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333화 (33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33화>

    ***

    스케모토는 쇼니 가(家)의 당주이면서도 스케사다가 모시는 주군이었다.

    고로.

    스케사다는 스케모토를 아주 잘 알았다.

    주군 스케모토는 아주 전형적인 무사였다.

    이제 막 약관에 불과한 나이라 그런지 몰라도 혈기는 왕성했고, 성미는 불같았으니 화가 나도 좀체 참는 법을 몰랐다.

    고집은 또 어찌나 센 지, 한 번 세운 뜻은 꺾을래야 꺾을 수가 없었다.

    당장 지리적인 이점을 포기하고 출성 할 생각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곳 세이후쿠지성(勢福寺城)은 완전한 난공불락의 요새는 아닐지 몰라도 비탈진 산을 깎아 만든 산성이니 만큼 지금 시점에서는 이 전략적으로 유리한 고지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이점을 포기하고 출성을 하겠다니······.

    굳이 아군이 가진 이점을 포기하겠다는 것 부터가 지휘관으로서의 자질부족이라 할 수 있었지만, 이건 스케모토의 성격 탓일 가능성이 컸다.

    스케사다는 스케모토를 어릴 적부터 봐왔다.

    어디 봐오기만 했던가?

    업어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을.

    스케모토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호승심이라면 호승심이고, 오기라면 오기인 치기.

    이 치기를 시도때도 없이 부리곤 했었다.

    물론 지금과 같은 상황 속에서는 암담하기 짝이 없는 치기였지만 어쩌겠는가.

    한 번 세운 스케모토의 뜻은 설사 부처가 온다 한들 꺾을 수 없는 것을.

    어차피 꺾을 수 없는 스케모토의 뜻이라면 만전을 기해야 했다.

    3,000 VS 10,000.

    수치 상으로는 분명 열세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전투에는 실패가 없어야 한다.

    한 번의 실수와 한 번의 패배가 쇼니 가의 몰락으로 이어질 테니까.

    새삼 이점을 상기한 스케사다는 일개 아시가루들의 사시모노(피아식별을 위해 등에 꼽던 깃발)까지 점검하며 전투 준비를 이어나갔다.

    승산은 적을지라도 일단 연합군을 몰아내면, 그 여세를 몰아 오우치의 돈줄인 하카타(박다)까지 먹어버릴 수 있을 테고, 수년전 오우치에게 뺏긴 다자이후(太宰府, 지금의 다자이후시)도 탈환 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실패하면 쇼니 가의 몰락으로 이어질 테지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출성한다!”

    채비를 마친 세이후쿠지성의 쇼니군이, 고작 백여명의 수비군만 남겨 둔 채 출성했다.

    목적지는 하카타였다.

    ***

    전쟁을 하러 온 건지 관광을 하러 온 건지.

    저도 모르게 착각할 만큼 하카타라 불리는 이 지역은 볼거리가 제법 많은 곳이었다.

    특히 융의의 관심을 끈 것은 하카타 일대에 있는 고로칸(과거 사신이 머물던 객사)의 터였다.

    훌륭한 여행가이드(?)를 자처한 오키후사의 말에 따르면, 수백년 전에는 저 폐허에 신라와 백제와 당나라의 사신이 들락거렸다 한다.

    비록 지금은 폐허가 돼서 주춧돌로나마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융은 한참을 고로칸의 터를 바라봤다.

    수백년 전, 위용 있는 자태로 외국의 빈객들을 맞았을 객사의 터를 새삼 눈에 담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인생사 허무하기가 이다지 허무하거늘······.”

    저 폐허가 꼭 사람의 인생처럼 느껴졌다.

    한창 시기에 어미의 젖을 빨며 세상을 맛보던 객사는 어느 순간 노년이 되어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노인처럼 세상에 잊혀졌을 것이다.

    아주 쓸쓸히 말이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모진 풍파는 온몸으로 맞았을 게다.

    수백년을 한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으면서.

    감상에 젖자 누군가 떠올랐다.

    어느 순간 세상에서 잊혀진 저 객사처럼, 어느 순간 삼한의 역사에서 잊혀졌을 누군가였다.

    그 누군가를 떠올리자 시상이 마구 솟아올랐다.

    “지, 지필묵! 지필묵을 가져와라, 어서!”

    잠시 후, 휘하의 군관들이 지필묵을 가져오자 융은 미친 듯 붓을 휘갈겼다.

