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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34화 (33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34화>

    ***

    쿵쾅!

    쿵쾅!

    가슴이 마구 요동친다.

    이런 가슴 두망방이질은 열아홉 생에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두망방이질이었다.

    “이게 전쟁······.”

    대명제국 황제 주후조.

    그리고 남왜정총병관 주수.

    어떤 인격이건 간에 열아홉의 어린 인생은 한 번도 전쟁이란 걸 실감하지 못 했다.

    전쟁의 참상은 글로만 봤고, 전쟁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귀로만 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느낀 전장에서의 감정.

    이건 열아홉 생에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흥분감이었다.

    뭐랄까, 말로 형용 할 수 조차 없었다.

    감히 말로 형용 한다는 것 자체가 이 감정을 훼손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굳이 표현을 하자면 여인의 몸에 사정할 때와 흡사한 기분이었다.

    “으으.”

    극도의 흥분감에 취한 후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시야에 조선왕이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함께 막사 안에서 적의 출현을 미동도 없이 지켜만 보고 있던 조선왕은, 어느 새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막사 밖 조선군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있는 중이었다.

    왕의 외침과 함께 머잖아 아군 진영에서도 나팔 소리와 같은 군악기 소리가 울려퍼졌다.

    둥! 둥! 둥!

    전방의 조선군이 북(鼓)을 두들겼다.

    저러다 북의 가죽이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 될 만큼 강렬한 방망이질이었지만, 그만큼 가슴 깊숙이 뭔가를 끌어내는 듯한 마력이 있는 소음이기도 했다.

    진정된 가슴이 다시금 요동쳤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실전은 처음인 후조였지만, 그는 전투를 만만히 보지 않았다.

    이미 오기 전부터 빠삭하게 일본군의 풍습과 전투 방식을 학습한 상태였고, 저기 미사카 강 너머를 빼곡하게 채운 적군의 사시모노 깃대가 무얼 의미하는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피아식별을 위한 깃발이라 배웠는데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아름답기 짝이 없는, 어떤 고화(古畫)를 보는 듯 했다.

    꼭 비가 올 듯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 녹음이 우거진 평야의 수풀, 도도하게 흐르는 미사카의 강물, 박자감 있게 들려오는 조선군의 포성, 그 너머를 수놓은 적군들의 사시모노 깃대, 그리고 이 모든 걸 유심히 지켜보는 조선왕.

    한폭의 그림 같았다.

    “우오오오!”

    온몸의 피가 들끓는 기분이다.

    아니, 정수리를 통과한 전율이 미처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 하고 몸 곳곳을 순회하는 기분이었다.

    이 대단한, 역사에 기록 돼 만대에 이르도록 회자 될 이 전장의 한복판에서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건 후세인들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또, 남왜정총병관 주수가 아니라 대명제국 황제 주후조로서도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장군!”

    후조는 걸리적거리는 망토를 벗어던지고 지휘에 여념이 없는 융에게 다가갔다.

    파진군들을 지휘하던 융이 반갑게 후조를 맞이했다.

    “아, 주 장군. 어쩐 일이시오?”

    “내 도울 일이 없겠소?”

    “갑자기 도울 일?”

    “그래, 도울 일!”

    흥분해서 미친놈 마냥 고개를 끄덕거리는 후조에, 융이 뒷걸음질쳤다.

    “어, 없소.”

    “그래도 하나쯤은 있지 않겠소?”

    “아무리 그래도 주 장군을 내 어찌······.”

    “괜찮소, 괜찮아. 도울 일 있으면 어서 말해주오. 이거, 몸이 근질근질 해서 참을 수가 없소이다.”

    멋쩍어하던 융이 자리를 권했다.

    “앉아서 지켜 봐주는 게 도와주는 것이오.”

    금세 시무룩해진 후조였다. 융은 그런 후조를 달랬다.

    “아, 오해는 하지 마시오. 여기 앉아서 소이전 놈들이 박살나는 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 귀국해서 황제폐하께 조선군이 얼마나 크게 활약 했는지 주달 할 것이 아니오?”

    “아, 그런 깊은 뜻이······.”

    “속히 앉으시오. 같이 보십시다.”

    후조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자리에 앉은 사이.

    파진군들이 채비를 마쳤다.

    저 멀리, 몰려드는 소이전과 그 졸개들도 보였다.

    물론 한낱 개미떼에 불과했다.

