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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35화 (335/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35화>

***

적의 포격에 진격은커녕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제아무리 전쟁 경험이 다른 이들에 비해 많지 않은 스케모토라지만, 이런 전쟁은 겪어 본 바가 없었다.

이건 전쟁이 아니었다.

학살이었다.

저 언덕 너머에 파진군(破陣軍)이라 써진 깃발 수십장이 휘날리고 있었다.

바로 저기였다.

저 언덕 너머에 이 일의 원흉인 연합군이 있었다.

“그런데 왜!”

스케모토는 애꿎은 바닥을 내리쳤다.

분명 저 너머에 적이 있었다. 저 적만 사로잡으면 됐다.

문제는 도무지 아군이 나아가질 못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척후병에게 적이 화포가 있다는 건 보고 받았다. 하지만 이만한 화력일 줄은 몰랐다.

아니, 이런 화력은 난생처음이었다.

포격 따위에 진격이 저지된다?

스케모토가 아는 상식선에선 불가한 일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포격을 뚫고 적장을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적장만 사로 잡는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적장을 사로잡긴 커녕 진격이 저지당하고 있었다.

아니, 저지가 뭔가?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이건 아니었다. 이건 스케모토의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콰쾅!

포격에 귀가 멍- 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한차례 포격과 함께 수하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안 돼······.”

어떻게 긁어 모은 군병들이던가.

이들에게 쇼니 씨의 운명이 걸렸다. 그런데 손 한 번 제대로 못 써본 채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안 돼!”

언덕 너머를 향해 절규했지만, 절규 따위가 적을 무찔러 주는 건 아니었다.

상황에는 변함이 없었다.

“주군!”

정신이 없는 와중에 스케사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오른팔에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스케사다가 보였다.

“스케사다!”

“주군! 지금이라도 퇴각령을 내려주시옵소서!”

“하지만 어찌··· 고려(조선) 놈과 당적(명나라)들이 바로 저 너머에 있지 않더냐!”

피를 토하듯 외치는 스케모토에 우물쭈물거리던 스케사다가 울먹이며 말했다.

“이미 전세가 기울었사옵니다, 주군!”

“내 칼 한 번 뽑지 못 했다! 칼 한 번 휘두르지 못 했단 말이다! 그런데 무슨 전세가 기울었단 말이냐!”

“주군, 부디······.”

“이곳 다자이후는 우리 선조들이 대대로 다스리던 곳이다! 오우치 놈들에게 빼앗긴 것도 선조들 뵐 면목이 없는 일인데 어찌 일전을 제대로 결하지도 못 하고 퇴각하란 말이냐!”

“하오나 더 이상은 무리이옵니다! 남은 이들이라도 보전하고 훗날을 도모하소서!”

“우리에게 훗날은 없다! 죽음이 두렵다면 스케사다 너 혼자 물러나거라! 나는 오늘 명예롭게 죽을 것이다!”

결국 스케모토가 칼을 높이 빼든 채 뛰어나갔다.

그리고 그가 뛰쳐나가자마자 지축이 뒤흔들렸다.

두두두두두-.

스케모토를 떠나보낸 스케사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기병이었다. 적의 기병이 분명했다.

적의 작전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무지막지한 포격을 쏟아부어 아군의 전열을 무너뜨리고 기병대를 출진시킨다.

전열은 군대의 생명이었다.

그리고 전열이 무너진 군대는 지리멸렬하기 마련.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수하들을 상상하니 모골이 절로 송연해졌다.

“퇴각하라! 퇴각 나팔을 불어라!”

사색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지만, 혼전의 와중에 그의 외침이 들릴 리 만무했다.

그러는 사이, 적의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차에 가까운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수하들은 그나마 남은 전의도 상실했는지 하나, 둘 무기를 내던지고 도망하기 시작했다.

한 둘이 무기를 내던지고 도망하자, 그 분위기는 금세 전염됐다.

모두가 도망가거나 주춤거리니, 유일하게 칼을 높이 빼든 채 적의 기병에게 달려드는 스케모토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띄었다.

“주, 주군! 도, 돌아오십시오! 주군!”

황망한 마음에 손을 뻗은 채 허우적거렸지만, 이미 멀어질 대로 멀어진 스케모토가 손에 닿을 리 없었다.

대신, 스케사다의 음성을 듣긴 들은 건지 미친 듯 달려가던 스케모토가 고개를 돌렸다.

