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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36화 (336/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36화>

군문의 한가운데에는 여러 수급들이 효수 되어 있었다.

특히, 풀어 헤쳐진 머리에, 핏기가 어릴 만큼 부릅 뜬 눈, 쩍 벌린 입, 그리고 그 입 사이로 단도가 쑤셔 박아진 수급이 인상적이었다.

쇼니 가의 가주이자, 오우치의 오랜 적이기도 했던 스케모토의 수급이었다.

오키후사는 스케모토의 수급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합장했다.

“극락왕생 하시오.”

스케모토는 분명 어린 적이었다. 하지만 장렬하게 전사한 그 부형(父兄)의 명성에 걸맞게끔 용감하게 싸웠다.

나이는 비록 어릴지 몰라도 그의 존경을 받을 만한 무장이었다.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이군요.”

오키후사는 어린 스케모토의 수급을 착잡하게 바라봤지만 사람의 관점이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히로시(博)였다. 오키후사가 오우치 가문의 가신이라면, 히로시(博)는 스에 가의 가신이었다.

“쇼니와의 전쟁은 끝이지.”

천하에는 오우치 가문에 대적하는 수십명의 적이 있었다.

그 수십 중에 하나를 이이제이의 책으로 쓰러뜨렸을 뿐이다.

아직도 수십, 수백의 적이 남아 있었으니 기뻐하긴 일렀다.

“곧 이 난세도 종결 될 겁니다.”

“물론이다. 한데, 히로시.”

“예.”

“황제와 조선왕이 어찌 부른 것이냐?”

히로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논공행상 때문이 아닐는지요?”

“논공행상?”

논공행상이 있는 거라면, 그를 부르지도 않았을 터였다.

이번 전쟁에 오우치 군은 아무런 공을 세우지도 않았다.

당초 계획대로 세이쿠후지 성까지 길안내라도 맡았다면 길안내 맡은 공이라도 있다 말할 수 있을 테지만, 길안내를 하기도 전에 쇼니군이 들이닥쳐 전투가 벌어졌다.

애당초 공을 세울 새도 없었지만, 전쟁을 하나의 놀이로 생각하는 두 제왕의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놀이에 가담해 수하들을 사지로 떠밀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무슨 논공행상이겠는가.

“흠.”

뭐가 됐건 가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오키후사는 발을 바삐 놀렸다.

그리고 도착한 조명 연합군의 지휘부 막사였다.

오키후사는 역시 군략이 탁월하다··· 공명도 울고 갈 것이다··· 과연 천하의 으뜸이시다··· 등등.

공평하게(?) 두 사람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고는 조심스럽게 왜 불렀냐 본론을 물었다.

본론에 대한 답은 황제가 꺼냈다.

“짐이 보아하니 이 구주는 전국의 군웅들이 할거하는 난세의 한복판이 아니라, 일개 군상들이 할거하여 지지고 볶는 작은 섬나라 같구나.”

도무지 장단을 못 맞추겠다.

아까까지만 해도 남왜정총병관 주수더니 이제는 또 황제란다.

뭔 놈의 인격이 하루 꼴로 다른지 모르겠다.

그래도 예는 갖춰야 하는 법.

오키후사는 최대한 공손히 예를 갖추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 구주에 있는 군상들을 모조리 쳐내고 이곳에 총관부(摠管府)를 설치하려면 얼마나 걸리려나. 여섯 달이면 되려나? 왕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황제의 질문에, 황제처럼 장수 놀이에 흠뻑 취해서는 본인을 신무정왜군 도원수라 호칭하던 조선왕이 말했다.

“소왕은 오늘 난생처음으로 천군의 위용을 보았습니다. 천군이 씩씩한 기상으로 날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여섯 달이 뭐겠습니까? 한 두 달이면 이 구주가 함락 될 것입니다, 폐하.”

“하긴, 내 오늘 조선 파진군들의 위력도 똑똑히 봤소. 그런 파진군들이 도와준다면 과연 여섯 달이 아니라 한 두달이면 너끈히 구주를 함락시키겠구려.”

오키후사는 얼이 나간 채 역관을 바라봤다.

도대체 이 두 제왕이 무슨 말을 하고 있냐는 무언의 눈짓이었다.