    그리고 한낱 개미떼에 불과한 것들이 사람을 상대할 순 없는 법이었다.

    “령을 내려주십시오, 장군.”

    파진군 총책 갑동이었다.

    방포령을 내려달란 말이었다.

    “800보!”

    그의 손짓 한 번에, 수십문이 넘는 화포 아가리에서 일제히 불이 뿜어져 나올 터였다.

    “700보!”

    그리고 그 불덩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소이전과 그 졸개들의 머리 위로 떨어질 터였다.

    “600보!”

    고개를 돌려 명군 진영을 바라보았다.

    명의 기병대는 이미 채비를 끝마친 상태로 조선군 진영에서 눈을 떼지 못 하고 있었다.

    “500보!”

    소이전의 전열이 포격으로 무너졌을 때라야, 비로소 기병대가 출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장군, 속히 령을 내려주시옵소서!”

    괜한 감상에 젖었나 보다.

    그새 바글바글한 적들이 코앞까지 도달했다. 융이 등채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400보!”

    “방포하라!”

    “방포하랍신다!”

    쾅!

    콰콰콰쾅!

    전방에 배치 된 수십문의 화포가 그의 손짓 한 번에 시뻘건 불을 내뿜었다.

    물론 그게 끝은 아니었다.

    “서쪽의 방비가 허술하지 않느냐! 서쪽에 화력을 집중하라!”

    “적들이 우회하지 않느냐! 길을 돌지 못 하게 포격을 집중하라!””

    상황에 맞는 적절한 명령을 내리면서 군을 진두지휘하는 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적의 전열이 연이은 포격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됐다! 효시를 쏘아라!”

    쐐애애액-!

    효시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풀썩!

    그걸 마지막으로 기진맥진해진 융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조선군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이제 남은 몫은 명나라 기병대의 것이었다.

    “아, 주 장군.”

    벌러덩 드러눕듯이 자리에 앉은 융의 시야에 후조가 들어왔다.

    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아니 가셨소?”

    안 갔냐는 물음에, 후조는 소심하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머, 멋있었소. 오늘 일은 내 폐하께 가감없이 아뢰리다.”

    “고맙소이다.”

    씨익-.

    웃는 융에 진정 된 가슴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니지, 아니야. 이럴 때가 아니지.”

    요동친 가슴에 뭔가 떠오른 건지 한차례 독백과 함께 후조가 말에 올랐다.

    그가 말에 오르자, 그를 보좌하는 전(前) 우도어사(右都御史), 현 경략(經略) 양일청(楊一淸)이 깜짝 놀라 그 앞을 가로막았다.

    “폐, 폐하! 어딜 가시옵니까?”

    “장군이다! 경략은 그놈의 장군 소리가 그리도 어렵더냐?”

    “하오나 폐하께서 어찌 장군이······.”

    “됐고, 비켜서라!”

    “위험하옵니다, 폐하!”

    “이제 곧 금의위와 기병대가 출진하지 않더냐!”

    “그러니 위험하옵지요. 기병대는 강 진무사(鎮撫使)에게 맡기소서.”

    하여간 양 경략은 말이 안 통하는 위인이다.

    쯧쯧 혀를 찬 후조가 말허리를 걷어찼다.

    그의 돌발 행동에 놀란 건, 연합군 수뇌들이었다.

    “뭐, 뭣들 하느냐! 속히 폐하를 뒤따르지 않고!”

    “폐하! 폐하!”

    친위군과 장수들이 후조의 뒤를 쫓았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말을 몰아 기병대가 도열한 곳으로 향했다.

    기병대는 조선군의 효시에 바짝 긴장한 눈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조선군의 효시는 적의 전열이 무너졌고, 우리 역할은 끝났다는 알림이었다.

    이제 명나라 수뇌부에서 신호를 보내오면, 전군이 돌격이었다.

    돌격 직전의 상황이었으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 할 수 밖에.

    “폐, 폐하 여긴 어인 일로··· 위험하옵니다, 돌아가시옵소서!”

    1천의 정예 기병대를 통솔하는 건, 금의위진무사(錦衣衛鎮撫使) 강임(江林)이었다.

    “내 너희에게 이를 말이 있어 경우가 아닌 줄 알면서도 찾은 것이다.”

    강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리자, 후조가 칼을 높이 들어올렸다.