    그렇게 한참, 떠오른 시상들을 종이에 옮기던 그때였다.

    저 멀리 등에 무슨 깃발을 꼽은 기병 하나가 말을 몰아오더니, 후다닥 달려와 여행가이드 오키후사의 발치에 부복했다.

    온화해보이던 오키후사의 표정에도 변화가 생겼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더냐?”

    “그게, 적도들이 다자이후 세이쵸(관청) 폐허에 나타났다 하옵니다.”

    “적?”

    “그러하옵니다.”

    융은 이해 할 수 없었다.

    뜬금없는 적의 출현이었다.

    “적들의 정체는 무엇이라더냐?”

    “깃발의 문양을 보아 소이전 같다 하옵니다.”

    긁적긁적.

    “성에 웅거하고 있다지 않았던가?”

    오키후사는 분명 소이전은 세이후쿠지라는 성에 웅거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놈들을 쓸어버리는 일 따위야 천병이 왔으니 언제, 어느 때 시행해도 대세에 지장이 없을 테니 하북과 요동의 본대가 정비를 마치는대로 진격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도 해왔다.

    아닌 게 아니라 바로 엊그제 하북과 요동의 4만이 넘는 천병이 도착했었다.

    “하북군과 요동군의 상륙은 미처 파악하지 못 하고, 신무정왜군 1만만 상륙해 파진했다고 여긴 듯 하옵니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굳이 출성을 왜 한단 말이냐? 나올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건 본인도 잘 모르겠다고 하옵니다. 다만 태수가 말하길, 소이전의 당주는 어려서 분별력이 떨어지고, 어린 나이에 공명을 떨치고자 하는 바가 있어 무리하게 군을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하옵니다.”

    “허어. 성에 쥐죽은 듯 웅거하고 있으면 어련히 박살을 내줄까. 그걸 못 참고 명을 재촉 하는구만, 쯧쯧.”

    “그··· 황제폐하께는 어찌 전하올지요?”

    융은 획! 고개를 돌렸다.

    역관은 아니었다.

    신무정왜군 부원수 장임이었다.

    장임은 황제가 가진 제2의 인격체인 주수를, 주수라 인정(?)하지 못 하고 줄곧 황제라 불렀다.

    몇 번 다그쳤지만, 도통 말귀를 알아 쳐듣질 않아 융도 포기한 상태였다.

    “어쩌긴. 깨워서라도 적침을 알려야지.”

    “알겠습니다.”

    장임이 주 장군에게 적침을 알리러 장내를 벗어나자,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오키후사가 말했다.

    “명을 내려주시면 기꺼이 호령을 따르겠다 하옵니다.”

    “그대들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

    융은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으려는 오키후사를 일별했다.

    저 멀리 기마 몇 기가 시야에 들어오더니, 곧 그의 목전에 도착했다.

    주수였다.

    “이 장군! 설마 벌써 시작한 것이오?”

    “시기적절하게 오셨소이다. 이제 막 시작하려던 참이오.”

    “적세가 기천에 불과하다던데, 어찌 하겠소?”

    “주 장군의 뜻은 어떠시오?”

    “이 장군의 뜻부터 말해보시오.”

    “화포를 사용해 적을 무찌름이 어떨까 하오이다.”

    “화포를 쓰면 너무 쉽지 않겠소?”

    “무릇 장수의 자질은 사졸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 했으니, 비록 단박에 섬멸시키면 재미는 반감될지 몰라도 사졸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을 터이니 장수로서 이만한 기쁨이 어디 있겠소.”

    “그래, 뭐. 이 장군이 그렇다는데··· 그리 하십시다.”

    합의(?)를 본 두 장군에 의해 하카타에 상륙한 신무정왜군과 천군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 시각 쇼니군 진영.

    “아룁니다!”

    오매불망 척후를 기다리던 스케모토는 정탐 간 척후가 드디어 돌아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격하게 척후를 반겼다.

    “어찌 되었느냐?”

    “조명군이 함께 움직였습니다!”

    “그 수는? 수는 얼마나 되는 것 같았더냐?”

    “송구합니다. 그것까진······.”

    “진영이 움직이는 것만 본 것이더냐?”

    “예!”

    “혹 장군기가 움직이는 것은?”

    “봤습니다.”

    스케모토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래?”

    “예, 깃발이 화려한 것을 보아, 대장기 같았사온데 진영이 움직일 때 함께 움직인 걸 보면 총대장이 지휘를 하는 것 같습니다.”