애석하게도 역관은 눈치가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알아 듣게 설명을 했는데도 못 알아 들으니, 눈치가 그리 없어서 대내전을 시위 할 수 있겠나. 쯧쯧.”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짐이 황제신보(군대를 소집할 때 사용하던 옥새)로 하여금 남왜정군을 소집하였고, 천자신보(군대를 파병할 때 사용하던 옥새)로 하여금 창해를 건너와서 구주를 평정했으며, 칙명지보(조서를 내릴 때 사용하던 옥새)로 하여금 조선에 박다를 조차(租借) 한다는 조서를 내렸으니 이제는 이제는 마땅히 천자행보(제후를 책봉할 때 사용하던 옥새)를 사용할 차례가 아니겠는가 이 말이야.”

‘처, 천자행보?’

또 한 번 얼이 나간 오키후사였다.

그러니까, 그의 주군을 제후로 책봉하겠단 말이었다.

이만큼 뜬금 없을 수가 있나 싶어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데······.

의문점이 생겼다.

“하, 하온데 박다를 조선에 조차 한다는 조서는 어인 말씀이신지······.”

“그대는 조차의 뜻을 모른단 말인가?”

설마 조차의 뜻을 모르고 물었겠는가.

황제의 면전임에도 오키후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내 오만 대군으로 하여금 혼란한 구주를 평정하지 않았더냐? 어디 평정만 했는가? 소이전에게 억압 받는 구주의 백성들을 구원하였으니 구주의 백성들에게 짐은 실로 미륵보살과 같았을 것이니라. 이런 위엄을 내 너희 왕을 위해 떨쳤는데 너희 왕이 조천(천자를 뵘)하여 번왕을 자처함은 지극히 온당하고, 인간으로서 당연한 도리가 아닌가?”

와서 책봉 받으라는 소리를 참 길게도 늘어 놓는다.

“오키후사님, 이건 우리에게도 이로운 일이 아닙니까?”

엿듣고 있던 히로시의 부언이었다.

쇼군으로서 책봉 받은 이는 백여년도 훨씬 더 전의 인물인 아시카가 요시미쓰(1358~1408년) 외에는 전무했다.

그만큼 명은 역대 쇼군들을 쉽사리 책봉해주지 않았다.

천자는 만백성의 군주요, 천황 역시 천자의 신하일 텐데 천황의 가신을 자처하는 쇼군을 어떻게 책봉하냐는 논리 때문이었다.

그런데 쇼군을 책봉해주겠단다.

미륵이니··· 조천이니··· 번왕이니··· 오만하고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늘어놨지만, 히로시의 말처럼 주군께는 이로운 일이었다.

황제와 조선왕을 마중나오기로 했던 주군이 오지 못 한 까닭이 무엇이던가?

폐주(아시카가 요시즈미)의 급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폐주의 기치 아래 똘똘 뭉쳐 지금의 쇼군(아시카가 요시타네)께 반하는 이들이 많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현재의 쇼군께서 백여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 명나라 황제에 의해 일본국왕에 책봉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나?

명나라 황제의 책봉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지가 되고, 정통성이 되는 법이었다.

폐주의 기치에 모여 폐주를 추종하는 무리 사이에 분열이 갈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사실인데······.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어. 한데 그 꿍꿍이가 뭔지를 모르겠구나.”

“꿍꿍이··· 말입니까?”

명이 다짜고짜 쇼군을 책봉해주겠다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내부 분열?’

문득 스치고 간 생각이었다.

쇼군이 황제에게 책봉 되면 폐주와 그 무리 사이를 분열 시킬 수 있었다.

반대로 쇼군과 주군의 사이에도 금이 가기 시작할 터였다.

가뜩이나 주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쇼군인데, 거기에 쇼군이 황제의 책봉을 받는다면··· 안 봐도 눈에 훤했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오키후사가 고심 끝에 말했다.

“폐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해주셨으니 저 또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째서 저희 쇼군을 책봉 해주시려는 것입니까? 이건 오히려 저희 쪽에서 부탁드려도 시원찮을 일인데 말이옵니다.”

역관의 말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황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확실히 황제치곤 경박한 자다.

“짐의 입장에서 빈 손으로 돌아간다면 면이 서겠느냐, 안 서겠느냐?”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무엄하구나, 감히 천자의 말을 의심해?”

“···”

“못 믿겠다는데 어쩌겠느냐? 믿음을 강요하진 않을 것이다.”

흐음.

어쩌면 정말 별 뜻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사.

전쟁을 무슨 하나의 놀이로 생각할 만큼 정신이 온전치 못 한 황제였다. 그런 황제가 무슨 거창한 뜻을 갖고서 쇼군을 책봉하니 마니 하겠나.