    “병법에 이르기를, ‘예부터 선봉을 가리지 않는 장수와 군사는 필패한다’ 하였다! 이는 선봉이 그만큼 중요하단 말이다! 비록 조선군이 포격을 퍼부었지만, 적과 조우했다고는 할 수 없으니 선봉이 누구더냐? 바로 너희다! 너희는 짐이 특별히 선별하여 뽑은 정예기병대이니, 너희만이 바로 이 선봉을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짐이 너희에게 이르건대, 몰아치라! 적들을 폭풍처럼 몰아치고, 또 몰아치라! 그리하여 마침내 적장의 목을 베어 돌아오라! 알겠느냐?”

    “충!”

    쒸이이이익!

    강임과 기병대가 알았다는 의미에서 군례를 올리자마자 때마침 지휘부 쪽에서 효시 소리가 들려왔다.

    “출진하라!”

    그의 말 한 마디에 강임과 기병대가 진형을 갖춘 채 뛰쳐나갔다.

    ***

    “스케사다님, 주군께 좀 말씀을 드려보시지요.”

    오무라 다네아키의 말에 스케사다는 침음하며 멀리 앞장서 걷는 스케모토를 흘겼다.

    “어디 주군께서 이 사람 말을 들으시던가.”

    “그래도 말씀이라도 드려보심이··· 뒤를 좀 돌아보십시오. 이게 어디 전장에 나가는 이들의 몰골이란 말입니까? 패잔병들의 몰골도 이와 같진 않을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자 축 쳐진 무사들이 보였다.

    무사들이 축 쳐져있으니 사졸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이미 바닥인 상태의 사기였다.

    이전 당주이신 마사스케(政資)님은 오우치와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스스로 배를 가르셨다.

    그 이후 가신단의 말석을 차지하던 류조지(龍造寺)가문을 필두로 타카기(高木), 고토(後藤)씨가 연달아 주군을 배반하고 오우치에 붙어 먹었다.

    사기는 당연히 바닥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닥인 상태의 사기로 출성을 했다.

    말이 출성이지, 실상 죽을 자리 알고 죽으러 나온 것과 다를 게 없었다.

    “흐음.”

    “이대로 패배해서 세이쿠후지까지 잃게 된다면 주군께 두 번이란 없습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미 뜻을 세우신 주군을 무순 수로 말리겠는가.”

    “어떻게 수가 없겠습니까?”

    간절하기까지 한 다네아키의 질문이었지만, 세월이란 절대적인 지혜를 가져오진 않는다.

    조건부적인 지혜는 숱하게 얻은 스케사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열세인 상황까지 뒤집을만한 지혜는 배운 적이 없었다.

    하물며,

    쾅!

    콰콰쾅!

    집중되는 포격을 뚫고 전세를 뒤집을 만한 지혜는 더더욱 배운 적이 없었다.

    “으악!”

    곧이어 비명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아비규환도 이런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충격에 멀쩡한 땅이 파이고, 직격 당한 군진은 전열이 무너졌다.

    포환에 맞은 시체는 산산조각이란 말이 어울릴 만큼의 넝마가 되어, 그 살점과 내장이 곳곳에 흩날렸다.

    피해는 시간이 갈수록 중첩됐다.

    심지어 도망가는 탈영병도 생길 정도였다.

    적들이 화포를 이용할 거란 계산은 했지만, 이만한 화력은 분명 예상 밖의 것이었다.

    특히,

    콰쾅!

    한차례 포성,

    데구르르르-.

    그리고 날아든 하나의 구체.

    저게 가장 두려운 무기였다.

    다른 포환들은 직격 그 자체로 끝이었지만, 저 낮도깨비 같은 무기는 아니었다.

    “모두 피해라!”

    스케사다가 사색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치자마자 콰콰쾅! 폭음이 연쇄적으로 일었다.

    예의 구체에서 일어난 폭음이었다.

    그 주변 일대는 쑥대밭이 됐다.

    수하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나뒹굴거나 살려달라 아우성을 쳐댔다.

    적과 백병전을 펼치긴 커녕 조우하지도 않았는데 혼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양상의 전쟁을 스케사다는 일찍이 접한 적이 없었다.

    예상만 하던 패전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갔다.

    그리고 예상 밖의 화력과, 예상 밖의 혼전에 당황한 건 스케모토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혹감에 휩싸인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주위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콰콰쾅!

    그 와중에도 적의 포격은 계속됐다.

    스케사다는 마음을 굳힌 채 스케모토에게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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