“폭풍이 몰아치면 꽃 또한 지는 법, 꽃이 지는구나.”

뜻 모를 말을 찌걸인 스케모토가 다시금 뛰쳐나갔다.

그게 스케사다가 목격한 스케모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조선군】

전사자 : 0명

중상자 : 0명

경상자 : 6명

총계 : 6명

【명군】

전사자 : 26명

중상자 : 16명

경상자 : 31명

총계 : 73명

【소이전군】

전사자 : 757명

중상자 : 351명

경상자 : 불명

탈영 : 불명

포로 : 1,948명

승리했다.

아니, 집계 된 결과를 보면 승리 정도가 아니라 대승이었다.

조선군은 사상자가 전무했다.

경상자 여섯도 포환을 옮기다 깔려서 발생한 것이지, 적과의 교전에서 발생한 피해는 아니었다.

명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사자 스물 여섯에 중상자 열여섯, 경상자가 서른 한명.

최일선에서 싸운 걸 감안해도 적은 피해였다.

반면 쇼니군의 피해는 무척 컸다.

포격이 빗발치는 중에도 퇴각없이 돌격을 감행한 탓이었다.

사실 포격에 의한 피해 자체는 크지 않았다.

집중 된 포격으로 부상자가 다수 발생한 건 사실이었지만, 진짜 문제는 전열이었다.

부상자가 발생하면서 전열이 무너졌고, 비격진천뢰가 터지면서 생기는 시각적인 효과가 쇼니군을 압도했다.

이로인해 혼비백산하면서 달아나는 쇼니군의 후미를 명군이 급습했고,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밖에 없었다.

쇼니군 입장에선 애석한 일이었지만, 그건 쇼니군 입장에서 애석한 일이고······.

“으하하하!”

연합군 막사에선 대소가 터져나왔다.

남왜정총병관 주수의 것이었다.

“이 장군. 수고 많으셨소이다.”

주수가 신무정왜군 도원수 이백돌을 와락 끌어안았다.

잠시 당혹스러워 하던 백돌 역시 머잖아 피식거렸다.

“어디, 이 사람 덕택이겠소이까? 주 장군이야 말로 수고가 많으셨소.”

“아니오, 아니오. 조선군이 적의 전열을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천병이라 한들 적을 일거에 제압 할 수 있었겠소이까? 그러니 이는 진실로 이 장군과 조선군의 덕이라 할 수 있는 것이오.”

“무릇 겸손도 때를 가려서 부려야 하는 법. 나와 휘하의 군사들이 한 일이 무엇이겠소이까. 주 장군의 호령과 함께 적진으로 뛰어든 천병들이 다했지. 진실로 놀라웠소이다. 한치 망설임 없이, 아주 용맹하게 적진으로 뛰어드는 천병들이란··· 적으로 만났다면 필시 오금이 저렸을 것이오.”

“허어, 자꾸 금칠을 해주시오. 조선군이야 말로 적으로 만났다면 오금이 저렸을 것이외다. 어디 오금만 저렸겠소? 참으로······.”

너가 잘 했네.

아니, 너가 더 잘 했네.

손 발이 절로 오그라 들 만큼 민망한 공치사인지라, 통역하는 역관들의 표정이 썩 좋진 않았지만 당사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참 동안이나 서로에게 공치사를 해댔다.

화두가 바뀌기 전까진 말이다.

“그런데 조선군은 포환을 얼마나 소모했소이까?”

“굳이 세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소만··· 아마 가져온 것 중에 과반은 썼지 싶소이다. 넉넉히 가져와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낭패를 볼 뻔 했지 뭐요.”

“화약이란 게 그리 값싼 군수품이 아닐 텐데, 허어.”

“뭐, 어쩌겠소이까. 다 감안한 거고, 또 이처럼 소이전 놈들을 혼쭐 냈으니 목적은 달성한 셈 아니겠소. 아··· 그러고 보니 우리는 뭐, 소수다 보니 그럭저럭 감당이 되겠지만 천병은 그 액수가 상당했겠소?”

묻자마자, 후조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이를 말이겠소. 가져온 군량미며··· 소모할 군량미··· 전사자의 노자(路資)··· 아니, 이것들은 차치하고 천병이 무려 스물 일곱이나 전사했으니 이건 어찌 환산이나 할 수 있겠소이까?”

끄덕끄덕.

“과연 그렇겠소이다.”

아닌 게 아니라 명군은 상당한 군비를 썼을 터였다.