“하오면 박다를 조차하는 일은······.”

이번에는 조선왕이 나섰다.

황제처럼 전쟁을 무슨 하나의 놀이로 생각할 만큼 정신이 온전치 못 한 건 같지만, 이번이 첫 원정인 황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무위는 입증이 됐다는 것이었다.

그는 쓰시마를 평정시켰다.

어디 쓰시마만 평정시켰던가?

몇 년 전에는 유구까지 평정시켰다고 들었고, 북쪽의 오랑캐들도 왕이 무위를 떨쳐 함부로 설치지 못 하고 있다고 들었다.

오키후사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내 직접 이 박다에 와보니, 물산은 풍족하고 교통은 활발해서 귀국과 우리 조선을 잇는 징검다리가 되줄 수 있단 생각이 들었느니라. 그러니 50여년 정도 귀국에서 조차 해준다면 양국의 우의가 훨씬 더 두터워지지 않겠는가?”

“···”

오키후사는 할 말을 잃었다.

왕의 말처럼 하카타는 물산이 풍족하고 교통이 발달해서 각국의 상인들이 찾는 곳이었다.

그만큼 노른자위 땅인지라, 규슈의 다이묘들도 이 하카타를 손에 넣으려 세력 싸움을 했을 정도였다.

그건 하카타가 주군의 영향력 하에 들어온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노른자위 땅을 달라니······.

“그건 어렵사옵니다. 왕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하카타는 주인이 따로 없는 고을이옵니다. 주군께서도 세금은 받되, 크게 간섭은 하지 않는 곳이 바로 이 하카타인데 어찌 빌려주고 말고 할 수가 있겠사옵니까?”

하카타는 죽어도 못 넘기겠단 말에 발끈한 건 황제였다.

“그대는 그 옛날 몽고와 고쿠리가 이 구주를 어떻게 했는지 잊었단 말인가? 정녕 이 구주가 쑥대밭이 나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말이야!”

“폐하.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어찌 땅을 외국에 내줄 수가 있겠사옵니까? 이런 예는 일찍이 접한 바가 없사옵고, 예의에도 어긋나는 듯 하니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 못 하겠다면 어쩌겠느냐?”

“폐, 폐하. 두려우니 부디 언행을 삼가주시옵소서.”

“이제는 감히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인 것이냐?”

털썩!

“소, 소인이 어찌 감히··· 다만 하카타는 예로부터 각국의 사신들과 상인들이 찾던 곳으로 왕께서 말씀하신대로 물산은 풍족하고 교통은 발달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변명 아닌 변명을 이어나가던 그때였다.

왕이 슬쩍 손을 들어올리며 오키후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긴, 그대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구나. 아무리 그래도 땅을 빌려 달라는 건 무리한 청이지. 대신 다른 걸 좀 받아갔으면 하는데······.”

“다른 거라 하오시면?”

“그대도 알겠지만 이번에 천병과 나의 군사들이 크게 활약했다. 이 덕에 대내전으로서는 앓던 이를 쏙 빼낸 격이 아니었더냐? 물론 이번 일을 두고 너희는 너희끼리 모여 이이제이의 책이 바로 이와 같다며 수군거렸겠다만, 국가의 일에 어찌 득실을 따지지 않을 수 있으랴. 일본의 토산을 받아가야겠다.”

도무지 뭘 내놓으라 할 거길래 조선왕이 저리 장설을 늘어놓나 한껏 긴장하던 오키후사는 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카타를 내주는 것에 비하면 토산물 정도 바치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걸 얼마나 원하시옵니까?”

“상어가죽 80편(片), 호초(胡椒)150근, 은 900근······.”

오키후사의 입이 씰룩거렸다.

저 정도야 하카타를 내주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거저 먹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유황 2만근에 염초 8천근.”

“염초 말이옵니까?”

“그렇다.”

“염초는 구하기가 여간 쉬운 게 아닌데··· 송구하오나 유황과 염초는 어찌 필요로 하신 건지 여쭤도 되겠나이까?”

“야, 약으로 쓰려는 것이다!”

왜 신경질적인지 모르겠다.

염초를 당연히 약으로 쓰겠지.

다만 왜 그리 많이 필요한가 의문이었을 뿐이다.

“말씀하신 것들은 주군께서도 보답으로 내어주실 것이옵니다. 주군께 말씀 아뢰겠사옵니다.”

오키후사는 조선왕과 황제가 이를 빌미로 다른 걸 요구할까 싶어, 얼른 자리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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