가 내기에 건 금반지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허.”

    어이가 없어서 실실거리고 있던 그때.

    황제가 일필휘지로 뭔가를 써내려가더니, 종이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렸다.

    탁자 위 종이의 여백을 채운 건 붉을 주(朱)와 목숨 수(壽), 주수(朱壽)였다.

    종이를 탁자 위에 올린 정덕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역관에게 말했다.

    “내 명색이 천자로서 배수진을 치고, 이번 판에서 진다면 내가 쓴 이름을 하사하겠다 호언하였는데 졌다고 해서 어찌 입을 씻겠는가? 의 교위에게 짐이 쓴 이름 주수를 사명(賜名, 이름을 하사함)하노라. 라고 하시옵니다.”

    역관이 정덕제의 말을 전하자마자 개똥이 오체투지했다.

    “황은에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하온데 폐하. 다음 판에는 장신구를 걸어주시면 안 될까요? 아까 거신 반지 같은 거 말구요. 기왕이면 계집들이 쓸 수 있는 걸루요.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누구 주려는 건 아니고······.”

    횡설수설하는 개똥이··· 아니, 이제는 의주수에 융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만!”

    “···?”

    “그만하고 패 돌리자꾸나.”

    이 섯다라는 놀이는 묘하게 승부욕을 자극하는 놀이였다.

    그렇게 다시 사흘이란 시간이 흘렀다.

    ***

    사흘 후, 5월 25일.

    오늘은 명군의 귀국 날이었다.

    하카타가 제법 마음에 든 건지, 후조는 조금 더 머물다 갈 생각이었지만 신하들이 만류했다.

    신하들의 입장에선 하루라도 더 빨리 돌아가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보름 전 본국에서 연락선이 도착했었다.

    생각보다 반란 진압이 쉽지 않다는 내용의 연락이었다. 그랬으니 만큼, 황좌를 계속 비워둘 순 없었다.

    그런데다 이제 곧 여름이었다.

    본격적으로 태풍이 오기 전에 귀국을 해야했다.

    시기가 어그러지면 여름 태풍이 지나갈 동안은 발이 묶이고 말 테니 말이다.

    하카타 해변.

    귀국할 명군이 도열해 있었고, 그 선두에는 후조가 있었다.

    후조는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한참 동안이나 하나, 둘 배에 오르는 명군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등을 돌려 배웅 나온 조선의 지휘관들에게 향했다.

    배웅 나온 지휘관들 사이에는 융도 물론 있었다.

    이제 후조와 융의 관계는 장군대 장군의 관계가 아니었다.

    융은 후조가 다가오자 예를 갖췄다.

    “아··· 아쉽도다. 이제 가면 왕을 언제나 볼 수 있겠소?”

    원래 사람이란 아무리 싫어하는 사람이어도 조금만 부대껴도 정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조선왕은 후조의 마음에 딱 드는 이였다.

    거기에 더해 전우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돌아가기 싫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대로 몇 달 좀 더 머물면서 마음이 맞는 왕과 놀음을 하고 싶었다.

    “왕께서 말하길, 이제 보기 어렵겠지요.”

    북경에서 한양까지 왕복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황제의 만기를 제쳐두고 가기란 더더욱 쉽지가 않다. 왕의 말처럼 이것이 마지막임을 알기에 더 아쉽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후조가 손을 뻗어 융의 손을 굳게 마주잡았다.

    “부디 꼭 놀러오시오. 내 제후가 아니라 전우의 예로써 왕을 후대 할 것이외다.”

    아쉬운 티를 팍팍 풍기는 후조에, 융은 가슴 한구석이 푸근해짐을 느꼈다.

    “왕이 말하길, 이를 말이겠습니까?”

    “아쉽소. 아쉽고 또 아쉽구려.”

    “비록 서로 간에 육신은 멀어진다 하나, 우의를 간절히 바랄 테니 아쉬울 게 또 어디에 있겠냐 하옵니다.”

    후조는 애써 미소 지었다.

    “맞소. 왕의 말처럼 서로 우의를 간절히 바란다면 아쉬울 게 어디 있겠소이까.”

    “엣 시에서 말하길,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데 소인은 자꾸 뒤를 돌아보고, 군자는 뒷날을 생각하니 군자의 풍모를 보이자 하옵니다.”

    피식 웃은 후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왕의 말이 맞구려. 군자의 풍모를 보여야지······.”

    1년 동안 붙어 다녔던지라, 멀어진다는 게 쉬이 상상이 안 갔다.

    아쉬운 듯 군자의 풍모를 되뇌이던 후조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겨우 떼고는, 귀국선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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