약 5천에 달하는 황제 직속군 정도야 조선에서 머무는 동안 조선이 그 군량을 댔지만, 하카타에 상륙한 뒤부터는 아니었다.

주둔하는 동안 자비로 군비를 부담했고, 나머지 비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조선군은 명군에 비하면 소수였지만, 명군 그 수만 오만이 넘어갔다.

오만도 전투병력만 오만인 것이지, 수행원과 짐꾼과 사공 등등을 다 합하면 팔만에 육박했다.

소모하는 군량 자체만으로도 천문학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장군.”

“음?”

“그래서 말인데······.”

“뭔데 그리 뜸을 들이시오?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무에 있다고··· 편히 말씀해보시오.”

우물쭈물하던 후조는 편히 말해보라는 융의 재촉에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명이나 조선이나 소이전에게 승리해서 얻은 게 뭐가 있겠소?”

“얻은 거?”

곰곰이 생각하던 융이 머잖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물질적인 것 자체만 따지면, 이번 전쟁에서 얻은 건 없었다.

오히려 허비만 했지.

물론 물질적인 것 이상의 것을 얻었으니 아주 손해라고 볼 순 없었지만.

“허비만 하고, 대내전만 좋은 일 하지 않았소이까?”

“감안한 일 아니오.”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융에, 후조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안은 했지. 근데 어디 사람 마음이란 게 그리 쉽던가? 왜 우리가 굳이 대내전 좋은 일을 해줘야겠소이까? 뭐, 나야 폐하의 명을 받고 예까지 온 것에 불과한지라 가타부타 말할 필요는 없소만, 조선은? 조선은 보시오. 애당초 이 장군과 조선군이 이 구주(규슈)까지 온 까닭이 무엇이오? 제주에 상륙해서 노략질을 한 왜놈들 때문이 아니었겠소이까?”

끄덕끄덕.

“그렇소만.”

“자, 따지고 보면 그 왜놈들이 제주까지 흘러 들어온 연유가 무엇이겠소? 발단을 한 번 생각해보시구려.”

‘발단?’

발단은 아주 간단했다.

제주를 침략했던 왜장은 왜국 말로는 지바 다네히사(千葉胤尚)라 불리고, 조정에서는 통상 천엽이라고 불리던 자였다.

그자와 그자의 수하들을 의금부에 압송해 문초를 했는데, 문초 결과 나온 진술은 일관됐다.

군자금.

대내전과 소이전과의 싸움에서, 소이전 측의 군자금이 모자라 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발단을 헤아려보자면, 대내전과 소이전의 싸움이 된다.

여기서 좀 더 파고 든다면 소이전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못 한 대내전의 책임으로 까지 떠넘길 수 있는 일이었고 말이다.

긁적긁적.

“대내전 때문이란 걸 말하고 싶으신 거요?”

“옳지! 바로 그거요. 대내전이 소이전 놈들을 제대로 통제 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냐 이 말이외다. 아니 그렇소?”

듣고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끄덕끄덕.

“듣고보니 맞는 말씀이긴 하오. 한데 그게 지금 어쨌다는 것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융에, 후조는 역관만 남겨둔 채 막사의 모두를 내보냈다.

모두를 내보내고 독대 아닌 독대를 하게 되자, 어안이 벙벙한 융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후조는 엿듣는 새라도 없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은근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이 장군.”

“말씀하시오.”

“이 장군도 알겠지만 우리 폐하께서는 승전보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시오.”

“이기지 않았소이까?”

“이겼지, 어디 이기기만 했소? 대승을 거뒀지.”

문제 될 건 없어 보여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한데 명색이 오만 대군을 일으키지 않았소이까. 사공에, 짐꾼에, 수행원에, 마부에··· 여차저차 다 합치면 팔만이 넘소. 그리고 이 팔만으로 우리 돈 써서 남 좋은 일 한 것 까진 다 좋다 이거요. 근데, 이게, 이게. 아무리 그래도 빈손으로 돌아가기보단, 약간의 선물이라도 받아감이 좋지 않겠소이까?”

“누구에게? 대내전에게 말이오?”

“맞소.”

대내전에게 약간의 선물을 받아간다.

사실 조선의 입장에서 나쁠 건 없어보였다.

명나라라는 떡장수에 기대서 일본이란 나라에 콩고물을 받아 먹는 것 뿐이니까.

“근데 어떤 선물을 받아가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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