    “아주 잘 했다. 이만 물러가보거라.”

    척후가 물러가자 스케모토는 쾌재를 불렀다.

    물론 스케사다를 포함한 가신들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주군. 총대장이 지휘를 한다면 적이 총력을 기울이려 할 텐데 어찌 그리 기뻐하시는지······.”

    참다 못 한 스케사다의 질문에, 스케모토는 군배(지휘용 부채의 일종)를 휘두르며 말했다.

    “총대장이 후방에서 지휘한다면 사로 잡을 기회가 영영 없지만, 전면에 나서서 지휘 한다면 총대장을 사로 잡을 기회가 생기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총대장을 생포할 생각이시옵니까?”

    “물론.”

    “하지만 아직 조명군의 총대장이 누군지도 모르옵고, 적이 어떤 진형을 갖출지도 모르옵니다. 하온데 어찌 적장을 생포하겠다고······.”

    “적의 총대장이 누구건, 어떤 진형을 갖추건 상관 없다. 무슨 수를 써서든 적장을 사로잡아 적의 예봉을 꺾고, 적을 격파한다. 알겠느냐!”

    스케사다는 경악을 금치 못 했다.

    물론, 주군의 말씀이 어떤 뜻인지는 알 것도 같았다.

    아군이 불리한 상황이다.

    불리한 상황이다 보니 사기도 바닥이었고, 이를 어떻게든 충천 시킬 필요가 있었다.

    주군께서는 그 판도를 뒤집을 만한 일에 매몰 되다 보니 이런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적절치 못 한 전술임은 가신단의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주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사옵니다. 귀성하여 적의 동태를 지켜보면서, 적의 방비가 허술할 때 마다 급습한다면 적들이 능히 사자를 보내올 것이옵니다.”

    또 다른 가신 오무라 다네아키(大村胤明)였다.

    “다네아키! 지금 내 판단이 틀렸다는 말이냐?”

    “그것이 아니오라 적절치 못 하다는······.”

    “그게 그 말이다!”

    “···”

    침묵하는 다네아키를 씩씩거리며 흘기던 스케모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겁나는 자들은 지금이라도 물러나라! 나는 오늘 적에게 명예롭게 죽을 것이다!”

    ***

    하카타 만에 진을 치고 있던 조명 연합군은 쇼니군이 다자이후 세이쵸에 출몰했다는 전령의 보고에 곧바로 일군을 정돈해, 하카타 남쪽 방면의 미카사(御笠)강 인근의 평야지대에 진을 쳤다.

    예상되는 쇼니군의 진격로이기도 했다.

    한 번도 합을 맞춰 본 적이 없던 조명 연합군이었지만, 두 부대는 질서정연하면서도 신속히 움직였다.

    명군은 적군의 공세에 이 평야를 거점기지 삼을 생각인지, 아예 마굿간과 변소까지 지으면서 부대를 주둔했고, 명군이 마굿간과 변소를 짓는 사이 조선군은 파진군(포병부대)을 선봉에 내세웠다.

    명군 측에도 화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명군의 주력이 기병과 보병이 주인 까닭이었다.

    그리고 조명 연합군이 아슬아슬하게 채비를 마쳤을 즈음.

    쇼니군이 미카사 강 남쪽으로 6리 거리에 출현했다는 척후의 보고가 전해졌다.

    연합군이 파진한 평야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병사들대로.

    지휘관들은 지휘관들대로.

    원래 분위기란 건 전염되는 법이었다.

    전장에 긴장감이 감돌자, 그 분위기는 점점 전염돼 이번 원정을 하나의 놀이로 생각하고 있던 주후조에게도 전해졌다.

    진중을 들락날락하는 척후에 점점 긴장 되는지 후조의 호흡이 가빠졌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후조가 융을 바라보니, 그는 미동도 없이 팔짱 낀 채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뭐라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여태 다른 분위기를 뽐내는 그에 감히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숨 죽이고 있은지 얼마나 지났을까.

    땅이 조금씩 울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울리던 땅에, 별안간 대라(大螺, 나각) 소리까지 들려왔다.

    뿌우우우우우-.

    뿌우우우우-.

    여태 들어 본 적 없던, 진중의 가뜩이나 무거운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드는 대라 소리였다.

    적의 공세가 임박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적이다!”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저 멀리 적들의 깃발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보이던 깃발은 이윽고 평야 전체를 가득메웠다.

    1